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104화 (104/201)

#   104 - 광세일소_한추영 - 1522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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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3화 화산검전(華山劍戰) (8)

석추명의 검이 찬란한 검광을 뿌리며 일직선으로 뻗어가 흑묘를 베어드는 마군의 검을 쳐 냈다.

챙! 검이 서로 부딪치는 맑고 경쾌한 소리가 났다.

마군은 난데없이 고양이인지 여우인지 모를 짐승이 달려들어 당황했는데 이제 석추명까지 가세하자 분노가 치민 듯 얼굴이 시뻘게졌다.

“네놈이 검동으로 숨어들어온 주제에 감히 화산십수의 비무를 방해하려는 것이냐?”

마군이 석추명을 노려보며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비무 중인 두 사람 사이에 갑자기 끼어들어 그중 한 사람을 공격하는 것은 강호의 법도상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원래 석추명은 두 사람의 비무에 개입할 마음이 전혀 없었으나 흑묘가 위험해지자 지켜주고 싶은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돌발적으로 검을 펼친 것이다.

“미안하외다. 절대 고의로 그런 것은 아니오. 나는 다만 이 짐승을 구하러―”

“시끄럽다. 오냐, 네 녀석이 내 검을 받아냈으니 어디 끝까지 한번 받아 보아라.”

마군이 검 끝을 땅바닥에 늘어뜨리고 석추명을 노려보았다. 마군의 살벌한 눈빛을 바라보며 석추명도 공력을 끌어올려 대비하려는 찰나, 흑묘가 다시 사납게 울부짖으며 마군의 왼손을 물려고 덤벼들었다.

“이 잡놈의 고양이 새끼가!”

집요하게 덤벼드는 흑묘에게 화가 난 마군이 흑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놀랍게도 흑묘는 무공고수처럼 번개같이 마군의 검을 피하는 게 아닌가. 짐승이었으나 화산검법의 행로를 이미 아는 듯 마군의 날카로운 검세에도 전혀 기죽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그르릉 거리며 마군의 왼손 식지를 노렸다.

흑묘의 이상한 행동을 잠시 지켜보던 석추명에게 이상한 점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마군의 왼손 식지 손톱이 다른 손톱보다 한 치나 더 길었던 것이다. 여자도 아닌 남자가 그것도 화산십수에 들 정도의 무림고수인 마군이 왜 손톱을 길렀을까?

그때 문득 석추명의 머릿속에 독의 대가 사소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강호인 중에 이유 없이 손톱을 기른 자가 있다면 십중팔구 독을 쓴다고 봐야 해요. 손톱 밑에 독가루를 넣어두고 손가락을 튕겨 독을 뿌리는 용도지요. 물론 그래 봤자 저한테는 안 되겠지만, 호호호.”

확인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한 석추명은 더 망설이지 않고 검을 들고 일직선으로 내찌르면서 말했다.

“외람되오나 내가 귀하의 솜씨를 한번 견식 해봐야겠소. 확인할 게 있어서 말이오.”

석추명의 검이 빛줄기처럼 뻗어 나가며 마군을 에워쌌다. 마군은 갑자기 석추명의 검세가 바뀌자 놀라면서도 당황하지 않고 화산파의 절기 이십사수매화검(二十四手梅花劍)을 펼쳐냈다.

마군의 검법이 정밀하기는 했으나 정사를 양대 검의 고수인 수라검 뢰정과 설영객 초의공의 검법을 체득한 석추명의 검은 갈수록 빨라져 팔이 여덟 개 달렸다는 팔비나타(八臂哪吒)처럼 검을 휘몰아쳤다.

석추명의 검에서 일어나는 경(勁)이 실린 바람이 마군의 얼굴을 따갑게 찔러왔다.

