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 - 광세일소_한추영 - 1534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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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0화 화산검전(華山劍戰) (15)
“여기 어디쯤일 텐데....”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는 여인이 있었다. 제법 먼 길을 달려온 듯 옷에는 흙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고 가끔 거친 숨을 내뱉었다.
“이봐요, 금 소협. 정신 차려요. 여기서 정신을 잃으면 안 돼요. 정신을 차리라니까!”
여인은 젊은 공자를 부축하고 있었다. 젊은 공자는 검에 베인 듯 옷은 찢어져 나풀거렸고 몸 여기저기에 핏자국이 있었다.
“사 소저, 저는... 저는... 더 이상 못 갈 것 같습니다. 저를 버, 버리고... 가십시오....”
두 사람은 다름 아닌 사소혜와 화산파의 막내 제자 금린이었다.
금린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리며 숨을 헐떡였다. 창백한 얼굴에는 핏기가 하나도 없었고 입술은 바싹 말라 갈라져 있었다.
“이, 이러다가 둘 다 잡힙니다. 사 소저.... 헉헉.”
금린이 힘겹게 눈을 뜨더니 사소혜를 억지로 밀어내려 했다. 그러자 사소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슨 남자가 그토록 의지가 약해?”
사소혜가 화를 내자 금린이 놀라 감기는 눈을 치떴다.
사소혜는 부축하던 금린의 손을 고쳐잡으며 금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 누님이 하는 말 똑똑히 새겨들어. 나는 절대 혼자 도망가지 않아. 이 사소혜, 그렇게 의리 없는 여자가 아니라고. 우린 함께 달아날 거야.”
“사, 사 소저....”
“소저는 무슨 얼어 죽을 소저. 앞으로 누나라고 불러. 알겠어?”
사소혜가 힘든지 숨을 헉헉대며 금린을 노려보았다.
“알겠냐고!”
“예, 예. 누, 누님!”
금린이 엉겁결에 누님이라고 하자 사소혜는 기분이 좋은 듯 슬며시 미소를 짓더니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조금만 더 버티면 돼. 그럼 화산파에서 실력이 제일 출중하다는 화산십수와 우리 대주님께서 나오신다고. 그럼 괜찮을 거야. 검동 안에서 틀림없이 신묘한 무공을 배워왔을 거야. 비천검 독고양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는 나도 안다고. 그런 사람과 백일이나 같이 있었으니 뭔가 배워도 배웠겠지. 그러니 힘들어도 조금만 더 버텨보라고.”
거친 숨을 내뱉으며 이를 앙다무는 사소혜의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것인지 아니면 금린에게 하는 말인지도 분명치 않았다.
금린은 그런 사소혜의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생면부지의 자신이 뭐라고 이렇게 목숨까지 걸고 보호해주려고 할까?
“미, 미안해요. 알겠어요. 포기하지 않을게요. 사내가 되어서, 누, 누님께 이렇게 부축을 받아야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두 사람은 어느덧 검동 입구로 이어지는 가파른 협곡 위의 좁은 길로 들어섰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에도 벅찰 정도로 길은 좁았다. 사소혜는 금린이 실족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발길을 힘겹게 뗐다.
‘그 마녀도 아마 여기까지 쫓아오지는 못할 거야. 그러니 걱정할 필요 없을 거야. 이제 곧 자정이니, 대주님께서 금방 나오실 거야. 금방 나오실 거야. 금방.’
***
사소혜는 석추명이 검동에서 나올 때까지 화산 아래에서 숨어 지낼 생각이었다.
어느 날, 이 층 객잔에 혼자 앉아 술잔을 기울이던 사소혜의 귀에 어떤 여인이 점소이에게 길을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화산파로 가려면 어떻게 가면 되지?”
하지만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사소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목소리의 주인이 나찰녀였기 때문이다. 재빨리 난간 뒤로 몸을 숨긴 다음, 아래를 내려다보니 과연 나찰녀가 점소이에게 무엇인가를 좀 더 자세히 묻더니 싸늘한 눈빛으로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는 총총걸음으로 길을 나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찰녀가 여기 다시 웬일이지? 설마 나와 석 대주를 잡으려고?’
나찰녀 옆에는 신선과 같은 풍채의 키가 큰 노인이 머리를 품(品)자로 올려 검은 비녀를 꽂고, 허리에는 뼈로 만든 듯한 희한한 검을 검집도 없이 차고 있었다. 외모로 짐작하건대 자신도 말로만 듣던 전대의 장로, 백골마검이 분명해 보였다.
‘저 두 사람이 여기 웬일이지?’
사소혜는 불길한 느낌이 들어 위험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두 사람의 뒤를 밟았다.
단순히 자신들 두 사람을 찾으러 왔다면 백골마검까지 나타날 리는 없었다. 자신들이 무슨 대단한 거물이라고 전대 장로 백골마검까지 나타났겠는가?
사소혜가 멀찌감치 떨어져서 은밀히 뒤를 밟아보니 놀랍게도 두 사람만 온 것이 아니었다. 화산 아래의 한적한 산길에는 검은 옷을 입은 수백 명의 군사가 완전무장을 하고 전투준비를 한 채 대기하고 있었다.
