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 광세일소_한추영 - 1505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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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화 화산검전(華山劍戰) (3)
“허 도장께서 무림맹의 업무로 바쁘실 텐데 이렇게 화산파까지 걸음을 해주시니 정말 감사하외다.”
화산파 장문인 거양자가 회색빛 수염을 쓰다듬으며 탁자 맞은편에 앉은 역시 반백의 도사에게 말했다.
“올해가 화산검전이 열리는 해라 그 준비로 한창 바쁘실 줄은 잘 알지만 그래서 더욱 장문인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허각 도장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허각 도장의 말에 거양자는 두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찻잔에 담긴 차가 은은한 향을 내며 식어가고 있었다.
“긴히 하실 말이라... 그렇지 않아도 지난번 사천대전 때 부맹주가 마교와 손을 잡고 오히려 맹을 공격했다는 말이 요즘 항간에 떠돌아다닌다는 말은 나도 들었소이다. 부맹주가 그런 의심을 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의심을 살만한 행동을 했다는 뜻이 아니겠소?”
거양자의 말에 허각 도장은 잠시 머뭇거리듯 뜸을 들이다가 거양자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비단 부맹주 뿐만 아니올시다.”
허각 도장의 말에 거양자가 감았던 눈을 뜨고 허각 도장을 바라보았다.
“부맹주 뿐만 아니라니, 그게 무슨 소리요?”
“사실 오늘 제가 온 이유는 부맹주 때문이 아니라 맹주와 관련된 일입니다.”
“맹주와 관련된 일?”
거양자가 의아한 눈초리로 허각 도장을 바라보았다. 무슨 뜻이냐는 눈빛이었다.
허각 도장은 다시 잠깐 주저하더니 이내 마음을 굳힌 듯 말을 꺼내었다.
“사실 지난번 사천대전 때 맹주는 참전은 했으나 실제로 전투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소이다.”
“그 얘기는 나도 들었소이다. 귀면쌍살이 나타나서 잡으러 갔었다면서요? 그것도 맹주의 조카인 남궁세가의 장남이 납치되었다던데?”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시점이 너무나 절묘합니다. 게다가 남궁척은 아무런 부상도 없이 맹주와 함께 전투가 다 끝난 뒤에야 복귀했지요.”
허각 도장의 말에 거양자는 아직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허각 도장을 바라보았다. 허각 도장이 계속 말을 이었다.
“게다가 이번 전투에서는 부맹주의 실책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맹주가 부맹주를 계속 감싸고 돌고 있습니다.”
그제야 거양자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허 도장의 말씀은 맹주가 수상하다는 것이오?”
“무림맹이 돌아가는 분위기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부맹주의 악행은 이미 상당히 드러나고 있지만 정작 더욱 조심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닌가 우려스럽습니다. 물론 아직 아무런 증거가 없으니 단정적으로 말할 것은 아닙니다만.”
허각 도장의 말에 거양자가 깊은 탄식을 터뜨렸다.
“어허, 정파 무림의 단합을 선도해야 할 무림맹이 분열을 조장하고 있으니 오히려 없느니만 못하구려.”
“만에 하나, 맹주가 다른 야심이 있다면 당금 무림에서 그를 막을 자는 귀파의 태상장로이신 독고양 선배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독고 선배님께서 나서만 주신다면―.”
“그건 어렵소이다. 사백께서 강호사에 관여하지 않으신지 30년이 넘었소이다. 나도 몇 번이나 말씀을 드렸지만 검동 안에 은거하신 이후로 한 발짝도 밖으로 나오지 않으시오.”
거양자가 허각 도장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말을 자르며 말했다. 그러자 허각 도장은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무림의 태산북두이신 소림신승과 독고양 선배님 두 분께서만 나서주셔도 작금의 이 난국에서 벗어날 수 있으련만.”
“언제까지나 그분들만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지요. 우리 후배들이 무슨 면목으로 다시 그분들을 불러낸단 말이오? 우리의 잘못으로 이렇게 된 것을...”
거양자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마교도 그렇고 무림맹도 그렇고 그분들이 아니면 누가 있어서 이 난세를 바로잡는단 말입니까?”
허각 도장이 답답하다는 듯이 말하자 거양자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 검동이 열리면 다시 한번 선배님께 간곡히 말씀드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허각 도장의 말에 거양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사백님께 내 다시 한번 간곡히 말씀드리겠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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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면 볼수록 정말 탐나는 인재로군.
