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 - 광세일소_한추영 - 1533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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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9화 화산검전(華山劍戰) (14)
석추명은 독고양을 바라보았다. 독고양은 어서 공격해 들어오라는 듯 손 하나를 앞으로 뻗었다.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전대 무림쌍절 중의 하나로 일컬어지던 고수.
독고양과의 비무는 자신이 교주 남무궁과 싸울 수 있을지 가늠해볼 기회가 되리라.
팽팽한 긴장감에 온몸의 터럭이 모두 일어선 느낌이었다.
“후―”
석추명이 심호흡을 내뱉으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긴장할 필요는 없다. 아직 실력이 부족하다면 더 닦으면 그뿐. 이제 가야 할 방향은 잡았으니 그걸로 된 것이다.
석추명보다 더욱 긴장한 사람은 바로 화산십수였다. 스무 개의 눈동자가 한 번의 깜박거림도 없이 석추명의 몸을 꿰뚫기라도 할 듯 주시했다. 주위는 숨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그 전에,”
독고양이 두 손으로 나무지팡이를 잡고 비틀며 뽑자 놀랍게도 지팡이가 반으로 나뉘며 그 속에서 거무튀튀한 검 한 자루가 뽑혀 나왔다.
“나도 예우를 갖추어야겠지.”
지팡이 속에서 나온 검은 일반 검보다 한 자 정도 더 길었는데 특이점이라고는 검날과 손잡이 사이를 막아주는 방패막이 부분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 외에는 검날이 검은색이라 빛을 받아도 반짝이지 않는 점을 제외하고는 뚜렷한 특징도 없고 별다른 예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독고양의 나무지팡이에서 검이 나오자 화산십수들은 모두 설마 하는 눈초리로 그 검을 주시했다.
“비천검이라네.”
독고양의 말에 화산십수는 ‘아!’하고 나직한 탄성을 터뜨렸다. 그 소리에는 실망감도 포함되어 있었다. 조사 때부터 내려오던 화산파 최고의 신물이자 화산신검의 표식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평범한 검에 불과했다.
“자, 준비했으니 이제 시작해 볼까?”
먼저 손을 쓴 사람은 독고양이었다. 무림에서 선배가 후배와 겨루면 선배가 보통 3수 정도는 양보하나, 오늘 이 싸움은 쌍방이 대등한 위치에 싸우는 싸움이지 선배와 후배 간의 결투가 아니었다.
독고양이 든 비천검이 출렁인다 싶더니 어느새 석추명의 안면부를 찔러 들어갔다. 그토록 빠른 속도로 검을 휘두르는데도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무성검!”
독고양이 휘두르는 검법에 이목남이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내뱉었다.
검을 휘두를 때는 빨리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파공음이 나게 되어있다. 형체가 있는 검이라면 공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움직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고양이 휘두르는 묵검에서는 아무런 소리나 기척이 나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검이 아니라 유령이 움직인다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석추명은 검에서 파공음이 나든 안 나든 상관없다는 듯 평온한 표정으로 얼굴을 찔러 들어오는 독고양의 검을 보지도 않고 팔을 아무렇게나 휘둘러 막았다.
텅!
검이 서로 부딪친다고 하기에는 너무 깊은 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만장 절벽 아래에서 바람이 불어와 두 사람의 옷깃이며 머리를 흩날렸다.
석추명의 눈빛은 이미 담담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독고양과 같은 무림의 대선배와 겨루면서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모습. 차갑게 가라앉은 가을 호수와 같이 담담한 모습이었다.
독고양의 검이 갑자기 화려한 꽃무늬를 그리기 시작했다.
“저, 저것은...!”
독고양의 검법을 보던 화산십수들의 입에서 경탄의 소리가 튀어나왔다.
온천지에 매화 꽃잎이 날리는 듯한 착각.
바로 매화만천(梅花滿天)이었다. 화산파 제자라면 누구나 아는 무공이었지만 또한 동시에 아주 생소한 무공이기도 했다.
‘매화만천이 저런 무공이었던가?’
‘나름 깨달음을 얻었다고 자부하고 있었건만 내 깨달음이라는 것이 정말 태양 앞의 반딧불에 불과했었구나.’
