# 118 - 광세일소_한추영 - 1553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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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7화 누명 (3)
“흥! 어림없다!”
천계심이 다시 검을 앞으로 쭉 뻗어 찌르는 찰나, 기하진의 좌장이 불시에 천계심의 복부를 때리는 것이 아닌가?
퍽!
기하진의 장력을 맞은 천계심의 몸이 공중으로 붕 뜨더니 주루 뒤쪽 벽면에 사납게 부딪히고 말았다.
“헉!”
천계심의 입가에서 선혈 한 줄기가 흘러 내려왔다.
정공법으로 공격해서는 딱히 방도가 보이지 않자 기하진이 일부러 허점을 노출하여 상대방의 공격을 유도한 것이다.
자신의 아들뻘인 기하진에게 계속 밀리던 천계심은 초조한 나머지 허점을 발견하자 그것이 함정인지도 모르고 덥석 물었다가 그만 당하고 말았다. 냉정하기로 유명한 평상시 천계심이었다면 절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네놈이 감히...!”
천계심이 주루 바닥에 주저앉은 채 기하진을 노려 보았다. 이미 심각한 내상을 입어 더 저항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기하진이 차가운 검날을 천계심의 목 바로 옆에 갖다 댄 채 품속에서 맹주가 준 영패를 꺼내 들었다.
“이게 무엇인지 아시오?”
“맹주의 영패가 아니냐?”
천계심이 반항을 포기하자 용봉단원 두 사람이 다가와 죄인을 압송하는 포승줄로 천계심의 팔을 묶었다.
“그렇소. 특히 이 황금색 영패를 가진 자는 맹에 있는 누구든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생사여탈권을 갖게 되오. 다시 말해서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당신을 죽여도 아무도 감히 나에게 뭐라고 하지 못한다는 뜻이오.”
기하진의 말에 천계심이 포승줄에 묶여 꿇어앉은 채 콧방귀를 뀌었다.
“흥! 그렇다면 당장 나를 한번 죽여보지 그러느냐?”
맹주 영패를 움켜쥔 기하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기하진은 천계심을 한참 동안 쏘아보더니 물었다.
“지난번에 천린상단의 임예린을 납치하도록 사주한 자가 바로 당신이지?”
그러자 천계심이 뻔뻔하게 고개를 쳐들며 말했다.
“그렇다면 어쩔 테냐?”
천계심의 말에 기하진이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검 끝으로 천계심의 턱을 추켜 올렸다.
“당신이 감히!”
천계심을 쏘아보는 기하진의 눈에서 화염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석추명인지 뭔지 하는 마교의 머저리 때문에 애쓴 노고가 수포가 되어버렸지. 껄껄껄.”
천계심은 내상을 입어 안색이 창백했지만, 여전히 기하진을 조롱하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 눈길에 분노가 치민 기하진이 이번에는 왼손으로 천계심의 목을 움켜잡았다.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면서 천계심은 목이 막혀 기침을 콜록콜록 해대기 시작했다.
“지난번 사천대전을 일으킨 흉수도 바로 당신이지? 마교와 짜고 천린상단의 사천지부를 공격한 것이지?”
기침을 해대던 천계심은 기하진이 손을 풀자 가소롭다는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굳이 내 입으로 확인해주랴? 그래, 내가 했다. 빌어먹을 마교 놈들이 이번에도 여지없이 실패했지만 말이야. 크흐흐흐.”
천계심의 말에 기하진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부맹주라는 사람이 어찌,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이냐? 당신 한 사람 때문에 도대체 몇 명이 죽어간 줄 알아? 당신의 그 알량한 욕심 때문에 몇 명이 죽어 나간 줄 아느냐고!”
기하진이 천계심의 면전에서 소리를 지르며 다시 천계심의 멱살을 잡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당신 때문에 한솥밥을 먹던 용봉단 단원 200명이 목숨을 잃었어. 당신 때문에 지학이 나를 구하다가 죽었다고! 나는 다시 만나 반갑다는 말 한마디도 건네지 못했는데!”
천계심의 멱살을 잡고 부들부들 떠는 기하진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그 모습에 천계심이 콧방귀를 뀌었다.
“역시 애송이라 어쩔 수 없군. 무림맹의 군사들은 모두 목숨을 바쳐 싸우는 것이 임무이거늘, 몇십 명이 죽든 몇백 명이 죽든 그게 무슨 대수라고 그러느냐? 네놈도 언젠가는 네놈보다 무공이 고강한 적을 만나면 목숨을 잃지 않겠느냐? 설마 죽는 것이 두려운 것은 아니겠지?”
천계심은 충격에 빠진 기하진을 바라보며 작정한 듯 다시 말을 이었다.