홍기 도장이 석추명을 지긋이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 약관을 갓 지난 나이인 듯한데 어찌 저렇게 뛰어난 무공과 담력을 갖추고 있단 말인가? 우리 화산파에서도 찾기 어려운 인재야. 무결이가 목숨을 잃지 않았다면 저 친구와 자웅을 한번 겨뤄볼 만했을 텐데.
백무결 생각을 하자 홍기 도장은 자신도 모르게 코끝이 시큰해졌다.
홍기 도장과 석추명 간의 경공 대결은 결국 무승부로 끝나고 말았다. 홍기 도장이 비록 모든 공력을 다 쏟아부은 것은 아니지만 상당한 공력을 끌어올렸음에도 종래 석추명을 따돌리지 못했다.
얼핏 보기로 석추명도 전력을 다하는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석추명은 홍기 도장의 명성을 생각해서인지 홍기 도장을 앞지르지 않고 꼭 홍기 도장이 가는 것만큼만 따라왔다. 검법 실력은 알 수 없으나 경공만큼은 최소한 홍기 도장의 뒤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홍기 도장이 석추명을 데리고 화산파의 본궁인 금천궁(金天宮)에 들어서자 서른 안팎의 외모가 수려한 청년이 비슷한 연령대의 청년 대여섯 명을 데리고 달려 나오다가 홍기 도장을 보더니 나는 듯이 다가왔다.
“사형, 마교에서 침입해왔다고요?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 선우 사제로구나. 다행히도 늦지 않게 도착하여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철없는 것들이 아직 강호가 얼마나 무서운 줄도 모르고 설레발을 쳐댔으니. 쯧쯧. 지금 멀찌감치서 뒤따라오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그거 정말 다행이군요. 마교의 어느 놈들이 감히 화산 언저리까지 쳐들어왔답니까?”
청년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신교에 대한 적개심이 보통이 아닌 듯했다. 석추명은 자신도 모르게 머쓱하여 청년을 쳐다보다가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글쎄다. 나도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두 사람이었는데 여자의 무공이 기이할 정도로 높더구나.”
홍기 도사의 말에 석추명이 부득이 입을 열었다.
“나찰녀라고 복건성에서 악명을 떨치던 마녀인데 이번에 신임 장로가 된 모양입니다.”
석추명의 말에 청년이 두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과 사형의 대화에 외부인이 갑자기 끼어들자 언짢은 것 같았다.
“귀하는 뉘시오?”
그 말에 홍기 도사가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오, 이런 내 정신 좀 보게나. 선우 사제, 인사드리거라. 이번에 그 마녀의 손에서 철없는 어린 것들을 지켜주신 석 소협이시다.”
홍기 도사의 말에 석추명이 얼른 포권을 취하며 자기소개를 했다.
“석명이라고 합니다. 사문은 밝힐 수 없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자신을 소개하면서 사문을 소개하지 않자 청년은 탐탁지 않은 눈빛을 지었다.
“선우호라고 하오. 아무튼, 도움을 주셔서 감사하오.”
자신을 선우호라고 소개한 청년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하더니 석추명은 제대로 바라보지도 않고 다시 홍기 도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홍 사형께서 직접 가셨으니 나찰녀인지 야차녀인지 아주 피떡이 되었겠군요?”
그러자 홍기 도장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부끄럽구나. 나를 포함해서 매화검수 5명이 동시에 달려들었지만 그만 나찰녀를 놓치고 말았다. 그 마녀의 무공이 워낙 높아서 만약 일 대 일로 붙었다면 나라고 하더라도 그 마녀에게 지고 말았을 게야.”
홍기 도장의 말에 선우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사형께서는 매화검수단 중에서도 우리 화산파를 대표하는 운룡검수이신데 어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사형께서 그 마녀의 무공을 너무 높이 평가하시는 것이 아닌지요?”
“아니야. 내가 어찌 내 무공의 한계를 모르겠느냐? 우리가 조금만 늦었어도 우리 화산파 철부지 다섯 명의 목숨은 사라졌을 게야. 다행히 여기 계신 석 소협께서 목숨을 내놓고 전력을 다해 마교 놈들을 물리쳐주어서 저 어리석은 제자들 목숨은 구할 수 있었어.”
홍기 도장의 말에 석추명이 얼른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닙니다. 사실 저도 쩔쩔매던 차에 다행히 홍 선배님을 비롯하여 여기 계신 매화검수 선배님들께서 오셔서 겨우 위험에서 벗어났습니다. 제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석추명은 겸양을 하려고 한 말이 아니라 실제로 상황이 그랬기 때문에 아무런 사심 없이 한 얘기였지만 그 말을 듣고 선우호는 콧방귀를 뀌었다.
