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 - 광세일소_한추영 - 1535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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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1화 화산검전(華山劍戰) (16)
밤이 깊어져서인지 만장 절벽 아래 머물러 있던 안개가 밤바람과 함께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하늘에는 휘영청 달이 밝았지만 사소혜가 서 있는 협곡의 좁은 길 위로 운무가 살짝 깔리면서 길과 허공의 구분이 쉽지 않았다.
“뭣이라? 호호호, 고년 제법 성깔이 있구나. 그냥 죽이기에는 아깝군. 어떠냐? 내 밑으로 들어와서 내 제자가 되지 않으련? 우리 두 여자 사제가 강호를 휘저으며 뭇 남자들을 희롱하는 것도 재미있을 듯한데?”
나찰녀의 말에 사소혜가 다시 채찍을 휘둘러 ‘짝!’ 소리를 내며 나찰녀의 말을 끊었다.
“주둥이에서 나오면 다 말인 줄 아느냐? 네년같이 천박한 계집과 나를 동급으로 보지 마라. 기분 더럽게 나쁘니까.”
사소혜가 나찰녀의 제안을 단박에 거절하자 나찰녀의 눈가가 샐쭉해지면서 냉기가 서렸다.
“네년이 분수도 모르고 잘도 나불거리는구나. 애들 장난감 같은 그 채찍으로 내 공격을 몇 수나 받아내는지 보자.”
쐐액.
말이 끝나자마자 나찰녀의 유성추가 운무를 뚫고 사소혜를 향해 곧장 날아왔다. 유성추의 날카로운 끝이 달빛에 번쩍였다. 그 모습에 사소혜는 급히 몸을 누이며 오른손의 채찍을 떨쳤다.
‘짝’ 소리와 함께 금빛 채찍이 나찰녀의 유성추를 휘감더니 채찍과 유성추가 서로 엉키고 말았다. 그 모습에 나찰녀가 가소롭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유성추 쇠줄을 잡아당기자 쇠줄보다 훨씬 두꺼운 사소혜의 채찍이 속절없이 나찰녀 쪽으로 끌려갔다.
사소혜는 끌려가지 않으려고 양손에 힘을 주어 채찍을 잡아당겼지만, 나찰녀가 잡아당기는 힘을 당할 수가 없었다.
“우라질!”
“호호호, 그게 전부야? 큰소리치기에 뭔가 있을 줄 알았네.”
사소혜가 고전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찰녀가 간드러진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사소혜가 나찰녀의 얼굴을 향해 채찍을 집어 던지면서 오히려 나찰녀에게 달려들었다.
“흥! 이 채찍이 그토록 탐이 나면 말을 하지 그랬어? 이 언니가 과감하게 양보할 텐데.”
그와 동시에 사소혜의 두 손이 소맷자락으로 들어갔다 나오면서 위기 상황에 쓰기 위해 만들어 둔 독환(毒丸)을 꺼내 손가락으로 바스러뜨리며 나찰녀에게 뿌렸다.
“그런 잔꾀에 넘어갈 본녀가 아니다.”
나찰녀는 사소혜가 독약을 쓸 것으로 짐작했는지 사소혜의 손가락 움직임을 보더니 곧장 허리춤에 꽂아 두었던 부채를 들고 휙 부쳤다. 그러자 나찰녀 쪽으로 날아가던 독 가루가 갑자기 강한 바람을 타고 오히려 사소혜 쪽으로 날아왔다.
사소혜는 놀라서 즉시 소매로 얼굴을 가리며 호흡을 멈추었으나 나찰녀의 높은 공력으로 일어난 바람은 독 가루를 싣고 그대로 금린에게까지 휘몰아쳐 갔다. 부상 때문에 기혈이 불안정해진 금린이 이 독 가루를 마신다면 다른 사람보다 몇 배나 빨리 독이 퍼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사소혜가 금린을 바라보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금린, 숨을 멈춰!”
하지만 사소혜가 입을 벌려 얘기하는 순간, 소매로 가리기는 했으나 독가루의 일부가 사소혜의 입으로 흘러 들어갔다.
땅바닥에 쓰러져 있던 금린은 어찌 된 영문인지 몰랐으나 사소혜의 다급한 외침에 즉시 코와 입을 가리며 숨을 멈추었다.
“호호호, 어린놈에 대한 애정이 대단하군.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데 꼬마 녀석부터 챙기는 것을 보면 말이야.”
사소혜가 들이마신 독은 황소 열 마리를 한꺼번에 죽일 수 있는 맹독이었다. 독가루를 들이마신 사소혜는 즉시 호흡이 가빠지더니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사소혜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길로 품 안을 뒤지더니 해약이 들어있는 약병을 꺼내 들었다.
