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107화 (107/201)

#   107 - 광세일소_한추영 - 1526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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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6화 화산검전(華山劍戰) (11)

독고양이 약속했던 날이 되었다. 마군의 몽혼약에 정신을 잃었던 기광과 무염은 화산십수가 돌아가며 공력을 불어넣어 치료한 덕분에 정신을 차려 태상장로 앞에 설 수 있었지만, 정작 독을 쓴 장본인인 마군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독고양은 화산십수 가운데 한 명이 비는 것을 모르는 것인지, 관심이 없는 것인지 따로 묻지 않았다.

“자, 한 놈씩 앞으로 나와서 그동안 수련한 결과를 보여라.”

그 말에 화산십수 가운데 대사형격인 이목남이 앞으로 나서 검법을 펼쳤다. 독고양은 보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그만하라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쾌(快)가 가볍기만 하면 되는 것이더냐? 아무리 빨라도 검에 실린 힘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랴? 동정일여(動靜一如)요, 일심무일심(一心無一心)이니라. 자, 다음!”

독고양은 한두 마디로 화산십수들의 단점을 지적해주었다. 독고양이 무슨 신묘한 무공이라도 전수해줄 것으로 기대했다가 고작 한두 마디 조언만 하자 첫째 이목남을 제외한 화산십수들은 실망감과 불만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라왔다.

그러나 독고양은 화산십수들의 기분 따위는 전혀 모른다는 듯 말했다.

“30일 뒤에 네놈들이 얼마나 늘었는지 다시 살펴볼 것이다. 그럼 이만 해산하도록.”

그러자 팽신이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오며 큰소리로 불만을 터뜨렸다.

“태상장로님!”

“무엇이냐?”

“지금 강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십니까?”

팽신의 돌발적인 질문에 나머지 화산십수들은 영문을 몰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팽신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뜻이냐?”

독고양의 목소리가 제법 쌀쌀했으나 팽신은 작심한 듯 쏟아냈다.

“지금 강호는 요동을 치고 있습니다. 마교는 날뛰고 무림맹은 분열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심지어 무림맹 부맹주라는 사람이 마교와 한통속이 되어 오히려 정파 무림을 치려 한다는 믿지 못할 소문도 나돌고 있습니다. 그뿐인 줄 아십니까? 강호에는 정파무림의 후기지수들만 노리는 귀면쌍살이라는 놈이 나타났습니다. 저희 화산파도 백무결이라는 출중한 인재를 그놈 손에 잃었지요. 똑똑하고 착한 녀석이었습니다. 태상장로님께서는 모르시겠지만....”

독고양은 팽신의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백무결.... 독고양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내심 자신의 뒤를 이을 화산신검으로 점찍어 두고 있던 아이였으니까.

독고양이 검동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으나 장문인과는 은밀한 방법으로 연락을 주고받아 문파의 일도 제법 소상히 알고 있었다. 당시 화산파 장문인 거양자(擧陽子)는 독고양의 뒤를 이을 인재를 발견했다고 알려왔다. 거양자의 말을 듣고 독고양도 내심 큰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백무결이 수련 중에 주화입마에 빠졌을 때, 장문인이 자신의 힘으로 역부족이라며 다급하게 도움을 요청해왔으나 독고양은 장문인의 요청을 단칼에 거절했다. 검동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30년간 지켜왔던 자신의 서약을 깨뜨리기 싫어서였다.

그 이후, 듣자 하니 그 아이는 목숨은 다행히 건졌으나 목소리를 잃었다고 했다. 목숨만 건졌으면 됐지. 차후에 기회가 되어 그 아이를 직접 볼 날이 오면 목소리를 고칠 방도가 생길지도 모르지 하고 느긋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죽어버린 것이다. 귀면쌍살이라는 놈의 손에.... 사람이 무슨 일을 계획하더라도 그 일을 이루는 것은 하늘이라고 했던가. ‘하늘이 하는 일을 한갓 인간이 어쩌랴?’ 하고 마음을 담담히 비워냈다. 그 아이와 자신의 인연은 거기까지인가 보다 하고 여겼다.

그런데 뜻밖에 팽신의 입에서 백무결의 이름이 다시 튀어나온 것이다.

독고양이 아무 말도 없자 팽신은 계속 이어나갔다.

“강호 무림이 위기에 빠진 이때, 우리 화산파가 나서서 강호를 구할 수 있다면 좋지 않겠습니까? 우리 화산은 소림, 무당도 우러러보는 태상장로님께서 계신 데 이 좋은 기회를 어찌 살리려 하지 않으십니까? 태상장로님께서 조용히 은거하시는 것도 좋지만, 지금은 풍전등화 같은 문파의 앞날을 생각하시어 대승적인 결단을 내리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때까지도 이목남을 비롯한 화산십수들은 팽신이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팽신이 긴장한 듯 잠시 말을 멈추고 독고양을 바라보더니 쥐어짜듯 말을 이었다.