수세에 몰린 마군은 검으로만 막는 것은 어렵다고 여겼는지 왼손 식지를 번쩍 쳐들고 불시에 내찌르며 지공(指功)을 펼쳤다. 그러더니 석추명의 얼굴 가까이서 돌연 왼손 식지를 힘차게 튕기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에 검은 고양이 흑묘가 날카롭게 울부짖었다. 하지만 석추명의 반응도 재빨랐다. 진즉부터 마군의 손가락 움직임을 눈여겨보고 있던 그는 마군이 손가락을 들어 올리자 가슴 가득 숨을 참고 있다가 손톱을 튕기는 순간 힘차게 내뿜었다.

“허억! 네놈이 어떻게...!”

마군은 자신이 손톱으로 튕겨냈던 몽혼약이 오히려 거꾸로 자신의 코로 들어오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아마도 약의 위험성을 잘 알기에 그런 듯했다. 하지만 마군은 내뱉은 말을 채 잇지 못하고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마군이 쓰러지자 한쪽 옆에서 수상한 눈초리로 지켜보던 이목남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사제!”

이목남이 얼른 달려가 마군을 부축했으나 마군은 이미 정신을 잃은 뒤였다.

“이게 무슨 짓이냐!”

상황이 이해되지 않던 이목남은 석추명을 돌아보며 사납게 소리 질렀다. 그는 석추명이 비열하게 독을 썼다고 생각했다.

그때 석추명이 마군에게 다가오더니 마군의 왼손 식지를 쳐들었다. 왼손 식지 손톱 아래에 허연 가루가 묻어 있었다. 검은 고양이 흑묘가 그걸 보더니 석추명의 옆에 서서 또 울부짖었다.

“이 가루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목남이 답을 하지 않자 석추명이 말을 이었다.

“이 가루는 특수하게 제작된 몽혼약이 틀림없습니다. 며칠 전, 저는 기 소협과 무 소협이 쓰러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약물에 중독이라도 된 듯 깊은 잠에 빠진 듯한 증세를 보였습니다. 보십시오. 마 소협도 같은 증세를 보이지 않습니까?”

석추명의 말에 이목남이 믿기지 않는 눈초리로 다시 마군의 증세를 살폈다.

“두 사람 중 기 소협은 정신을 잃은 지 나흘이 다 되어 갑니다. 마군의 손톱 밑에 있던 몽혼약이 어떤 것인지는 몰라도 대단히 강력한 독약이 분명합니다. 다행히 이 고양이처럼 생긴 영물이 몽혼약의 냄새를 추적할 수 있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모르기는 해도 마군은 아마 세 번째 희생자로 이 대협을 노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비무 중에 슬쩍 독을 쓰려고 했겠지요.”

이목남은 들을수록 놀라워 입을 다물지 못했다.

“뭣이라고? 기광 사제와 무염 사제가 그럼 이미 당했다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한번 가 보시겠습니까?”

석추명의 말에 이목남은 정신을 잃은 마군을 들쳐메고 석추명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경공을 펼쳐 화산십수 중 무염(武琰)이 쓰러져 있던 동굴로 갔다. 무염이 쓰러진 모습을 본 이목남은 즉시 무염의 맥박과 호흡, 눈동자 상태를 살펴보았다. 놀랍게도 무염은 마군과 정확히 똑같은 증세를 보였다.

그리고 다시 기광이 있는 곳까지 가서 기광의 상태를 확인한 이목남은 나직한 신음을 내뱉고 말았다.

“이럴 수가!”

이목남은 화산십수 중 제일 맏이였다. 비록 검술로는 자신보다 더 뛰어난 사제들도 있었으나 그는 맏이답게 항상 침착하고 사려 깊었으며 분별력이 있었다.

이목남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화산파 최고의 후기지수들이 경쟁하는 이 신성한 검동에서 화산파 제자가 사형제에게 독을 쓴다는 것을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제들을 불러 모아야겠소.”

이목남이 품 안에서 짧은 화살을 꺼내어 하늘로 쏘아 올리자 단전(短箭)은 하늘 위로 솟구치더니 매화꽃 모양의 붉은 연기를 내뿜었다. 화산파 제자들이 위급할 때 서로 연락하는 신호탄이었다. 신호탄을 쏘아 올리고 얼마 되지 않아 곧 나머지 화산십수 6명이 속속 이목남과 석추명이 있는 곳에 나타났다.