“흥! 석 소협의 무공이 얼마나 높은지는 모르겠으나 석 소협이 그 나찰녀를 상대할 수 있었다면 홍 사형께서는 대적하고도 남음이 있지요. 어찌 그리 겸양하십니까? 외부인 앞에서 지나친 겸양은 오히려 우리 화산파의 명성에 누가 될 뿐 아니겠습니까?”
선우호의 말에 석추명과 홍기도장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만회하려는 듯 홍기 도장이 다시 크게 웃으며 석추명에게 말했다.
“허허허. 선우 사제는 명예를 아주 중요시하지요. 무공은 제법 쓸 만하나 아직 마음을 비우지 못했으니 도사가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석 소협께서 이해해 주시오.”
홍기 도장의 말에 석추명이 얼른 다시 대답했다.
“이해라니요, 가당치 않습니다. 선우 선배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자 홍기 도장이 이번에는 선우호를 향해 말했다.
“선우 사제, 내가 지나치게 겸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실로 석 소협의 도움이 컸다네. 그리고 내 보아하니 석 소협은 무림의 뛰어난 인재일세. 자네도 우리 화산파를 대표하는 인재이니 두 사람이 찬찬히 서로 사귀어보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홍기 도장이 웃으며 권했지만 선우호는 석추명에게 고개도 돌리지 않고 여전히 차가운 목소리로 단칼에 거절했다.
“저는 사문을 밝히지 않는 사람에게는 관심 없습니다.”
선우호의 대답에 오히려 홍기 도장이 머쓱해지고 말았다.
“어허, 이 사람 말본새 하고는...!”
마침 그때 뒤처져서 오던 화산파 제자 다섯 명과 사소혜가 도착했다.
선우호는 옆에 손님들과 사형들이 있건 말건 신경 쓰지 않은 채 화결과 금린 등 화산파 제자들을 향해 대뜸 소리를 질렀다.
“네놈들은 지금 당장 본궁 뒤편 연무장에 집합한다. 나보다 늦게 도착하는 녀석은 각오해라!”
그러고는 홍기에게 포권을 취하나 싶더니 경공을 발휘해서 휘리릭 사라졌다. 화산파 제자 다섯 명은 그렇지 않아도 홍기 도장과 석추명이 경공 대결을 펼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죽을힘을 다해 달려왔는데 금천궁에 도착하자마자 작은 사숙인 선우호의 호통을 듣자 사색이 되었다.
숨도 제대로 돌리지 못하고 쩔쩔매며 다시 연무장으로 급히 달려가는 화산파 제자들의 모습으로 보아하니 선우호가 군기 담당인 듯했다. 그 모습에 사소혜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피식 웃었다.
홍기 도장은 누군가와 잠깐 얘기를 하더니 석추명에게 다가왔다.
“마침 장문인의 처소에 손님이 들었다 하니 이 아이를 따라가 좀 쉬고 계시오. 장문인께서 시간이 되시면 다시 연락을 드리리다.”
한 도동(道童)이 석추명과 사소혜를 조용한 별관으로 안내했다.
석추명과 사소혜는 두 사람만 남게 되자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왔다. 화산까지 쉬지 않고 달려온 데다 나찰녀, 흑련아와 싸우고, 화산파 제자들과 매화검수들을 만났다. 몸은 피곤했지만 자신들의 정체를 숨겨야 하기에 잔뜩 긴장했기 때문인지 정신은 여전히 말똥했다.
“화산파 사람들은 왜 이렇게 신교에 대한 원한이 깊을까요?”
사소혜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사소혜도 좌불안석이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글쎄. 나도 모르겠구나.”
“이렇게 속이고 있다가 갑자기 우리 정체가 들통이라도 나면 나찰녀의 말마따나 화산파 사람들이 떼로 몰려들 것 같아요. 특히 선우호라고 했던가, 그 기분 나쁘게 생긴 자식이 앞장서서 공격해올 것만 같아요.”
그러더니 사소혜가 몸서리를 치며 두 손으로 자신의 양팔을 문질렀다.
“으! 생각만 해도 기분 나쁘네요. 틀림없이 밴댕이 소갈딱지에 속이 시커먼 음흉한 놈일 거예요.”
사소혜의 말에 석추명은 피식 웃으면서도 한 가닥 불길한 생각을 그칠 수 없었다. 누군가가 자신들의 정체를 알아차리기도 한다면...!
그렇게 한 시진쯤 지나자 지객도인이 와서 장문인께서 두 사람을 기다린다는 전갈을 전해왔다. 석추명과 사소혜는 잔뜩 긴장한 마음으로 지객도인을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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