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93화 (93/201)

#   93 - 광세일소_한추영 - 1482049

#

제92화. 길은 다시 엇갈리고 (3)

부맹주 천계심이 머릿속이 하얘졌다. 내가 무욕자를 죽인 것을 맹주가 어떻게 알았을까? 그때 주위에 아무도 없었는데. 아무도... 아니다. 한 명 있었다. 바로 자신의 아들, 천옥랑이 있었다.

“너무 놀라지 마시오, 부맹주. 나는 무림맹에 대한 부맹주의 충성심을 맹에 속한 모든 문파의 제자가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오. 물론 일부 문파에서 부맹주의 행적을 의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오. 하지만 부맹주는 내 사람이니 이 남궁진악이 책임지고 보호해 주리다. 부맹주와 무욕자 간에 있었던 일도 철저히 비밀에 부치겠소이다. 하하하.”

그때야 천계심은 자신이 맹주 남궁진악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남궁진악은 그저 ‘허허’하고 웃기만 하는 무골호인이 아니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모습이 맹주의 본모습이었다.

문득 맹주를 때려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불처럼 치솟았다. 천계심은 자신의 무공이면 가능하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옆에 음양사자인지 고양이인지 하는 년이 있으니 지금은 어쩔 수 없다. 맹주가 원하는 것을 줄 수밖에. 하지만 이 수모는 반드시 갚아주마, 남궁진악!

천계심의 양미간이 꿈틀거렸다.

“무얼 원하시오?”

천계심이 기다란 탁자 저쪽 끝에 앉은 맹주를 바라보며 내뱉었다.

“역시 부맹주는 상황 파악이 빠르시군. 지난번 마교와 손을 잡고 사천대전을 일으킨 것은 정말 잘했소이다. 내 마음을 어떻게 읽었는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내 마음에 쏙 들게 해주었소. 그 싸움으로 청성파와 아미파의 예기가 상당히 깨졌소이다. 두 문파 모두 당분간 재기하기 어려울 것이오. 그리고 소림사 후기지수 중 제일이라는 녀석이 죽은 것도 의외의 성과였소. 으하하하.”

천장이 높은 맹주전의 구조 때문인지 맹주의 웃음소리가 공명을 일으키며 메아리쳤다. 이때만 하더라도 천계심은 맹주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맹주가 문득 웃음을 멈추고 다시 부맹주를 바라보았다. 평소와는 달리 맹주의 두 눈에서 시퍼런 안광이 번뜩였다.

“한 번 더 마교와 손을 잡고 천린상단을 공격하시오. 이번에는 낙양쯤이 좋을 듯하오. 소림과 무당이 한꺼번에 쑥대밭이 될 수 있도록. 흐흐흐.”

맹주의 말에 부맹주는 온몸의 털이 꼿꼿이 일어서는 느낌이 들었다. 그제야 맹주가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섬광처럼 다가왔다. 단순히 구대문파와 오대세가 위에 군림하려 했던 자신의 야망은 맹주의 야욕에 비하면 차라리 순박한 편이었다. 맹주는 문파를 말살하여 문파별 구분을 없애고 강호를 하나의 거대한 제국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그 모든 것 위에 군림하는 무림의 황제가 되려는 것이겠지.

천계심은 무림맹에 몸을 담은 이후 처음으로 맹주가 두려워졌다. 내색은 안 했으나 심장은 밖으로 튀어나올 만큼 이미 요동치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손에서 식은땀이 났다.

“지난번 사천대전에서 마교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어 선뜻 응할지 모르겠소이다.”

천계심이 주저하듯 말하자 맹주의 입에서 음산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맹주가 천계심을 힐끗 쳐다보았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에는 조롱기가 묻어났다.

“부맹주, 자신의 위치를 잊지 마시오. 나는 부맹주에게 부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을 하는 거요. 만약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부맹주는 아마 무림 공적이 되어 두 번 다시 강호에 발을 붙일 수 없을 것이야.”

맹주의 낮은 목소리가 천계심의 귀에서 화약처럼 폭발을 일으켰다. 맹주의 어투도 한참 아랫것들에게 하는 말투처럼 어느새 바뀌었다. 천계심은 자신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키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반드시 성사시키겠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말투가 공손해졌다. 그제야 맹주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좋소. 나가보시오.”

천계심은 심호흡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발걸음마저 후들거리는 것만 같았다. 평소에는 몇 걸음 되지도 않는 거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멀게 여겨졌다. 천계심이 문을 열려고 하자 맹주가 문득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또 한 가지. 딴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요. 부맹주는 현명한 사람이니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 거라고 보오.”

