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 - 광세일소_한추영 - 1506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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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화 화산검전(華山劍戰) (4)
지객도인이 두 사람을 안내한 곳은 장문인의 처소가 아니라 대연각(大然閣)이라는 현판이 걸린 넓은 대청마루였다. 대연각 안에는 얼추 이삼백 명에 달하는 제자들이 반듯하게 도열해 있었고, 그 앞에는 한쪽 소매 끝단에 분홍색 매화꽃 문양이 있는 사람들 수십 명이 역시 엄숙한 표정으로 기립해 있었다. 제일 앞줄에 홍기 도장과 선우호가 있는 것으로 보아서 매화검수들인 듯싶었다.
매화검수들 앞쪽에는 열 대여섯 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몇 군데 빈자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흰색 도복을 입은 반백의 중늙은이들이 앉아 있었다. 근엄한 표정을 한 이들에게서는 하나같이 은근한 기운과 위엄이 풍겨 나왔다.
가운데 자리가 비어 있는 것으로 봐서 아직 장문인은 들어오지 않은 듯했다.
단순히 장문인만 본다고 생각했던 석추명과 사소혜는 눈앞의 광경에 놀라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지객도인이 석추명과 사소혜를 돌아보며 빙그레 웃었다.
“조금 당황스러우시죠? 마침 오늘이 화산검전에 출전할 화산십수(華山十秀)를 제자들에게 선포하는 날입니다.”
그러자 석추명이 당황하여 말했다.
“그러면 굳이 지금 장문인을 뵙지 않아도 되는데....”
장문인에게 비천검 독고양에 관한 질문을 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이렇게 공개된 자리에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홍 사숙께서 장문인께 은인을 너무 기다리게 하지 말고 차라리 이 경사스러운 날에 화산파 제자들에게 은인을 소개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하셨습니다. 그러자 장문인께 쾌히 승낙하시며 이 자리에서 두 분을 뵙겠다고 하셨습니다. 자,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지객도인이 빈 의자를 가리켰다.
이게 아닌데...! 석추명은 덥석 앉지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는데 마침 자신의 앞쪽에 서 있던 홍기 도장이 자신을 향해 팔을 흔들며 아는 척하는 것이 아닌가. 홍기 도장은 싱글벙글 미소를 띤 채 팔을 뻗어 어서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홍기 도장의 옆에 서 있는 선우호는 석추명 쪽으로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석추명은 별수 없이 홍기 도장에게 목례를 하고는 사소혜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 있어서는 안 될 자리에 있는 듯하여 마음이 불편했지만 지금 와서 되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징 소리가 한 차례 나더니 화산파 수석 장로의 목소리가 들렸다.
“장문인께서 들어오시니 모두 기립하시오.”
그 소리와 함께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일어섰다. 석추명도 덩달아 일어났다.
잠시 후 화산파 장문인 거양자가 반백의 노도사와 얘기를 나누며 대청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석추명은 거양자의 옆에 있는 노도사의 얼굴이 낯익은 듯하여 유심히 바라보다가 깜짝 놀랐다. 그 사람은 무림맹 천림비고를 탈출할 때 자신의 앞을 막아섰던 노인이 아닌가. 하진이가 그때 저 사람을 ‘허 도장님’이라고 불렀던 것 같은데... 그런데 저 사람이 왜 여기 있는 거지?
석추명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입안이 바싹 말라왔다. 허 도장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으니 들키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여기서 나가야 한다. 하지만 지금 움직이면 모든 사람의 이목이 쏠릴 것이고 대번에 정체가 들통날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앞자리에 계신 분들은 좌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수석 장로의 말이 들렸다. 지금 자신은 허각 도장에게 등을 보인 채 앉아 있으므로 아직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듯했다.
석추명은 사실 끝까지 정체를 숨길 생각도 없었다. 화산파 장문인인 거양진인을 만나면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간곡히 부탁해볼 생각이었다. 그때 가서 자신이 정체를 속였다고 장문인이 탓하더라도 독고양을 만나게 해준다면 모든 벌을 달게 받으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자신의 정체가 밝혀진다면...!
자신이 직접 밝히는 것과 정체가 탄로 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가 있으리라. 어쩐지 일이 너무 순탄하게 진행된다 싶었다.
석추명이 긴장한 기색을 눈치챈 사소혜가 석추명의 팔을 살짝 붙잡고 왜 그러냐는 눈짓을 했다. 지금 이 자리에는 화산파의 모든 고수가 총출동해 있으므로 아무리 작은 소리로 얘기한다 하더라도 저들의 이목을 피할 수는 없기에 석추명은 사소혜에게 어색한 웃음만 지어 보였다.
