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102화 (102/201)

#   102 - 광세일소_한추영 - 151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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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1화 화산검전(華山劍戰) (6)

매서운 칼바람이 부는 낙안봉(落雁峰).

산세가 어찌나 가파른지 기러기도 벗어나다가 힘들어 떨어진다는 화산의 제일봉이었다. 신이 거대한 도끼로 쪼개어 놓은 듯한 계곡의 밑바닥은 운무가 자욱이 끼어 신비로운 느낌이 들었다. 그 가파른 절벽 옆에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만한 길로 횃불 서너 개가 마치 도깨비불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석추명은 두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저 앞에서 움직이는 횃불을 지켜보고 있었다. 횃불을 든 사람들은 다름 아닌 화산십수(華山十秀)들이었다. 가끔 불빛에 얼핏 비치는 화산십수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제 검동에 들어가면 백일 간 화산파 제일 고수의 비전절기를 배우고 그들 중 한 사람이 화산제일수라는 명예를 얻게 된다. 그러니 누구라도 긴장하지 않을 수는 없을 듯했다.

제일 앞에서 그들을 인솔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전임 화산십수 중 하나였던 홍기 도장이었다. 그리고 화산십수의 제일 뒤에는 나이 지긋한 장로 한 사람이 따라가고 있었는데 바로 일전에 보았던 매화단주였다.

석추명은 그들보다 백 척 정도 뒤에서 소리 없이 천 리를 간다는 천리잠행보(千里潛行步)를 펼치고 있었다. 거센 바람 소리는 그렇지 않아도 깃털처럼 가벼운 석추명의 미약한 발소리마저 완전히 감추어주었다.

“이 길 끝은 까마득한 낭떠러지인데 어째서 이 길로 가는 걸까?”

석추명은 화산십수를 뒤따르며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지난 칠 일간, 혹시라도 검동의 입구를 발견할까 싶어서 혼자서 낙안봉 주위를 샅샅이 뒤졌다. 경공이 절륜하다고 자부하는 자신조차 갈 수 없는 가파른 낭떠러지를 제외하고 모든 곳을 다 뒤져 보았으나 그 어떤 곳도 검동으로 생각되는 곳은 없었다.

역시 비전(祕傳)이라 이건가? 기관 진식이 설치되어 있다고 하더니 정말 육안으로는 찾을 수가 없었다.

밤하늘에서 솔개 한 마리가 끼루룩 울고 지나갔다. 화산십수들과 멀찍이 떨어져서 횃불도 없이 움직이는 석추명이 안타까운지 달빛이 그나마 밤길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한참을 가던 홍기 도장이 낭떠러지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 앞은 망망무제(茫茫無際). 온통 구름 밭이었다.

홍기 도장과 화산십수는 걸음을 멈춘 뒤 잠시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홍기 도장이 밤하늘을 올려보더니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시간이 되었다.”

그러자 정말 신기하게도 ‘끼기긱’ 하고 듣기 거북한 기계음이 들리더니 낭떠러지 앞 자욱한 구름을 뚫고 좁은 다리 하나가 뻗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뒤에서 지켜보던 석추명은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하마터면 ‘악!’ 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홍기 도장이 서 있는 낭떠러지는 자신도 며칠 전 낮에 다녀간 곳이었다. 늘 운무가 차 있긴 했지만 돌멩이를 던져 그 앞이 천 길 낭떠러지라는 사실을 이미 확인했었다. 그런데 저 다리가 도대체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왔단 말인가.

하지만 놀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어느새 화산십수가 매화단주에게 인사하며 다리를 건널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매화단주가 화산십수에게 말했다.

“너희들의 건승을 비마. 화산파의 앞날이 너희에게 달렸다. 그리고 태상장로님을 뵙거든 장문인의 서찰을 잊지 말고 전해 올리거라.”

“예. 단주님.”

“어서들 가거라. 저 다리는 조금도 사정을 봐주지 않느니라.”