천계심은 맹주의 말을 다 듣고 난 후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밖은 희뿌연 어둠에 잠긴 채 고요하기만 했다. 문득 지난 몇십 년 동안 보아왔던 무림맹 전각들이 낯설게 느껴졌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천계심이 돌연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

기하진은 자신의 처소인 용봉각(龍鳳閣)에서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맹주의 뜻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얼핏 맹주가 일부러 부맹주를 감싸고 도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이번 사천대전은 부맹주가 마교와 짜고 일으킨 것이 분명하다. 그 책임을 엄중히 물어 당장 부맹주직을 박탈할 뿐만 아니라 뇌옥에 가두고 관련자들을 모조리 색출하여 일벌백계해도 모자랄 판에 맹주는 계속 관망하는 자세를 취했던 것이다.

기하진이 부맹주의 죄상을 고하면서 강호의 의(義)를 바로 세우고 땅에 떨어진 무림맹의 위신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부맹주를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맹주는 다른 말 없이 한 마디만 던졌을 뿐이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때가 되지 않았다는 것일까? 그때 밖에서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천옥랑이 사색이 된 표정으로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기 단주, 큰일 났어.”

기하진이 다시 단주로 복귀하면서 자연스레 부단주로 돌아온 천옥랑은 지난 사천대전이 끝난 이후 얼굴 보기가 쉽지 않았다. 지난번 싸움에서 청성파는 무참히 패한 데다 장문인마저 목숨을 잃자 결국 봉문(封門)을 선택했다. 다시 재기하기 전까지는 어떤 강호사에도 관여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천옥랑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버팀목이 되어줄 사문이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부맹주와 마교의 관계를 의심하는 말들이 나돌면서 천옥랑은 거의 두문불출하다시피 했다. 그랬던 천옥랑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오랜만이로군, 천 부단주. 무슨 일인데 그래?”

“지금 종남파와 공동파, 아미파에서 사람들이 몰려와서 맹주전으로 가고 있어.”

“무엇 때문에?”

기하진의 말에 천옥랑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그것이... 아마도 내 아버지와 관련된 일 같아.”

“부맹주님과 관련이 있다니?”

“요즘 무림에 사천대전이 발발한 원인 뒤에 내 아버지가 있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퍼지는 모양이야. 아마도 3개 문파 장로들이 그 소문의 진위를 따지고자 온 것 같아.”

천옥랑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 모습을 보니 안쓰럽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부맹주의 죄를 덮을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 부맹주는 이미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맹주님께서 우리 아버지를 버리실까? 아버지가 한 짓을 생각하면 그런다 하시더라도 이상할 것은 없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 아버지는 어떻게 되는 거지?”

늘 패기만만하고 거침이 없던 천옥랑이 불안한 듯 떨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니 부맹주님도 반드시 죗값을 받게 되실 거야.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니 옥랑이 너도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어. 네가 해야 할 일은 부맹주님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도록 맹주님을 도와드리는 거야. 그게 지금으로서는 부맹주님을 위한 최선의 방법인 것 같다.”

“후후, 누가 원칙주의자가 아니라고 할까 봐 입바른 소리만 골라서 하는군. 그래서 내가 그토록 널 싫어했던 거야. 건방진 놈.”

천옥랑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상관에게 건방진 놈이라니. 확 감찰단에 찔러버릴까 보다.”

기하진도 웃으며 농담으로 받았다. 어릴 때는 그토록 치고받고 싸우던 두 사람이 언제부터인지 이런 농담도 주고받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어서 맹주전으로 가보자.”

기하진과 천옥랑은 신속하게 맹주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맹주전 앞마당에는 이미 서른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잿빛 승복을 입은 아미파 여승 10여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도복을 입고 머리를 품(品)자 모양으로 틀어 올려 쪽을 찐 도사들이었다. 그중에 머리가 허옇게 센 노도사들은 불진을 든 채 한쪽 손을 가슴 앞에 들어 올린 반장(半掌)의 예를 취하고 있었다.

맹주전에서는 총군사 사마경이 남천단주 원무개와 천림원주 공각대사를 대동하고 이들을 맞이했다. 맹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맹주님께서 지금 폐관 수련 중이시라 부득이 제가 나왔습니다. 먼 길들 오셨을 텐데 안으로 드시지요.”

사마경이 웃는 낯으로 권했다.

“그럴 필요 없소이다. 이 엄중한 시점에 맹주께서 폐관수련에 드시다니, 참으로 어이가 없소이다. 그렇다면 총군사께서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여기서 명명백백하게 밝혀주시오. 도대체 부맹주가 마교와 손을 잡았다는 말이 사실이오이까?”

공동파 장로 현암자(玄岩子)가 강경한 목소리로 말했다. 백발이 성성했으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는 것을 보니 웅후한 내력을 겸비한 고수가 분명했다.

“이 일은 조금도 지체할 수 없는 일이니 지금 당장 부맹주를 불러주시오. 내 직접 부맹주에게 따져봐야겠소이다.”

이번에는 키가 크고 몸이 비쩍 마른 늙은이가 소리쳤다. 볼 밑이 움푹 패어 광대뼈가 두드러지긴 했지만, 목소리만큼은 카랑카랑한 쇳소리였다.

“부맹주는 지금 총단에 없습니다, 청풍도장님.”

