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 - 광세일소_한추영 - 1507578
#
제100화 화산검전(華山劍戰) (5)
석추명의 행동에 거양자를 비롯한 화산파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교주 남무궁의 손에 제 스승님을 비롯하여 신교의 장로이셨던 황보, 곤륜파의 설영객 초의공께서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황보와 초의공이 죽었다는 말에 좌중이 다시 술렁거렸다. 설영객 초의공은 비천검 독고양 이후로 정파 무림에서 그 신묘한 검술을 따를 자가 없는 고수인데 어찌하여 마교 교주의 손에 죽었을까? 그리고 신교의 장로 황보라면 응룡검 황보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십여 년 전부터 종적을 감추어 의아했는데 설마 그동안 마교의 지하뇌옥에 갇혀 있었단 말인가?
거양자가 놀란 목소리로 석추명에게 되물었다.
“초의공이 어째서 마교 교주의 손에 죽었단 말인가?”
“초의공께서는 제 스승님의 친우이십니다. 스승께서는 십여 년 전 교주의 눈 밖에 나서 지하뇌옥에 갇힌 황 장로를 구하려고 초의공께 도움을 요청하셨습니다.”
“초의공의 친우라니 자네의 스승이 누구인가?”
거양자의 물음에 석추명은 스승이 쓰러지던 모습이 생각나서 비통한 마음에 얼른 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허각 도장이 말했다.
“그자의 스승은 수라검 뢰정입니다.”
“수라검 뢰정!”
허각의 말에 거양자뿐만 아니라 장로들이 모두 놀라는 눈빛이었다. 수라검 뢰정은 검군자라는 별칭으로 정파 무림에도 잘 알려진 사람이었다.
“흠, 그렇군. 나도 수라검 뢰정과 초의공이 서로 친분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네. 그 때문에 무림맹이 초의공을 잡아들이라는 추포령을 내렸다지. 어허, 그런데 두 사람 모두 남무궁의 손에 죽다니.”
석추명의 입에서 나온 엄청난 사실에 거양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석추명을 지켜보던 허각 도장이 다시 나서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캐물었다.
“하지만 뢰정의 죽음이 화산파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이냐? 똑바로 대지 못할까.”
그 소리에 석추명은 비통한 눈빛으로 장문인 거양자를 바라보았다.
“스승님께서 저에게 무공 비급을 한 권 남기시며 그 비밀은 화산파의 태상장로이신 독고양 어른께 여쭈어보라는 유지를 남기셨습니다. 제가 신교의 대주라는 사실을 밝히면 장문인을 뵐 기회조차 없을까 봐 부득이 정체를 숨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석추명의 말에 거양자를 비롯한 화산파 장로들과 중진들이 모두 눈살을 찌푸렸다. 비천검 독고양은 화산파가 낳은 불세출의 고수였다. 그런 만큼 독고양과 관련된 사항은 철저하게 문파의 기밀로 유지되어왔다. 그런데 명문정파도 아닌 뢰정이 어떻게 태상장로에 대한 것을 알았단 말인가.
그때 선우호가 앞으로 나서며 목소리를 높였다.
“무슨 비급을 남겼다는 것이오? 그 비급을 꺼내 보이시오.”
“그 비급은...”
석추명이 잠시 머뭇거렸다.
“보여드릴 수 없습니다.”
“흥! 보여줄 수 없다? 스승의 유언이 아니라 애당초 그런 비급 따위는 없는 것이겠지.”
선우호의 조롱에 석추명은 반박하려고 입을 열다가 그만 다시 다물고 말았다. 아직 구대문파는 중양일지의 존재에 대해 알지 못한다. 만약 그 사실을 입 밖에 꺼냈다가는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모른다. 독고양 어른을 만나기 전까지는 비밀로 해야 하리라.
석추명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거양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장문인, 독고양 어른을 만나게 해 주십시오. 그분께 모든 것을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제발 그 어른을 만나게 해 주십시오.”
석추명의 간곡한 말을 듣던 거양자는 굳은 얼굴로 석추명에게 말했다.
“독고양 어른이 우리 문파의 최고 어른이신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나 지난 30여 년간 나도 그분을 뵌 적이 없네. 자네가 마교가 아니라 구대 문파의 중진이라도 그 어른에 대한 것은 밝힐 수 없네. 그러니 그만 일어나게나.”
“장문인!”
석추명이 다시 한번 간곡하게 거양자를 불렀지만 거양자는 요지부동이었다.
“마교의 간자가 잠입해왔는데 매화검수단은 무얼 하는 게냐?”
장문인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매화검수단 10여 명이 떨어지는 꽃잎처럼 비산(飛散)하더니 어느새 석추명과 사소혜에게 검을 겨누었다.