“태상장로님께서만 익히신 화산의 비전절학을 저희에게도 전수해주십시오. 한 사람이 익히는 것보다 열 사람이 익히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그제야 팽신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깨달은 나머지 화산십수들이 우려 반, 기대 반의 눈빛으로 독고양을 바라보았다. 독고양은 화도 내지 않고 팽신을 담담히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비전절학을 말하는 것이냐?”

“그야, 뭐, 태상장로님께서 따로 익히신 신공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강호에서 그렇게 높은 명성을 쌓으셨겠지요. 평범한 화산 무공이 아니라....”

“네 이놈! 평범한 화산 무공이라니. 네놈 눈에는 화산파의 무공이 평범해 보인다는 말이렷다?”

독고양의 목소리에 노여움이 깃들자 그제야 팽신은 허둥대기 시작했다.

“그, 그게 아니옵고, 아무래도 태상장로님께서 소림신승과 함께 무림쌍절(武林雙絶)로 불리실 만큼 높은 명성을 쌓으신 데는 특별한 무공이 있지 않을까 하여....”

팽신의 말에 독고양은 허탈하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허, 어이 이리 아둔할꼬. 이것이 너희들의 수준이더냐? 정녕 우리 화산에는 이제 인재가 없단 말이냐?”

인재가 없다는 독고양의 말에 화산십수들은 창피함과 억울함으로 저마다 얼굴이 울긋불긋했다. 독고양이 그런 화산십수를 둘러보며 측은한 듯 한마디 했다.

“무공의 지극한 경지는 너희들 속에 이미 내재해 있다. 몸 밖에서 특별한 무공, 특별한 경지를 찾지 말거라. 이 늙은이도 너희들과 다른 무공을 익히지 않았느니라. 똑같은 검법, 똑같은 신법, 똑같은 내공을 닦았을 뿐이니라.”

“그렇다면,”

이번에는 잠자코 있던 선우호가 앞으로 나서며 당돌하게 물었다.

“어찌하여 태상장로님과 저희의 무공은 그토록 큰 차이가 나는 것입니까?”

“깨달음이니라. 깨달음은 누가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도 그저 그 방편만 일러줄 뿐.”

평소의 독고양답지 않게 온화한 어투로 말하던 독고양이 갑자기 뒤로 돌아보며 호통을 쳤다.

“그러니 엉뚱한 생각 품지 말고 수련에 정진하거라, 이 썩을 놈들아.”

****

“쥐새끼 같은 놈, 도대체 어디 숨은 거야?”

기광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독고양 태상장로와 만나기로 한 날에 뜻밖에 석추명이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선우호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토록 필사적으로 독고양을 만나겠다고 하던 놈이 정작 태상장로를 만나기로 한 날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뭔가 기분이 찝찝했다.

“이놈이 혹시 우리 계획을 눈치채고 일부러 숨은 것은 아닐까?”

무염이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선우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태상장로님을 만나겠다고 여기까지 몰래 숨어들어온 놈입니다. 우리 계획을 눈치챘더라도 절대 그렇게 쉽게 포기했을 리가 없습니다.”

“이놈이 어디 숨었는지나 알고 찾는다는 말이냐? 젠장.”

팽신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러자 선우호가 오히려 자신이 사형인 듯 팽신을 다독였다.

“그래 봤자 우물 안의 개구리가 아니겠습니까? 검동이 넓다 해도 몇 리 되지 않는 데다 사방이 막힌 공간이니 금방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네 사람이 검동 안을 이 잡듯이 샅샅이 뒤진 지 사흘 만에 울창한 수림의 조용한 시냇가 옆에서 석추명을 발견했다. 석추명은 시냇가 옆 넓적한 바위 위에 좌정하고 앉아 명상에 빠져 있었다.

선우호는 그 모습을 보자 불현듯 질투심이 불같이 타올라 이를 으드득 갈았다.

‘시건방진 놈. 무공을 수련하겠다는 놈이 감히 여기 앉아서 도인 흉내를 내고 있어?’

그때까지도 석추명은 아무것도 모른 채 바위 위에 조용히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선우호는 기광과 무염에게 눈짓을 하자 두 사람은 검을 소리 나지 않게 빼 들고 살금살금 석추명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선우호의 손이 번쩍 들리는 순간 두 사람은 땅을 가볍게 박차더니 쏜살같이 석추명에게 날아갔다.

깊은 선정에라도 빠진 듯 그때까지도 눈을 뜨지 않는 석추명을 바라보며 선우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네놈이 검동에 침입한 죄를 씻을 기회를 주는 것이니 우리가 네놈에게 자비를 베푸는 격이지. 네놈의 죽음으로 우리 화산파의 명예를 지킨다면 네놈의 죽음도 헛된 것은 아니야.’

그러나 그다음 순간, 선우호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분명히 주위에 아무런 기척도 없었는데 기광과 무염의 검 끝이 석추명의 몸을 관통하려는 찰나, 어디선가 태상장로 독고양의 지팡이가 바람처럼 가볍게 날아오더니 두 사람의 검을 쳐내는 것이 아닌가.

