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109화 (109/201)

#   109 - 광세일소_한추영 - 1529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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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화 화산검전(華山劍戰) (13)

석추명이 담담하게 자신이 깨달은 바를 설명했다.

“무공에는 정신이 깃들어야 합니다. 정신, 즉 마음이 떠난 무공은 이미 죽은 무공입니다. 불의한 방법으로 얻은 승리는 이겨도 기쁘지 않고 마음이 편안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의 승리를 축하하더라도 본인은 떳떳하지 못함을 알기 때문에 늘 마음이 괴로울 것입니다.”

석추명의 말에 선우호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 고함을 질렀다.

“그게 무슨 헛소리야? 죽은 다음에 정정당당한 것이 다 무슨 소용이야? 피가 튀고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는 전장에서는 무슨 수를 쓰든 살아남는 것이 선(善)이고 도(道)야. 그게 전부라고!”

“정신을 잃으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선우호를 바라보며 석추명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닙니다. 반면에 정신을 지킨다면 몸은 죽어도 그 정신과 마음은 후대로 계속 이어져 남게 되는 것입니다.”

“건방진 놈! 감히 마교 주제에 정신이 어떻고 마음이 어때? 네놈이야말로 간악한 혓바닥으로 정신을 흐리게 하는구나. 모두가 지켜보는 이 자리에서 네놈의 가식을 벗겨주마.”

치솟는 분기를 참지 못한 선우호가 독고양 앞이라는 사실도 잊고 발악이라도 하듯 불시에 석추명에게 검을 찔러 왔다.

쏴아.

검을 찌르는 기세가 어찌나 빠른지 선우호의 움직임에서 거센 바람 소리가 났다.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떨어져 나갈 듯이 펄럭였다.

매화검에 이어 화산파가 자랑하는 또 다른 무공, 낙영광풍검(落英狂風劍)이었다. 얼핏 보면 사면팔방으로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는 듯하지만, 사실은 상대방의 정신을 혼란스럽게 하면서도 방어하기 어려운 곳만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검법이었다.

선우호는 검동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화산십수 중에서 1, 2위를 다투는 실력의 고수였다. 그런 선우호가 지금 독기가 올라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선우호가 검을 내찌른 곳에 석추명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언제 움직였는지 석추명은 어느새 선우호의 뒤에 가 있었다. 선우호는 석추명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전혀 보지도 못했다.

“네놈이 사술을 쓰는구나!”

선우호가 몸을 빙그르르 돌리면서 검을 횡으로 그으며 공간을 베어냈다.

석추명과 선우호의 거리는 불과 1척 반.

선우호는 검이 허공을 친다는 느낌이 들기가 무섭게 몸을 돌리며 검을 휘둘렀기에 이번에는 도저히 피하지 못하리라 여겼다.

하지만 그런 선우호를 조롱이라도 하듯 석추명의 몸이 무릎을 굽히지도 않은 채 그대로 지면에 닿을 듯이 스르르 눕더니 발을 축으로 몸이 반원을 그리며 회전하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에 화산십수는 모두 놀라서 탄성을 내질렀다. 사람으로서 어찌 저런 무공이 가능하단 말인가.

두 번이나 공격이 실패하자 분기가 치밀어 오를 대로 오른 선우호가 노성에 가까운 기합을 넣으며 석추명의 몸을 쫓아 검을 내리꽂았다.

그 순간 석추명이 검을 뽑아 번개같이 떨쳤다.

쨍!

검이 부딪힌 것은 단 한 차례.

그러나 선우호의 검은 부딪친 충격으로 검날이 부러져 튕겨 나가고, 석추명의 검 끝은 그대로 선우호의 가슴 한 치 앞을 겨누었다.

선우호의 심장 부위가 상대방의 검 앞에 무방비 상태로 활짝 열렸다.

선우호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아랫입술을 얼마나 꽉 깨물었는지 핏기가 살짝 감돌았다.

“네, 네놈이 어찌...!”

“다시 한번 해보겠소?”

석추명이 담담한 눈빛으로 물었다.

누가 보더라도 이번 싸움은 선우호의 패배가 확실했다. 반 토막 남은 검을 쥔 선우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네놈이, 네놈이....”

충격으로 부들부들 떨며 말을 잇지 못하는 선우호를 바라보며 맏형 이목남이 안타까워했다.

“사제, 승패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라고 하지 않던가. 이번에 졌다고 앞으로도 지라는 법은 없네. 오늘은 그만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하게나.”

그 말에 선우호는 자신의 분기를 이기지 못하고 반 토막 남은 검을 바닥에 던져버리고는, 석추명을 노려보며 뒤돌아서 물러났다.

독고양은 가타부타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석추명이 이겼구나. 석추명에게 도전할 자 없느냐?”