‘저것이 진정 우리 화산파 무공이 맞단 말인가?’
독고양이 펼치는 매화검법을 바라보며 화산십수들은 하나같이 넋이 나가 상념에 젖었다.
독고양이 자신도 별다른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고 했을 때 그 말을 그대로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이목남마저도 태상장로께서 자신만 아는 비기(秘技)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으신가 보다 하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 살펴보니 무공과 초식은 자신들이 익히 아는 것들이지만 그 무공과 초식이 독고양의 손에서 펼쳐지자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무공이 되었다. 그제야 화산파 제자들은 독고양의 말뜻을 이해하고 본문의 무공에 대해 더욱 깊은 자긍심과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석추명의 느낌도 다르지 않았다. 이미 자신은 매화검수들과 화산십수가 펼치는 매화검법을 여러 번 보았기에 검법의 행로와 초식은 익숙하다고 생각했으나 독고양이 펼치는 검법의 위력만큼은 그들과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이게 진정한 명문정파 무공의 힘이로구나.’
석추명은 스승에게 배운 수라검법으로는 화산검법을 대적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석추명이 공중으로 치솟더니 아래를 향해 검을 떨쳤다.
석추명의 검에서 시퍼런 검기가 벼락같이 발출되더니 땅바닥에 3장 길이로 한 치 두께의 기다란 금이 파였다. 검기가 스치는 곳마다 돌가루가 날리고 풀잎이며 나무가 그대로 베여 공중으로 분분히 피어올랐다.
주변에 서서 두 사람의 비무를 지켜보던 화산십수들이 석추명이 뿌리는 검기를 피해 황급히 멀찌감치 뒤로 물러났다.
석추명의 몸이 아래로 내려오며 검을 떨칠 때마다 땅바닥에 새겨지는 금의 수가 늘었다.
가공할 검세에 독고양이 검봉으로 땅을 짚고 물구나무를 선 자세로 파도를 넘듯 석추명이 뿌리는 검기를 타 넘었다.
석추명이 뿌리는 검기의 수가 점점 많아지자 독고양의 움직임도 점점 다급해졌다. 그러더니 마침내 두 사람의 검이 허공에서 서로 맞부딪쳤다.
쨍강!
석추명의 검이 독고양의 비천검과 맞부딪친 순간, 비천검의 예기를 견디지 못하고 검날이 부러지고 말았다. 검이 부러지지 않았다면 석추명의 검이 독고양의 목에 닿았을 것이다.
“앗!”
화산십수들은 그 광경에 눈을 치켜뜨며 탄성을 내질렀다. 특히 선우호는 지금 자신이 목격한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떻게 저 마교 새끼가 단기간에 저토록 무공이 높아졌단 말인가? 화산파 장문인도 감히 받아낼 수 없는 태상장로의 검을 받아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역공을 가하기까지 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훌륭하구나. 이 무공의 이름이 무엇이냐?”
독고양이 찬탄하며 물었다. 그러자 석추명이 반만 남은 검을 내리며 포권을 취했다.
“검법의 이름을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숭양일지에 기록되어 있던 세 검법, 숭양일기검, 음양어기검, 무극진공검을 하나로 합쳤을 뿐입니다.”
석추명의 말에 독고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 검법의 이름은 혼원일기검(混元一氣劍)이라 하는 것이 좋겠구나. 세 가지 검법이 하나로 돌아갔으니 우주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결국 하나로 돌아가는 이치가 아니겠느냐? 조사께서 내리신 비천검이 아니었다면 나라도 제대로 막아내기 어려운 공격이었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선배님.”
“으하하하.”
돌연 독고양이 하늘을 우러러 광소를 터뜨렸다. 한참이나 껄껄 웃던 독고양이 웃음을 거두며 말했다.
“지난 30년의 세월이 헛되지 않았구나. 드디어 화산 심법(心法)을 이어갈 인재를 발견했으니.”
그러고는 손에 들고 있던 검을 석추명에게 넘겨주었다.
“받아라. 비천검(飛天劍)이니라.”
