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117화 (117/201)

#   117 - 광세일소_한추영 - 155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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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6화 누명 (2)

깊은 밤 호젓한 고급 주루의 3층 꼭대기에 부맹주 천계심이 혼자 앉아서 술잔을 들이켰다. 3층 전체를 전세라도 냈는지 다른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술잔을 입안으로 털어 넣은 천계심은 화가 치미는 듯 술잔을 쾅 소리 나게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정면을 바라보는 천계심의 눈에 적개심이 이글거리고 입가의 수염이 분노를 이기지는 못하는 듯 씰룩거렸다.

“종이호랑이인 줄 알았던 그 노인네가 발톱을 감춘 늑대였을 줄이야. 그동안 보였던 모습은 다 연기였던 것인가? 나는 그 영감 손에 놀아난 꼭두각시였고? 하!”

천계심이 정면을 쏘아보며 술잔을 움켜잡았다. 손아귀에 힘을 주자 사기로 만든 술잔이 금방 바스러져 가루가 되어 떨어졌다.

“오냐, 죽을 때 죽더라도 이렇게 끝낼 수는 없지. 그 영감탱이 뒤통수를 제대로 한번 치고 죽어야지. 이번에는 내 연기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보여주마. 돈만 있으면 고수들이야 얼마든지 영입할 수 있을 테지. 기다려라, 남궁진악.”

천계심이 또 술잔을 기울이며 초조한 듯 창밖을 내다보았다.

“올 때가 넘은 것 같은데. 이제는 이놈 저놈이 다 나를 무시하는구나.”

그때 계단으로 누군가 올라오는 기척이 들리더니 천린상단 임풍 대방의 동생, 임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오시게나.”

조금 전까지 화를 내던 천계심이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임호를 반갑게 맞이했다. 하지만 임호는 경계하는 눈빛이 강했다.

“부맹주님께서 여기까지 어인 일이십니까? 사람을 보내지 않으시고요.”

“하하하, 내, 자네 얼굴도 볼 겸해서 직접 왔다네. 그리고 요즘은 믿을 만한 사람이 별로 없어서 말이야. 웃으면서도 칼로 찌르는 게 요즘 세상이니 누굴 믿는단 말인가?”

천계심의 말에 임호는 순간 움찔하며 낮게 한숨을 내뱉었다.

“요즘 좀 힘드시다는 말은 전해 듣고 있습니다. 그래, 어떠십니까?”

“허허, 내 이야기가 자네 귀에까지 흘러 들어갔는가? 이거 면목 없구먼.”

천계심이 임호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자네가 들은 말도 있고 하니 내 탁 까놓고 이야기하겠네. 은자 50만 냥만 좀 융통해 주시게나.”

임호는 천계심이 돈 이야기를 꺼낼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지만 오자마자 은자 50만 냥이라는 거금을 달라고 하자 아연실색했다.

임호가 어색하게 얼굴을 찌푸리며 웃음을 내뱉었다.

“제, 제가 그렇게 큰돈이 어디 있겠습니까? 임풍 형님이라면 몰라도 저야 위에서 시키는 일만 자리라 그리 큰돈은 만지지를 못 합니다요.”

“이 천계심이 아직 죽지 않았네. 놈들이 나를 호구로 알지만 이 천계심이 그렇게 만만치 않을 걸세. 자네가 비록 무림에 대해 잘 몰라도 강호에 구대 문파와 오대 세가, 그리고 마교가 있음은 잘 알 걸세. 정파 무림의 연합인 무림맹과 마교는 당금 무림에서 가장 큰 세력일세.”

“하지만 그들이 전부는 아니지. 사실 진짜 고수들은 숨어 있다네. 그 대표적인 예가 화산파의 태상장로 비천검 독고양과 소림신승 무학대사이지.”