그러자 이목남이 앞으로 나섰다.

“제가 도전해 보겠습니다.”

이목남은 중앙으로 걸어와 석추명을 바라보며 포권을 취했다.

석추명은 원래 화산검전에 참여할 생각이 없었으나 선우호의 공격으로 부득이 참가한 셈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고 인제 와서 자신은 싸울 생각이 없다고 빠지는 것도 화산십수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석추명이 공손히 포권을 취하며 이목남의 도전을 받아들였다.

“그럼 한 수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이목남은 화산십수들의 대사형으로 원래 무공도 상당했지만 이번에 검동에서 큰 깨달음을 얻어 무공이 가장 많이 진보했다. 그런 이목남이 근엄한 표정으로 검을 뽑아 들고 정중하게 말했다.

“석 대주, 선우 사제의 무례함은 내가 대신 용서를 구하겠소.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화산파 제자가 수치를 당했으니 이는 그냥 넘어갈 수 없소.”

이목남의 말은 이번 비무가 단순한 비무가 아니라 자신이 화산파 제자를 대표해서 석추명에게 하는 도전이라는 뜻이었다. 화산십수의 맏형인 이목남의 눈에 굳은 결의가 엿보였다.

석추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문파의 대사형이라면 응당 그러해야 하리라.

“저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한 차례 인사를 주고받은 뒤, 이목남은 석추명을 공격하는 동시에 발을 크게 내디뎌 진각(振脚)을 밟았다. 이목남의 발이 땅바닥을 때리는 순간, ‘쿵!’하고 지축이 울리는 소리가 나더니 무시무시한 기파(氣波)가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갔다. 그 바람에 화산십수 중 공력이 다른 사람보다 낮은 무염이나 현봉은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몸을 비틀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석추명의 몸은 이목남이 진각을 밟는 순간, 이미 허공으로 높이 떠오르고 있었다.

일학충천(一鶴衝天).

한 마리 학처럼 10여 척 높이로 석추명이 이목남에게 검을 겨누는가 싶더니 한 줄기 빛으로 화해 이목남을 향해 내리꽂혔다.

석추명의 검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날카로웠다. 이목남은 곧장 받아치지 못하고 얼른 몸을 뒤로 도약해서 피하려는 찰나, 돌연 등 뒤에 누군가의 장심(掌心)이 와 닿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헛!”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히 자신의 위에서 쏟아져 내려오던 석추명이 어느새 자신의 뒤에 서서 좌장을 가볍게 뻗어 자신의 등을 슬쩍 스치고 지나간 것이 아닌가. 좌장에 공력을 불어넣거나, 장이 아니라 검으로 내찔렀다면 이미 자신은 싸늘한 시신이 되어 바닥에 누워 있었으리라.

그 자리에 화산십수 열 사람이 모두 있었지만, 누구도 석추명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정확히 보지 못했다. 다들 석추명이 홀연히 사라졌다가 이목남의 등 뒤에서 나타나자 귀신에라도 홀린 듯한 표정이었다.

화산파 대사형이 단 한 수만에 패하다니.

하지만 놀라움은 잠시, 이목남은 진심으로 탄복하며 패배를 깨끗이 인정했다.

“내가 졌소이다. 세상에 그런 무공이 있을 줄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소이다.”

이목남이 두 손으로 포권을 취하자 석추명도 정중하게 인사했다.

“과찬이십니다.”

두 사람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독고양이 열화를 돌아보며 말했다.

“너도 한번 도전해 보겠느냐?”

그러자 열화가 손사래를 쳤다.

“제가 대사형의 실력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어찌 석 대주에게 도전하겠습니까?”

열화의 말에 독고양은 한 손으로 수염을 쓰다듬으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걸로 이번 화산검전의 우승자는 결정되었구나. 이번 화산제일수(華山第一手)는 석추명이니라.”

드디어 화산제일수가 결정된 것이다.

“아!”

화산십수 중 누군가가 망연자실하게 탄식을 내뱉었다. 화산파 제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것도 마교의 인사가 화산제일수가 된 것은 화산파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자, 그럼 화산제일수가 화산신검의 칭호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 시험해보겠다.”

독고양의 말에 넋이 나가 있던 화산파 제자들이 깜짝 놀라 모두 우르르 무릎을 꿇었다.

“태상장로님, 그것이 무슨 소리입니까? 본문의 제자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화산신검의 칭호를 내리신다는 말씀입니까?”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따져 묻는 사람은 다름 아닌 팽신이었다. 독고양이 그런 팽신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렇다.”

“그렇다면 본문의 무상지보(無上至寶)인 비천검도 저자에게 물려주신단 말씀입니까?”

