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92화 (92/201)

#   92 - 광세일소_한추영 - 1479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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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화. 길은 다시 엇갈리고 (2)

“위험해!”

예린이 끼어들자 석추명이 놀라서 소리쳤다.

기하진은 제 화를 이기지 못하고 전력을 다해 석추명을 때려가다가 돌연 임예린이 끼어들자 급히 장력을 회수했다. 한번 발출한 장력을 다시 회수하는 일은 극히 위험했으나 이미 기하진의 무공은 공력의 수발이 자유롭고 기가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는 수발자재(受發自在), 만사여의(萬事如意) 단계에 올라있었다.

산을 무너뜨릴 만큼 격하게 몰아닥치던 장력이 햇빛에 어둠이 사라지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석추명은 직접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혹시 그 엄청난 공격이 꿈이었던가?

“너, 괜찮은 게냐?”

석추명의 물음에 임예린이 토끼 같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슨 뜻이냐는 듯이 석추명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기하진도 속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임예린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게 갑자기 끼어들면 어떡해?”

“그래야 오라버니들이 싸움을 멈추죠. 하진 오라버니, 추명 오라버니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허튼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오라버니도 잘 알잖아요? 그러지 말고 맹주가 정말 귀면쌍살과 관계가 있는지 한번 확인해보는 것이 어때요? 만약 사실이라면 지금 당장에라도 온 무림에 알려서 더 큰 피해가 나지 않도록 해야죠.”

그 말에 기하진은 기도 안 찬다는 듯 임예린을 바라보았다.

“너마저도 형을 두둔하는 게냐? 그래, 어떻게 확인하자는 것이냐?”

“하진 오라버니가 마음만 먹으면 가능한 일이지요. 오라버니의 무공이 이제 귀면쌍살과 비슷한 정도이니 오라버니가 귀면탈을 쓰고 맹주 앞에 나가서 귀면쌍살인 척하는 것이죠. 맹주가 잡으러 오면 대번에 내빼면 될 것이고, 아니면 맹주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한번 들어보면 맹주와 귀면쌍살 간의 관계를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임예린의 말을 듣던 기하진이 발을 구르며 불같이 화를 냈다.

“흥! 너마저도 정신이 어떻게 된 것이냐? 너희 상단을 지켜주려고 무림맹의 아까운 목숨 수백 명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는데 감히 맹주님을 의심하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이냐!”

“하진 오라버니, 고정하세요. 만약 추명 오라버니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까지 드러내지 않고 몰래 일을 꾸며온 맹주가 부맹주보다 더욱 위험한 인물일 수 있어요.”

“듣기 싫다! 어떻게 맹주님이 부맹주보다 더 위험하다는 거냐? 이번 사천대전을 꾸며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간 원흉은 바로 부맹주야. 부맹주가 마교와 짜고 한 짓이라고!”

기하진은 고함을 지르더니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정원에 있는 석등을 오른손으로 내리쳤다. 그러자 일백 근도 넘는 석등이 모래로 쌓아 올린 탑처럼 단숨에 바스러지고 말았다.

그런 다음 기하진은 두 사람을 한 번씩 노려보더니 소매를 떨치고는 그대로 몸을 날려 밤하늘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 일어난 일이었다.

석추명은 기하진이 사라진 방향을 잠시 바라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저 녀석 고집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어릴 때부터 한번 싫은 건 죽어도 싫어했었지.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소용이 없었어.”

석추명의 눈에 어린 시절 고집을 피우던 하진의 모습이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하진 오라버니가 고집은 있지만 눈치도 빨라서 알아서 잘할 거예요. 다만 맹주의 진면목을 보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겠지요.”

“그래. 괜히 내가 노파심이 드는구나.”

“그나저나 뢰정 백부님이 돌아가시다니 믿을 수가 없어요. 정말 좋은 분이셨는데...”

임예린의 입에서 뢰정의 이야기가 나오자 석추명의 안색이 다시 침울해졌다.

“지금 교주는 제정신을 잃었다. 구세제민(救世濟民)이라는 신교의 대의를 잊고, 함부로 전횡을 일삼는 데다, 부맹주 등 간악한 자와 함께 강호를 휘저을 뿐만 아니라 스승님이나 황보 장로 같은 신교의 충성스러운 신하들을 함부로 살육하고 있어.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을지 몰라. 누군가는 반드시 막아야 해. 반드시!”

석추명의 머릿속에 처참하게 죽어간 뢰정과 황보, 초의공과 황연화의 얼굴이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그 얼굴들이 떠오르자 가슴이 또 욱신거렸다.

“정말 큰 일이군요. 신교의 교주, 무림맹의 맹주와 부맹주 등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어째서 하나같이 제정신이 아닌 거죠? 세상에 의(義)는 사라지고 불의(不義)만 가득하니 이 노릇을 어찌할까요? 모든 것을 다 가진 그 사람들을 대체 누가 막을 수 있을까요?”