“기 단주, 자네가 모르는 듯하니 내가 한 가지 사실을 더 알려주랴? 일전에 마교에서 맹주전을 습격해온 적이 있었지? 그것도 실은 내가 꾸민 일이야. 흐흐흐. 그때 마교 놈들이 제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했을 때 진작 그놈들과는 손을 뗐어야 했는데 말이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하는 천계심을 바라보던 기하진의 머릿속에 적의 칼날에 목이 베이고도 눈을 감지 못하던 당시의 부단주 구휘의 눈빛이 떠올랐다.
“아아악!”
기하진이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천계심을 베려는 듯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저 검을 내려치기만 하면 천계심의 목숨을 끝장이었다.
천계심은 맹으로 잡혀 들어가 봤자 좋은 꼴을 못 볼 것이므로 오히려 지금 죽는 것이 낫다는 듯 담담한 표정이었다.
“지금 나를 죽여라. 그게 서로 좋을 게야.”
“기하진 안돼!”
그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천옥랑이 달려와서 양팔을 벌려 천계심 앞을 막아섰다. 땀이 비 오듯 흐르는 것으로 봐서 먼 길을 쉬지 않고 달려온 것만 같았다.
천옥랑이 나타나자 천계심의 두 눈빛이 흔들렸다.
“아버지가 잘못했다는 것은 나도 알아. 하지만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면 안 되겠어? 아버지가 저지른 잘못은 내가 속죄하며 살게.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테니 제발 목숨만은 살려줘, 하진아.”
“네 이놈, 네놈이 지금 여기서 무얼 하는 게냐? 우리 천씨 가문의 당당한 장남이 왜 저놈에게 고개를 숙이는 게야!”
천계심이 소리치자 천옥랑도 참지 않고 고개를 돌려 맞받아쳤다.
“이제 제발 그만 좀 하세요! 하늘이 부끄럽지도 않으세요? 아버지의 그 허황한 욕심 때문에 셀 수도 없는 청성파의 젊은 제자들이 목숨을 잃었어요. 아버지의 손으로 사숙마저 해하시고도 아직도 뭐가 부족하신가요? 왜 깨닫지 못하세요, 왜요? 저보다 무공도 높고 경륜도 많으신 아버지께서 어째서 이 간단한 사실 하나도 깨닫지 못하시는 겁니까, 도대체 어째서요!”
천옥랑의 말에 천계심은 털썩 주저앉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인생이 어차피 욕심의 바다이거늘 무엇을 더 깨달으란 말이냐? 난 그저 내 욕심에 충실했을 뿐이다.”
천옥랑은 그런 천계심을 안타깝게 쳐다보더니 다시 기하진에게 고개를 돌렸다.
“하진아. 아니, 기 단주, 제발!”
기하진이 검을 움켜잡고 천옥랑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비켜!”
“기하진! 어릴 때 내가 너를 아무리 괴롭혔어도 너는 꿈쩍도 안 하던 강한 놈이었잖아. 너는 독하기는 해도 나쁜 놈은 아니야. 그 사실은 내가 잘 알아. 아무리 나쁜 아버지라도 내게는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분이야. 그러니 제발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면 안 되겠어? 내가 이렇게 빌게. 하진아.”
천옥랑이 기하진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에 천계심 뿐만 아니라 용봉단원들도 모두 놀랐다.
“네 아버지 때문에 목숨을 잃은 사람이 몇백 명인 줄 알아? 네 말마따나 청성파 문도 500명과 장문인도 결국 네 아버지 손에 죽은 거야. 네 아버지는 살인마라고.”
기하진이 으르렁거리듯 천옥랑에게 소리쳤다.
기하진의 말에 천옥랑이 무릎 위에 놓인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얼마나 힘이 들어갔는지 피가 통하지 않아 주먹이 새하얘졌다.
“네 아버지는 귀면쌍살과는 비교도 안 되는 악인이야. 마교 놈들도 이렇지는 않을 거라고!”
기하진의 말이 비수가 되어 박혀 들자 천옥랑이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하진아, 꼭 내 아버지의 목을 베야겠다면, 대신 내 목을 베도록 해.”
천옥랑의 말에 천계심이 놀라서 소리쳤다.
“안된다, 옥랑아! 그게 무슨 소리냐?”
하지만 천옥랑은 결심을 굳힌 듯 기하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버지의 은원을 아들이 갚는 게, 무림의 불문율이잖아? 그렇게 하게 해줘.”
천옥랑의 말에 천계심이 광분하기 시작했다.
“안된다! 절대 안 된다. 기하진, 차라리 나를 맹으로 압송해라. 맹에서 무슨 고문을 하든지 내가 다 받으마. 옥랑이는 잘못이 없어. 그 애는 내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기하진이 천계심을 바라보며 차갑게 웃었다.
“그러는 당신도 아들은 소중한가 보지? 당신 눈에서도 피눈물이 나 봐야 해.”
허공에 높이 들린 기하진의 검이 아래로 세차게 떨어졌다.
천옥랑은 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들으며 두 눈을 꼭 감았다.
“안돼!”
천계심은 그 광경에 놀라 단말마의 비명을 내질렀다.