지팡이 위에 커다란 야광주가 달린 모양새가 암만 보아도 태상장로의 나무 지팡이가 분명했다. 더욱 기이한 것은 기광, 무염 두 사람의 검을 쳐낸 지팡이가 끈으로 매달기라도 한 듯 석추명의 앞에 꼿꼿이 서서 마치 석추명을 보호하는 듯 서 있는 것이었다.

기광과 무염은 난데없이 나타난 태상장로의 지팡이에 화들짝 놀라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독고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지팡이가 여기에 있는 이상, 독고양이 지척에 있는 것이 분명하리라.

선우호와 팽신은 두려움에 질렸다. 자신들이 저지르려던 일을 독고양이 알게 되면 화산제일수가 되는 것은 고사하고 사문에서 축출될 수도 있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선우호는 팽신을 보며 말없이 다급하게 손가락으로 뒤쪽을 가리켰다. 어서 도망치자는 뜻이었다. 놀라기는 팽신도 마찬가지여서 두 사람은 기광과 무염이 어떻게 되는지 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내빼고 말았다.

기광과 무염 두 사람도 감히 소리 내어 독고양을 부를 생각은 못 하고 그 길로 그대로 허겁지겁 달아났다.

석추명은 여전히 이 모든 상황을 모르는 듯 깊은 명상에 빠져 있었다.

****

어느덧 검동에 들어온 지도 90일이 훌쩍 지났다. 이제 불과 열흘이면 검동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석추명은 그 사실도 잊고 좌정하여 깊은 선정(禪靜)에 들고 있었다.

지난번 독고양이 내어준 숙제는 화두가 되어 앉으나 서나, 깨어있을 때나 잠잘 때나 한시도 석추명의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잠자는 것과 밥 먹는 것도 잊고 그 답을 찾으려고 했다.

그날도 석추명은 좌정하여 선정에 빠진 채 밤을 새웠다. 머릿속은 아득하고 물음의 답을 알 듯 말 듯 한 느낌이 밤새 계속되었다. 그때 반개한 석추명의 두 눈으로 떠오르는 아침 햇살이 비치자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던 화두가 벼락이라도 맞은 듯 한꺼번에 홀연히 사라지면서 갑자기 깨달음이 찾아왔다.

온 우주를 덮을 만큼 충만하면서도 동시에 텅 빈 것. 텅 빈 충만함. 시공을 초월한 존재. 그것은 바로 자신의 마음이었다. 깊은 선정에 빠져 있을 때의 마음이야말로 텅 비어 있으면서도 충만하고, 동시에 온 우주를 가득 덮지 않는가? 또한, 내 마음은 물질이 아니니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도 않는다.

갑자기 깨달음을 얻은 석추명이 번쩍 눈을 뜨더니 스르르 일어섰다. 전신이 깃털처럼 가벼워 날아갈 것만 같았다. 검을 쥐고 한마음을 일으키니 의식하기도 전에 벌써 검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야말로 마음 가는 대로 검이 움직였다.

그렇다고 검이 마음을 쫓아 움직이는 것도 아니었다. 이미 검과 마음은 하나. 마음이 어디에 이르면 벌써 검도 같이 이르고 있었다. 이른바 심의상통(心意相通)의 경지를 뛰어넘어 심검합일(心劍合一)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러다 보니 숭양일기검 48식을 모두 펼쳐도 숨 하나 차지 않고 땀 한 방울 나지 않았다. 아니 초식의 구분도 필요 없었다. 그저 마음 가는 대로 검을 휘두를 뿐.

그제야 석추명은 스승 뢰정이 남긴 중양일지 후반부를 꺼내 들었다. 중양일지에는 세 개의 무공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중 첫 번째가 숭양일기검. 숭양일기검은 공력이 뒷받침되면 구 할까지는 이룰 수 있는 검법이었다. 나머지 일 할도 중양내공을 차근차근 익히고 어느 정도의 오성(悟性)이 있다면 성취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나머지 두 검법, 음양어기검(陰陽御氣劍)과 무극진공검(無極眞空劍)은 진정한 깨달음을 얻지 않고는 성취할 수 없었다.

사르락. 사르락.

책장 넘기는 소리가 났다. 석추명의 눈이 무심한 듯 지면 위를 훑으며 지나갔지만, 머릿속에는 음양어기검과 무극진공검의 요체가 빠르게 각인되었다. 결국, 두 검법의 요체도 석추명이 깨달은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

마침내 책장을 덮고 나자 문득 숭양일기검과 새로 익힌 두 검법이 서로 다른 검법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삼태극이 서로 섞여 하나의 원을 이루듯 세 가지의 검법이 석추명의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하나로 얽혀 들어갔다.

“결국 다른 게 아니었어.”

석추명이 나직이 읊었다. 아니, 굳이 새로운 검법을 따로 익힐 필요도 없이 자신이 이미 알고 있던 무공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깨달음을 얻기 전과 얻은 후의 무공의 위력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제야 석추명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독고양 선배님을 뵈러 가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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