잠시 후 장문인 거양자가 일어나더니 앞으로 걸어 나와 입을 열었다.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였지만 정기가 흘러넘쳐 우렁찬 목소리였다.
“화산십수는 앞으로 나오라.”
그러자 선우호를 비롯하여 청장년 십여 명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하나같이 눈빛이 엄숙하고 자세가 엄정하며 강렬한 기세를 풍기는 고수들이었다.
“너희들은 앞으로 우리 화산파의 비전(祕傳)을 이어 본문을 떠받치는 대들보가 될 것이다. 우리 화산파의 중흥이 너희들의 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으로 백일 간 최고의 자리를 놓고 서로 겨루게 되나 너희들은 적이 아니라 동기요, 형제다. 정정당당하게 대결하고 결과에 깨끗이 승복해야 하는 것은 화산파 제자들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소리기에 따로 강조하지 않겠다.”
석추명은 화산십수가 백일 간 겨룬다는 얘기에 깜짝 놀랐다. 설마하니 비무가 백일 동안 진행된다는 얘기인가? 그런 비무 방식은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었다.
석추명이 놀라는 사이 장문인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너희들이 검동 안에서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은 모두 값을 매길 수 없는 우리 화산파의 지극한 보물이다. 너희들 모두 화산제일수(華山第一秀)가 되고 싶어 하는 마음은 나도 잘 알고 있으며, 나 또한 사형제 간의 비무와 경쟁을 통해 우리 화산파의 무공이 더욱 일취월장해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화산제일수가 되는 것은 너희 중 한 사람의 영예지만 화산십수는 화산파 전체의 영예라는 사실을 명심해라. 그리고 검동 안에서 무엇을 보고 듣든지 간에 너희들의 입은 태산처럼 무거워야 할 것이다. 너희들 모두에게 조사님의 가호와 무운이 따르기를 기원하노라.”
장문인의 말이 마치자 화산십수 열 명은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고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갖다 대며 복창했다.
“저희 화산십수, 장문인의 지엄하신 명을 받들어 정정당당히 싸우고 검동의 비밀을 지킬 것을 엄숙히 맹세합니다.”
검동에 도대체 무슨 비밀이 있기에 비밀준수 맹세까지 공개적으로 한단 말인가? 석추명이 잠시 생각에 빠진 사이, 매화검수단 뒤에 늘어서 있던 제자들이 우레와 같은 환호를 지르며 박수를 쳤다.
“와!”
갑자기 분위기가 떠들썩해지자 석추명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빠져나가려면 지금뿐이다. 석추명이 얼른 사소혜의 팔을 붙잡고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장문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모두 조용히 하라. 오늘 이 좋은 자리에 소개할 귀한 손님 세 분이 있다.”
장문인의 목소리가 들리자 분위기가 다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석추명은 영문을 모르는 사소혜의 팔을 붙잡은 채 밖으로 나가려는데 문득 거양자가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 것이 아닌가.
“먼저 무당파의 장로요, 또한 무림맹의 인재 양성소인 천림원에서 무공을 강습하시는 허각 도장께서 이 자리에 함께하셨다. 너희들도 향후 기회가 닿아 무림맹 천림원에서 중원 천하의 인재들과 교류하게 되면 뵐 분이니 미리 얼굴을 잘 익혀두도록 하여라.”
장문인의 소개에 허각 도장이 일어나서 포권을 취하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바로 오늘 마교의 흉수에서 본문의 제자들을 구해주신 고마운 은인들이 계시다. 석 소협, 사 소저, 잠깐만 일어나시겠소이까?”
석추명은 머릿속으로 최악의 상황을 그리며 달아날 동선을 파악하기 위해 가까운 문을 확인하고 있었다. 자신의 정체가 발각되면 지체하지 말고 즉시 달아나야 한다. 제일 가까운 쪽의 문은 장로들과 수석 장로가 앉아 있는 자리의 뒤에 있다. 차라리 멀기는 해도 일반 제자들이 있는 쪽으로 달아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러려면 매화검수단을 지나야 하는데 가능할까?
“석 소협?”
잠깐 딴생각을 하던 석추명은 장문인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사소혜는 이미 일어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황한 석추명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일어나 사소혜와 함께 먼저 자신의 앞쪽에 늘어선 화산파 제자들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그리고 몸을 돌려 뒤에 앉은 장로들에게 포권을 취하다가 그만 허각 도장과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석추명은 얼른 고개를 돌리고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이미 허각 도장의 눈빛에서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석 소협과 사 소저는 마교의 장로 나찰녀의 손아귀에서 본파의 제자 다섯 명의 목숨을 구해준 고마운 은인이시다. 우리 화산파는 은원이 분명한 문파인 만큼 앞으로 두 분이 어려움에 빠지면 지체하지 말고 도와드려야 할 것이다.”