천옥랑은 목이 떨어지는 고통이 어떤 느낌일지 상상하며 눈을 감고 있었지만, 시간이 꽤 지난 듯한데도 여전히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천옥랑이 눈을 뜨고 보니 기하진이 검을 자신의 목 언저리에 둔 채 자신을 노려보며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천옥랑과 눈이 마주친 기하진이 돌연 검을 집어 던졌다.
“맹에서 알아서들 하겠지.”
기하진의 말에 천옥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진아, 고맙다.”
“흥! 네놈은 내 명을 어기고 위수지를 무단이탈을 했으니 지금 당장 돌아가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네놈에게 중징계를 내릴 테다.”
원래 기하진은 천계심을 잡으러 오면서 천옥랑에게는 절대 근무지를 이탈하지 말라고 단단히 명을 내렸었다.
“그래. 그럼 나는 명을 받들어 먼저 근무지로 돌아가마.”
천옥랑은 이제 기하진에게 모든 것을 맡겨 두어도 뒤탈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제는 기하진의 성격을 더는 긁지 않는 편이 좋을 것만 같았다.
천옥랑이 자리에서 일어나 천계심을 한 번 보고는 그대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자 천계심도 안도한 듯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두 손이 묶인 채로 주춤거리며 일어나 기하진 앞으로 다가왔다.
“기 단주, 아들을 살려 주어서 고맙네.”
천계심은 순식간에 10년은 더 늙은 것처럼 보였다. 늘 당당하고 오만하던 모습은 어디론지 사라지고 지금 기하진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아들을 염려하는 초라한 늙은이에 불과한 사람이었다.
“내 약조한 대로 모든 죄과를 담담히 받지. 옥랑이만 보살펴 주게. 그리고 또 한 가지, 맹주는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무서운 사람이네. 앞으로 유념해서 살펴―”
갑자기 천계심이 말을 끝내지도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냉랭한 표정으로 천계심의 말을 듣던 기하진은 깜짝 놀라서 쓰러지는 천계심을 얼른 부축했다.
“왜 이러시오?”
기하진의 소리에 밖으로 나가려던 천옥랑이 걸음을 멈추고 기하진 쪽을 돌아보았다.
“아버지!”
천계심이 의식을 잃고 고꾸라진 모습에 천옥랑이 놀라 소리를 지르며 다가왔다.
“아버지!”
천옥랑이 다급하게 천계심을 흔들었지만 천계심은 어느새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기하진! 네놈이 기어이!”
천옥랑이 기하진을 노려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조금 전까지 살려 주겠다고 해놓고선 비열하게 암수를 쓰다니!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 이 나쁜 놈아! 너를 그렇게 보지 않았는데 네놈이 어찌 이럴 수가 있어! 이 나쁜 놈아!”
기하진은 천옥랑의 울분에 찬 원망을 들으면서도 현재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 눈살만 찌푸렸다.
천계심이 비록 자신의 장력에 맞아 내상을 입기는 했으나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서 갑자기 앞으로 고꾸라져 죽는단 말인가?
“나쁜 놈! 어떻게 말과 행동이 다를 수가 있냐. 무공만 뛰어나면 다냐, 이 새끼야!”
천옥랑이 울부짖으며 기하진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기하진이 신공을 터득한 이후로 천옥랑과의 무공수준은 이제 하늘과 땅 차이였다.
“시끄러워.”
기하진이 손을 한번 떨치자 천옥랑의 몸이 대번에 나가떨어졌다.
“내가 한 짓이 아니야!”
천옥랑은 주루 바닥에 나뒹굴더니 다시 벌떡 일어나 기하진에게 달려들었다.
“네놈이 아니면 누구 짓이란 말이야? 아버지 앞에 네놈밖에 없는 것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데!”
온전한 정신으로 상대해도 이제 천옥랑은 기하진에게 10초도 버티지 못하겠지만 흥분한 상태에서 달려들자 기하진의 손길 한 번에 다시 속절없이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아무튼, 내가 한 짓이 아니라고!”
기하진이 천옥랑에게 고함을 쳤다. 이상했다. 설마 여기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누군가가 암습한 걸까? 만약 누군가 암기를 쏘아 보냈다면 천계심의 바로 지척에 있던 자신이 그것을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갑자기 사태가 엉뚱하게 번지자 기하진은 의혹이 샘솟듯 솟구쳤다. 자기가 안 했으니 자신은 범인이 아니지만, 제3자의 눈으로 보면 누구나 자신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 주루 밖에서 추상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하진, 이 방자한 놈! 맹주의 영패를 훔친 것도 모자라서 상관마저 함부로 살해했구나.”
뜻밖에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공은 남천단주 원무개였다. 어느새 주루 바깥을 남천단원들이 새까맣게 에워싸고 있었다.
“기하진을 맹주 영패 절도죄와 상관 살해죄로 즉시 압송한다. 용봉단원들은 뭣들 하는 게냐? 지금 즉시 죄인을 잡아 꿇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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