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94화 (94/201)

#   94 - 광세일소_한추영 - 1484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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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화. 길은 다시 엇갈리고 (4)

“저는 기하진이라고 합니다.”

기하진의 말에 계법사태는 깜짝 놀랐다. 자신은 당시 다른 일이 있어서 사천대전에 참전하지 못했지만 기하진 얘기는 사매들에게 귀가 닳도록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하진이 약관에 불과하자 소문이 과장되었다고 생각하며 다시 냉소를 지었다.

“소협께서 기 단주시군. 당시 빈니는 다른 중요한 임무가 있어서 나중에 참전했소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내 말이 거짓이 아님은 기 단주도 잘 아실 것이오.”

뻔뻔스럽게 나오는 계법사태의 말에 기하진은 할 말이 없었다. 나중에라도 참전했다는 말이 그다지 믿기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계법사태에게 사천대전에 참전했다면서 자신의 얼굴은 왜 모르냐고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기하진의 표정을 본 계법사태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천 공자는 잠시 빈니와 함께 있어야 하겠소이다. 부맹주께서 나오시면 보내드리리다.”

계법사태의 말에 천림원주 공각대사가 노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사태, 지금 무림맹 안에서 무림맹의 부단주를 인질로 잡을 셈이오? 이런 경우가 어디 있단 말이오?”

공각대사는 소림 방장의 사제로 연배로 따진다면 계법사태보다 훨씬 선배였다. 그러나 계법사태는 조금도 어려워하는 기색 없이 공각대사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응수했다.

“지금 경우를 따지게 되었습니까? 부맹주가 마교와 손을 잡고 무림 동도들을 공격한 것은 그럼 무슨 경우랍니까?”

깐깐하게 물고 늘어지는 계법사태의 말에 공각대사마저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상대방의 태도가 무례하긴 했으나 틀린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계법사태는 무림 선배인 공각대사마저 말로써 물리치자 더욱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천옥랑은 얼굴이 시뻘게진 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때 기하진이 천옥랑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옥랑, 너는 용봉단의 부단주로서 외부인 앞에서 용봉단의 명예를 실추시켰으니 칠 일간 외출과 외부인 접견을 금하겠다.”

그러고는 손을 번쩍 쳐들더니 그대로 천옥랑의 등짝을 내리쳤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저마다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용봉단의 기율이 아무리 엄하다고 하더라도 뭇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단주가 부단주에게 매질을 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기하진이 천옥랑의 등짝을 내리치자마자 천옥랑의 팔을 움켜잡고 있던 계법사태의 손이 튕기듯이 떨어져 나간 것이다. 그것만으로는 모자라서 계법사태는 심지어 두어 걸음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기까지 했다.

계법사태는 속이 울렁거려 얼른 자세를 바로 하지 못하고 잠시 심호흡을 해야 했다. 그리고는 두 눈을 부릅뜨고 기하진을 바라보았다. 직접 당하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방금 기하진이 구사한 것은 산을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 있는 소를 때린다는 격산타우(隔山打牛) 신공이 아닌가? 아니 겨우 약관을 갓 넘긴 젊은 단주가 수십 년 내공을 수련한 자신도 구사하지 못하는 무공을 어떻게 쓴단 말인가?

천옥랑은 3개 문파 장로의 접근을 막으려고 기하진이 일부러 자신에게 칠 일간의 금족령을 내린 사실을 눈치채고는 계법사태가 자신의 팔을 놓자마자 얼른 기하진의 뒤로 물러서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명 받들겠습니다. 단주님!”

천옥랑이 그 자리에서 빠져나가려 하자 돌연 종남파와 공동파의 도사들이 우르르 몰려들며 천옥랑의 뒤를 차단했다. 굳이 가려고 한다면 갈 수야 있겠지만 두 문파와의 충돌이 불가피한 상황이라 천옥랑은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무림의 선배라는 분들이 지금 무림맹 안에서 저희 부단주를 협박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힘으로 억압하려 하십니까?”

기하진의 양 눈썹이 하늘로 치솟았다. 그러자 계법사태가 다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누가 힘으로 억압하겠다고 했소? 우리는 그저 부맹주를 만나고 싶을 뿐이오.”

“그렇다면 부맹주님을 찾아가실 것이지, 어째서 다른 사람을 핍박하십니까? 이러시고도 정파 무림의 선배라고 할 수 있습니까? 마교가 하는 짓거리와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기하진이 따지자 현암자가 쩌렁쩌렁 고함을 질렀다.

“무엇이 어쩌고 어째? 기 단주의 말은 우리가 마교와 똑같다는 뜻이냐?”

현암자는 기하진이 새파랗게 젊기에 어느새 존칭을 생략하고 있었다. 공동파의 선임 장로인 현암자가 보기에 기하진은 까마득한 후배였다. 그러니 당연히 존칭 따위는 필요 없을 것으로 여긴 것이다.

