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114화 (114/201)

#   114 - 광세일소_한추영 - 1542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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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3화 화산검전(華山劍戰) (18)

담예린은 화산파를 치러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한편으로는 기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석추명을 다시 한번 볼 수 있을까 싶은 마음에 기뻤고 석추명이 나찰녀의 손에 붙잡히는 모습을 지켜보게 될까 봐 두려웠다.

다행히도 아직은 석추명의 모습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뢰정 장로와 황보 장로, 뢰 장로와 같이 왔다는 곤륜파 검객 초의공, 그리고 불모 황연화까지 모두 죽어버린 그 날, 비탄에 빠져 넋이 나간 석추명의 모습은 두고두고 담예린의 마음에 남았다.

내가 애초에 석 대주와 불모님 사이를 의심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런 끔찍한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럼 석 대주를 다시 보는 일이 이토록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제는 두 번 다시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하는 일은 없겠지. 만나더라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내 얼굴을 보려고 하지도 않겠지.

담예린의 얼굴이 한순간 어두워졌다.

담예린은 이번 전투에서 수색조에 투입되었다. 전투가 끝난 일대를 샅샅이 뒤지면서 숨어있는 화산파 제자들과 도피 중인 석추명을 찾는 것이 임무였다.

담예린은 혹시나 다른 사람이 먼저 찾을까 두려워서 기를 쓰고 임무를 수행했다. 이번 전투는 뜻밖에 관군(官軍)들이나 쓰는 ‘벽력탄’이라는 화약을 써서 손쉽게 승리를 거두었다.

벽력탄은 사용이 쉬웠으나 결과는 참혹했다. 벽력탄이 터지면 검으로 벨 때와는 달리 사람의 몸이 낱낱이 분해되었다. 그 끔찍한 모습을 보노라면 실전으로 오래 단련된 담예린도 치미는 구역질을 참을 수가 없었다.

벽력탄은 관에서도 엄격히 통제되는 물품으로 사실 관군과 신교와의 전투에서 신교를 진압하기 위해 사용되던 것이었다. 신교가 그 많은 고수를 동원하고도 관군과의 싸움에서 항상 이기지 못한 이유가 바로 이 화약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신교가 벽력탄을 써서 정파 무림의 한 축인 화산파를 친 것이다.

벽력탄이 버젓이 신교의 손아귀까지 흘러들어온 것을 보면 누군가 관과 결탁한 것이 분명했다. 아마도 관군과 끈이 잘 닿는 곳이리라. 어쩌면 이번 화산 전투에 투입된 복면을 쓴 자들이 있는 집단일지도 몰랐다. 이번 전투에는 외부 집단의 병력이 대거 합류했다.

복잡한 심사로 여기저기 살펴보던 담예린의 눈에 바위 뒤에 숨은 누군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자?’

담예린은 숨어있는 사람의 정체를 살펴보려고 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걸어가다가 불에 데이기라도 한 듯 화들짝 놀라며 걸음을 멈추었다.

눈앞에 나타난 여인은 석추명과 함께 사라진 사소혜였다.

사소혜가 여기 있다는 말은 곧 석 대주도 있다는 말인데...!

하지만 생각에 빠져 있을 새가 없었다. 자신의 바로 뒤를 따라 다른 수색 조원들이 쫓아오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사소혜가 띄기라도 한다면 사소혜의 목숨은 보장할 수 없었다.

담예린이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불과 10여 척 거리를 두고 조원 둘이 따라오고 있었다.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사소혜는 원래 자신보다 무공이 좀 더 높았는데 지금은 어찌 된 일인지 축 처져서 자신이 가까이 다가가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담예린은 재빨리 사소혜의 등 뒤로 다가가 혈도를 짚었다. 먼저 비명을 못 지르도록 아혈을 짚고 그다음은 움직이지 못하도록 주요 대혈을 몇 군데 찍었다.

갑자기 공격을 당한 사소혜가 놀라서 눈을 토끼 눈같이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다가 자신을 공격한 사람이 담예린임을 알아보고는 경멸과 질책의 눈빛을 지었다.

담예린은 냉정한 눈초리로 주위를 살펴보며 사소혜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움직이지 마. 사방에 수색조가 깔려있으니까.”

그러고는 근처에 죽어 널브러진 화산파 제자의 시신 몇 구를 뒤지는 척하면서 사소혜의 몸 위로 던져 올렸다.

사소혜는 자신의 몸 위로 시신이 올라오자 까무러칠 듯 놀란 눈빛을 지었다. 담예린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시신 두어 구를 더 겹쳐놓았다.

그 밑에 깔린 사소혜는 누가 보더라도 싸우다가 죽은 전사자로 보였다.

****

석추명은 마음이 급해서 경공을 한껏 끌어올렸다. 몸이 바람으로 화하기라도 한 듯 석추명이 발걸음을 내딛자 순식간에 수십 척을 이동했다.