임예린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석추명은 마음이 착잡했다. 신교와 무림맹의 수뇌부들을 과연 누가 막아설 수 있단 말인가? 자신도 모르게 다시 한숨이 새어나았다.

“참, 예린아, 내가 너를 찾아온 이유는 스승님께서 돌아가시기 훨씬 전에 만약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너를 찾아가라는 유언을 남기셨다고 해서다. 스승님께서 너에게 혹시 무슨 말씀이라도 남기셨느냐?”

“아, 그러고 보니 뢰 백부님께서 떠나실 때 나중에 추명 오라버니가 찾아오면 전해주라고 하신 게 있어요. 그동안 하도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었네요.”

임예린은 방으로 들어가더니 문갑에서 하얀 비단 천으로 감싼 물건을 꺼냈다.

석추명이 받아서 열어보니 안에는 서찰 한 통과 손때가 묻어 더러워진 표지가 없는 반 권짜리 책이 들어 있었다. 그 책은 석추명에게도 낯익은 것으로 한눈에 보기에도 중양일지 후반부가 분명했다.

석추명은 먼저 서찰을 열었다. 스승 뢰정의 정갈한 글씨체가 눈앞에 펼치자 석추명은 다시 콧잔등이 시큰했다.

“추명이 보아라. 네가 이 서찰을 열 때면 아마 내가 이 세상에 없을 듯하구나. 사람은 태어나면 누구나 다 죽는 법이니 내가 세상에 없더라도 그리 마음 쓸 것 없다. 사람이 무슨 일을 도모하다가 설령 실패하더라도, 그래서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잃는다 하더라도 그 노력은 절대 헛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황 장로를 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교주와 맞서야 하는데 내 생각에는 길보다 흉이 많을 성싶구나.”

석추명의 눈가가 어느새 촉촉해졌다. 스승 뢰정의 서찰은 계속 이어졌다.

“세상을 떠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어 이렇게 붓을 들어 글을 남긴다. 그동안 너에게 중양일지 후반부의 무공을 가르쳤으나 내 무공이 얕고 깨달음이 낮아 너에게 가르치지 못한 부분이 있구나. 중양일지에 실린 무공은 하나같이 상승무공이 아닌 것이 없고, 그 무공을 운용하려면 막대한 공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내 생각에 책의 전반부에는 공력을 쌓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을 듯하구나. 가장 좋은 방법은 무림맹에서 회수해간 중양일지의 전반부를 찾는 것이겠으나 그 책을 찾지 못한다면 도가 무공의 지극한 경지에 오른 분께 가서 가르침을 구해야겠지.”

도가 무공의 지극한 경지에 오른 사람이라니. 그런 사람이 있단 말인가? 석추명은 이제 뒤 내용이 궁금해서 마음이 다급해졌다.

“내 친우인 설영객 초의공도 곤륜파의 높은 경지에 오르기는 했으나 아직 지극한 경지에는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당금 무림에서 도가 무공의 최고봉에 오르신 분은 화산파의 태상장로 비천검(飛天劍) 독고양(獨孤陽)이시다. 그분은 무당파의 개파조사인 장삼봉에 비견되는 분이니 그분께 가르침을 구할 수만 있다면 중양일지에 있는 무공도 모두 익힐 수 있을 것이다. 이 서찰을 읽게 되면 기회를 보아 화산파로 가서 그분께 가르침을 청해라. 워낙 전대의 고인이라 아직 살아 계신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것조차도 네 운에 달렸구나. 끝으로 네가 중양일지에 기록된 모든 무공을 다 터득하기 전까지는 이 못난 사부의 복수를 할 생각은 절대 꿈도 꾸지 말길 바란다.”

스승이 남긴 서찰을 읽던 석추명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스승의 마지막 말에 눈시울이 다시 뜨거워졌다.

“안 좋은 소식인가요?”

석추명의 안색을 살피던 임예린이 석추명에게 물었다.

“아니야. 그것보다... 나는 지금 즉시 가야겠다.”

석추명이 목소리가 살짝 들떠 있었다. 석추명이 당장 간다고 하자 임예린은 화들짝 놀랐다.

“이렇게 빨리 가신다고요? 오늘 밤은 늦었으니 여기서 묵고 내일 가세요.”

“아니야, 마음이 급하구나. 즉시 가볼 데가 생겼어. 그동안 스승님의 물건을 맡아줘서 고맙구나. 다음에 또 들르마.”

석추명은 임예린에게 짧게 인사를 하자마자 서둘러 임가장을 벗어났다.

