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 - 광세일소_한추영 - 1547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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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5화 누명 (1)
남이는 요즘 기분이 부쩍 싱숭생숭했다. 혼자 얼굴을 붉히며 행복감을 느끼다가도 문득 어딘지 모르는 허전함이 물밀 듯 밀려오기도 했다. 이렇게 감정이 출렁이는 이유는 단 한 사람, 바로 기하진 때문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얼마 전부터 눈을 뜨면 늘 기하진이 자신의 곁에 있었다. 눈에 띄든 띄지 않든 항상 곁에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잠을 잘 때도 기하진은 마치 호위무사처럼 밤새 자신의 숙소 밖을 지키다가 날이 밝고 사람들이 북적이기 시작해서야 슬그머니 사라졌다.
왜 이렇게 쫓아다닐까? 설마 기 단주가 드디어 내 마음을 눈치챈 걸까? 그렇다면 남자가 먼저 말을 좀 해주면 안 되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남이는 혼자 얼굴을 붉히더니 그 모습을 누가 볼까 봐 얼른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럴 때는 당당한 아미파 제자가 아니라 사랑에 빠진 소녀에 불과했다.
잠이 오지 않던 남이는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왔다. 오늘따라 하늘의 달이 누구 얼굴처럼 휘영청 밝았다. 남이는 자신도 모르게 달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한밤중에 위험하게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문득 등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남이는 당황하여 얼른 뒤를 돌았다. 언제 나타났는지 자신의 앞에 기하진이 서서 차가운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그, 그게....”
“얼굴은 왜 빨개진 거지?”
갑자기 기하진의 몸이 연기처럼 스르르 움직이더니 남이의 뺨에 손등을 갖다 댔다. 기하진의 차가운 손등이 자신의 뺨에 닿자 남이는 황홀하면서도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지난번 사천대전 때 기하진이 어떤 기연을 만난 것인지, 자신도 명색이 아미파의 적전제자인데 이제는 두 눈 멀뚱히 뜨고도 기하진의 움직임을 쫓아갈 수조차 없었다.
지금도 기하진이 이렇게 순식간에 다가와 손을 내밀었지만 남이는 전혀 피하거나 막지 못했다. 딴에는 그러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긴 했지만.
“흠, 열이 좀 있군.”
뺨과 이마를 짚어보던 기하진이 갑자기 남이의 손목을 덜컥 움켜잡았다. 남이는 깜짝 놀라 손을 빼려고 했지만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기하진의 눈을 보자 그만 온몸에서 힘이 스르르 빠져 그러지도 못했다.
“맥박이 불규칙하긴 해도 독은 아니군.”
그제야 기하진은 안심이라는 듯 손을 떼고 한 발 떨어지더니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밤에는 위험하니 혼자 다니지 말라고 했잖아.”
기하진의 말에 남이의 가슴이 또 덜컥 떨려왔다. 이 사람, 정말 끔찍이도 내 걱정을 해 주고 있어.
“맹 안인데 뭐가 위험하겠어요? 그리고 훨씬 더 위험한 임무도 많이 수행했는데요, 뭘.”
“맹 안이라고 위험하지 않다는 생각은 버려. 그렇게 방심하고 있을 때 적이 다가오면 어쩌려고 그래? 적이 만약 맹 안을 활보하며 다닐 수 있는 자라면?”
기하진이 차가운 눈빛으로 다시 남이를 바라보았다.
“서, 설마 그럴 리가요. 그리고 무슨 적이 저를 노린다고....”
“지난번에도 귀면쌍살에게 붙잡히지 않았던가?”
기하진의 단호한 눈빛에 남이는 놀라서 눈이 토끼눈이 되었다.
“그, 그때는―”
“잊지 마. 그자가 호시탐탐 남 조장을 노리고 있으니 절대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마. 알겠어?”
귀면쌍살 이야기에 현실로 돌아오려던 심장이 기하진이 덧붙인 한마디에 쿵 소리를 내며 발 위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 사람, 자기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기나 할까?
남이가 떨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살짝 고개를 들어 기하진을 바라보자 기하진이 빙그레 웃었다. 늘 차갑기만 하던 잘생긴 눈매와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좀처럼 보기 힘든 그 미소에 남이는 혼자서 술이라도 마신 듯 얼굴에 다시 빨갛게 홍조가 일었다.
그때 단원 한 명이 기하진에게 다가왔다.
“단주님, 맹주님께서 찾으십니다.”
“알겠다.”
기하진은 남이에게 함부로 다니지 말라는 주의를 다시 한번 주더니 맹주전으로 사라졌다.
후. 남이는 저 멀리 사라지는 기하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다시 혼자 주변을 배회했다.