화산파 역대 조사들의 위패를 모신 조사전 앞에서 아까부터 은은히 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석추명이 잠시 몸을 숨긴 뒤 살펴보니 백골마군과 복면을 쓰고 검은 장포를 입은 사내가 화산십수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화산십수의 뒤에는 부상을 입은 화산파 장문인 거양자와 화산파 제자 10여 명이 한쪽 구석에 몰려 있었다.

화산 십수 가운데서도 현봉과 무염은 목숨을 잃은 듯했고, 팽신과 기광은 모두 몸에 심각한 부상을 입고 있었다. 마군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지금 백골마군과 검은 장포 사내를 싸우는 사람은 화산십수 중 4명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몸이 온전한 사람은 열화와 담치뿐인 듯했다. 대사형인 이목남과 둘째 서문효, 선우호는 검에 베여 옷깃이 나풀거렸고 혈우(血雨)라도 맞았는지 몸 전체가 온통 핏자국이었다.

아직 죽지 않고 버티는 것이 용하다고 할 정도였다.

석추명이 잠깐 지켜보는 사이, 백골 마군의 검이 귀곡성을 터뜨리며 담치의 팔목을 노렸다. 담치가 절묘한 화산검법으로 백골검을 피하기는 했으나, 아무래도 상대방은 전대의 마교 장로. 공력이 따라주질 않았다.

담치의 팔목이 잘려나가나 싶은 상황에 돌연 백골마군의 등 뒤에서 날카로운 검 한 자루가 가공할 속도로 소리도 없이 달려들었다. 만약 백골마군의 기감(氣感)이 뛰어나지 않았더라면 절대 알아챌 수 없을 정도였다.

챙!

백골마군이 담치를 포기하고 백골검을 뒤로 휘둘러 자신을 공격하는 검을 막아냈다. 검이 부딪치는 순간, 백골마군은 팔이 저릿하더니 말할 수 없이 차가운 냉기가 팔을 뚫고 관통했다.

“장로님께서 이 몸을 찾아 직접 오실 줄은 몰랐군요.”

“너는...!”

석추명을 본 백골마군의 눈초리가 찢어질 듯 위로 치켜 올라갔다.

“네놈이 교주의 명을 어기고 쫓기는 중이라고 하더라도 엄연한 신교의 대주이거늘, 지금 화산파를 도와 나에게 맞서려느냐?”

백골마군이 차가운 목소리로 석추명을 질책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이목남은 석추명이 혹시 마음이 바뀌기라도 할까 봐 걱정되어 얼른 소리쳤다.

“무슨 소리요? 저분은 우리 화산파의 비전을 이은 화산신검이시오. 석 대협, 독고양 태상장로님의 마지막 부탁을 잊으시는 일은 없겠지요?”

이목남의 말에 그제야 백골마군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석추명이 손에 든 검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화산신검? 설마 그 검이 독고양 그 늙은이의 비천검이란 말인가?”

독고양이 강호에서 은거한 지 30년도 넘어 이제는 직접 본 사람이 드물었지만 백골마군은 독고양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했다.

검을 바라보던 백골마군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독고양과 여러 차례 겨루어 본 적이 있던 백골마군은 석추명이 들고 있는 검이 비천검이라는 사실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백골마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교주의 혜안이 놀랍군. 네놈이 결국 신교를 배신할 것이라 하더니 과연 그대로 되었구나. 박쥐 같은 놈. 흥, 좋아. 하지만 네놈이 상대할 사람은 내가 아니니라.”

백골마군이 입가에 조소를 띠더니 목소리를 높였다.

“수라대는 전원 앞으로 나오라.”

공력이 실린 백골마군의 음성이 퍼져나가자 갑자기 수십 명의 병사가 튀어나왔다. 모두 이전에 석추명의 명을 받들던 수라대 대원들이었다.

“대, 대주님!”

대원들 중 석추명을 발견한 누군가가 석추명을 불렀다.

석추명이 차가운 시선으로 백골마군을 노려보았다.

“네놈이 정에 약하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지. 자, 네놈 손으로 네놈이 직접 키운 수하들을 벨 기회를 주마.”

백골마군이 고소하다는 입가에 음흉한 미소를 띠었다.

“수라대는 배신자 석추명을 처단하라.”

백골마군의 명이 떨어졌지만 수라대원들은 선뜻 움직이지 않고 모두 석추명을 바라보았다.

“뭣들 하는 게야! 어서 저놈을 잡아 죽이지 않고. 네놈들이 감히 내 명을 무시하느냐? 오냐, 그럼 본때를 보여주마.”

그 순간 백골검이 허공을 가르고 지나가더니 백골마군 옆에 서 있던 수라대원 두 명의 목이 그 자리에서 몸에서 분리되어 피를 뿌리며 땅바닥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 모습에 석추명은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백, 골, 마, 군!”

악다문 이빨 사이로 백골마군의 이름을 한 자, 한 자 끊어서 뱉어내는 석추명의 눈빛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수라대는 뭣들 하는 게냐! 오냐, 너희들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내가 직접 죽여주마.”