그러자 임호가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분들 명성이야 저 같은 장사치도 들어 보았습니다. 그분들이 부맹주님을 돕기만 하면 안 될 일이 없겠지요. 하지만 그분들은 강호를 떠난 지 이미 수십 년이 넘지 않았습니까? 살아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는 말이 많던데....”

“후후후. 맞네. 예를 들면 그렇다는 소리야. 그 영감탱이들이 살아있어도 설마 나를 돕겠는가? 내가 말하려는 자들은 그들이 아닐세. 자네, 세외쌍마(世外雙魔)와 귀문선생(鬼門先生), 막북칠괴(漠北七怪)라는 이름을 들어 보았는가?”

임호가 들은 적이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천계심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구대문파의 장문인과 견줄 만한 고수들이지. 다만 이들은 성격이 괴팍하고 근거지가 중원이 아니라 변방이라 아는 자가 드물지. 그중에 귀문선생은 흑귀련(黑鬼聯)이라는 비밀 살수 조직을 이끌고 있다네. 이들의 힘을 빌린다면 맹주를 제거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을 걸세. 맹 내에는 아직 내 세력도 살아있으니 말이야. 맹주를 제거하고 무림맹이 내 손으로 넘어온다면 그때부터는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겠지.”

“부맹주님의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만, 사실 저도 지난번 사천에서 벌어진 싸움으로 상단 내에서 입지가 많이 줄었습니다. 지금 당장은 그리 큰돈을 구하기 좀 어렵―”

“그게 어디 나만 좋자고 하는 소리인가!”

천계심이 갑자기 임호의 말을 끊으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나중에 내 덕을 좀 보려면 내가 어려움에 빠진 지금, 나를 도와주는 것이 순리 아니겠는가? 이 사람, 말이 좀 통할 줄 알았더니 답답하기 짝이 없구먼.”

천계심이 호통을 치자 임호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아, 알겠습니다. 그럼 돌아가서 조속히 돈을 마련할 방법을 찾아서 이른 시일 내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임호의 말에 천계심이 실소를 머금더니 돌연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지금 나하고 장난하자는 겐가? 이렇게 가버리고 입을 싹 닦아버리려고? 자네가 변심해서 맹주에게 고자질하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천계심이 내뱉는 말에 임호가 당황한 듯 목소리를 떨었다.

“설, 설마 제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지 말고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어음을 써 주시게나.”

천계심은 임호가 천린상단 도방의 명의로 언제든지 어음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임호는 포기했는지 쏘아보는 천계심의 눈빛에 질린 듯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천계심이 써 달라는 대로 어음을 써 주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잔을 천계심에게 주며 술을 권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것, 제가 술 한 잔 올리겠습니다.”

천계심을 바라보는 임호의 눈빛이 불안한 듯 떨렸다. 하지만 어음을 받아든 천계심은 흐뭇해서 임호의 눈빛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좋지. 한 잔 따라 보게.”

천계심은 임호가 주는 술잔에 술을 받아 통쾌하게 쭈욱 들이켰다.

“간만에 술맛이 제대로 나는군.”

“어디든지 우리 상단의 전장(錢場)으로 가서 이 어음을 내미시면 현금으로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50만 냥씩이나 준비해 두는 전장은 없으므로 아무래도 남경에 있는 저희 총단으로 오셔야 할 것인데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말게나. 하하하.”

천계심은 임호가 기를 쓰고 반항하면 어쩌나 내심 염려하다가 생각보다 쉽게 일이 풀리자 기분이 좋은 듯했다. 돈도 손에 들어왔겠다, 이제 맹주 그 늙은 여우를 잡을 날도 머지않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바깥에서 수십 명이 급히 움직이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맹주 천계심, 맹의 지위를 이용하여 부정한 재물을 취했으니 무림맹 법규에 따라 맹으로 압송한다. 죄인을 포위하라.”

어느새 용봉단주 기하진과 용봉단원 수십 명이 천계심이 있는 3층 주루로 우르르 들어왔다. 그 모습에 천계심이 벌떡 일어섰다.