“석추명이 화산신검에 부합하다면 당연히 그래야겠지.”

독고양의 담담한 어조에 팽신이 가슴을 치며 비통하게 소리쳤다.

“비천검은 조사님께서 남기신 유물 아닙니까? 어찌 그런 검을 화산파가 아닌 다른 문파 사람에게 준단 말입니까? 태상장로님께서 우리 화산파를 저버리려고 하십니까? 저놈은 마교놈입니다. 마교놈이라고요!”

팽신이 독고양을 노려보더니 벌떡 일어나 화산십수들을 향해 소리 질렀다.

“아무리 태상장로님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너무한 처사가 아닙니까? 사형, 사제분들도 입을 닫고 있지 말고 뭐라고 말씀해 보시오. 이게 될 법한 소리란 말이오?”

팽신의 말에 화산십수들이 서로 수군거리며 작은 소란이 일었다. 그러자 맏형인 이목남이 목소리를 높였다.

“사제들, 검동에 들어온 모든 사람은 검전(劍戰)에 참가할 수 있다는 것은 조사님 때부터 내려오던 불문율이니 여기서 그걸 왈가왈부할 수는 없네. 그리고 석 대주의 실력이 우리 모두를 압도하는 것도 사실이니 그에 대해서도 모두 뭐라고 할 말이 없을 걸세. 다만, 화산신검의 칭호와 비천검을 받는 것은 태상장로님과 백여 초식을 겨루어 동수를 유지해야만 가능하네. 아직 결과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렇게 마음을 졸여서야 되겠는가?”

그러자 둘째 서문효가 덧붙였다.

“그렇습니다. 태상장로님은 천하 무림이 최고로 인정하신 분. 비록 석 대주의 무공이 놀랍도록 진보했으나 아직 태상장로님께는 역부족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들 너무 우왕좌왕하지 말고 차분히 지켜보는 것이 어떻겠소? 이 또한 좋은 공부가 될 것이니.”

성격이 침착하고 매사에 사려 깊은 서문효다운 말이었으나 팽신은 그 말에도 버럭 역정을 냈다.

“애당초 마교 인사에게 그런 기회를 준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소이다.”

화산파 제자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하면서 설전이 오가자 가만히 듣던 독고양이 지팡이를 ‘쾅!’하고 내리쳤다. 지팡이 끝에서 ‘웅웅’하고 세찬 기파가 퍼져나가자 화산파 제자들은 귀가 먹먹해서 모두 입을 닫았다.

“듣거라. 이 늙은이도 화산파의 문도로서 그 누구보다도 우리 화산파 제자 중에서 내 뒤를 이어갈 사람이 나오기를 기대했느니라.”

독고양의 말에 화산파 제자들은 모두 숨소리조차 죽이고 독고양의 말을 경청했다.

“그러나 조사 때부터 내려오던 이 심법은 말로 전할 수 없느니라. 그리하여 이를 구전심수(口傳心授)라 한다. 입으로 전하되 받는 사람은 마음으로 받아야 한다는 뜻이니라. 마음으로 터득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내가 아무리 전하고 싶어도 전할 수가 없는 것이 이 심법이다. 나는 지난 30여 년간 검동에 은거하며 이 심법을 이을 자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려 왔느니라. 이번에도 이 심법을 이을 자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다시 10년의 세월이 그냥 흘러갈 것이니, 내가 그때까지 살아있지 못한다면 이 심법은 내 대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겠느냐?”

까칠한 늙은이 독고양의 입에서 뜻밖에도 화산파 제자들에 대해 각별히 애정 어린 말이 흘러나오자 분위기가 자못 숙연해졌다.

“그러나 이 심법이 내 대에서 사라지는 것은 우리 화산파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무림 전체의 큰 손실이니라. 조사님의 은혜로 그동안 우리 화산파가 이 심법을 전수해왔으나 이제는 이 법에 맞는 사람에게 넘겨주어야 할 때가 된 것이지. 아무리 본문의 제자라 하더라도 맞지 않는 사람은 이 법을 얻을 수 없으며, 설령 요행으로 얻는다 해도 천하 무림에 복(福)보다는 화(禍)만 불러올 것이니 그게 무슨 소용이겠느냐? 천하의 모든 무공에 주인이 없다는 말은 바로 이 뜻이니라. 본문의 무공을 다른 문파에 뺏긴다고 두려워하지 말고, 맞지 않는 사람이 이 무공을 취할까 걱정해야 하느니라. 알겠느냐?”

독고양이 말을 끝내고 좌중을 둘러보았다. 독고양의 처사에 불만을 품었던 팽신도 입을 닫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독고양이 석추명에게 말했다.

“자, 와서 자네가 깨달은 무공을 아낌없이 펼쳐 보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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