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106화 (106/201)

#   106 - 광세일소_한추영 - 1525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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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화 화산검전(華山劍戰) (10)

그 말에 석추명이 독고양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제 스승께서 유언으로 남기시길 중양신공의 나머지 검법에 대해서는 선배님께 가르침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화산파에 죄를 짓는 줄 알면서도 부득이 여기까지 오게 된 것도 모두 선배님께 가르침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제발 저를 밝은 길로 인도해 주십시오.”

석추명이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독고양이 석추명에게 대뜸 고함을 질렀다.

“예끼, 이 도둑놈아. 도둑놈이 하는 소리에 내가 넘어갈 줄 아느냐?”

“도둑놈이라니요?”

“중양신공은 도가 무공의 최고봉이니라. 초학자라 할지라도 그 내공부터 온전히 닦는다면 반드시 대성하게 되어 있거늘, 네놈의 무공을 보면 중양내공은 하나도 없으니 필시 네놈은 반쪽짜리 중양일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응당 잃어버린 내공 부분을 찾아야 할 것인데 나를 찾아온 걸 보면 나머지 반쪽 부분을 찾지 못하는 이유가 있겠지? 찾지 못하는 이유야 뻔하겠지. 그 비급을 어딘가에서 훔쳐내었을 테니. 그러니 네놈이 도둑놈이 아니고 무엇이냐?”

마치 10여 년 전의 일을 본 듯이 얘기하는 독고양의 혜안에 석추명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따지고 보면 육굉 대주가 무림맹의 천림비고에서 중양일지를 훔쳐내었으니 독고양의 말이 하나도 틀린 데가 없었다.

“천하의 무공에 주인이 따로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 무공을 지키려고 너무 많은 사람이 피를 보고 억울하게 죽어갔습니다. 그분들의 뜻은 무림의 평화였지 절대 개인의 욕심을 이루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러자 독고양이 갑자기 껄껄껄 하고 광소를 터뜨렸다.

“광오(狂傲)하기 그지없는 놈이로구나. 천하의 무공에 주인이 따로 없다니 그 말은 강호를 뒤집어엎겠다는 것이냐? 네놈 말대로라면 네놈도 주인이 아닌데 왜 그 무공에 그토록 집착하는 것이냐?”

“복수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무공을 지키다가 돌아가신 분들의 피맺힌 복수를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자 독고양이 차갑게 말했다.

“복수라니, 그 복수라는 것은 네놈 개인의 욕심이 아니라는 말이냐?”

독고양의 말에 석추명은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아닙니다. 개인의 욕심이 아닙니다. 강호의 악을 제거하려는 일이 어찌 제 개인의 욕심이겠습니까? 설령 그것이 개인의 욕심이라 하더라도 그 욕심을 실현하여 강호에 평화가 온다면 그 욕심이 어찌 꼭 나쁘다고만 하겠습니까?”

석추명의 말에 독고양은 한동안 아무말도 없이 석추명을 바라보았다.

“그 악을 제거하는 일이 네놈의 양심에 비추어 한치의 부끄러움도 없이 자명한 일이더냐?”

“그렇습니다!”

독고양의 물음에 석추명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아랫사람으로서 교주 남무궁을 처단하는 일은 개인적으로 보면 심각한 배신이요 배반 행위이지만 강호 전체를 보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오히려 윗사람이라는 이유로 교주의 악행을 방관한다면 그 행위야말로 무고하고 힘없는 백성들에 대한 배신이요 배반이지 않겠는가. 교주 남무궁을 제거하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구세제민(救世濟民)이리라.

독고양은 결연한 석추명의 눈빛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공의 경지라는 것이 공력만 높다고 올라가는 것이 아니며, 수련에 수련을 거듭한다고 무한정 계속 높아지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쌓는 무공은 한계가 있느니라.”