“사형, 무슨 일입니까?”

성격이 급한 선우호가 이목남을 보자마자 따지듯이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검동 안에서 신호용 단전을 쏘아 올린 경우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한 시각이 아까운 이때 목숨이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쏘아 올리지 않아야 할 신호탄이 터졌으니 사람들이 의아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마군이 기광과 무염에게 독을 썼다.”

이목남의 말이 떨어지자 나머지 여섯 사람이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예엣?”

“직접 보아라.”

이목남이 정신을 잃고 쓰러진 기광, 무염, 마군을 보여주었다. 그 모습에 선우호가 즉시 달려 나오더니 세 사람을 하나하나 자세히 살폈다. 선우호의 눈꼬리가 점점 치켜 올라갔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최초에 이들을 발견한 사람이 누굽니까?”

이목남은 마군이 자신에게 어떻게 비무를 하자고 했으며 어떻게 갑자기 쓰러졌는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목남의 설명을 듣던 선우호가 날카로운 눈초리로 석추명을 노려보았다.

“결국, 저자가 최초에 발견했다는 말 아닙니까? 마교의 대주를 지낸 자입니다. 저자의 말을 어떻게 믿는단 말입니까?”

“마군의 왼손 식지 손톱 아래를 자세히 보아라. 마군은 손톱 아래 묻은 그 허연 가루를 석 대주에게 튕기려고 하다가 도리어 자신이 당한 것이다.”

이목남의 말에 화산십수들은 마군의 왼손 식지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과연 손톱 밑에 미미하게 허연 가루 자국이 남아 있었다.

외가 공력을 단련한 듯 근육이 울퉁불퉁하고 덩치가 큰 사람이 걸걸한 목소리를 높였다. 화산십수 중 넷째 팽신(彭信)이었다.

“마군 이놈이 화산파의 명예에 먹칠을 했으니 당장 처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문사 차림의 둘째 서문효(西門曉)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그건 안 될 말이야. 이 일은 우리끼리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장문인께 아뢰어 처리해야 해.”

그러자 선우호가 앞으로 나서며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일이 강호로 새어나간다면 우리 화산파는 앞으로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것입니다. 이 일은 검동에 묻고 절대 새어나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선우호는 적개심에 가득 찬 눈빛으로 석추명을 힐끗 바라보았다.

이목남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태상장로님께 먼저 아뢰어야겠지. 그리고 제일 먼저 당한 기광은 발견된 지 벌써 나흘이 흘렀다고 하니 상태가 위중해지지나 않을지 걱정되는군. 후, 마군이 그렇게 욕심을 부릴 줄이야.”

“언제쯤 깨어날까요? 벌써 나흘이라면 생명이 위독해질 수도 있을 텐데”

선우호 바로 위의 사형인 현봉(賢奉)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이목남에게 물었다.

“그건 나도 모르겠네.”

이목남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 선우호가 이목남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형,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사태가 이렇게 되었으니 태상장로님을 만나 뵐 때까지 우리가 번갈아 돌아가면서 이 세 사람을 지키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래야겠지.”

이목남이 선우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선우호가 석추명을 바라보며 차갑게 내뱉었다.

“석 대주, 오늘 일을 평생 그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겠다고 맹세하시오.”

다짜고짜 자신을 압박하는 선우호의 말에 석추명은 어이가 없었다.

“선우 사제, 석 대주는 이번 사태를 꿰뚫어 본 우리의 은인이시다. 무례하지 말아라.”

이목남이 근엄한 목소리로 선우호를 나무랐다. 그러나 선우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석 대주 당신이 검동에 몰래 숨어들어온 그 이유 하나만으로 당신은 목숨을 내놓아야 하오. 화산파의 비밀을 엿본 셈이니까. 하지만 당신이 이번 일을 발설치 않겠다고 하면 최소한 목숨은 살려줄 의향이 있소.”