“새파랗게 젊은 단주가 하늘 같은 선배님들께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이러니 무림맹이 욕을 들어먹는 게야!”

이번에는 종남파의 청풍 도장이 카랑카랑한 소리로 기하진을 비난했다. 금방 출수라도 할 듯한 기세였다.

무림맹에 3개 문파의 장로들이 와서 무림맹의 단주를 꾸짖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무림맹 측의 제일 어른인 사마경이 이를 중재해야 하지만 사마경은 오히려 이 광경을 재밌다는 듯이 지켜보기만 하는 것이 아닌가.

기하진보다 훨씬 선배인 남천단주 원무개는 이번 일이 부맹주와 관련되자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괜히 속이 찔끔해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공각대사는 인상을 찌푸리기는 했으나 3개 문파 장로들이 제기했듯이 이번 사천대전의 배후에 부맹주가 있는지는 반드시 밝혀야 할 중요한 문제라 선뜻 나설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무림맹 선배라 하는 자들은 누구 하나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기하진은 차가운 표정으로 현암자와 청풍 도장, 계법사태를 바라보더니 성큼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말로는 보내주시지 않을 모양이군요. 좋습니다. 그렇다면 이 버릇없는 후배가 부득이 선배님들께 한 수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어느 분이 먼저 가르침을 내리시겠습니까?”

말은 정중하게 했으나 기하진의 눈빛은 도전적이었다. 할 테면 어디 한번 해보자는 눈빛이었다. 불의한 것을 보면 참지 못하는 기하진의 성격에 세 문파의 장로들이 불을 지른 셈이었다.

계법사태는 방금 기하진이 격산타우 신공으로 자신을 가볍게 밀친 데다, 사제들에게 들은 이야기도 있어서 선뜻 나서지 않고 사태를 관망했다. 그러자 말 많고 나서기 좋아하는 청풍 도장이 불진을 휘두르며 대뜸 앞으로 걸어나갔다.

“빈도가 먼저 가르침을 내리마. 마침 나는 종남파에서 계율당 당주 직을 맡고 있느니라. 차후에 맹주님께 무림맹의 계율을 엄격하게 다시 세우시도록 건의하겠지만, 오늘은 특별히 자네에게 먼저 가르침을 내리겠다.”

청풍 도장은 쉬지 않고 일장 연설을 하더니 기하진에게 대뜸 물었다.

“자네의 출신 사문이 어딘가?”

“저는 출신 사문이 달리 없습니다. 무공은 모두 무림맹에서 배웠습니다.”

그 말에 청풍 도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차며 손가락질을 했다.

“그러니 이 모양이군. 이래서 사람은 근본이 중요한 법이야. 쯧쯧.”

청풍 도장의 말에 기하진은 눈에서 불꽃이 일었으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포권을 취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청풍 도장이 다시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젊은 나이에 단주가 되었으니 한 가닥 실력이야 있겠지. 하지만 그 실력만 믿고 버릇없이 선배를 우습게 여길 것이 아니라 사람이 겸손할 줄 알아야 해. 강호에는 자네보다 뛰어난 고수가 수도 없이 많다네. 그래서 강호를 와호장룡의 세계라고 하는 게야.”

청풍 도장이 또 한바탕 잔소리를 늘어놓자 기하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마음 같아서는 제일 먼저 청풍 도장의 입을 때려서 아무 소리도 못 하게 만들고 싶었다.

“선배인 내가 후배와 똑같이 싸울 수야 있나? 내 자네에게 3 초식을 양보하지. 자, 먼저 공격해 보게나. 따끔한 맛을 볼 각오는 하고 말이야.”

3초를 양보한다는 말에 기하진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또다시 일장 연설을 듣게 될까 봐 아무 소리 하지 않고 손바닥을 휘둘렀다.

“오호라, 맹주의 독문 무공, 천룡파천장이군. 아무리 뛰어난 무공이라도 하더라도 무공을 시전하는 자의 깨달음이 얕으면 아무 소용이 없―!”

청풍 도장은 또 꼬투리를 잡으려고 했으나 말을 끝내기도 전에 황급히 쌍장을 들어올려야 했다. 기하진의 장력이 산을 무너뜨릴 듯이 자신의 가슴을 노리고 쇄도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청풍 도장의 손바닥에 기하진의 장력이 닿는 순간 청풍 도장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서너 걸음이나 뒤로 주르르 밀렸다.

이 모습에 공동파와 종남파의 제자들이 깜짝 놀라 ‘앗!’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청풍 도장이 누구던가? 종남파 제일의 고수이자 원로가 아닌가? 그런 청풍 도장이 어찌 한낱 애송이의 손바닥 놀음에 뒷걸음질을 친단 말인가!