조심하라는 기하진의 말은 사라지고 어느새 머릿속에는 기하진의 미소 짓는 모습만 떠올랐다. 그 모습이 떠오르자 남이도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때 저 멀리서 인기척이 났다. 남이는 순간 검을 잡으며 낮게 소리쳤다.
“누구냐?”
어둠 속에서 한 쌍의 선남선녀가 걸어 나왔다. 둘 다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외모가 수려했다.
“남 소저, 잘 지내셨습니까?”
“아, 아니 당신은 임 소저...?”
눈앞에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임예린과 일봉이었다. 두 사람은 사천 대전 때 무림맹이 입은 피해를 보상하고 향후 계획을 의논하러 무림맹에 들어와 있었다.
“잠깐 드리고 싶은 말인데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나요?”
임예린의 말에 남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방으로 안내했다.
등잔불 아래 다소곳이 앉은 임예린의 모습은 그야말로 그림 같았다. 사람이 어떻게 이런 미모를 지닐 수 있을까? 여인의 아름다움이 나라를 기울게 한다고 하더니 저 옛날 양귀비나 서시가 이렇게 아름다웠을까? 그러고 보니 기 단주와 임 소저가 서로 잘 아는 사이 같던데 이렇게 아름다운 소저를 보던 기 단주에게 내가 눈에 들어오기나 할까?
남이는 자신의 앞에 앉은 임예린을 바라보며 괜히 주눅이 들어 조금 전과는 달리 우울해지고 말았다. 그런 기분을 떨쳐버리려는 듯 남이가 보이지 않게 주먹을 꽉 쥐며 임예린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지요?”
“남 소저, 지난번 사천 대전 때 저희 상단을 지키느라 아미파에서 큰 희생을 치르셨습니다. 다시 한번 그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임예린이 다시 정중히 머리를 숙였다. 남이는 그 모습을 담담히 바라보았다.
“저한테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모두 사부님께서 결정하신 일인 것을요.”
“하지만 남 소저께서도 온몸에 성한 구석 하나 없이 고군분투하시지 않았습니까? 아미파 뿐만 아니라 남 소저께도 정말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차분하지만 진심이 우러나는 말이었다.
“저야 무림맹 소속이니 맹에서 시키는 임무를 수행한 것에 불과합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이상하게도 남이의 입에서 계속 말이 딱딱하게 나왔다. 남이의 경계심을 느꼈는지 임예린이 문득 쌩긋 웃었다. 임예린의 뒤에 서 있는 일봉은 숨소리 하나 없이 바깥 동정에만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제가 이렇게 밤에 남 소저를 찾아온 이유는 남 소저께 간곡히 부탁드릴 말씀이 있어서입니다. 저희 상단은 그동안 관의 오해를 사지 않으려고 무력을 키우는 일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비록 저희 상단에 호천대가 있기는 하지만 주로 표물 수송 때 호위를 하는 정도였지요.”
임예린이 담담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지난번 일을 겪고 나서 이대로만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거금을 주고 각지에서 내로라하는 고수들을 영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번 사천대전 이후 천린상단에서 고수를 영입하기 시작했다는 말은 남이도 얼핏 들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을 통솔하려면 이들을 압도할 만한 믿을 수 있는 고수가 있어야 하는데 사실 저희 상단에는 그런 고수가 없습니다.”
그 말을 하면서 임예린은 일봉을 슬쩍 쳐다보았다. 듣자 하니 일봉 저 사람이 호천대의 대주라는데 대주 앞에서 대놓고 고수가 없다는 말을 하기가 껄끄러웠으리라.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영입한 사람들이 정말 믿을 수 있는 자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저께서도 아시겠지만 재물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은 더 많은 재물을 쫓아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사람이지요. 이런 사람들에게 신뢰를 기대하기란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임 소저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무엇입니까?”
“저는 남 소저의 스승인 요혜신니께 이 일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임예린의 말에 남이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더니 불같이 화를 벌떡 일어섰다.
“감히 아미파의 장문인인 제 사부님께 일개 상단의 대주 역할을 하라는 것입니까? 임 소저, 천린상단에서 우리 아미파를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 것입니까?”
분노를 이기지 못한 남이의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일파 장문인에게 상단의 대주 역할을 하라니, 전례가 없을 뿐만 아니라 무례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임예린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남이를 올려다보았다.
“화를 거두시고 잠시 제 얘기를 더 들어 보세요. 먼저 말씀드리지만 저희도 아미파 장문인을 감히 저희 대주로 모시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호천대 대주는 변함없이 저분이 맡을 겁니다. 대주에게 꼭 필요한 덕목이 무공이 전부는 아니니까요.”
임예린의 눈길이 일봉에게 가서 멎었다. 무한한 신뢰가 담긴 눈빛이었다.
