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108화 (108/201)

#   108 - 광세일소_한추영 - 1528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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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7화 화산검전(華山劍戰) (12)

검동에 들어온 지 99일째 되던 날. 이날은 화산십수에게 더없이 중요한 날이었다. 검동에 들어온 이후의 수련성과를 평가하는 화산검전(華山劍戰)이 열리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독고양 앞에서 화산십수 10명이 비무를 펼치고 그중 가장 뛰어난 자에게 화산제일수라는 명예가 부여된다. 그리고 화산제일수는 독고양과 직접 비무하여 최소한 일백 초 내에 지지 않고 평수(平手)를 이룬다면 독고양에게 화산신검으로 인정받게 된다. 바로 화산파의 문을 연 개파(開派) 조사 때부터 한 대에 한 사람씩만 전승되었다는 심법(心法)을 이어받는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독고양의 심법을 이어받았다는 증표는 지난 30년 동안 주인을 찾지 못한 한 자루의 낡은 검이었다. 검의 이름은 비천검(飛天劍). 독고양의 별호와 같은 검이었다.

화산십수는 비천검이 어떤 검인지 궁금했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독고양이 한 번도 꺼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드디어 오늘 대망의 화산검전이 개최되면서 혹시라도 비천검을 보게 될까 봐 다들 가슴을 졸였다.

그러나 오늘 독고양의 얼굴을 보는 것이 껄끄러운 사람들도 있었다. 바로 석추명을 암살하려 했던 네 명의 화산파 제자들과 몽혼약을 쓰다가 석추명에게 들킨 마군이었다.

팽신과 선우호 등은 지난번 암살 시도가 좌절한 이후, 석추명의 암살에 대해서는 서로 쉬쉬하며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입을 열지 않는 것은 마군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속으로는 독고양이 언제 자신들을 불러 혼쭐을 낼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차라리 누가 화산제일수가 되어도 상관없으니 하루빨리 검동에서 벗어나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차피 독고양은 검동 밖으로 나가지 않으니 설령 자신들이 저지르려고 했던 일을 안다고 하더라도 검동 밖에 있는 사람들은 알 길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독고양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드디어 오늘 화산검전이 열리는구나. 사제는 그새 진전이 좀 있던가?”

이목남이 둘째 서문효에게 물었다. 그러자 서문효는 씁쓸한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아직도 태상장로님이 그때 하신 말씀을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수련에 소소한 성과는 있으나 검동에 들어온 목적에 부합할 정도는 아닙니다. 사형은 어떠하십니까?”

서문효의 물음에 이목남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동시에 뿌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얼마 전 뜻밖에 상당한 진보가 있었네. 태상장로님께서 지적해주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네.”

그 말에 옆에서 듣던 아홉째 현봉이 궁금한 듯 물었다.

“어떤 깨달음인지요?”

“하하하, 그걸 여기서 어떻게 말하겠는가? 이따 보여줌세.”

이목남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약속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멀찍이 떨어져서 그 말을 듣던 선우호는 마음이 초조했다.

‘흥! 대사형의 무공실력은 내가 아는데 그 실력이 어찌 한순간에 바뀌겠는가? 대사형도 성품이 변했군. 금방 드러날 일에 허풍을 치다니 말이야.’

그러면서도 선우호는 혹시 자신만 뒤처지는 것은 아닌지 불안한 마음이 자꾸 들었다.

드디어 화산십수가 약속 장소인 만장 절벽 위 너른 공터에 도착했다. 절벽 건너편은 여전히 운무가 지척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자욱하게 끼어 있었다. 그 운무가 절벽 위로 올라오지 않는 사실이 정말 기이했다. 오늘 밤이 되면 다시 저 운무 속을 뚫고 검동 밖으로 나가게 되리라.

약속 장소에는 화산십수보다 먼저 와 있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석추명이었다.

선우호는 혹시라도 석추명이 그때 일을 기억이라도 할까 봐 일부러 눈빛도 맞추지 않았다. 그러다가 내심 궁금하여 힐끗 고개를 돌려 보니 석추명은 편안한 표정으로 담담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다시 질투심이 불같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교 놈인 주제에 감히 검동에 들어와서 화산검전에 참가해? 이 일이 다른 문파에 알려진다면 우리 화산파가 어찌 얼굴을 들고 다니겠느냐? 오냐, 비록 검동에서는 실패했지만 여기서 나가면 어디 두고 보자.’

“다 모였느냐? 그럼 화산검전을 시작하노라.”

언제 나타났는지 독고양이 우렁찬 목소리로 화산검전의 시작을 알렸다.

“누가 먼저 시작하겠느냐?”

“제가 하겠습니다.”

독고양의 물음에 팽신이 8척 장신의 거구를 이끌고 앞으로 나와서 우뚝 섰다.

“좋다, 그럼 누가 팽신에게 도전하겠느냐?”

독고양의 물음에 이번에는 여섯째 열화(悅和)가 도전했다. 열화는 피부가 하얗고 호리호리한 청년으로 선우호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는 상당한 미남자였다. 내성적인 성격을 지닌 열화가 이렇게 선뜻 먼저 도전하는 일 자체가 상당히 의외였다.