“헉!”
깜짝 놀란 사소혜는 엉겁결에 소리를 내고는 다급하게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다행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이 병력은 다 무엇이지? 그리고 저들은 누구지?’
신교 내부의 일에 큰 관심을 두지는 않았지만 사소혜도 신교의 사람이어서 웬만한 병사들은 낯이 익었다. 그런데 나찰녀와 백골마군이 데려온 병력 가운데 절반 이상은 이상하게도 낯설고 이질감이 들었다.
사소혜의 머릿속에서는 어서 달아나야 한다는 경고가 끊이지 않았지만 사소혜는 좀 더 주위를 지켜보기로 마음먹었다.
“이놈들아, 이 검은 상자를 운반할 때는 극도로 조심해야 한다고 몇 번씩이나 말해야 알아듣겠느냐? 이 안에는 약간의 충격에도 여기 있는 사람 모두가 죽을 수 있는 폭약이 들어있다고! 멍청한 놈들 같으니라고.”
병사들을 닦달하는 사람은 뜻밖에도 수라대 부대주인 맹환이었다.
그때 검은 장포를 입고 키가 상당히 큰 사람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오늘이면 화산파도 무림에서 사라지겠구나. 크하하하하.”
사소혜 쪽으로 등을 돌리고 있어서 누군지 얼굴을 볼 수는 없었으나 나찰녀, 백골마검과 같은 자리에 앉아 유유자적하는 것을 보면 최소한 그들과 동급의 고수가 분명했다.
“저것이 있으니 우리가 손쓸 필요도 없겠소이다.”
검은 장포를 입은 사내가 턱짓으로 상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흥! 그렇게 쉽게 보내줄 수는 없지요. 특히 매화검수 놈들은 건드리지 말아요. 그놈들에게는 본녀가 지옥을 맛보게 해줄 테니. 건방진 놈들. 감히 나를 상대로 떼로 덤벼들었겠다? 어리석은 행동의 대가가 무엇인지 오늘 확실하게 보여주지.”
나찰녀가 독기 오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검은 장포의 괴한이 맞받아쳤다.
“으하하하, 화산파 놈들 죽어도 곱게 죽진 못하겠구먼. 그러게 누가 나찰녀께 죄를 지으라고 했나.”
“해가 지면 바로 칩니다. 수하들에게 똑바로 전달하세요.”
장포 괴한의 말에 나찰녀가 싸늘하게 대꾸했다.
“여부가 있겠소? 내 당장 전달하지.”
거기까지 듣던 사소혜는 그제야 사태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지난번에 매화검수의 손에 쫓겨 달아났던 나찰녀가 고수 수백 명을 이끌고 화산파를 치러 온 것이었다. 나찰녀와 얘기를 나누는 검은 장포의 괴한은 목소리로 봐서는 신교의 사람이 아닌 듯했다.
‘교주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화산파와 전면전을 일으키다니. 이는 곧 정파 무림 전체를 상대로 전면전을 하겠다는 말이잖아. 신교에 아무리 고수가 구름처럼 많다고 해도 구대 문파와 오대 세가, 무림맹의 협공을 어찌 감당하려고.’
사소혜의 마음이 초조해졌다.
‘그나저나 하필이면 대주님이 검동에 들어가 계신 지금 이런 일이 생기다니!’
사소혜는 화산파에 이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으나 자신은 화산파에서 축객령을 받은 몸. 두 번 다시 눈에 띈다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는 으름장까지 있었으니 섣불리 나설 수도 없었다.
사소혜는 뾰족한 방법이 없어 속으로 발만 동동 구르다가 문득 금린이 생각났다.
금린이라면 자신의 말을 믿어줄지도 모른다. 그래, 금 소협을 찾아 얘기해주자. 신교의 군사들이 화산파를 치러왔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사소혜는 신교의 군사들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조용히 몸을 내뺀 다음 즉시 화산파 본궁인 금천궁으로 달려갔다.
‘금린 소협이 어디 있을까? 아, 금린 소협은 내 말을 들어준다고 해도 화산파 장문인이 제자 중의 막내인 금린 소협의 말을 듣기나 할까?’
사소혜는 초조한 마음을 달래가며 은밀히 금린을 찾아보았다. 화산파에는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고수가 많았기에 행동이 무척 조심스러웠다.
이제 곧 해가 질 텐데 금린을 찾을 수 없자 사소혜는 마음이 점점 더 조급해졌다. 하지만 그토록 조심한다고 했건만 그만 행적이 발각되고 말았다.
“아니, 당신은 석 대주와 함께 있던 사 소저가 아니시오? 여기서 살금살금 도둑고양이처럼 무얼 하는 게요? 두 번 다시 눈에 띄면 살아남기 어렵다던 장문인의 말을 그새 잊었소이까?”
다행히 사소혜를 발견한 사람은 석추명과 자신에게 호의적이었던 홍기 도장이었다.
홍기 도장은 사소혜를 보자 눈살을 찌푸리며 호통을 치면서도 혹시 다른 사람 눈에 띌까 봐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사소혜를 얼른 전각 뒤편 사람이 없는 곳으로 이끌었다.
