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 - 광세일소_한추영 - 1496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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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화. 길은 다시 엇갈리고 (6)
“앞으로는 맹 안으로 들어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어쩌자고 다시 들어온 게야?”
뜻밖에도 인기척의 주인은 맹주 남궁진악이었다. 기하진은 맹주전 불빛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맹주가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평소에는 나름 담이 크다고 자부하던 기하진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맹주가 다가오자 기하진은 자신도 모르게 습관대로 얼른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한쪽 무릎을 꿇는 것은 맹주에 대한 무림맹 내의 법도였다. 뜻하지 않게 맹주와 마주친 기하진의 가슴이 거세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뜨끈한 피가 머리로 솟구치면서 거친 맥박이 뛰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귀면쌍살도 과연 이런 식으로 맹주에 대한 예를 차렸을까? 맹주가 이상하게 여기지나 않을까?
고개를 숙인 채 포권을 취하고 있는 기하진의 이마로 식은땀이 맺혔다. 그런 기하진의 심경과는 달리 맹주는 뒷짐을 진 채 느긋한 걸음으로 기하진의 앞을 지나치며 주변을 살폈다. 맹주의 옷자락이 스르르 뱀처럼 움직이며 기하진의 손을 스쳤다.
“네 아내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흉수들이 초의공과 마교의 신임 수라대주라지? 날 파리 같은 것들. 앞으로 행동에 더욱 각별히 주의해라.”
기하진은 맹주의 말에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머리만 다시 숙였다. 혹시라도 대답을 했다가 맹주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챌까 봐 속이 조마조마했다. 입안에서 침이 바싹 말랐다.
맹주는 기하진이 아무 대답이 없자 이상한 듯 흘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더욱 낮추었다.
“지난번에 실패한 아미파 제자를 제거하거라. 이번에는 반드시 실수 없이 해야 한다.”
귀면탈 너머로 보이는 맹주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도 차갑게 번뜩였다. 맹주의 말을 들은 기하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미파 제자라면 설마... 남이를 말하는 것인가? 남이는 아미파 요혜신니의 제자이며 무림맹 용봉단의 조장으로 그동안 맹을 위해 분골쇄신해 왔는데, 그런 남이를 제거하라니...! 그동안 귀면쌍살이 명문정파의 후기지수들을 살해한 것이 정녕 모두 맹주의 명령이었단 말인가. 이 사람이 정파 무림맹의 하늘이요, 수장으로 일컬어지는 사람이 맞단 말인가.
순간 아찔하게 현기증이 일었다. 귀면탈 때문인지 숨이 답답하게 막혀왔다. 귀면탈을 벗어던지고 싶었다.
“쓸데없이 나돌아다니지 말고 그만 가보거라.”
맹주의 말에 기하진은 일어서서 허리를 숙였다. 그러고 나서 고개를 들다가 그만 맹주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평상시와 다르다고 느끼는 것일까? 맹주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기하진을 훑고 지나갔다.
캄캄한 밤, 어두운 나무 그늘에 몸을 숨기고 얼굴에는 귀면탈까지 쓰고 있었지만 맹주와 눈이 마주치자 혼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맹주가 금세라도 자신의 정체를 꿰뚫어 볼 것만 같았다. 심장이 다시 한번 요동치기 시작했다.
눈이 마주치자 기하진은 얼른 목례를 하고는 즉시 초상비(草上飛)를 전개했다. 맹주가 혹시라도 마음이 바뀌어 자신을 붙잡을까 봐 모든 공력을 다 끌어올렸다.
기하진의 발끝이 풀잎에 닿는가 싶더니 그 새 십여 장 밖을 달리고 있었다. 다시 발끝으로 툭, 툭 풀잎을 차더니 어느새 전각을 넘어 순식간에 맹주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전각 뒤로 사라지기 직전 잠시 뒤를 돌아보니 맹주는 그때까지도 거대한 은행나무 그늘에 서서 자신을 가만히 주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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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방으로 들어선 기하진은 후들거리는 발걸음으로 탁자 옆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목 안에 모래가 가득 찬 듯 칼칼했다. 탁자 위에 있던 찻주전자를 주전자 채 들고 벌컥벌컥 식은 차를 마셨다. 방으로 돌아와서 앉았건만 심장 고동 소리가 줄기는커녕 더욱 커지기만 했다.
기하진은 혹시나 해서 바로 자신의 거처로 오지 않고 무림맹의 주위를 돌면서 귀면탈과 검은색 장포를 처리한 다음, 한 시진 정도 지나서야 자신의 거처로 돌아왔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서도 연신 쿵쾅대는 가슴을 진정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통째로 예리한 칼에 깎여 나간 듯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석추명의 말이 맞았다. 맹주님이, 자신이 그토록 존경하던 스승 남궁진악이, 귀면쌍살의 뒤에 있었다. 그렇다면 그동안 귀면쌍살의 손에 죽어 나간 각 문파의 젊은 제자들도 모두 맹주의 지시로 죽은 것이란 말인가? 무당파의 금휼, 하북 팽가의 팽호, 곤륜파의 추성학, 종남파와 점창파의 제자들. 그리고 화산파의... 백무결!