그 순간, 나찰녀의 유성추가 공기를 가르며 날아오더니 그대로 유리병을 깨뜨려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 바람에 약병에 담겨있는 해약들이 길 위로 우르르 쏟아지더니 대부분은 그대로 만장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안돼!”
연신 숨이 넘어가는 상황에서도 사소혜는 해약이 사라지자 절망에 찬 탄식을 내질렀다.
“호호호, 그렇게 쉽게 네년 뜻대로 될 줄 알았더냐? 내 허락 없이는 죽는 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지.”
사소혜가 숨이 막히는 듯 두 손으로 자신의 목을 움켜쥐더니 털썩 땅바닥으로 쓰러졌다. 그 모습을 바라본 금린이 사소혜에게 다가가고자 했으나 어느새 자신의 몸도 중독이 된 것인지 나른한 느낌과 함께 가뜩이나 무겁던 눈꺼풀이 스르르 닫혔다.
그때 어디선가 둔탁한 기계음이 들려오더니 놀랍게도 절벽 건너편에서 금린이 앉아 있는 곳으로 운무를 뚫고 쇠로 된 다리 하나가 뻗어왔다.
드륵, 드르륵.
난데없이 허공에서 다리가 나타나자 나찰녀는 수상한 생각이 들어 유성추를 단단히 잡고 다리를 주시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다리 위로 사람의 모습들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막내야!”
다리 위에서 제일 처음 나타난 이목남이 바닥에 쓰러진 금린을 발견하고 아직 다리가 절벽 끝까지 닿지도 않았는데 허공에서 몸을 솟구쳤다.
나찰녀는 별안간 허공에 나타난 다리로 화산파 제자들이 우르르 달려 나오자 깜짝 놀랐다. 뿜어내는 기세가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것이 매화검수들보다 무공이 훨씬 높은 듯했다.
“젠장. 이것들은 또 뭐냐?”
혼자서 이들을 다 상대할 수 없다고 생각한 나찰녀는 이목남이 금린을 돌보는 사이, 즉시 몸을 돌려 달아나려 했다.
그때 다리 위에서 달려오는 화산파 제자들의 어깨를 밟고 누군가가 빛살처럼 빠른 속도로 나찰녀를 향해 날아왔다.
아직 서너 장이나 떨어진 거리였으나 그자의 검 끝에 발출되는 검기가 나찰녀의 호신강기를 뚫고 등을 날카롭게 찔러 들어왔다.
달아나던 나찰녀는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어 즉시 몸을 돌려 방어자세를 취하는 순간, 상대방의 검 끝은 이미 서너 척 앞으로 바싹 다가와 있었다. 실로 믿을 수가 없는 속도였다.
나찰녀는 다급한 나머지 상대방 검의 속도를 줄이려고 유성추를 날려 검을 칭칭 감았다. 그러나 유성추가 검신을 감은 순간, ‘챙’ 소리와 함께 한 번도 끊어진 적이 없었던 유성추의 쇠줄이 산산조각이 나서 바닥에 떨어졌다.
“이럴 수―”
그런데 나찰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한 자루의 시커먼 묵검이 자신의 심장을 노리고 찔러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이미 피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상황이었다.
나찰녀는 다급한 나머지 맨손으로 자신의 심장을 노리는 검날을 움켜잡았다.
“윽!”
나찰녀의 손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와 검신을 타고 나찰녀의 옷을 붉게 물들였다.
손으로 막은 탓에 관통되지는 않았으나 검 끝부분이 가슴에 박혀 들어갔다.
“도, 도대체 누, 누가 이런 무공을?”
바람에 흩날리는 운무 속에서 누군가 나찰녀에게 걸어왔다.
나찰녀는 자신을 어린애 다루듯이 하는 상대방의 무공에 경이감을 느끼며 누군지 보려고 눈을 치켜떴다.
“그렇지 않아도 찾아가려고 했는데 제 발로 찾아왔군.”
나찰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는 사람이 싸늘하게 내뱉었다.
그제야 상대방을 알아본 나찰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가슴에는 연신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너, 너는 석 대주!”
“이제 두 번 다시는 악행을 못하게 해주지.”
석추명이 손을 뻗어 나찰녀의 가슴에 박힌 묵검을 뽑아 들었다.
“자, 잠깐!”
죽음을 직감한 나찰녀가 다급한 소리로 외쳤다.
“지금 사소혜와 화산파 제자가 극독에 중독되었다. 해, 해독약은 내가 가지고 있다. 나를 놓아주면 본진으로 돌아가서 해독약을 가지고 다시 오겠다.”
두려움에 질린 나찰녀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잔꾀를 냈다.
사소혜의 해약병이 깨지는 바람에 해약이 모두 쏟아진 것을 알 리 없는 석추명은 나찰녀의 말에 뒤로 돌아보았다.