다시 거양자의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그 순간, 허각 도장이 벌떡 일어서더니 석추명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네놈은 마교의 수라대주가 아니냐? 네놈이 여기서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것이냐?”
허각 도장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장내에 퍼지자 수백 명이 운집한 대청이 일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여기저기서 챙, 챙, 하고 검이 검집을 빠져나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매화검수단이 순식간에 좌우로 확 퍼지면서 석추명과 사소혜를 포위해버렸다.
수십 명의 매화검수에게 완전히 둘러싸여 이제는 달아나려야 달아날 수도 없었다.
허각 도장의 말에 제일 놀란 사람은 다름 아닌 홍기 도장이었다. 홍기 도장은 장문인과 여러 장로들 앞이라 자신이 나설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석추명이 어려움에 빠지자 존장의 예절 따위는 괘념치 않고 선뜻 앞으로 달려왔다.
“마교의 수라대주라니 그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석 소협은 마교의 나찰녀에게서 우리 화산파 제자들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올시다. 제가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어요. 혹시 허 도장께서 사람을 잘못 아신 것이 아닙니까?”
홍기 도장의 말에 허각 도장이 고개를 젖히고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사람을 잘못 알았다고? 허허허. 석 대주, 본인이 직접 말해보게나. 자네가 바로 몇 달 전 무림맹의 천림비고에 잠입했던 수라대주 석추명이라고 말이야. 그 당시 자네와 손을 겨룬 사람이 한둘이 아니거늘 내 어찌 자네를 몰라볼까?”
허각 도장의 말에 좌중이 술렁거렸다. 홍기 도장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석추명을 향해 안타까운 듯이 말했다.
“석 소협, 말씀 좀 해보시오. 허 도장께서 사람을 잘못 보신 것이 아니오? 소협이 마교의 수라대주가 맡소이까?”
대청 안에 있는 수백 명의 눈길이 자신에게 집중된 가운데 석추명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제가 백련신교의 수라대주 석추명이 맞습니다. 본의 아니게 이름과 정체를 감춘 점은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석추명이 자신의 정체를 시인하자 홍기 도장이 눈알이 튀어나올 만큼 눈을 부릅떴다.
“이럴 수가. 그렇다면 어째서 같은 편인 나찰녀와 싸우며 우리를 도왔단 말이오?”
홍기 도장의 말에 이번에는 선우호가 앞으로 나서며 차갑게 응수했다.
“그야 뻔하지 않습니까? 우리 화산파에 잠입하려고 서로 짠 것이지요. 그래서 사문을 밝힐 수 없다고 한 것일 테고.”
선우호의 말에 홍기 도장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야, 당시의 싸움은 절대 눈속임이 아니었어. 그 싸움은 목숨을 건 싸움이었어. 내가 어찌 그런 것도 분간 못 하겠는가?”
홍기 도장의 말에 선우호가 석추명을 바라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그러니 마교가 무섭다는 것이지요. 사형의 눈을 속일 정도니까요.”
좌중이 술렁거리자 장문인 거양자가 오른손을 쳐들었다. 그러자 주위가 일순간 조용해졌다. 거양자는 석추명을 돌아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석 대주가 직접 말해보게. 자네가 나찰녀와 싸운 것 자체가 원래 일부러 계획했던 일인가?”
석추명은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도, 도망칠 곳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된 이상 모든 것을 밝히고 도움을 요청하는 수밖에 없다. 마음을 다진 석추명이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사실 저와 사 소저는 신교에서 도망치는 중입니다. 나찰녀는 저희를 뒤쫓아 객잔까지 추격하여왔다가 화산파 제자들과 싸움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거짓말, 거짓말이 분명합니다.”
여기저기서 고함소리와 아우성이 들리며 석추명의 말을 가로막았다.
“거짓말이 아니예요.”
이번에는 사소혜가 소리치며 대꾸했다.
“저는 화산파 제자들이 죽든 말든 그냥 가려고 했지만 마음씨 좋은 우리 대주님께서 아무 잘못 없는 청년들이 죽는 모습을 두고 보지 못했어요. 우리가 나찰녀의 추격을 피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세요? 나찰녀와 싸워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화산까지 오면서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으려고 정말 갖은 방법을 다 썼다고요.”
“흥! 하지만 정체를 숨기고 화산으로 올라온 것은 딴 꿍꿍이가 있어서겠지.”
선우호의 말에 장문인이 석추명에게 시선을 던졌다.
“석 대주, 좋소이다. 대주가 우리 화산파 제자들의 목숨을 구해준 것은 아무런 사심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왜 정체를 숨기고 화산으로 왔는지 말해보시오.”
그 말에 석추명이 화산파 장문인 거양자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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