“매화검수들은 당장 두 사람을 포박하여 뇌옥에 가두어라.”
장로 하나가 소매를 떨치며 일어나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아마도 그 장로가 매화검수단의 단주(團主)인 듯했다.
“장문인!”
그때 홍기 도장이 앞으로 달려와 장문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장문인, 석 대주가 정체를 속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가 화산파 제자 다섯의 목숨을 구한 것은 저와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매화검수 사제들이 똑똑히 목격한 사실이옵니다. 장문인께서도 방금 화산십수에게 말씀하실 때 우리 화산파는 은원이 분명한 문파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만약 지금 우리가 확인되지 않은 의문만으로 석 대주를 잡아 가둔다면 강호에서 화산파를 뭐라고 하겠습니까? 다시 고려해 주십시오.”
홍기 도장이 앞으로 나서자 포박 명령을 내린 장로가 노기를 띠고 홍기 도장에게 소리를 질렀다.
“네 이놈! 지금 이 자리가 어떤 자리라고 감히 네 녀석이 나서는 것이냐. 썩 물러가지 못할까.”
그러나 홍기 도장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석 대주를 화산으로 데려온 사람은 저올시다. 죄를 물으시려면 차라리 저에게 묻는 것이 더욱 합당할 것입니다. 장문인!”
홍기 도장의 말에 거양자는 잠시 두 눈을 감았다. 홍기 도장의 말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화산파에 잠입한 목적은 따로 있다 하더라도 제자들의 목숨을 구한 것은 사실이므로 은혜를 입은 것은 사실이었다.
잠시 후 거양자가 감았던 눈을 뜨며 석추명을 바라보았다.
“네가 정체를 속이고 화산에 올라온 것은 분명히 묵과할 수 없는 잘못이나 홍기의 말처럼 또한 우리 문파에 은혜를 베푼 것도 사실이니 죄를 경감하여 너에게 추방령을 내린다. 지금 즉시 화산을 떠나라. 만약 또다시 화산에 잠입한다면 그때는 매화검수단의 검이 네 심장을 꿰뚫을 것이다. 알아들었으면 썩 물러나라!”
장문인의 명이 떨어졌다. 석추명은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순간 몸이 휘청거렸다. 그런 석추명을 사소혜가 급히 다가와 부축했다.
“대주님, 어서 떠나시지요. 명문정파가 언제 은혜를 은혜로 갚는 것을 보셨습니까?”
사소혜가 주위를 쏘아보며 말했다. 두 사람이 걸음을 내딛자 수백 명의 화산파 제자들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길을 내어주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걸음을 내디디며 화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매화검수단을 비롯한 화산파 제자들은 두 사람이 남천문을 넘을 때까지 따라와서 끝까지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들 중에는 안타까운 표정의 홍기 도장도 있었고, 싸늘한 눈빛의 선우호도 있었으며, 사람들의 등 뒤에 숨어 두 사람을 몰래 훔쳐보며 발을 동동 구르는 금린도 있었다.
어느새 해가 진 화산에는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다. 화산을 내려가던 석추명이 풀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자신의 무능함이 견딜 수 없이 괴로워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스승 뢰정과 초의공, 죽는 순간까지 초연하던 황보 장로,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던 불모 황연화의 쓸쓸한 눈빛이 떠올랐다.
스승의 복수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들의 복수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중양신공을 모두 익힐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남무궁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는 현재로서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
그렇게 넋을 잃고 멍하니 앉아 있는데 숲 안쪽에서 문득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석추명이 고개를 돌리니 사소혜도 일어서서 어느새 금사신편을 꺼내 들고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냐!”
사소혜가 금사신편을 휘두르며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몸을 솟구쳤다. 허공에서 금사신편이 출렁이더니 나무 뒤에서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향해 질풍처럼 뻗어갔다.
“저, 접니다!”
갑자기 나무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그 소리에 사소혜가 얼른 금사신편을 말아 올리고 보니 나타난 사람은 뜻밖에 화산파 막내 제자 금린이었다.
“금 소협?”
사소혜는 네가 여기 웬일이라는 듯이 의아한 눈길로 금린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금린은 주위를 한번 둘러본 뒤 잽싼 걸음으로 사소혜와 석추명에게 다가왔다.
“석 소협, 아니 석 대주님. 아무래도 이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금린은 급히 달려온 듯 숨이 차서 헉헉거렸다. 금린의 말에 석추명이 의아한 눈길로 금린을 바라보았다.
“...?”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저는 석 소협께서 나쁜 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때 객잔에서 저희 사형제들의 목숨을 구해주셨을 때 그런 확신이 들었어요.”