기하진의 눈에 갑자기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천림원에 처음 올라와 어리둥절해 하던 자신에게 다가와 먼저 아는 척해주던 백무결의 선한 눈매와 부드러운 미소가 눈에 선했다. 검으로 허공에 매화를 수놓던 백무결의 기막히게 멋들어진 매화 검법도 생각났다. 무결, 지학과 함께 정파 무림의 주춧돌이 되자고 다짐했었는데.... 이제 자신의 옆에는 둘 다 없었다.
눈물이 기어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지학은 마교 놈들에게 죽었지만 무결을 죽인 것은 귀면쌍살이었다. 어쩌면 그것조차도 맹주의 지시였을지도 모른다. 왜, 도대체 왜 그랬을까? 맹주를 무림의 하늘로 알고 있던 무결이를, 정파의 피 끓는 청년들을 왜 죽이라고 한 것일까?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그동안 그것도 모르고 맹주의 말이라면 철석같이 믿고 따랐다. 맹주가 하는 말에 행여나 의심이 들면 자신의 충성심이 부족한 것이라고 여기고 자신을 더 채찍질했다. 수하들에게도, 예린이에게도, 추명이 형에게도 맹주를 의심하면 안 된다고 큰소리를 쳤었다. 정작 한 치 앞도 보지 못한 눈뜬장님은 자신이었으면서!
주화입마를 당한 자신을 치료해 주던 맹주의 행동도 가식에 불과했던 것인가? 나를 왜 제자로 받아들인 걸까? 평소 인자하다고 생각했던 맹주의 모습을 떠올리니 구역질이 났다. 그토록 맹주를 믿었던 자신이 너무나 어리석고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멍하니 한 곳만 응시하던 기하진의 눈매에 핏발이 섰다. 주먹을 움켜쥐었다. 싸워야 한다. 맹주와 싸워야 한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파 무림은 괴멸하고 말 것이다.
하지만 가슴이 답답했다. 나 혼자서 어떻게 해야 할까? 아니, 내가 이 이야기를 한다고 누가 믿기나 할까? 구대문파 장문인들이 선뜻 맹주를 몰아내는데 동참할까? 부맹주는 어떻게 해야 하고, 마교는 또 어떻게 해야 할까? 안팎으로 썩어 문드러진 무림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한참을 괴로워하던 기하진이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더욱 급한 일이 있었다.
남이! 남이가 다음 귀면쌍살의 목표다. 또다시 아까운 인명이, 정파 무림의 동량들이 맹주의 추악한 계획에 목숨을 잃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당분간 남이 옆에서 한시도 떨어져서는 안 되겠다.
사경이 다 끝나가는 시각이었지만 기하진은 즉시 남이의 처소로 달려갔다. 야심한 밤에 이렇게 불쑥 여인의 거처로 찾아가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도 하지 않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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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이제 거의 다 온 듯해요.”
사소혜가 더운 듯 손바람을 부치며 말했다. 하기야 가을이라 하더라도 아직 낮에는 햇볕이 따가운데 사소혜는 지금 머리에 커다란 방갓을 쓰고 그것도 모자라 두꺼운 붕대로 얼굴을 칭칭 감싸고 있었다. 붕대에는 일부러 누런 피고름을 묻혀 마치 흉측한 병에 걸려 온몸이 썩어들어가는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차림새는 석추명도 다르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누가 자신들을 알아볼까 봐 극도로 조심하며 화산이 자리한 화음현(華陰縣)으로 달려왔다.
“대주님, 화산에 간다고 비천검이라는 분을 찾을 수 있을까요?”
사소혜가 신경질적으로 손바람을 일으키며 석추명에게 물었다.
“그건 나도 모르겠어. 스승님께서 그분을 찾으라고 하셨으니 일단 화산으로 올 수밖에.”
사소혜가 더위를 참지 못하고 얼굴을 감싼 붕대를 아래로 잡아당기며 민얼굴을 드러냈다.
“더워서 더 이상 못 가겠어요. 어디 가서 목이나 축여요.”
사소혜의 말에 석추명이 빙긋 웃었다. 총단을 떠나서 오는 동안 계속 풀이 죽어있는 사소혜의 모습이 안쓰러웠는데 이제 조금 자신의 모습을 찾은 듯했기 때문이었다.
“마침 저기 객잔이 있군. 그럼 저기서 좀 쉬었다 갈까?”
