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 - 광세일소_한추영 - 1486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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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화. 길은 다시 엇갈리고 (5)
계법사태가 개입하여 겨우 목숨을 건진 현암자는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계법사태는 선장을 움켜잡고 차갑게 기하진을 노려보았다.
“그러지 마시고 두 분이 같이 덤비시지요.”
기하진이 두 사람을 담담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 소리에 차갑게 냉정을 유지하던 계법사태마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잡고 있던 선장을 ‘쾅’ 소리 나게 내리쳤다.
“오늘 보니 기 단주가 이토록 기고만장한 이유가 있었구먼. 그게 소원이라면 들어줘야겠지.”
계법사태가 선장을 수평으로 휘둘러 기하진을 덮치며 현암자에게 소리쳤다.
“기 단주가 이토록 간절히 원하니 들어주는 게 선배의 도리인 듯싶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현암도장!”
현암자는 자기와 같은 무림의 대선배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후배와 싸우는 것이 내키지 않았으나 이미 자신과 공동파의 명예는 구겨질 대로 구겨진 다음이었다. 비록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더라도 저 애송이 단주 놈에게서 졌다는 자백을 들어야 그나마 분이 풀릴 것만 같았다. 게다가 이 싸움은 저놈이 제 입으로 제안한 것이 아닌가? 그러니 저 애송이 놈을 합공하다고 해서 우리를 비난할 수는 없으리라.
현암자는 마음을 정하자 즉시 불진을 떨치며 계법사태의 좌측에서 보조를 맞추어 기하진을 공격했다.
기하진은 무림 선배라는 사람들의 작태에 쓴 웃음을 지었다. 비록 이 대 일의 싸움이지만 자신이 지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중양신공 대주천을 완성한 이후로는 아무리 공력을 사용해도 공력이 고갈되는 경우가 없었다. 그래서 두 명이든, 세 명이든 두렵지 않았다.
계법사태의 선장과 현암자의 불진이 좌우에서 동시에 기하진을 압박해왔다. 두 병기가 하나는 단단하고 길며, 하나는 부드럽고 짧아 각자 상대방의 단점을 보완하며 공격해오니 기하진은 얼른 빈틈을 찾기가 어려웠다.
빈틈이 없으니 빈틈이 생기도록 해야겠군. 기하진이 두 사람의 공격을 피해 몸을 십여 척이나 공중으로 띄워 올리더니 도약자세 그대로 수평으로 이동하며 검을 들고 두 사람을 찔러 들어갔다.
그 모습에 계법사태와 현암자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사람이 어찌 위로 솟구치다가 돌연 수평으로 이동할 수 있단 말인가. 세상에 이런 신법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기에 두 사람이 느낀 놀라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냥 놀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기하진은 수평으로 검을 찔러오는가 싶더니 돌연 몸을 번쩍 솟구쳐 위에서 아래로 찔러오고, 앞에서 공격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뒤에서 다시 검광을 뿌려댔다. 그러면서도 기하진의 움직임은 갈수록 빨라져 나중에는 두 사람의 주위를 마치 팽이처럼 핑핑 도는 것만 같았다.
“윽!”
두 사람 중 공력이 좀 더 낮은 계법사태가 그 지독한 속도에 현기증이 나서 잠시 몸을 비틀거렸다. 눈 깜짝할 사이였지만 기하진은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손바닥을 훌러덩 뒤집더니 번개같이 계법사태의 어깨를 내리찍었다.
“위험하오!”
그 모습에 현암자가 놀라서 급히 불진을 휘둘러 계법사태를 보호하려 했으나 이미 기하진의 손바닥은 계법사태의 어깨를 스치고 난 뒤였다. 계법사태는 집채만 한 바윗덩어리가 어깨를 짓누르는 듯한 엄청난 무게감에 그만 휘청거리더니 땅바닥에 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앗. 사태님!”
그 모습에 아미파 여승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기하진은 손을 앞으로 쭉 뻗어 현암자의 불진 끄트머리를 움켜잡았다. 졸지에 적의 손에 병기가 잡힌 현암자는 당황하여 몇 번이나 공력을 주입하여 불진을 털어 내려 했으나 어떻게 된 일인지 기하진의 손은 요지부동, 불진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당황한 현암자의 얼굴을 바라보던 기하진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다 하셨으면 이번에는 제가 한번 해 보지요.”
기하진이 불진을 잡아당기자 불진을 붙잡고 있는 자신마저 딸려 가는 게 아닌가. 현암자가 대경실색하여 급히 마보 자세를 취하고 ‘얍!’하고 기합을 넣으며 딸려 가지 않으려고 버티자 불진이 ‘퍽’하는 소리와 함께 대번에 반으로 나뉘고 말았다. 어느새 자신의 손에는 앙상한 총채자루만 남아있었다. 현암자는 그 총채자루를 멍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저 어린놈의 내공이 자신을 능가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지 않았다.
기하진이 단번에 세 명의 원로 고수들을 제압하자 사람들은 모두 놀라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기하진이 다가서자 기하진과 천옥랑의 퇴로를 막고 있던 종남파와 공동파의 도사들이 즉시 양쪽으로 물결처럼 갈라지며 길을 열었다.