그 말에 석추명은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들고 독고양을 바라보았다. 나뭇가지 위에 몸을 걸치고 앉은 노도인의 모습이 그렇게 편하게 보일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독고양은 석추명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깨달음이 있어야지. 깨닫는다면 무공의 경지는 순식간에 몇 단계를 뛰어넘을 수 있느니라. 깨달음의 관문을 넘은 사람의 무공은 흐르는 물과 같아서 앞으로 나가기만 할 뿐 결코 뒤로 퇴보하는 법이 없느니. 네놈이 하고많은 무공 가운데 기왕 도가의 무공을 고집하니 기본 소양이 되는지 하나만 물어보자꾸나.”

독고양의 말에 석추명은 다시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하문하십시오.”

“텅 빈 충만함이란 무엇이냐? 온 우주에 가득 차 있어도 또한 동시에 텅 빈 것은 무엇이냐?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냐?”

독고양의 말에 석추명은 갑자기 가슴이 탁 막혀와 아무 답도 할 수 없었다. 텅 빈 충만함이라니. 가득 차 있으면서 또한 동시에 텅 빈 것이라니. 그리고 시공을 초월하는 존재라니.

그런 것이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할까?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과 무공이 무슨 관계란 말인가?

독고양의 물음에 석추명은 갑자기 머릿속이 아득해서 말을 잃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독고양이 ‘쯧쯧’하고 혀를 찼다.

“그것도 모르는 것을 보니 네놈은 사흘 뒤에 볼 필요도 없겠구나. 이놈아,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알기 전까지는 내 앞에 나타날 생각일랑 하지 말거라.”

그러더니 독고양은 버럭 소리를 질러 흑묘와 백묘를 불렀다.

“흑묘아(黑猫兒), 백묘아(百猫兒), 쓸데없는 놈에게 기운 빼지 말고 어서 가자꾸나.”

독고양의 말에 고양이 두 마리는 아쉬운 듯 석추명을 한번 돌아보더니 그대로 독고양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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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 그놈이 이대로 검동을 빠져나가게 내버려 두실 생각입니까?”

선우호가 목소리를 낮추며 팽신에게 물었다. 팽신은 팔짱을 끼며 눈살을 찌푸렸다. 짐승 가죽으로 만든 조끼 밖으로 드러난 팽신의 팔뚝은 웬만한 성인 남자의 허벅지보다 두꺼웠다.

“그놈이 입을 열지 않겠다고 약조했지만, 그 말을 어떻게 믿는단 말입니까?”

선우호가 다시 팽신을 다그쳤다. 팽신은 팔짱을 낀 채 오른손 손가락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무언가를 고심할 때 나오는 그만의 버릇이었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것이냐?”

“죽여야지요.”

선우호가 당연하다는 듯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화산파 제자들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출중한 외모를 지닌 선우호였지만 눈빛이 살의로 번쩍이자 출중한 외모가 오히려 공포감을 더해 주었다.

“하지만 대사형께서 저렇게 반대하시는데 어떻게 그놈을 없앤단 말이냐? 그렇다고 우리가 마교놈들도 아닌데 대사형에까지 손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겠느냐?”

팽신이 이마를 문지르던 손가락을 멈추며 선우호를 돌아보았다.

“그것은 염려 마십시오. 마군의 품을 뒤졌더니 그 녀석이 사용했던 몽혼약이 나오더군요. 대사형께 그 몽혼약을 아주 조금만 쓰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럼 대사형께서는 금방 곯아떨어지실 겁니다. 기광 사형과 무염 사형이 깨어난 걸 보면 마군의 몽혼약이 다른 해악은 없는 듯합니다. 대사형이 잠시 주무실 때 우리가 그놈을 해치워 버리면 되지요. 그러고 나서 그놈 시신을 만장 절벽 아래로 떨어뜨려 버린다면 대사형은 깨고 나서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실 겁니다. 그 일은 저희 가슴에만 묻는 겁니다.”

아주 그럴듯한 계획이었다. 명문의 제자로서 썩 내키지는 않았으나 만일을 대비해서 선우호가 말한 대로 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았다.