두 사람은 객잔의 이 층으로 올라갔다. 이 층에는 화산파의 제자로 보이는 젊은 청년 너댓 명이 앉아 목소리를 높이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비록 방갓으로 가리기는 했으나 얼굴 전체를 붕대로 감싼 두 사람의 모습은 너무 기묘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절로 끌었다. 청년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더니 다시 이야기에 열중했다.
“그러니까 암만 생각해도 무림맹이 제구실을 못 하는 게 맞아. 그렇지 않고서야 귀면쌍살이 강호를 활개 치며 다닌 게 언제부터인데 아직도 못 잡느냐고.”
그중에 한 명이 분통을 터뜨렸다.
“맹주님이 의지가 없는 것이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구대 문파의 정예들로만 구성된 무림맹에서 어떻게 도둑고양이 같은 그놈 하나를 아직도 못 잡는단 말이야?”
“내 생각에는 구대 문파 장문인들도 문제가 있다고 봐. 무림맹에서 잡지 못하면 구대 문파가 나서서라도 잡아야 하는데 장문인들은 맹주 눈치만 보고 있잖아.”
다른 한 명이 분개한 듯 탁자를 내리치며 말했다.
“그래. 무결 사형이 돌아가신 지 벌써 이 년이 다 되어 가는데 어째서 아직도 그놈을 잡지 못하냐고. 장문인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우리라도 나서서 잡아야 해!”
화산파 제자들은 무림맹에서 아직도 귀면쌍살을 잡지 못하는 것에 강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석추명은 화산파 제자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다가 문득 멀리서 은은히 들려오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누군가 신교의 천리잠행보(千里潛行步)를 전개하여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발걸음 소리가 극히 가벼운 것을 보면 대단한 고수가 분명했다.
석추명은 손가락에 물을 묻혀 얼른 탁자 위에 썼다.
- 적이 쫓아 왔어. 얼른 몸을 숨겨야 해.
사소혜는 석추명이 쓴 글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화산파 제자들이 눈치채지 않게 자연스럽게 일어나 객잔 이 층에 있는 빈방 가운데 하나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 그리고는 바깥 동태에 귀를 기울였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누군가가 객잔 이 층으로 번쩍 나타나더니 간드러진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풋풋한 애송이들이 잔뜩 모여있군. 방금 여기로 남녀 한 쌍이 들어오지 않았느냐?”
그 목소리에 석추명은 깜짝 놀랐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나찰녀였기 때문이었다. 설마 했더니 정말 자신들의 뒤를 쫓아서 여기까지 추격해온 것이었다.
화산파 청년들은 상대방이 자신들을 애송이라고 부르자 불같이 화를 내며 벌떡 일어났다. 가뜩이나 귀면쌍살 얘기를 하면서 분개해 하던 참이었다.
“귀하는 누구신데 우리에게 그런 막말을 일삼는 게요? 애송이라니, 감히 화산 아래서 화산파 제자를 모욕하는 게요?”
청년들 중 겁 없는 청년 하나가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귀하께서 여인인 걸 다행으로 생각하시오. 남자였다면 그냥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오.”
그러자 나찰녀가 재밌다는 듯 다시 간드러지게 웃으며 말했다.
“그냥 넘어가지 않으면 어쩔 테냐? 애송이를 애송이라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한단 말이냐?”
나찰녀가 또다시 도발하자 화산파 청년 두어 명이 참지 못하고 검을 빼 들었다.
“뭣이라고! 그 말 당장 취소하지 못하겠소?”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나찰녀와 함께 온 누군가 중재를 하는 듯했다.
“이 분은 백련신교의 호법장로시오. 무례하지 마시오.”
하지만 정체를 밝히자 마치 불에 기름을 부은 듯 화산파 제자들이 벌떼처럼 들고일어났다.
“무엇이라고? 마교 놈들이란 말이냐? 마교 놈들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온단 말이냐?”
그 말과 동시에 화산파 청년들이 동시에 나찰녀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화산파 청년들은 나찰녀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나찰녀는 무기는 꺼내지도 않은 채 몸을 교묘히 피해 공격을 피하며 화산파 제자들의 검에 손가락을 한 차례씩 퉁겼다. 그 몸놀림이 어찌나 유연하고 잽싸던지 마치 잉어 한 마리가 물속을 힘차게 헤엄쳐 다니는 듯했다.
챙. 맑은 금속성과 함께 화산파 청년들의 장검이 대번에 차례대로 부러지더니 부러진 검날이 객잔 나무기둥에 나란히 일렬로 박혔다. 화산파 청년들은 이 광경에 부러진 장검을 손에 든 채 입을 쩍 벌리고 다물지 못했다.
“너희들이 왜 애송이인지 이제 알겠느냐? 그러니 내 물음에 답을 하려무나. 고통스럽게 죽기 싫다면 말이야. 호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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