금린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금린의 말에 석추명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금 소협이 그렇게 믿어주니 다행이군요. 고맙습니다. 그 얘기를 해주려고 여기까지 달려온 것입니까?”
그러자 금린이 고개를 가로젓더니 목소리를 잔뜩 낮추었다.
“아닙니다. 석 소협께서 태상장로님을 정말 뵙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아서 그분을 뵐 방법을 알려 드리러 왔습니다.”
금린의 말에 석추명은 용수철이 튕기듯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태상장로님은 검동 안에 계십니다. 검동 안으로 들어가시면 태상장로님을 만나 뵐 수 있을 겁니다.”
검동에 외부인에게 밝히기를 꺼리는 비밀이 있으리라고는 예상했으나 비천검 독고양이 검동 안에 있을 줄이야.
“검동이라니, 그게 어디 있단 말이오? 그리고 어떻게 들어갈 수 있소?”
다급하게 묻는 석추명의 물음에 금린은 차근차근 말했다. 여전히 목소리는 잔뜩 낮춘 채였다.
“앞으로 칠일 뒤에 화산십수들이 검동에 들어갑니다. 천외삼봉(天外三峰) 중 하나인 낙안봉(落雁峰) 근처에 있다는 것만 알지 검동의 정확한 위치는 저도 잘 모릅니다. 다만 검동의 입구에는 기관장치가 되어 있어서 바깥에서는 출입을 조절할 수가 없다고 해요.”
“기관장치가 있다고?”
포기하고 있던 석추명은 금린의 말을 듣자 가슴이 뜨거워졌다. 금린이 가져온 정보는 눈이 번쩍 뜨일 만큼 고급 정보였다.
금린은 눈망울을 초롱초롱 빛내며 석추명에게 소곤거렸다.
“다만 입구가 열리면 일각(一刻)이 지나기 전에 닫힌다고 합니다. 검동의 안쪽은 어떻게 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저도 들어가 보지 않아서...”
“입구가 닫히면 언제 다시 열리지?”
석추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어떻게 되든 일단 들어가고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백일이 지나야 다시 열려요. 그때 화산십수가 다시 밖으로 나올 겁니다. 그때 나오지 않으면 앞으로 십 년 동안 나올 수 없어요.”
십 년 동안 나올 수 없다는 말에 석추명과 사소혜는 깜짝 놀라 조그맣게 탄성을 내뱉었다.
“칠일 뒤부터 정확히 백일 후 자시 초에 다시 검동의 입구가 열리고 일각 후에 닫힙니다. 명심하세요.”
금린이 불안한지 연신 주위를 살피며 조바심을 냈다.
“아무래도 이제는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사형들이 찾을 거예요.”
“잠시만. 백일 동안 검동 안에서 무얼 하는 거지?”
“얼핏 듣기로 태상장로님께서 화산십수에게 무공을 전수하신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마지막 날 비무대회를 열어 화산제일수를 뽑는 대요. 화산제일수의 자질과 품성이 뛰어나면 태상장로님의 직계 제자가 될 수도 있다고 들었어요. 물론 지금까지 태상장로님의 제자가 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태상장로님의 제자면 장문인의 사제로 바로 장로급이죠.”
금린이 말하다가 하얀 치아를 보이며 씨익 웃었다. 장문인의 사제라니, 무공뿐만 아니라 배분상으로 엄청난 지위를 받게 되는 것이다. 이제야 화산파 제자들이 왜 이렇게 화산검전에 목숨을 거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30여 년 전에 강호에서 은거했다는 비천검 독고양이 사실은 검동에 머물면서 계속 화산파 제자들을 지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나 검동 밖으로는 나오지 않으며 오로지 100일 동안이라는 시간 제약을 둔 채.
“석 소협께서 태상장로님을 만날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행운을 빕니다. 그럼 저는 이만.”
금린은 그 말을 남기더니 다시 토끼처럼 깡충깡충 튀어서 산 위로 사라졌다.
금린이 사라지자 사소혜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석추명을 바라보았다.
“대주님, 정말 검동으로 들어가실 건가요? 만약 그전에 들킨다면 매화검수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 검동 안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도 모르고... 설령 독고양 장로를 만난다고 하더라도 대주님의 정체를 알면 어떻게 나올지도 모르잖아요? 아까 화산파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절대 환영할 것 같지는 않은데....”
사소혜가 걱정스레 말하자 석추명이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그래도 부딪쳐 봐야지. 시작도 하기 전에 겁부터 먹으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석추명은 머리 위에서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스승 뢰정에게 도와달라고 기도를 올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