사마경이 대답했다. 청풍도장은 종남파 장문인 청송자의 사제로 무공은 오히려 사형을 능가한다는 평을 듣는 고수였다. 청풍도장은 사마경의 말에 버럭 역정을 내며 소리쳤다.

“지금 그 말을 믿으란 소리요? 마교를 무찔러야 할 무림맹의 부맹주란 사람이 마교와 손을 잡고 오히려 무림 동도를 해쳤다는 소문이 파다한데 무림맹은 자꾸 그자를 비호할 생각이오? 지금 당장 불러내시오.”

사마경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부맹주가 정말 잘못을 저질렀는데도 우리가 비호한다면 문제가 되겠지요. 하지만 이번 싸움에서 부맹주의 사문인 청성파는 절반이 넘는 제자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잘 아시다시피 청성파 장문인도 전투 중에 돌아가시어 결국 청성파는 얼마 전에 봉문을 선포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데도 부맹주가 마교와 손을 잡았겠습니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사마경의 말에 이번에는 아미파 대제자 계법사태가 목소리를 높였다. 계법사태는 스승인 요혜신니의 진전을 가장 많이 이어받은 제자이며 아울러 깐깐한 성정까지도 스승과 똑같다 하여 작은 요혜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흥! 청성파는 사천전투에서 싸움 내내 뒷전으로 빠져 있었소. 그 때문에 수많은 우리 아미파 제자들이 목숨을 잃었소이다. 청성파는 우리 아미파 장문 사태께서 꾸짖자 겨우 싸우는 시늉을 하면서도 정작 마교 놈들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잘 싸우고 있던 우리 아미파와 무림맹 용봉단을 방해하기만 했었소이다. 그 바람에 우리뿐만 아니라 용봉단도 막심한 피해를 입었소. 용봉단주를 불러서 물어보면 아실 것이오, 내 말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계법사태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날카로운 눈초리로 주위를 둘러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청성파는 멍청하게도 마교 놈들이 자신들은 공격하지 않으리라고 믿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은 것이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다 부맹주의 농간이 있었기에 일어난 일이오.”

계법사태의 말이 끝나자마자 누군가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말씀 삼가십시오! 사태께서 직접 눈으로 보셨습니까? 부맹주께서 마교 놈들과 작당하는 것을 직접 보셨냐는 말입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천옥랑이었다. 천옥랑은 자신의 사문과 부친이 조롱받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나선 것이었다.

“청성파 제자들도 있는 힘껏 싸웠습니다. 이것은 제가 제 눈으로 똑똑히 본 사실입니다.”

계법사태는 천옥랑이 나서자 눈을 부라리며 천옥랑에게 물었다.

“소협은 누구시오?”

“저는 용봉단 부단주 천옥랑이라고 합니다.”

천옥랑의 말에 계법사태는 입가에 조소를 띠며 말했다.

“오호, 그렇다면 부맹주의 자제분이 아니시오? 부친은 어디 계시오? 당장 불러오시오!”

천옥랑이 천계심의 아들이란 말에 좌중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천 공자가 여기 있으니 부맹주도 있겠군. 당장 나오라고 하시오.”

무리 중에 제일 선배격인 공동파 장로 현암자가 불진을 휘두르며 목소리를 높였다.

천옥랑은 욱하는 마음에 앞으로 나섰다가 갑자기 사태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당황했다.

“부, 부친이 어디 계신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자 계법사태가 코웃음을 치며 천옥랑에게 다가오더니 천옥랑의 팔을 불쑥 움켜잡았다.

“흥, 지금은 몰라도 곧 생각이 나실 것이오.”

천옥랑은 자신 때문에 부친이 더 곤란한 상황에 빠지는 듯하여 마음이 복잡한 상태에서 갑자기 계법사태가 자신의 팔을 움켜잡자 제대로 저항 한번 해보지도 못하고 팔을 붙잡히고 말았다. 천옥랑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당황한 천옥랑이 황급히 팔을 뿌리치려 했으나 자신의 팔에 꽉 박힌 계법사태의 손가락은 떨어질 줄 몰랐다. 그 모습에 여기저기서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들렸다.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무림맹 용봉단 부단주가 단 한 수에 아미파 고수에게 제압되어버린 꼴이었다. 무림맹과 용봉단의 명예를 실추시켰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토록 지키려고 했던 사문의 명예도 순식간에 비웃음거리가 되어 버렸다.

천옥랑이 낭패한 처지에 빠지자 보다 못한 기하진이 앞으로 나섰다.

“지난번 전투의 상황을 그토록 정밀하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사태께서도 분명히 그 전투에 참전하셨겠군요?”

기하진이 계법사태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계법사태의 얼굴에 살짝 당황한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그렇소. 소협은 또 누구요?”

사천대전에 참전했던 아미파 여승치고 기하진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당두걸의 손에서 아미파 장문인 요혜신니를 구해낸 기하진은 아미파 여승들 사이에서 이미 유명인사였다. 하지만 계법사태는 기하진이 누군지 전혀 알지 못하는 듯했다.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