사소혜는 금린보다 홍기 도장을 만나자 속으로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장문인이 화산파의 중진인 홍기 도장의 말은 듣겠지 싶었기 때문이었다.
“홍기 도장님, 큰일 났습니다. 지금 신교의 고수 수백 명이 완전무장을 한 채 화산 아래 진을 치고 있습니다. 서둘러 피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뭣이라? 신교의 고수 수백 명? 허허, 지금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거요?”
“지난번에 도망쳤던 나찰녀가 군사 수백 명을 데리고 화산파를 치러왔다니까요. 지금 제 눈으로 똑똑히 보고 올라오는 길입니다.”
사소혜의 말에 홍기 도장이 잠시 생각하더니 차갑게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거 잘 됐군. 그렇지 않아도 지난번에 그 마녀를 도망가게 내버려 둔 사실이 계속 마음에 걸렸는데 이번에야말로 우리 화산파의 무서움을 확실히 보여주어야겠군.”
“도장! 나찰녀만 온 것이 아니라 신교의 고수와 함께 외부의 지원군도 상당히 대동하고 온 것 같습니다. 즉시 대비를 하지 않으면 큰일 난다고요.”
“흥! 그깟 마교 놈들, 한칼에 쓸어버리면 그뿐.”
홍기 도장이 가슴을 펴고 호기롭게 외쳤다. 그러더니 사소혜를 바라보며 싸늘하게 소리쳤다.
“사 소저도 얼른 떠나시오. 지난번의 정리를 봐서 이번 한 번만큼은 그냥 넘어가겠지만, 만약 또다시 눈에 띈다면 그때는 정말 목숨을 걸어야 할게요.”
홍기 도장은 말을 마치더니 그대로 홱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어 사라졌다.
자신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홍기 도장을 보며 사소혜의 불안감은 더욱 증폭되었다.
‘이게 아닌데....’
해가 지자 사소혜의 불안감은 현실로 드러났다.
사소혜는 금천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은밀히 몸을 숨기고 사태를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문득 사소혜의 머릿속에 축객령을 받은 자신들을 일부러 찾아와 검동 이야기를 해준 아직 앳된 얼굴의 청년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금린만큼은 꼭 구해야겠어.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대주님을 뵐 때 면목이 없을 거야.’
과연 해가 지자 신교의 군사 수백 명이 화산파에 들이닥쳤다.
그러나 화산파도 아무런 준비도 없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행히 홍기 도장이 사소혜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던 모양인지 매화검수 백여 명이 화산파 정문 앞에 이미 집결해서 전투준비를 하고 있었다.
“호호호. 이렇게 모여 있다니 일부러 찾을 필요가 없어서 좋군.”
나찰녀의 입에서 싸늘한 웃음이 터져 나오고 바로 이어서 벽력탄이 터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적들이 벽력탄을 쓸 줄 몰랐던 매화검수들은 검 한번 뽑아보지도 못한 채 상당수가 목숨을 잃었다.
펑, 펑, 폭약 터지는 소리가 날 때마다 피떡이 된 화산파 제자들의 팔다리와 살점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비명 소리와 울부짖는 소리, 흐느끼는 소리, 급박하게 검이 부딪치는 소리를 뚫고 나찰녀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화산파 금천궁에 울려 퍼졌다. 간드러지면서도 뾰족한 그 목소리는 살육을 즐기는 지옥 야차의 웃음소리였다.
***
“여기에 무엇이 있다고 부상한 사람을 데리고 예까지 도망쳐 왔을까?”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는 사소혜와 금린의 뒤에서 사람 소리가 들렸다. 사소혜가 놀라서 쳐다보니 자신들이 막 지나온 협곡 위의 좁은 길 위에 나찰녀가 한 손에 부채를 들고 부치며 느긋한 표정으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석 대주는 어디다 숨기고 그 어린놈은 또 무엇이야? 오호라, 네년 취향이 바뀐 게로구나. 호호호. 하기야 고기는 연할수록 맛있지. 하지만 나는 저런 애들보다 사내구실을 제대로 하는 놈들이 좋더라. 호호호.”
나찰녀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검동 입구에 울려 퍼졌다.
사소혜는 나찰녀를 노려보다가 결심한 듯 부축했던 금린을 길 한쪽에 내려놓고 허리에 감고 있던 금사신편을 꺼내 들었다.
그 모습에 금린이 화들짝 놀랐다.
“누, 누님!”
하지만 금린의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사소혜는 채찍을 들고 한 발 한 발 천천히 나찰녀 쪽으로 걸어갔다.
“흥! 천하 여인들의 망신은 혼자서 다 시키는 년. 그렇지 않아도 한번 붙어보고 싶었는데 잘 만났다. 신교의 선배로써 내가 따끔하게 버릇을 고쳐주마.”
사소혜가 앙칼지게 소리치며 가죽채찍으로 돌바닥을 내리치자 ‘짝!’ 하는 채찍 소리가 만장 절벽 아래로 퍼져나가며 메아리가 되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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