당황한 청풍 도장이 즉시 천근추 무공을 시전하여 몸을 멈추려고 했으나 기하진이 내지른 힘줄기가 성난 파도처럼 쉬지 않고 몰려오는 통에 또다시 서너 걸음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그런 식으로 청풍 도장은 이십여 척이나 뒤로 주르르 밀리더니 결국에는 중심을 잃고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무림 원로 청풍 도장이 어디서 이런 수모를 겪어봤을까? 후배와 장력을 겨루다가 엉덩방아를 찧다니 청풍 도장 개인의 명예뿐만 아니라 종남파 전체의 명예가 실추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청풍 도장은 그때까지도 기하진의 공력이 그토록 높으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하고 단순히 뭔가 속임수가 있다고 여겼다.

“이노옴! 어디서 감히 사술을 부리는 것이냐!”

얼굴이 터질 듯이 시뻘게진 청풍 도장이 등 뒤에서 자신의 무기인 청풍고검(靑風古劍)을 뽑아 들더니 땅을 박차며 찔러왔다. 종남파가 자랑하는 태을분광검법(太乙分光劍法)을 펼친 것이다.

청풍 도장이 검으로 공격해 들어오자 기하진은 조금도 방심하지 않고 바로 검을 뽑으며 창궁무애검법을 펼쳤다.

챙, 챙, 챙, 챙.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났다. 청풍 도장이 펼치는 태을분광검법은 강호에서 상대를 찾기 어려울 만큼 쾌검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번번이 기하진의 검에 가로막히는 것이 아닌가. 청풍 도장이 이를 악물고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러도 여전히 기하진의 검에 검로가 모두 봉쇄되고 말았다.

청풍 도장의 안색이 참담하게 일그러지자 기하진이 씨익 웃으며 한마디 했다.

“강호는 와호장룡의 세계라, 하하 정말 명언입니다.”

그 말과 함께 기하진이 검을 휘두르자 청풍 도장의 검 끝이 ‘띵!’ 소리를 내며 부러지고 말았다.

“이, 이럴 수가!”

청풍 도장이 부러진 검을 바라보며 부르르 떨었다. 청풍고검은 전대 장문인이었던 자신의 사부가 남겨준 유품이었다. 그동안 숱한 격전을 치르면서도 날 한번 상한 적이 없는데 오늘 그만 무림맹의 애송이 단주 손에 부러지고 만 것이다.

청풍 도장이 넋이 나가 털썩 주저앉자 종남파 제자들이 우르르 달려와 청풍 도장을 에워싸더니 뒤로 물러났다. 기하진의 신공을 눈으로 본 종남파 제자들은 감히 다시 도전할 생각은 못 하고 화난 눈초리로 입을 꾹 닫고 있었다.

청풍 도장이 물러나기 무섭게 이번에는 현암자가 불진을 휘두르며 맹공을 퍼부어 왔다.

“흥! 한 가닥 감춘 실력은 있구나. 어디 빈도에게도 한번 펼쳐 보거라.”

현암자의 불진이 기하진의 검을 대번에 휘감아 왔다. 과연 공동파 제일 장로인 현암자의 공력은 웅후하기 짝이 없었다. 현암자가 힘주어 불진을 잡아당기자 검이 부러질 듯 휘는 게 아닌가! 버티려면 버틸 수는 있겠으나 그러면 금방이라도 검이 부러질 것만 같았다.

그 순간 기하진이 현암자의 가슴을 향해 검을 집어 던지더니 동시에 땅을 박차고 날아오르며 공중에서 현암자를 향해 쌍장을 휘둘렀다.

현암자는 기하진의 검이 자신이 잡아당기는 힘까지 더하여 맹렬한 속도로 가슴을 향해 날아오자 깜짝 놀랐다. 불진을 휘둘러 검을 막자니 기하진의 쌍장을 막지 못하겠고, 기하진의 쌍장을 막자니 기하진의 검이 금방이라도 자신의 가슴을 꿰뚫을 것만 같았다.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그 모습에 깜짝 놀란 계법사태와 공각대사가 동시에 소리쳤다.

“손을 멈추어라!”

현암자의 목숨이 위험하다고 생각한 공동파 제자들이 일제히 검을 빼 들고 달려왔다.

“사부님!”

현암자에게서 가장 가까이 있던 계법사태가 즉시 육중한 선장을 휘둘러 기하진의 검을 내리쳤다. 허락도 없이 다른 사람의 비무에 끼어드는 것은 강호의 금기였으나 지금은 그런 관례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챙’하는 소리와 함께 기하진의 검이 땅바닥에 떨어지고 동시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계법사태의 선장이 맹주전 앞마당에 내리꽂히면서 청석판이 부서져 돌가루가 사방으로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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