비천검 독고양! 석추명의 가슴이 두근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

맹주전에서 온 급한 호출로 발걸음을 옮기는 부맹주 천계심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미 자정을 넘긴 시간이었다. 한 번도 이 시각에 부른 적이 없던 맹주였다. 늘 자기를 어려워해서 지금까지 자기 말에 토 한 번 달지 않던 맹주였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전갈이 왔을 때는 천계심은 이미 잠자리에 들었기에 내일 일찍 찾아뵙는다고 전하라고 해도 총군사 사마경은 요지부동이었다. 맹주님께서 무조건 부맹주를 모시고 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감히 아랫사람으로서 맹주님의 호출을 받고 어찌 다음날로 미룰 생각을 하냐는 비웃음마저 들었다. 천계심은 사마경의 말에 어처구니가 없어 일어나 앉으면서 역정을 내었다.

‘총군사께서 지금 누구와 얘기하는지 잠시 잊었나 본데, 나 부맹주 천계심이요!’라고 했다가 사마경의 냉소만 받았다. ‘잘 알고 있습니다. 부맹주님.’

오늘따라 불손한 사마경의 태도에 천계심은 속에서 열불이 나는 듯했다. 감히 이 말라비틀어진 영감탱이가 나를 비꼬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천계심이 좀처럼 쓰지 않는 방법을 썼다. 공력을 끌어올려 사마경을 향해 살기를 쏟아낸 것이다. 오만불손한 사마경에게 누가 더 위인지 따끔하게 가르칠 필요가 있었다.

아무리 책을 많이 읽고 학식이 많다 하더라도 무림맹에서의 지위 구분은 무공으로 하는 것. 사마경의 공력이 그리 높지 않음을 알기에 이 정도의 살기만으로도 사마경은 아마 오줌을 지릴 만큼 놀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사마경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요지부동이지 않은가?

천계심이 공력을 더 높였다. 사마경이 그 알량한 공력으로 청성파 제일 고수인 자신이 쏘아 보낸 기운을 막아낸다는 사실에 천계심은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아무리 공력을 높여도 사마경이 꿈쩍도 하지 않자 천계심은 자제력을 잃고 기운을 폭증하고 말았다.

그때 돌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맹주께서 기운이 남아도시나 보군. 공연히 헛심 빼지 말고 아껴두시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그 말에 천계심은 귀신이라도 본 듯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사마경의 옆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무림맹 안에서 자신의 기운을 나, 천계심의 눈에서 완전히 숨길 수 있는 자가 있단 말인가!

목소리만으로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었으나 나중에 확인해 본 바로는 여자였다. 치렁치렁한 머리는 온통 백발이고 특이하게 눈이 노란색의 고양이 눈이었다. 자신이 아는 사람 중에 그 여인과 닮은 사람은 없지만 묘하게도 인상이 낯익어서 자꾸만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었다. 알고 보니 자신이 사마경에게 쏘아 보낸 살기는 그 여인이 막아낸 것이 분명했다.

천계심이 놀라자 사마경이 묘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부맹주님은 처음 보시지요? 이 자가 바로 음양사자 묘백랑(猫白娘)입니다.’

그 소리에 천계심은 가슴이 철렁했다. 음양사자라니! 이 자가 천림비고를 지킨다는 그 음양사자란 말인가?

하지만 의문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천림비고를 한 번도 떠나지 않는다고 들었거늘 어째서 지금은 사마경과 동행했단 말인가? 그리고 사마경은 나한테 오면서 어째서 이 자와 같이 왔을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어느새 맹주전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천계심이 슬쩍 뒤를 돌아보니 음양사자 묘백랑은 여전히 서너 걸음 정도 떨어진 채 감시라도 하듯 따라오고 있었다.

“맹주님, 부맹주 들었사옵니다.”

“안으로 모시게나.”

사마경이 아뢰자 맹주전 안에서 남궁진악의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기분 탓인지 다른 날과는 달리 자꾸 마음이 답답했다.

사마경이 문을 열어주자 천계심은 안으로 들어갔다. 맹주전에는 열여덟 명이 한 번에 앉을 수 있는 기다란 자단목 탁자가 있었는데 맹주는 그 탁자의 한쪽 끝에 앉아 있었다.

천계심은 쿵쾅거리는 마음을 다잡고 평상시처럼 거드름을 피우며 맹주 앞에 섰다.

“찾아 계셨소이까?”

“앉으시오, 부맹주.”

맹주가 자신의 반대쪽을 가리켰다. 기다란 탁자의 다른 쪽 끝부분이었다.

천계심은 일부러 ‘어험!’하고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부맹주가 자리에 앉자 사마경과 음양사자 묘백랑은 맹주의 좌우에 가서 섰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맹주와 상당한 거리가 생기고 말았다.

“부맹주, 지난 사천대전 때는 노고가 많으셨소. 특히 무림맹을 탈퇴하려던 청성파 장문인을 일격에 때려죽인 것은 정말 감동적이었소. 내 부맹주의 충성심을 높이 치하하는 바이오. 하하하.”

맹주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에 천계심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여기로 오는 내내 들던 불안함의 정체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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