선우호의 말에 석추명은 껄껄껄 웃었다. 물에 빠진 사람 구했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이었다. 위험에 빠진 화산파 제자들을 찾아내고 흉수까지 찾아 주었는데 다짜고짜 살고 싶으면 입을 다물어라?

“그렇게 못하겠다면 어떡하시겠소?”

“그렇게 못하겠다면... 이번 일의 모든 잘못을 뒤집어쓰고 여기서 죽으면 되오. 생각해 보시오. 마교의 고수가 검동에 몰래 침입하여 화산십수들을 해하려고 독을 썼다. 누가 봐도 말이 되지 않소?”

선우호는 자신의 논리가 어떻냐는 식으로 말을 하며 사형들을 둘러보았다. 선우호의 말에 나머지 화산파 제자들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는 것이 내심 동의하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목남은 깜짝 놀라 큰소리로 선우호를 나무랐다.

“막내 사제, 그게 무슨 소리인가? 살인멸구(殺人滅口)라도 하자는 건가? 어찌 협의를 행하는 화산파 제자의 입에서 그런 끔찍한 소리가 나온단 말이냐?”

그러자 선우호가 지지 않고 대사형에게 대들었다.

“사형! 이번 일이 밖으로 새어나간다면 수백 년간 이어져 내려온 우리 화산파의 명예는 한순간에 바닥에 떨어지고 맙니다. 석 대주가 검동에 잠입한 것은 당연히 죽을죄요, 어차피 죽을 사람이니 이 모든 것을 뒤집어 써준다면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겠습니까?”

“안된다! 우리가 무공을 배우는 이유가 무엇이냐? 협(俠)을 행하고 신의(信義)를 지키기 위함이 아니냐? 너와 같이 생각한다면 우리가 사파(邪波)와 다를 것이 무엇이냐?”

이목남은 분노하며 다른 사제들을 돌아보았다.

“어찌 다들 아무 말도 안 하는 게야?”

이목남이 화가 난 눈초리로 사제들을 바라보자 다들 말없이 대사형의 눈초리를 피하기만 했다. 그 모습에 이목남은 허탈한 듯 털썩 주저앉았다.

“우리 화산파가 언제부터 이런 꼴이 됐단 말이냐? 중요한 것은 무공이 아니요, 의(義)를 행하고 약한 자를 돕는 협행(俠行)이라고 화산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배워왔거늘.”

그러자 선우호가 목소리를 가다듬어 다시 말했다.

“저희가 어찌 대사형의 말씀을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영웅이라면 모름지기 대세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저희가 사소한 인정에 사로잡혀 문파의 큰 명예를 지키지 못한다면 그것도 조사님과 화산파 선배 고인들께 큰 죄가 될 것입니다.”

“듣기 싫다!”

그때까지 선우호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석추명이 허탈하게 웃었다.

“화산파의 수법이 대단히 고명하시군. 그동안 구대문파는 항상 우리 신교를 마교라고 불러왔소. 하지만 나는 정말 궁금했다오. 왜 우리 신교를 마교라고 부르는지. 신교는 중원 각지에서 백성들을 위해 탐관오리들과 무능한 이 나라의 왕조에 맞서 싸우는데 말이오. 그 와중에 인명을 해치는 일도 물론 있었소. 하지만 소위 명문정파라는 구대문파와 오대세가는 그만큼 인명을 살상하지 않는단 말이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우리는 마교이고 당신네는 명문정파인 거요?”

석추명의 말에 선우호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고 싶은 것이냐?”

“정말 궁금해서 그러오. 지금도 보시오. 내가 기 소협과 무 소협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저들은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오. 마군은 아마도 자신이 화산제일수가 되려고 여기 있는 모든 사람에게 마수를 뻗치려고 했을 것이오. 하지만 여러분은 그 사실은 외면한 채 오히려 나를 신교의 대주라는 이유로 죽이려 들고 있소. 이런 당신네가 정말 정파라고 말할 수 있소? 당신들의 목숨을 구하려고 했던 내가 정말 사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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