기하진이 몇 걸음 가다가 몸을 돌리고 세 사람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그럼 불초 후배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세 분 선배님은 무림맹에서 보시려던 용무를 마저 보시지요.”
기하진과 천옥랑은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수십 개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으며 그 자리를 유유히 벗어났다.
*****
“노인네들 얼굴이 정말 볼 만했겠구나. 으하하하.”
사마경의 이야기를 듣던 맹주 남궁진악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사마경은 오늘 낮에 공동, 종남, 아미 3개 문파의 장로들이 어떻게 기하진의 손에 단번에 박살이 났는지 고해 올리는 중이었다.
손짓 발짓 섞어가며 설명하는 사마경과 이에 배꼽을 잡고 웃는 맹주 남궁진악과는 달리, 정작 기하진은 무표정한 눈빛으로 맹주전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석추명이 했던 말이 자꾸 떠올랐다. 귀면쌍살과 맹주님이 관계되어 있다니 절대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기하진이 귀면쌍살 뒤를 쫓으려고 할 때마다 정작 맹주는 귀면쌍살보다 초의공을 쫓으라고 했었다. 초의공이야말로 당시 귀면쌍살과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는데 초의공을 추격하는 것은 오히려 귀면쌍살의 활로를 열어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식으로 정작 자신도 귀면쌍살을 쫓는 초의공을 몇 차례나 방해했었다.
그리고 당시 귀면쌍살에게 납치되었던 남궁척이 아무런 상처 없이 돌아온 것도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구대문파 후기지수들을 보면 웬만해서는 절대 살려두지 귀면쌍살이 남궁척을 왜 살려두었을까? 남궁척은 맹주를 배출한 남궁세가의 장남이다. 그런데 남궁척을 살려서 보낸다? 그것도 아무런 상처도 없이? 남궁척의 처지에서 보면 다행스러운 일이겠으나 그동안 귀면쌍살이 해온 행적을 보면 납득이 가지 않았다.
잠시 딴생각을 하던 기하진은 맹주의 목소리에 급히 정신을 차렸다.
“기 단주가 아주 잘해주었다. 이제부터는 구대문파에서도 부맹주 일을 함부로 입에 담지 못할 것이야. 또 누군가가 부맹주의 일을 캐묻는다면 기 단주가 이번처럼 다시 나서서 해결하기 바란다.”
맹주의 말에 기하진의 양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당시 자신이 나선 이유는 위기에 빠진 천옥랑을 구하고 실추된 용봉단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서였지 절대로 부맹주를 비호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부맹주의 악행은 차고 넘치는데 어찌 자신이 그런 악당을 보호할 수 있겠는가.
기하진은 얼른 맹주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맹주님, 당시 제가 부득이 원로 선배님들과 맞선 것은 절대 부맹주를 감싸기 위한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부맹주는 마교와 짜고 지난번 사천대전을 일으킨 흉수입니다. 부디 이번 일의 진상을 조사하시어 부맹주 뿐만 아니라 관련된 자를 모조리 색출하여 일벌백계하시고 무림맹의 기강을 바로잡으시기 바랍니다.”
기하진이 다시 맹주에게 부맹주를 벌하라고 충언을 올렸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몰랐다. 부맹주는 반드시 찍어내야 할 무림맹의 암 같은 존재. 맹주님도 그 사실을 분명히 아실 텐데 어쩌자고 자꾸만 부맹주를 감싸고 도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기하진의 충언에 맹주가 기분이 상한 듯 앉아 있던 의자의 팔걸이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기 단주, 부맹주 일은 입에 담지 말라고 내, 말하지 않았더냐? 맹의 대업을 위해서 조그마한 악행은 감수할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거늘, 어찌 기 단주는 아직 그 작은 이치도 모르는 게야! 그러니 다들 기 단주를 얕보는 게 아니냐!”
맹주가 노여워하자 기하진은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맹주님.”
“나도 부맹주가 한 짓은 잘 알고 있다. 내가 왜 모르겠느냐? 다만 나는 부맹주와 그 일당을 일망타진할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이니라. 그러니 기 단주는 군말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느니라. 알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맹주님.”
맹주를 스승으로 모신지도 어언 삼 년이 다 되어 가건만 맹주에 대한 심적 거리는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맹주와 기하진의 관계는 늘 주군과 신하의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기하진이 물러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사마경이 기하진이 밖으로 나가자 목소리를 낮추어서 맹주에게 말했다.
“기 단주의 무공이 처음에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너무 지나치게 높아졌습니다. 무공이 높으면 쓸모는 많겠지만 기 단주의 성격이 대쪽 같으니 앞으로 우리 일을 추진하기에 혹시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우려스럽습니다.”
“흠, 나도 저 녀석의 무공이 갑자기 급진전한 것이 의아스럽네. 하지만 저 녀석은 내 명령이라면 거역할 생각을 못 할 테니 걱정할 필요 없네. 애초에 우리가 저 아이를 선택했던 이유는 고아였기 때문이야. 저 아이는 자신을 보호해줄 방패막이 세력이 없어. 그만큼 우리가 이용하기에 좋아. 당시 총군사의 안목이 정확했던 것이지.”