“기하진, 이게 무슨 짓이냐?”

그러나 기하진은 천계심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그 옆에 있던 임호를 쳐다보았다.

“임 도방, 수고하셨소이다.”

“예,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맹주님께 잘 좀 말씀드려주십시오.”

임호가 천계심을 힐끗 보더니 허둥지둥 나가려고 했다.

“네놈이 감히 나를 속여? 가긴 어딜 가겠다는 것이냐!”

천계심이 노여움으로 얼굴이 우락부락한 채 임호를 잡으려고 움직이자 용봉단원 10여 명이 ‘창!’ 소리와 함께 일제히 검을 빼서 천계심 앞을 가로막았다.

“천계심, 경고하는데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마시오. 지금부터 당신의 부맹주 직은 박탈되고 당신은 죄인 신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오.”

기하진이 천계심을 차갑게 응시하며 말했다. 그 틈을 타 임호는 얼른 주루 밖으로 사라졌다.

천계심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기하진을 잠시 바라보더니 곧 고개를 젖히고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맹주에게 또 뒤통수를 맞은 것인가? 정말 볼썽사납게 되었군.”

한참을 웃던 천계심이 웃음을 멈추고 거만한 눈빛으로 기하진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말이야, 맹주가 자신의 제자랍시고 자네를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군. 나를 잡는다고 자네를 보내다니 말이야. 아 참, 자네는 지난번 사천대전에서 기연을 얻었다지? 개방 장로 당두걸의 한쪽 팔마저도 으스러뜨린 무용담은 나도 잘 들었네. 후후후.”

천계심이 기하진의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더니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네놈이 나를 옥랑이로 착각하는 게지. 네놈이 내 아들이야 제압할 수 있을지 몰라도 청성제일검객인 나를 네놈이 아무리 기연을 얻었기로서니 나를 잡을 수 있을까?”

천계심은 말을 마치자마자 돌연 오른손을 불쑥 내밀며 응조수(鷹爪手)로 기하진의 목을 움켜쥐려 했다. 세 뼘도 채 떨어지지 않은 지척에서 불시에 들어오는 공격이라 웬만해서는 막기 불가능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천계심이 공격할 것으로 이미 예상하고 있던 기하진은 몸을 뒤로 서너 척 스르르 움직였다. 그 바람에 천계심의 손가락은 허공을 움켜쥐고 말았다.

천계심은 첫수가 실패했으나 개의치 않고 두 번째, 세 번째 공격을 연달아 펼쳤다.

탁, 타다닥.

두 사람의 움직임에 강맹한 기류가 형성되며 두 사람의 손이 허공에서 서로 몇 번 부딪쳤다.

“껄껄. 그래도 단주 소리를 허투루 들은 것은 아니군. 내 응조수 공격을 막아낼 정도가 되니 말이야. 과연 내 아들보다 나아, 하하하.”

천계심이 웃음을 멈추고 기하진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자, 놀이는 이쯤하고 제대로 한번 해봐야겠지. 고명하신 맹주님의 제자 실력이 얼마나 되는지 말이야.”

천계심이 ‘처렁’ 소리를 내며 장검을 빼 들었다.

검은 고풍스러운 송문고검(松紋古劍). 바로 청성파의 보물이었다. 청성파 장문인의 사형인 천계심에게 청성파 제일의 검객이라는 영예를 갖다 준 검이었다.

천계심이 공력을 불어넣자 옷자락이 부풀어 오르며 살기가 치솟았다. 그 광경에 용봉단 단원들이 검을 들고 천계심 주위를 빙 둘러쌌다.

“모두 물러서라.”

기하진이 싸늘하게 내뱉었다.

“내 명 없이 함부로 싸움에 끼어들지 마라.”

기하진은 천계심을 바라보며 호승심을 불태웠다.