팽신은 허리가 자기 팔뚝보다 가는 열화가 나서자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럼 시작하라.”

독고양의 호령 소리에 팽신, 열화 두 사람이 서로 포권을 취했다.

석추명은 체격과 기질이 전혀 다른 두 사람이 서로 맞붙게 되자 흥미가 생겨 두 사람을 찬찬히 지켜보았다.

‘외공을 극성으로 연공한 팽신과 순수 내가권 고수의 전형인 열화의 대결이라.’

그런데 어쩐 일인지 움직이지도 않고 그냥 다리를 벌리고 마주 선 기세만으로도 두 사람의 수준이 한눈에 들어왔다.

‘팽신은 외공만 전문으로 수련한 것 같지만 사실 내외공을 겸비한 고수이다. 온몸으로 뿜어내는 살기만으로도 과연 상대방을 압도하는군. 반면, 열화는 나약한 듯하지만 약하지 않아. 가벼움의 장점을 살려 쾌속한 공격을 하면 팽신이 막아내기 쉽지 않을 거야. 그리고 처음에 봤을 때와는 분위기가 바뀌었어. 검동에 들어온 이후 수련에 진전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번 싸움은 무승부일 가능성이 크군.’

화산십수는 서로의 실력을 잘 알던 터라 모두 열화가 질 것으로 예상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두 사람의 비무는 석추명의 생각대로 박빙의 싸움이 되고 있었다.

팽신의 검은 일반 검보다 훨씬 크고 무거웠다. 신력을 타고난 팽신에게 일반 검은 너무 가벼워 오히려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반 검보다 두세 배는 더 무거운 중검을 특별히 제작해서 썼다.

그렇다고 팽신의 검이 둔검은 아니었다. 화산파의 특장기인 현란하고 화려한 검법을 펼치면서도 동시에 막강한 위력이 뒷받침되니 화산파 안에서 팽신의 검을 막아낼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열화의 무공이 낮지는 않으나 전력을 다해 내리치는 팽신의 검을 감당하기는 역부족일 것으로 모두 생각했다.

잠시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던 석추명의 눈에 두 사람의 장단점이 투명한 유리처럼 훤하게 드러났다.

‘이제 십여 초만 더 지나면 승부가 나겠구나. 팽신이 자만하지만 않는다면 무승부로 끝나겠지만 만약 자신의 검이 중검(重劍)이라고 자만한다면 그때가 바로 승부가 갈리는 순간이겠지.’

아니나 다를까 팽신이 위력적인 중검을 휘두르며 매화검법의 절초인 매화일락(梅花一落)을 펼쳐냈다. 언뜻 보면 꽃 한 송이가 허공에서 떨어지듯 가볍기 그지없는 듯하나 그 가벼운 기세 속에 산을 쪼갤만한 위력을 감추고 있었다. 만약 열화가 이를 간과한 채 그저 가볍게 막아내려 한다면 순식간에 손목이 부러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열화는 팽신의 의도를 눈치챈 듯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날렵하게 몸을 날려 팽신의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동시에 이어진 공격, 매화만천(梅花滿天).

사방에 꽃비가 내리듯 아름다운 춤사위가 펼쳐졌다. 그 춤사위를 펼치는 사람이 팽신이었다면 보기에 상당히 거북했을 것이나 열화같은 미남자의 손에서 검무가 펼쳐지자 눈길을 뗄 수 없을 정도였다.

“흥! 사제, 그런 수작은 내게 통하지 않네. 우리 화산파 검법의 최대 단점이 쓸데없이 현란하다는 것이지. 나는 그런 허식을 제거하고 나만의 무공을 정립했어. 무공은 간결하고 강맹함을 추구해야 하네. 그 강맹함이란 군더더기 없는 직선에서 나온다네.”

팽신이 자신의 무공관을 이야기하면서 매화만천을 펼치는 열화를 향해 수직으로 검을 그어 내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석추명이 쓴웃음을 지었다.

‘단순하기 그지없는 생각이로군. 이걸로 열화의 승리인가?’

열화가 몸을 훌쩍 비틀며 그 반동력으로 떨어져 내리는 팽신의 검을 슬쩍 밀자 별로 큰 힘을 준 것 같지도 않은데 팽신의 검은 그만 초점을 잃고 한쪽으로 밀리고 말았다.

“하지만 사형, 검동에서 제가 깨달은 사실은 자연은 직선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것이 사실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하늘의 해와 달을 보십시오. 둥글지 않습니까? 해와 달이 움직이는 길은 또 어떻습니까? 쭉쭉 뻗은 나뭇가지조차 사실은 중간에 살짝 휘거나 꺾이고, 또 돌아가면서 곡선을 지향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살아남기 위해서입니다. 즉 곡선이야말로 생존에 가장 필요한 방식이라는 말입니다. 저는 무공도 자연을 닮아야 한다는 태상장로님의 가르침을 그제야 이해했습니다.”