석추명은 독고양의 말에서 삼엄한 위엄이 풍기자 감히 거부하지 못하고 공손히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검을 받들었다.
“천하의 모든 물건에는 진정한 주인이 있는 법. 이제부터는 석추명 자네가 이 검의 주인이며 제13대 화산신검이 되었네.”
석추명을 대하는 독고양의 어조가 어느새 정중해져 있었다.
“일신의 무공이 아무리 높아도 백성을 위해 쓰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네. 자네가 깨달은 바를 부디 실천해나가기를 바라네.”
독고양의 간곡한 말에 석추명이 정중하게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또 한 가지. 자네가 화산파는 아니나 하늘의 깊은 뜻이 있어서 화산 심법을 이어받아 화산신검이 되었으니, 본파가 어려움에 부닥칠 때 부디 외면하지 말기 바라네. 그리고 이 심법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늘이 내린 사람을 찾아 후대에 꼭 물려주기 바라네.”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선배님.”
석추명이 비천검을 받자 언제 나타났는지 흑묘아, 백묘아가 나타나 석추명에게 몸을 비볐다. 독고양이 그 모습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 두 영물은 음양묘(陰陽猫)라고 하는 것으로 아무리 미세한 독이라도 금방 알아채며, 몸놀림이 워낙 재빨라 사람의 몸으로는 잡을 수가 없다네. 그래서 섬전묘라고 불리기도 하지. 그 두 녀석이 자네를 따라가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 데리고 가게나.”
독고양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흑묘아, 백묘아가 알아듣기라도 한 듯이 갸르릉 거리며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그러자 석추명이 당황하여 말했다.
“하지만 흑묘아, 백묘아는 선배님께서 기르시던 영물들인데 제가 어찌 감히 데리고 가겠습니까?”
그러자 독고양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닐세. 내가 말하지 않았나? 천하의 모든 물건에는 정해진 주인이 있다고 말이야. 지금까지는 내가 주인이었으나 앞으로는 자네가 주인일세. 데리고 가게나.”
독고양이 그러고 나서 화산십수를 향해 말했다.
“비천검의 주인이 나타났으니 이후로는 누구도 검동으로 들어올 수 없을 것이야. 아무쪼록 우리 화산파가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너희들이 각별히 애써주길 바란다.”
독고양의 말에 이목남이 놀라서 무릎을 꿇고 소리쳤다.
“아니 됩니다. 태상장로님!”
아무도 들어올 수 없다는 말은 또한 아무도 나갈 수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즉, 독고양이 검동을 폐쇄하여 자신을 검동에 영원히 가두겠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그동안 비천검을 물려줄 사람을 찾느라 계속 미루었지만 이제 이 늙은이도 우화등선해야하지 않겠느냐? 걱정하지 말거라. 허허허.”
독고양이 한차례 웃었다.
해가 진 검동의 밤하늘에는 어느새 둥근 보름달이 떠올라 있었다.
“자, 이제 다시 시간이 되었느니라. 나가면 장문인께 나는 잘 있다고 인사를 드리거라. 자, 그럼 이제 가거라. 시각이 얼마 없으니 전력으로 달려야 할 것이다.”
독고양의 말이 끝나자마자 ‘드르륵, 드르륵’ 소리와 함께 운무를 뚫고 만장 절벽 이쪽에서 저쪽을 연결하는 다리가 허공에 놓였다.
“어서 가거라.”
독고양의 말에 화산십수는 숙연한 마음으로 독고양에게 허리 숙여 예를 올린 다음, 한 명씩 다리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석추명이 독고양을 돌아보았다. 노도인의 흰 눈썹과 흰 수염이 밤바람에 가볍게 날리고 있었다.
“부디 평안 하십시오.”
석추명은 이후로 두 번 다시 독고양을 볼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무거웠다.
독고양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무림의 평화가 자네 두 어깨에 달려있네. 힘들겠지만 부디 무림의 큰 기둥이 되어 쓰러져가는 강호를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시게.”
석추명은 독고양을 향해 허리를 굽혀 공손히 인사를 하고 자욱한 운무가 흩날리는 다리 위로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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