땅바닥 위에 쓰러져 있는 사소혜가 눈에 들어왔다. 그렇지 않아도 흑묘아, 백묘아가 아까부터 사소혜의 주위를 돌며 사납게 울고 있었다.
석추명이 성큼성큼 걸어가 사소혜의 상태를 살폈다. 사소혜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이미 손, 발톱과 입술, 눈 밑이 새까매진 것으로 보아 독이 전신에 퍼진 것이 분명했다.
흑묘아가 갸르릉 거리며 사소혜의 입과 코를 핥고 백묘아가 코를 땅에 박고 냄새를 맡으며 무엇인가를 찾는 듯했다.
석추명은 사소혜를 안아 든 채 나찰녀에게 말했다.
“좋다. 당장 해독약을 가지고 돌아오너라. 그럼 이번만큼은 살려주마. 하지만 만약 약속을 어긴다면 가장 참혹한 방법으로 죽여주겠다.”
나찰녀를 노려보는 석추명의 두 눈에서 시퍼런 안광이 불꽃처럼 타올랐다.
“아, 알겠소. 거, 걱정하지 마시오.”
나찰녀는 검에 베인 손으로 가슴의 상처를 누르며 다급하게 뒷걸음질 쳤다. 두 눈에는 여전히 두려움과 놀라움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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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럴 수가!”
이목남과 화산십수는 아수라장이 된 화산파 건물들을 바라보며 분노에 부들부들 떨었다. 그토록 웅대한 위용을 자랑하던 화산파의 금천궁을 비롯하여 주요 전각들이 불길에 휩싸여 검은 연기를 내뿜고 있었고, 땅바닥에는 팔다리를 잃고 참혹하게 죽은 화산파 제자들의 시신이 지척에 널려 있었다.
“도대체, 어느 놈이, 누가 이런 짓을 했단 말인가!”
평상시에는 진중하기 그지없는 이목남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소리 질렀다.
그때 어디선가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사형, 저기 누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서 가 보세.”
화산십수는 칼싸움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재빨리 신형을 날렸다.
사소혜를 두 팔에 안고 있던 석추명은 사소혜를 평평한 풀밭에 눕혔다. 그러자 사소혜가 깨어나려는지 ‘끙’ 하고 소리를 냈다.
“소혜야, 정신이 드느냐?”
사소혜의 눈꺼풀이 힘겹게 올라가더니 사소혜가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 아까 백묘아가 물고 왔던 약환을 먹인 것이 효과를 보는 게 분명했다. 킁킁거리며 땅바닥 냄새를 맡던 백묘아가 깨진 약병에서 흘러나온 해독약 한 알을 물고 왔던 것이다.
“대, 대주님. 정, 정말 나오신 건가요? 호, 혹시 내가 꿈을 꾸는 건 아니겠지요?”
사소혜는 아직 약 기운이 다 가시지 않아 정신이 혼미한 듯했다.
석추명이 사소혜의 손을 꼭 붙잡으며 빙그레 웃었다.
“꿈이 아니다. 정말 나왔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것이냐?”
석추명의 말에 사소혜는 그제야 안심이 되는지 ‘아!’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나찰녀가 오늘 저녁, 신교의 고수들을 이끌고, 화산파를 침공해왔어요.”
아직 말하기가 쉽지 않은 듯 사소혜의 말이 중간에 간간이 끊어졌다.
“뭐라고?”
석추명의 눈가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하룻밤 만에 화산파가 이렇게 무너졌단 말이냐? 매화검수들은 다 무얼 하고?”
사소혜가 힘이 부치는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저, 저들은 처음부터 벽, 벽력탄을 쏘며 공격했어요. 제가 얘기를 해주려고 했으나, 저, 저들은 제 말을 처음부터 들으려 하지, 않았어요.”
사소혜의 말을 듣던 석추명은 상황이 대충 머릿속에 들어왔다. 보나 마나 마교 인사의 말이라고 무조건 듣지 않으려 했겠지.
“멍청한 사람들!”
석추명이 벌떡 일어섰다. 사소혜가 석추명을 바라보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백, 백골마군이 나찰녀와 함께 왔어요. 그리고 정, 정체를 알 수 없는 고수들도 함께 있으니 조심하셔야, 해요.”
석추명이 사소혜를 걱정스럽게 내려다보며 물었다.
“내 잠시 다녀와야겠다. 백골마군이라면 화산십수도 상대가 안 될 거야. 혼자 있어도 괜찮겠느냐?”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세요. 제 독은 제가 잘 알아요. 해약을 먹었으니 이제 곧 괜찮아질 거예요.”
석추명은 그런 사소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흑묘아, 백묘아에게 사소혜와 함께 있으라고 말했다. 영물들은 기이하게도 석추명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 낮은 목소리로 갸르릉거렸다.
그러자 석추명도 안심이 되는 듯 화산십수가 달려간 곳으로 신속히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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