매화단주의 말에 이어 홍기 도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지 말고 경공을 발휘해서 있는 힘껏 앞으로 달려가라. 운무가 자욱해서 상하좌우가 보이지 않을 것이나 운무를 뚫고 은은하게 빛나는 불빛 하나가 보이리니, 그 불빛을 향해 모든 공력을 개방하고 전속력으로 달려야 한다. 알겠느냐?”

홍기 도장의 말에 화산십수가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사형.”

“그럼 이제 달려라!”

화산십수 중 제일 앞에 서 있던 사람부터 허공 위에 떠 있는 다리를 향해 몸을 날렸다. 운무를 뚫고 좁은 다리 하나가 나타나기는 했으나 화산십수가 서 있는 곳과 다리 사이는 여전히 20여 척이나 떨어져 있었다. 만약 경공이 조금이라도 부족해서 몸을 띄워도 다리에 착지하지 못한다면 그대로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셈이었다.

게다가 다리의 폭은 좁고 짙은 운무에 바람까지 간간이 불고 있어서 경공에 있어서는 다들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였지만 지금 이 순간, 누구 한 사람 긴장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어느새 마지막에 서 있던 선우호마저 다리 안으로 사라졌다. 홍기 도장과 매화단주는 선우호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잠시 허공에 걸쳐진 다리를 지켜보았다.

석추명은 마음이 초조했다. 시간을 헤아려 보니 어느새 반 각이 훨씬 지나고 있었다.

서둘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다리 위로 올라서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 앞을 막고 있는 홍기 도장과 매화단주가 걱정이었다. 두 사람 모두 자신보다 무공이 윗길인데 두 사람에게 막히기라도 하면 다시 십 년을 기다려야 한다. 속에서 조바심이 났다.

홍기 도장과 매화단주는 아직 자신이 뒤쫓아 왔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신룡보를 극상승으로 펼쳐 단번에 통과해야 한다. 손을 펼칠 시간도 주지 말고!

석추명은 천천히 기운을 들이마시며 단전의 공력을 모두 개방했다. 그리고는 발소리가 나는 것도 개의치 않고 바닥을 박차며 몸을 번개같이 앞으로 쏘아 보냈다.

휘리릭.

석추명이 매화단주의 머리 위를 뛰어넘으려는 순간, 매화단주가 몸을 빙그르르 돌리며 오른손을 질풍같이 뻗어 석추명의 어깨를 틀어쥐었다.

“이 쥐새끼 같은 놈! 다시 나타나면 살려두지 않는다고 했거늘!”

매화단주는 갑자기 자신의 뒤에서 세찬 바람이 몰아치자 누군가가 자신들의 뒤를 따라왔다는 사실을 눈치챈 듯했다. 석추명은 허공에서 교묘히 몸을 비틀어 가까스로 매화단주의 호조수 공격을 피했으나 이번에는 홍기 도장이 손날을 곧추세우고 석추명의 머리를 쪼갤 듯이 내리쳤다.

“석 대주, 장문인께서 한번 살려주셨거늘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오?”

홍기 도장의 수도(手刀)를 피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석추명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어쩔 수 없이 홍기 도장을 향해 전력을 다해 쌍장을 뻗어냈다.

“스승님의 복수와 무림의 평화를 위해서입니다. 남 교주를 그대로 두면 반드시 천하 무림에 혈풍이 다가올 것입니다. 그것을 막아야 합니다. 도와주십시오!”

석추명은 홍기 도장을 향해 쌍장을 내지르면서 절실한 마음으로 소리쳤다.

바로 그 순간, 허공에 떠 있던 다리가 다시 거북한 기계음을 내며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다.

“안돼!”

그 모습을 본 석추명은 마음이 다급해져서 그대로 다리 위로 몸을 날렸다. 홍기 도장은 석추명의 말에 마음이 움직였는지 연이어 공격해오지는 않았다.

“그렇게 네놈 마음대로 될 것 같은가!”