“황공합니다. 맹주님.”
“쓸 만큼 써먹다가 더 이상 필요 없으면 버려야지. 괜히 붙잡고 있을 필요가 있겠는가?”
맹주가 슬쩍 덧붙이는 말에 사마경은 속이 뜨끔하여 얼른 고개를 숙였다. 형식적이기는 하나 기하진은 사제의 관계를 맺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마저도 서슴지 않고 토사구팽(兎死狗烹)하려는 맹주의 잔인함에 사마경은 속으로 몸서리쳤다. 바짝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언제 자신의 차례가 올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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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거처로 돌아온 기하진은 뭔가 마음이 씁쓸했다. 자꾸만 중요한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추호도 부맹주를 비호할 생각은 없었다. 자신도 부맹주가 이번 사천대전의 흉수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오히려 3개 문파의 장로들과 같은 편에 서서 총군사 사마경과 맹주님을 압박해야 맞는 일이었다.
그런데 하다 보니 오히려 그 반대로 부맹주를 비호하고 말았다. 그 바람에 맹주의 칭찬을 들었으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게다가 앞으로 공동, 종남, 아미 3개 문파는 자기를 원수처럼 여길 것이 자명했다.
“후!”
기하진이 한숨을 내쉬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가슴이 답답했다. 머릿속에 조금 전 맹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일망타진이라... 무엇을 더 일망타진한다는 말인가? 일단 부맹주를 잡아들이고 나면 관련된 자들은 자연히 그물망처럼 엮여 나올 것인데.
부맹주를 벌하라고 주청을 올릴 때 맹주가 짓던 눈빛이 떠올랐다. 그 눈빛은 절대 자신을 제자로 여기는 눈빛이 아니었다. 충성스러운 신하로 보는 눈빛도 아니었다. 싸울 상대를 앞에 두고 적개심을 내뿜는 맹수와 같은 눈빛이었다.
기하진이 나쁜 생각을 털어 내려는 듯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벌떡 일어났다. 심호흡을 하다가 문득 방 한구석에 놓인 작은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상자인지 얼른 기억이 나지 않았다. 상자 뚜껑을 열자 안에는 놀랍게도 정성스레 만든 귀면탈이 하나 들어 있었다.
“...!”
그제야 기억이 났다. 얼마 전 기하진은 머리나 식힐 겸 항주의 시장에 나갔었다. 이곳저곳을 무심코 구경하던 기하진은 마침 경극 도구로 쓰이는 각종 탈을 파는 가게 앞을 지나다가 귀면탈을 보게 되었다. 귀면쌍살이 쓰는 것과 똑같지는 않았으나 상당히 비슷했다. 그때 무슨 생각에서인지 기하진은 그 탈을 샀었다. 가게 주인이 삼십 년 동안 탈만 만든 장인이 만든 것이라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던 일이 기억났다.
귀면탈을 만지작거리던 기하진의 머릿속에 얼마 전 임예린이 한 말이 떠올랐다.
‘오라버니의 무공이 이제 귀면쌍살과 비슷한 정도이니 오라버니가 귀면탈을 쓰고 맹주 앞에 나가서 귀면쌍살인 척하는 것이죠. 맹주가 잡으러 오면 대번에 내빼면 될 것이고, 아니면 맹주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한번 들어보면 맹주와 귀면쌍살 간의 관계를 알 수 있지 않을까요?’
한참 동안 귀면탈을 만지작거리던 기하진이 결심한 듯 귀면탈을 얼굴에 썼다. 동경을 통해 바라보니 마치 자신이 귀면쌍살처럼 보였다. 일부러 검은 장포를 둘러 보았다. 만약 지금 누군가 자신을 본다면 귀면쌍살이 나타났다고 난리를 칠 것만 같았다.
시각은 이미 삼경도 훨씬 지난 밤.
기하진은 충동적으로 귀면탈을 쓰고 그대로 경공을 발휘하여 맹주전으로 달려갔다. 밤바람이 차갑게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맹 내 경계병의 위치를 훤히 꿰뚫고 있던 기하진은 아무런 걸림도 없이 어느새 맹주전에 도착했다.
늦은 밤인데도 맹주전의 불은 꺼지지 않고 있었다. 맹주의 전각에서 약 백오십여 척 떨어진 곳에 있는 커다란 은행나무 그늘에 몸을 숨겼다.
뭘 어찌해보려고 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저 답답한 마음에 즉흥적으로 귀면탈을 쓰고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었다.
나무 그늘에서 가만히 맹주전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을 바라보던 기하진이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귀면탈을 쓰고 여기로 오다니 자신이 생각해도 정신 나간 행동이었다. 만약 누군가 자신을 본다면 반드시 귀면쌍살로 오해할 것만 같았다. 그때 가서는 아무리 자신이 진짜 귀면쌍살이 아니라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자신의 치기 어린 행동을 한심하게 여기며 기하진이 자신의 처소로 돌아가려고 몸을 돌리는 순간, 갑자기 옆에서 인기척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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