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 - 광세일소_한추영 - 1523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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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4화 화산검전(華山劍戰) (9)
“헛소리 집어치워라. 내 제안을 거부하겠다면 네놈에게는 죽음뿐이다. 자, 어떻게 하겠느냐?”
어느새 대사형인 이목남의 의견 따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막내 선우호가 자신이 마치 대사형인 듯 목소리를 돋웠다. 선우호의 살기 등등한 눈빛을 바라보며 석추명은 잠시 속으로 갈등했다.
화산십수 하나하나의 무공은 아직 자신에게 미치지는 못한다. 하지만 저들이 합격이라도 해 온다면 자신은 절대 이길 수가 없었다. 자신보다 무공이 훨씬 뛰어났던 나찰녀도 매화검수들의 합격에 도망가지 않았던가?
저들은 지금 자신에게 무인이 지켜야 할 마지막 자존심조차 버릴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죽을지언정 절대 힘을 앞세운 핍박에 굴복하지 않겠지만, 지금은 그렇게 함부로 목숨을 버릴 수 없다.
왜냐하면, 내 목숨은 내 것이 아니라 스승 뢰정과 초의공, 황 장로와 불모 황연화에게서 빌린 것이니까.
교주 남무궁의 목을 베고 이들의 원한을 다 갚기 전까지 나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니까.
그때까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아야 한다. 비록 비굴한 모습을 보일지라도....
선우호의 두 눈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석추명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소. 내가 입을 다물겠소. 오늘 일은 절대 다른 사람에게 발설치 않겠소.”
“후후, 역시 현명한 선택이오.”
선우호가 입가에 묘한 웃음을 지었다. 석추명이 성큼성큼 걸어서 그 자리를 떠나자 석추명의 뒤로 새끼 여우 같은 고양이 두 마리가 뒤를 따랐다.
선우호는 멀어지는 석추명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미안하지만 그게 네놈 운명이로구나. 검동에 왜 들어왔는지는 모르지만 화산파를 위한 희생 제물로 하늘이 보내신 것이겠지.’
그 시각, 화산십수가 있는 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거대한 나무 위에 석추명의 뒷모습을 마뜩잖게 바라보는 또 한 쌍의 눈길이 있었다.
산신령처럼 새하얀 눈썹과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은 아득히 높은 나무꼭대기의 가느다란 가지 위에 깃털처럼 가볍게 서 있었다. 노인장의 몸은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대로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바로 화산파 태상장로 독고양이었다.
“쯧쯧, 저놈 무공은 괜찮은데 패기가 약하구먼.”
독고양은 석추명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돌연 훌쩍 몸을 날리더니 연기처럼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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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십수를 떠난 석추명은 외진 시냇가에 앉아서 흐르는 시냇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검동 안으로 새어드는 햇빛이 어느새 산 너머로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아무리 아니라고 부정해도 석추명은 목숨을 구걸한 것만 같은 느낌에 목구멍이 칼칼했다. 같이 왔던 고양이를 닮은 영물 두 마리도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너희들도 비겁한 내가 싫은가 보구나.”
석추명이 쓸쓸하게 혼잣말을 했다.
잠시 낙담하던 석추명은 마음을 고쳐먹고 검을 빼 들었다. 지금 자신은 이런 상념에 빠질 여유가 없었다. 마음이 괴로울수록, 자신감이 떨어질수록, 더욱 수련에 매달려야 했다. 자신의 어깨가 짊어진 목숨값을 조금이라도 갚기 위해서.
석추명의 검이 바람을 가르며 세차게 휘몰아치자 주위의 나뭇잎이며 풀잎, 잔가지들이 바람에 말려 올라가 회오리바람처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석추명이 검을 뻗자 검 끝에서 검기가 발출되면서 주변 땅바닥에 자로 그은 듯한 선이 난무했다.
검을 휘두르다 보니 어느새 괴로움과 잡념은 사라지고 석추명의 눈에는 자신이 붙잡은 검만 보였다. 오롯이 혼연일체(渾然一體)의 경지였다.
온몸에서 땀이 가볍게 나며 아울러 기혈의 흐름이 탁 트인 듯 활발하게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다.