“그놈은 어차피 마교의 대주이니 우리의 적이 아닙니까? 언젠가 맞닥뜨리면 반드시 베어야 할 놈입니다. 게다가 조사님의 흔적이 배어 있어 외부인에게는 금지구역인 이곳 검동까지 잠입해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그놈 하나 죽여 없앤다고 하더라도 크게 협의에 어긋나는 일은 아니지요. 오히려 미래에 그놈이 끼칠 해악을 생각한다면 강호에 도움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도 그렇겠군.”

팽신이 선우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러자 선우호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사형과 제가 직접 손을 쓸 필요도 없습니다. 몽혼약에서 깨어난 기광 사형과 무염 사형에게 흉수는 마교 놈이라고 넌지시 알려주었더니 두 분은 당장 그놈을 찢어 죽이고 싶어 하는 눈치였습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니 조금 참으시라고 얘기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놈의 무공이 제법 고강하기는 해도 기광 사형과 무염 사형 두 사람의 합격을 당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을 대비해서 사형과 저도 손을 쓸 수 있도록 준비한다면 그놈 하나 잡아 죽이는 것은 문제도 아닐 것입니다.”

“그래. 잘했구나. 우리 넷이 덤빈다면 그놈이 아니라 마교 교주라도 꼼짝 못 할 것이야.”

팽신은 자신의 무공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지닌 듯했다. 팽신이 다시 말을 이었다.

“별수 없지. 이 모든 게 다 문파를 위한 길이다. 가끔은 썩 내키지 않아도 해야 할 일이 있지. 내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다면 누구 손에 묻혀야겠느냐? 이게 다 문파의 명예를 위한 일인 것을. 강호에 몸담은 이상 홀로 학처럼 고고하게 살 수는 없는 법이지. 대사형은 다 좋은데 그런 면에서 고지식한 게 문제야. 그래, 언제가 좋겠느냐?”

“내일모레면 태상장로님께서 말씀하신 날입니다. 태상장로님께서도 그놈을 알고 계시니 아무래도 그날이 지난 다음 처리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태상장로님의 성격상 내일모레 한두 마디쯤 해주시고 나면 또 한 달 정도 저희끼리 수련을 하라고 하실 것 같습니다.”

그러자 팽신은 갑자기 분기가 치미는 듯 주먹을 쥐고 옆에 있는 나무를 쾅 때렸다. 거대한 나무줄기가 팽신의 주먹심을 이기지 못하고 부르르 떨렸다.

“망할 늙은이. 여기까지 와서 각자 수련을 하라니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이냐. 이러려면 우리가 뭣 하러 검동까지 기어들어 와서 이 고생을 한단 말이냐?”

팽신은 생각할수록 화가 치미는 듯 얼굴을 붉히고 숨까지 씨근벌떡 내뱉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아무리 태상장로님의 무공이 신의 경지라고 하나 몇 마디 말만 해주시는 것으로 우리 무공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겠습니까? 결국, 우리 실력은 우리가 수련한 몫만큼이겠지요.”

선우호가 우울하게 덧붙였다.

“사제 말이 맞아. 그렇지 않다면 진즉에 우리 화산파가 소림, 무당을 제치고 구대 문파의 수장이 되었어야지, 왜 지금까지 못했겠는가? 내가 암만 생각해도 태상장로님에 관한 이야기는 모두 허풍인 것만 같아. 여기 이 검동에 숨어 있는 것 자체가 실력이 없다는 것을 방증하지 않느냔 말이야. 태상장로님께서 천하무적이면 무엇이 두려워서 이 깊은 산골에 숨어 산단 말이냐?”

팽신의 말에 선우호는 신경이 쓰이는 듯 주위를 잠시 주의 깊게 둘러보았다.

“고정하시지요, 사형. 하지만 제가 보기에 태상장로님께서는 장문인을 비롯한 우리 문파의 그 어떤 고수보다도 무공이 높은 것만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런 분이시니 뭔가 뜻이 있겠지요.”

선우호의 말에 팽신은 내키지 않은 듯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아무튼 이 일은 우리 네 사람만 알고 있기로 하고 당분간 입조심 하자꾸나.”

“예, 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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