백골검이 다시 허공으로 치솟자 두려움을 견디지 못한 수라대원 하나가 소리를 지르며 석추명에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그 소리가 신호라도 된 듯이 나머지 대원들도 우르르 달려들었다.

석추명은 자신을 향해 사정없이 검을 찔러오는 대원들의 검을 일일이 피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그들에게 칼날 한번 대지 않았다. 제아무리 무공이 높다 하더라도 이렇게 싸워서는 절대 싸움을 끝낼 수 없었다.

수라대원 모두 백골마군의 강압에 못 이겨 석추명을 공격하기는 했으나 자신들을 인간적으로 대하던 석추명에 대한 기억으로 손에 사정을 두고 있었다.

그 사실을 눈치챈 백골마군이 수라대원들의 등 뒤에서 백골검을 휘둘렀다.

“배신자를 처단하는 일에 어영부영하는 놈들은 먼저 내가 숨통을 끊어주마.”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두어 명의 수라대원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 광경에 수라대원들은 전력을 다해 석추명을 공격해 들어갔다. 석추명이 가르쳐준 무공으로 석추명을 공격하는 셈이었다. 그리고 백골마군보다는 차라리 석추명 가까이 있는 것이 더 안전했으므로 더욱 전력을 다해 석추명 옆으로 가려고 했다.

담예린도 그 무리에 섞여 있었지만 석추명에게 차마 검을 내지를 수는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괴로운 심정으로 검을 들고 공격하는 시늉을 하다가 그만 석추명과 두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석추명은 차가운 시선으로 자신을 흘낏 보고는 마치 모르는 사람이라는 양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그 모습에 담예린은 속이 아려왔다. 마음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듯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이전에 자신에게 격의 없이 장난을 치고 농담을 하던 쾌활한 석추명의 모습이 떠올라 담예린은 공격하는 대원들 틈 속에서 넋이 나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때 누군가 담예린을 치고 나가는 바람에 담예린의 몸이 뒤로 밀리면서 문득 저 멀리 뒤쪽에서 검은 장포를 입은 사내가 수하들에게 은밀히 귓속말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복면을 쓴 장포 사내의 표정은 볼 수 없었으나 이쪽을 바라보는 복면 속의 눈이 이상할 정도로 번들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장포 사내의 수하 20여 명이 수라대원을 둘러싸고 벽력탄을 발사하는 총포를 겨누었다. 저 벽력탄 앞에서 화산파의 절세고수들도 모두 목숨을 잃었다.

담예린의 시선이 총포가 겨냥한 대상으로 옮겨갔다. 총포조는 수라대 전원과 석추명, 그리고 화산파 제자 모두를 몰살할 계획인 듯했다.

석추명은 수라대원들이 퍼붓는 공격을 피하면서도 그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데만 정신이 팔려있었다.

담예린이 석추명에게 고개를 돌렸다.

시간이 정지된 듯 돌연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자신의 눈앞에는 석추명만 보였다.

담예린이 석추명에게 달려가며 소리를 질렀다. 있는 힘껏 큰소리로 외치고 싶었지만 목구멍이 막힌 듯이 소리가 얼른 나오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더욱 목소리를 쥐어짰다.

“모두 피해요!”

담예린이 외치자마자 총포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탕. 탕. 탕. 탕.

총포조 바로 앞에 있던 수라대원 십여 명이 순식간에 벽력탄을 맞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이목남과 담치, 서문효 등이 장문인을 보호하려고 막아서다가 총포가 뿜어내는 벽력탄에 팔, 다리가 날아가며 그 자리에서 숨이 끊어졌다.

그 모습에 거양자가 울부짖으며 다시 앞으로 나서려고 하자 부상을 입고 쓰러져 있던 팽신과 기광이 벌떡 일어나 온몸으로 거양자를 막아섰다.

다시 총포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자 팽신과 기광은 각기 다리 하나와 어깨가 통째로 날아가며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거양자가 미친 듯이 울분을 내뿜으며 소리를 질렀다. 그 와중에도 거양자는 부상을 입은 화산파의 어린 제자들을 온몸으로 막아섰다.

벽력탄 하나가 거양자의 가슴에 정통으로 맞더니 주먹만 한 구멍을 뚫어 놓았다. 거양자의 무릎이 천천히 구부러졌다. 여기저기서 장문인을 부르는 오열 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이 자꾸 천천히 갔다.

석추명에게 달려가는 담예린의 눈에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화산파 제자들이나 수라대원들이 비쳤지만 지금 이 순간 담예린에게는 석추명 외에 아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단지 조금만 더 빨리 가고 싶을 뿐이었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벽력탄이 일직선으로 석추명을 향해 날아왔다. 총포에서 발사된 벽력탄은 제아무리 무공이 높다 해도 인간의 속력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 순간, 담예린은 석추명 앞에 너무 늦지 않게 서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단 한 번이라도, 자신이 단 한 번이라도 석 대주에게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리면서도 뭉클한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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