얼마나 검을 휘둘렀을까. 제법 시간이 지난 느낌이 들어 석추명은 검을 멈추었다. 서산 끝자락에 걸려있던 해가 산 뒤로 완전히 넘어가 주위는 새까맣게 어두웠고, 어느새 밤하늘에는 별이 총총 떠 있었다.
“갸르릉”
어디선가 귀에 익은 소리가 났다. 석추명이 돌아보니 저만치 백묘, 흑묘가 앉아서 자신을 바라보며 그르릉 그르릉 낮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너희들 왔구나.”
석추명이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자 두 고양이 영물은 두 개씩 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으응?”
뜻밖에도 두 고양이 옆에는 검동에 들어온 첫날 봤던 금사, 은사가 배를 허옇게 까 뒤집고 누워 있는 게 아닌가. 석추명은 신기한 마음에 두 고양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설마 너희가 잡은 것은 아니지?”
금사, 은사는 황소라도 휘감아 으스러뜨릴 만큼 거대한 구렁이였는데 아무리 봐도 고양이보다 조금 더 큰 정도의 이 두 마리 짐승이 잡았을 것 같지는 않았다.
백묘, 흑묘는 앞발을 들고 얼굴을 닦더니 귀여운 혀를 날름 내밀어 앞발의 털을 정리하고는 다시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석추명을 바라보며 갸르릉 울었다.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또 지느러미가 달린 기이한 구렁이를 자세히 보고 싶어 가까이 다가가자 흑묘와 백묘가 돌연 발톱을 세우더니 금사, 은사의 뱃가죽을 쭉 하고 가르는 것이 아닌가. 그러더니 석추명을 바라보며 갸르릉 갸르릉 울었다.
석추명은 두 짐승이 자신에게 뭐라고 하는 것 같은데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두 눈만 멀뚱거리며 흑묘와 백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금사, 은사의 갈라진 뱃가죽으로 시뻘건 핏물이 시큼하고 역겨운 냄새와 함께 새어 나왔다.
“뭘 어쩌라는 거야? 뱀의 뱃가죽은 왜 갈랐지?”
석추명이 알아듣지 못하고 머리를 긁적이자 흑묘, 백묘는 답답하다는 듯 좀 더 큰 소리로 갸르릉 울기 시작했다.
“멍청한 놈아, 저 두 뱀의 쓸개를 꺼내어 먹으라는 뜻이다.”
갑자기 뒤에서 사람 말소리가 났다. 석추명이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언제 나타났는지 독고양 태상장로가 뒤에 있는 나무 위에 올라앉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석추명은 독고양이 나타나자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여 얼른 큰절을 올렸다.
“선배님!”
“이놈아, 내가 언제 네놈 같은 후배를 두었다고 나를 선배라고 부르는 게냐? 그리고 저 금은혈망(金銀血蟒)의 쓸개가 값을 따질 수 없는 영약이기는 하나 공기 중에 노출된 후 일각이 지나면 극독으로 변하니 빨리 먹는 게 좋을 게야.”
그러더니 독고양은 흑묘, 백묘를 바라보며 고함을 쳤다.
“예끼, 배은망덕한 놈들! 아무리 짐승이라지만 이렇게 사람을 차별한단 말이냐?”
석추명은 독고양의 말에 얼른 금은혈망의 쓸개를 찾아 꿀꺽 삼켰다. 말할 수 없이 비릿하고 쓴맛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 석추명은 자신도 모르게 오만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금은혈망의 쓸개는 두 번 다시 먹고 싶지 않은 맛이었으나 목구멍을 넘어가는 순간 몸속에 시원한 바람이 부는 듯 청량한 기운이 온몸에 퍼져 나가는가 싶더니 갑자기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이 늙은이가 허리가 안 좋아서 금은혈망을 잡아 오라고 그토록 채근해도 들은 척도 않던 녀석들이 네놈이 뭐라고 네놈에게 그 좋은 영약을 덥석 갖다 바치는 게야!”
독고양은 석추명이 금은혈망의 쓸개를 먹어서 짜증이 나는 듯 심술궂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석추명은 자신이 괜히 금은혈망의 쓸개를 먹었나 싶어서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선배님께서 드실 영약을 제가 눈치 없이 먹었나 봅니다. 금은혈망이 어디에 있는지만 알려주시면 제가 가서 다시 한 쌍을 잡아 오겠습니다.”