하지만 등 뒤에서 쩌렁쩌렁 고함소리가 나더니 매화단주의 갈고리 손이 다시 석추명의 다리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저 갈고리 손에 붙잡히면 끝장이었다. 허공 위의 다리는 이미 10여 척이나 더 뒤로 물러나면서 석추명이 있는 곳과는 30여 척이나 멀어져 버린 상태였다.

석추명은 말할 수 없는 좌절감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깊은 탄식을 내질렀다.

자신의 몸은 이미 공중에 뜬 상태. 매화단주의 쾌속한 호조수 공격을 피할 도리는 없었다.

그때, 홍기 도장이 별안간 무엇인가에 밀린 듯 ‘어이쿠’ 소리를 지르더니 그대로 매화단주에게 몸을 부딪쳤다. 그 바람에 매화단주의 손이 석추명의 다리를 아슬아슬 스치고 지나가 버렸다. 홍기 도장이 일부러 매화단주에게 부딪힌 것이 분명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홍기 도장은 석추명에게 욕을 해댔다.

“네 이놈! 허공에서 벽공장(擘空掌)을 구사하다니, 실력을 숨긴 게로구나. 다시 한번 붙어보자. 이놈!”

그러더니 자신을 노려보는 매화단주에게 어색한 웃음을 웃었다.

“어이쿠, 단주님 죄송합니다. 지난번에도 저놈의 무공이 보통이 아니다 싶었는데 벽공장까지 구사할 줄은 몰랐습니다. 저놈의 무공을 얕본 제 불찰입니다.”

마침 거센 바람에 운무가 날리면서 주위를 분간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 매화단주는 홍기 도장이 넘어진 것이 의심스러웠으나 딱히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석추명은 그 순간 ‘살았다!’는 생각이 들자 허공에서 다시 공중제비를 돌아 한 번 더 도약했다. 석추명의 몸이 솔개처럼 운무를 뚫고 공중으로 치솟더니 스르르 멀어지는 다리를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이미 다리는 다시 사오 척이나 멀어진 상태.

석추명의 몸이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는가 싶더니 불쑥 내민 손길이 다리의 끝부분을 겨우 움켜잡았다. 허공에서 움직이는 다리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석추명의 몸이 몹시도 위태롭게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석추명은 몸에 반동을 주어 반원을 그리며 크게 한번 구르더니 순식간에 다리 위로 올라섰다. 그러고는 다리 끝부분에 보이는 아련한 불빛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

벌써 상당히 달려온 것 같은데 아직도 저 앞에 보이는 불빛은 전혀 가까워지지 않았다. 혹시 달려갈수록 그만큼 더 멀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아까부터 짙어지기 시작한 운무는 점점 더 짙어져 이제는 자신의 발끝이나 손끝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석추명은 자욱한 운무 속에서 자신이 허공에 있는지 다리 위에 있는지도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운무가 조금씩 옅어지는 듯하더니 저 앞에서 반짝이던 불빛의 정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산신령이나 쓸법한 꼬불꼬불한 지팡이 위에 달린 커다란 야광주였다. 지팡이의 주인은 정수리 부분이 대머리에 새하얀 눈썹이 어깨까지 내려오는 역시 산신령 같은 풍채의 노인이었다. 노인의 앞에는 자신보다 앞서갔던 화산십수가 공손한 자세로 서 있었다.

저 노인이 자신이 그토록 찾던 비천검 독고양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석추명은 화산십수가 매서운 눈길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도 까맣게 잊은 채 마냥 들뜬 마음으로 허겁지겁 앞으로 달려갔다.

“응? 네놈은 누구냐?”

열 명의 화산십수 외에도 석추명이 나타나자 노인은 의외라는 듯 두 눈썹을 추켜 올렸다. 그러고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를 내리치며 삼엄한 표정으로 석추명에게 물었다.

지팡이가 땅을 때리는 순간, 지팡이 끝에서 엄청난 기운이 폭증되어 나오면서 석추명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휘청거렸다.