부맹주는 서열상 맹 내에서 맹주 다음가는 고수. 절대 만만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기하진은 지난번 사천대전에서 공력이 일취월장한 이후 이제는 귀면쌍살과 붙어도 지지 않을 정도라 자신이 있었다.

천계심은 기하진의 말에 다시 ‘클클클’ 하고 기분 나쁜 웃음을 터뜨렸다.

“암, 그 정도의 기개가 있어야 무림맹의 단주 소리를 들을 수 있지. 기 단주, 그럼 시작해 볼까?”

천계심이 쿵 소리를 내며 걸음을 내딛더니 기하진을 향해 질풍처럼 곧장 일검을 찔러 왔다. 천계심이 휘두르는 검은 청성파의 유명한 검법, 칠십이파검(七十二波劍)이었다.

천계심은 청성파 내에서도 60여 년 만에 나타난 무공기재로 문파 내에서 무공으로는 천계심을 따를 자가 없었다. 뛰어난 실력에 비상한 머리, 악독한 성정이 한데 어우러져 구대문파 중 약소 문파인 청성파 출신이나 무림맹 내 서열 2위인 부맹주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과연 검에 실린 기운이 비범하기 짝이 없었다. 맹의 수뇌부와 처음으로 검을 겨루게 된 기하진은 처음부터 가장 위력이 큰 천마검법을 펼쳐냈다.

챙강!

일직선으로 찔러 들어오던 천계심의 검이 수평으로 휘두르던 기하진의 검에 가로막혔다. 기하진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허공에서 시뻘건 불꽃이 화르르 타오르며 주루 안이 삽시간에 열기로 가득 찼다.

천계심은 자신의 검이 기하진의 검과 부딪치자 검신(劍身)이 용광로에 빠진 것처럼 달아오르며 손잡이까지 뜨거워져 내심 깜짝 놀랐다. 하지만 고작 아들뻘인 기하진의 손에 자신이 패할 리는 절대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네놈이 제법 큰소리칠 만하구나.”

천계심이 평생 수련한 내공을 검에 불어넣으며 송문고검을 아래에서 위로 치떠 올렸다. 내기가 실리자 검에서 ‘지잉’하고 소리가 나며 검기가 폭발할 듯 상하좌우로 뻗어 나왔다.

일흔두 번의 집채만 한 파도가 연달아 휘몰아치는 듯 천계심이 휘두르는 검에 주루에 있던 탁자와 기둥이 박살이 나고 벽이 갈라지면서 흙먼지가 날렸다.

기하진은 강맹한 공력을 바탕으로 천계심의 검을 막아내고 있으나 초식의 정교함과 노련함은 천계심이 한 수 더 위였다. 압도적인 공력을 바탕으로 단번에 밀어붙이지 않고서는 승산이 없을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기하진이 천마검법 제7단계 광룡출세(狂龍出世)를 펼쳐냈다. 뜨거운 불기운이 화르르 폭증하면서 천계심의 상체를 뒤덮었다.

“윽!”

천계심이 기하진과 검을 부딪칠 때마다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한 발짝씩 뒤로 밀렸다.

‘이놈의 공력이 어찌 이다지도 높단 말인가? 설마 맹주가 자신의 공력을 전부 넘겨주기라도 한 걸까?’

천계심은 기하진의 공력에 거듭 놀라면서도 청성 제일 검객답게 절묘한 초식으로 기하진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때 기하진이 과도하게 공력을 끌어올린 여파 때문인지 공격이 이어지지 않고 순간적으로 허점이 드러났다. 그 천재일우의 기회를 천계심이 놓칠 리가 없었다.

‘그러면 그렇지, 네놈도 사람인데 실수가 없을 리가 있나?’

천계심이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를 떠올리더니 기하진의 허점을 노리고 번개같이 반격에 나섰다. 천계심의 반격에 기하진은 간담이 서늘한 듯 다급하게 한 걸음 물러나며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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