석추명은 독고양에게 미안해서 한 소리였지만 그 말을 듣자 독고양은 더욱 역정을 냈다.
“이놈아, 백 년에 한 번 날까 말까 한 그 귀한 영물을 또 어디 가서 구한단 말이냐? 그리고 네놈 재주로 어떻게 그놈을 잡아? 아무한테나 잡히는 놈들이라면 내가 잡고 말지 왜 이놈들에게 시켰겠느냐? 어리석은 놈 같으니라고.”
석추명 딴에는 미안해서 한 말이었는데 독고양이 더욱 화를 내자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럼 제가 어찌해야 합니까, 선배님?”
“어쩌긴 뭘 어째? 당장 땅바닥에 좌정하고 앉아서 운기조식을 삼주천(三周天) 해야지. 냉큼 하지 못할까!”
벼락같이 다그치는 독고양의 말에 석추명은 얼른 땅바닥에 좌정하고 앉아 단전에서 기운을 일으켰다. 기이하게도 잠시 생각만 했을 뿐인데 단전 한구석에서 용광로같이 뜨거운 불기운이 솟구쳐 올랐다. 동시에 다른 쪽 구석에서 얼음같이 시린 느낌이 들어 배가 아릴 정도였다.
“금은혈망의 쓸개인 금은혈담(血膽)은 천하 십대영약 중의 하나로 금혈망의 양강지기(陽剛之氣)와 은혈망의 음유지기(陰柔之氣)는 천하에서 그 짝을 찾을 수 없을 정도이니라. 한순간이라도 경계를 늦추었다가는 온몸이 타들어 갈 수도 있으니 정신 바짝 차리고 내가 알려주는 데로 진기를 유도하여라.”
독고양이 기의 행로(行路)를 알려주기 시작했다. 석추명은 불덩이처럼 뜨거운 기운과 얼음같이 차가운 기운이 동시에 몸속을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자 가슴이 철렁해서 정신을 바싹 차리고 독고양이 알려주는 경락으로 기를 유도했다.
일각이나 지났을까. 불기둥처럼 타오르던 기운을 돌이켜 단전에 뭉쳐있던 얼음처럼 차가운 기운을 녹이니 얼음은 수증기로 화해서 정수리로 올라간 다음 마치 안개비처럼 다시 몸 안 구석구석 퍼져 나갔다. 드디어 두 기운이 융합된 것이다. 기운이 융합하자 전신이 말할 수 없이 상쾌하고 머리가 맑아졌다.
석추명은 알 수 없는 기운이 온몸에 흘러넘치자 번쩍 두 눈을 뜨고 넘치는 기운을 주체하지 못해 자신도 모르게 검을 뻗어 숭양일기검을 펼치기 시작했다.
독고양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차례 폭우가 쏟아졌다 그치는 것처럼 눈부신 검무를 펼치던 석추명이 어느새 검을 거두고 우뚝 섰다. 알 수 없는 쾌감이 청량한 가을바람처럼 온몸을 관통하며 지나갔다.
무공의 단계가 오른 것이다.
석추명은 벅찬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독고양을 쳐다보며 다시 무릎을 꿇고 큰절을 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나 독고양은 석추명이 자신에게 절을 하자 몸을 돌려 절을 피했다.
“네놈이 이제 나를 아예 죽은 놈 취급하는구나. 아까도 절을 했으니 또 절을 하면 절을 두 번 하는 셈인데, 이 배는 죽은 사람한테 올리는 것인 줄 모르느냐, 이놈아! 내가 네놈 조상이라도 되는 줄 아느냐? 고얀 놈.”
독고양의 입에서 고운 소리가 나오지 않았지만 석추명은 싱글벙글했다. 독고양은 탈속한 듯한 외모와는 달리 입만 열면 욕지거리였지만 독고양의 성품이 원래 그런 줄 알았으므로 이제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저 무공이 한 단계 진보했다는 사실이 기쁘기만 했다.
독고양이 그런 석추명을 딱한 듯 쳐다보며 한마디 했다.
“이놈아, 네놈 무공은 이제 겨우 두 발로 일어설 줄 아는 정도에 불과 하느니라. 언제가 되어야 걷고 뛸 수 있을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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