“흥! 시끄럽다. 무공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실력으로 증명할 뿐.”

“그렇습니다. 오직 실력으로 증명할 뿐이지요.”

그 말과 동시에 열화가 몸을 급속도로 회전하여 회전력을 극대화한 다음 그대로 팽신에게 부딪쳐왔다. 정면에서 미는 힘은 버틸 수 있어도 측면에서 슬쩍 미는 힘은 버티기 어려운 법이다. 가벼운 쾌검을 추구하던 열화의 검이 회전력으로 얻은 반탄력을 내뿜으며 측면으로 몰아닥치자 수직으로 내리긋던 팽신의 커다란 중검이 그만 속절없이 튕겨 나가고 말았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열화의 검 끝이 그대로 팽신의 목젖을 가리켰다.

팽신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모든 사람이 숨을 죽였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져, 졌다.”

팽신이 패배를 시인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만 것이다. 화산십수는 모두 큰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특히 선우호의 표정은 벌레를 씹은 듯 일그러져 있었다. 팽신이 누군가? 아홉 명의 사형들 가운데 자신이 유일하게 사형으로 인정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닌 유약하기 짝이 없는 열화 따위에게 지다니.

“열화의 승리로구나. 자, 열화에게 도전할 자 나오너라.”

열화의 승리를 공표하는 독고양의 호령 소리가 넋을 잃은 화산십수의 귓가에 쏟아졌다.

열화는 이후 도전한 기광까지 꺾고 결승전으로 올라갔고, 화산십수의 맏형인 이목남이 둘째 서문효와 여덟째 무염을 꺾고 역시 결승전으로 올라갔다. 마지막에 남은 담치, 마군, 현봉, 선우호 네 사람은 각기 두 사람씩 붙어서 셋째 담치(淡治)와 막내 선우호가 결승전으로 올라갔다.

여섯째 열화와 첫째 이목남은 각각 두 번씩 싸웠지만 담치와 선우호는 한 번씩밖에 싸우지 않았으므로 두 사람의 비무가 먼저 시작되었다.

석추명은 그때까지 비무에 참가하지는 않고 그저 화산십수의 싸움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사실 자신은 화산파도 아닌데 화산검전에 참여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그리고 자신은 이미 검동에 온 목적을 달성했으므로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

‘담치와 선우호라.... 선우호는 기본이 탄탄하고 무공에 대한 남다른 감각이 있으니 담치 소협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쉽게 이기지는 못할 거야. 게다가 선우호는 특히 임기응변에 능하니 비무가 아니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실전이라면 필시 선우호가 이기겠지.’

석추명의 예상은 적중했다. 두 사람은 백여 초식을 싸울 때까지 아무도 승기를 잡지 못하다가 비무가 삼백 초식을 넘어가자 돌연 선우호가 변칙적인 공격을 잇달아 쏟아냈다. 그러자 정정당당하게만 싸우려고 하던 담치는 그만 선우호의 계락에 빠져들어 연거푸 실수를 거듭하면서 결국 선우호에게 승리를 내주고 말았다.

“선우호가 이겼구나.”

독고양은 선우호의 승리를 공표하면서도 뭔가 탐탁지 않은 듯 잠시 선우호를 바라보았다. 선우호는 그 모습에 속이 뜨끔했으나 태연한 척 가장했다. 싸움에서는 무슨 수를 쓰든 이기는 것이 최고 아닌가.

“싸움에서는 이기는 것이 도(道)냐?”

갑자기 독고양이 선우호에게 질문을 던졌다. 선우호는 독고양의 물음에 당황하기는 했으나 계속 생각하던 것이 있으므로 대답을 망설이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방법을 쓴다 하더라도 지고 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목숨을 잃은 다음에야 공명정대한 방법이 다 무슨 소용입니까?”

그러자 독고양이 이목남에게 고개를 돌려 다시 물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러자 이목남은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아 포권을 취하며 대답했다.

“선우 사제의 말도 일리는 있으나 승리를 취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면 정사(正邪)의 구분이 없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이목남의 말에 선우호가 거세게 항변했다.

“하지만 죽고 나면 그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적은 온갖 비열한 방법으로 공격해오는데 우리는 성인군자인 척 떳떳하게만 싸우려고 한다면 십중팔구 우리가 불리할 것입니다. 이겨야, 살아남아야, 정도(正道)건 문파건 지킬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산꼭대기를 오르려고 한다면 무슨 길로 가든지 올라만 가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선우호의 말에 이목남은 더는 반박할 말이 없는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선우호의 말에 답할 자 없느냐?”

독고양이 화산십수들을 둘러보았으나 모두 입을 닫고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러자 독고양이 석추명을 돌아보았다.

“너는 어떠하냐? 여기에 무슨 할 말이 있느냐?”

그러자 석추명은 담담히 말했다.

“정신이 깃들지 않은 승리는 결국 그 사람의 정신까지 장악해 버립니다. 지켜야 할 것은 승리나 목숨이 아니라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에 독고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녀석들이 알아듣도록 좀 더 설명해 주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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