석추명이 자신을 소개하기도 전에 두 눈을 부릅뜨고 석추명을 노려보던 선우호가 앞질러 얘기했다.

“태상장로님, 저놈은 마교의 간자입니다. 장문인께서 추방령을 내리시며 다시 한번 화산에 발을 들일 시에는 용서치 않겠다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선우호의 말에 독고양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리며 위로 치솟았다.

“마교?”

석추명은 선우호가 자신을 왜 그렇게 싫어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미 검동에 들어선 이상 이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석추명은 독고양 앞에 무릎을 꿇고 공손히 절을 올렸다.

“저는 백련신교의 수라대주 석추명이라고 합니다. 스승님의 유언을 받들어 선배님께 가르침을 받고자 화산파 제자가 아니면서도 이렇게 검동에 들어왔습니다. 화산파의 금기구역을 침범한 죄를 벌하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만, 그전에 스승님의 유언을 아뢸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네놈의 스승이 누구냐?”

독고양은 백 살이 가까운 노인이라는데 목소리는 카랑카랑 쇳소리가 났다. 노인이 일말의 호의도 내비치지 않자 석추명은 은근히 걱정되기 시작했다.

“제 스승님은 수라검 뢰정입니다.”

“수라검 뢰정? 들어본 적 없다.”

독고양이 스승을 모른다고 단칼에 말해 버리자 석추명은 당황했다. 지금까지 숱한 명문정파의 사람들을 만났지만 뢰정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무림의 최고 선배라는 사람이 자신의 스승을 모르다니.

“그러시면 먼저 스승님의 유언을 말씀드리―!”

“시끄럽다. 네놈이 이곳으로 몰래 숨어들어온 것만 해도 용서할 수 없는 죄이거늘, 내가 네놈의 사사로운 원한 관계를 뭣 하러 듣는단 말이냐.”

독고양이 두 눈썹을 찌푸리며 큰소리로 역정을 냈다. 무림의 대선배라면 의당 그에 걸맞은 인품을 갖추고, 자신의 출신 문파에 상관없이 인자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리라 기대했던 석추명의 예상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당황한 석추명의 모습을 보던 화산십수들이 고소하다는 듯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내가 시간이 없으니 너희들끼리 알아서 연공하다가 한 달 뒤에 다시 여기로 모이거라. 알겠느냐?”

독고양의 말에 이번에는 화산십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리끼리 알아서 연공을 하라니 그러면 검동에는 뭣 하러 들어온단 말인가? 자신들은 백일동안 피나는 고련을 할 것으로 예상하고 들어왔다. 백일은 긴 시간이 아니었다. 그 황금 같은 시간에서 한 달을 우리끼리 알아서 연공을 하라니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태상장로님, 우리끼리 정확히 무엇을 하라는 말씀인지요?”

선우호가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서며 조심스럽게 질문을 했다.

“이놈아, 연공(練功)하라는 말 몰라? 연공? 무공 수련하라고. 이런 우라질.”

뜻밖에도 독고양은 공손하게 질문하는 선우호에게 상스러운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핏대를 올렸다. 그 바람에 선우호는 당황해서 얼굴이 시뻘게지며 말까지 더듬었다.

“아, 연, 연공하라는 말씀입니까? 알, 알겠습니다.”

선우호의 말에 독고양은 ‘에헴!’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지팡이를 짚고 몸을 돌렸다. 그런 뒤 갑자기 생각난 듯 석추명을 돌아보며 말했다.

“네놈도 마찬가지야, 알겠어?”

석추명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독고양의 모습에 넋이 나간 채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선배님”

그러자 독고양은 주위를 둘러보며 짜증이 난다는 듯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 이놈들.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을꼬? 잡히기만 해봐라. 내 요놈들을 그냥 콱!”

그러고는 지팡이를 땅에 ‘쾅!’ 하고 내려치더니 순식간에 연기처럼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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