일봉은 두 여인의 얘깃거리가 자신의 지위에 관한 것이었지만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그저 묵묵히 서 있기만 했다.
임예린이 다시 남이를 바라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저희는 사실 좀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건 또 무슨 얘기입니까?”
“이번 사천대전을 겪으면서 저희는 무림맹도 그렇게 믿을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부맹주께서 어떤 일을 벌였는지는 남 소저도 보셔서 잘 아시겠지요?”
남이는 그게 무슨 소리냐고 다시 화를 내려고 하다가 임예린의 말에 자신의 말을 삼키고 말았다. 이번에 청성파가 거의 전멸하다시피 하고 용봉단과 아미파가 큰 피해를 본 것은 모두 부맹주가 꾸민 짓이라는 이야기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뿐이 아닙니다. 저희는 맹주님과도 앞으로 거리를 둘 생각입니다.”
임예린의 말에 남이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임예린을 바라보았다. 무림맹 한가운데로 들어와서 무림맹주와 거리를 두겠다니, 보통 배짱이 아니면 절대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저희는 이번 사천대전에서 맹주께서 싸움이 일어나기 직전 사라져서 싸움이 끝난 뒤에야 나타나신 것에 미심쩍은 구석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야 귀면쌍살이 갑자기 나타나서....”
“귀면쌍살이 왜 하필 공교롭게 그때를 딱 맞추어서 나타났을까요?”
임예린이 묻는 말에 남이는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자신도 그 사실이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사부님께 어떤 일을 맡기겠다는 말인가요?”
이번에는 남이가 물었다.
“정도련(正道聯)의 수장 역할입니다.”
임예린의 말에 남이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정도련이라니, 무림맹을 두고 다른 문파 연합을 만들겠다는 말인가? 임 소저는 지금 자신이 한 말이 어떤 파문을 가져올지 알기나 하고 이런 소리를 내뱉는 것일까?
남이가 잔뜩 긴장하여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속삭였다.
“임 소저께서 지금 무림맹 한복판에 있다는 사실을 잊은 것은 아니겠지요? 이 말을 맹주님이나 총군사가 알기라도 하면 어떻게 될 줄 아십니까?”
남이의 말에 임예린이 차갑게 웃었다.
“그래서 더욱 여기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요. 아무도 내가 무림맹 한가운데서 이런 얘기를 하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할 테니까요.”
그 말에 남이는 임예린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아까는 마냥 아름답기만 한 소녀 같았는데 지금은 백만대군을 지휘하는 장수같이 늠름해 보이는 것이 아닌가. 천린상단의 임 소저가 두뇌가 명석할 뿐만 아니라 담력도 크다고 하더니 그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남이는 이제야 실감이 났다.
“구대 문파에서 맹에서 하는 일에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남 소저도 이미 눈치채고 있겠지요. 무림맹에 가장 반기를 드시는 분이 바로 요혜신니이시니까요. 정도련 결성에 필요한 자금은 모두 저희 상단이 댈 작정입니다. 다만 구심점 역할을 하실 분이 필요한데 그 역할을 해 주실 만한 분으로 요혜신니보다 적임자는 없는 것 같아요. 다만 명목상으로 저희 호천대의 태사(太師)로 모시자는 것이지요. 남 소저는 장문인께서 제자들 가운데 가장 아끼시는 분이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저희는 요혜신니께 이 말씀을 드릴 때 남 소저께서 힘을 좀 써주십사하고 부탁드리고 싶어요. ”
“흠....”
남이는 얼른 답을 하지 못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남 소저께서 저희와 함께하셔야 하는 이유는 또 한 가지가 더 있어요.”
남이가 무슨 뜻이냐는 듯 임예린을 쳐다보았다.
“기 단주가 왜 그토록 남 소저를 보호하려고 하는지 이유를 아시나요?”
임예린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오자 임예린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임 소저가 도대체 그 사실을 어떻게 아는 것이지?
임예린은 놀란 남이의 눈을 바라보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무림맹의 요직에 있는 자가 귀면쌍살과 관계가 있다는 이야기를 누군가 해주더군요. 그 사람이 아무래도 남 소저를 노리고 있는 것 같아요. 기 단주가 그 사실을 눈치챈 것이겠지요.”
“나를 왜...?”
남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임예린을 바라보았다.
“아미파에 분란을 일으키려면 남 소저를 해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까요?”
임예린의 말에 남이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기하진도 귀면쌍살 이야기를 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임예린이 남이의 두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남 소저는 지금 당장 저희와 함께 맹을 나가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남 소저도 살고 기 단주도 무사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계속 있다가는 결국 남 소저와 기 단주,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귀면쌍살과 맞닥뜨리게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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