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 - 광세일소_한추영 - 1477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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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화. 길은 다시 엇갈리고 (1)
화련산을 떠나는 석추명의 마음은 울적하기 짝이 없었다. 총단으로 복귀할 때 같이 왔던 사람들은 모두 죽고 자신만 살아남아 다시 신교를 빠져나가려니 마음이 처참하기만 했다. 평소 같으면 쉬지 않고 재잘거렸을 사소혜 마저 며칠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석추명도 별말 않고 걷기만 했다.
두 사람은 혹시나 교주가 자신들을 잡으려고 사람이라도 풀었을까 봐 낮에는 몸을 숨기고 가능한 밤을 이용했으며, 사람 많은 곳도 피했다. 객잔에 머물 때는 커다란 대나무 방갓을 쓰고 환자처럼 일부러 얼굴에 붕대를 감아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게 했다.
그렇게 10여 일을 걷다 보니 어느새 남경에 도달했다.
어두운 밤.
석추명은 사소혜는 객잔에 머물도록 하고 자신만 빠져나와 임가장을 찾아갔다. 쓸데없는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던 석추명은 몰래 몸을 숨겨 임가장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지난번에 요양차 며칠 묶었던 터라 임가장 안의 전각 위치는 대충 파악하고 있었다.
석추명은 경계를 서는 호천대의 눈을 피해 살금살금 임예린의 처소로 갔다. 임예린이 방에서 누군가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부맹주가 또 너희 집안을 노릴지 모르니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할 거야. 마음 같아서는 내가 계속 있고 싶지만 해야 할 임무가 있으니 마냥 있을 수만은 없구나.”
“오라버니께서 이렇게 따로 와 주신 것만 해도 감사드려요. 이번에 용봉단의 피해가 막심하다고 들었어요. 제가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용봉단 뿐만 아니라 아미파와 청성파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 하지만 마교 놈들의 피해도 만만치 않을 거야. 쌍방 간에 큰 피해를 봤으니 당분간 서로 조심하겠지. 다만 탈명검 마립이라는 놈을 끝장내 버렸어야 했는데 그놈이 살아난 게 너무 아쉽구나. 도대체 그놈을 구해간 자가 누굴까? 무공이 정말 놀라웠어. 귀면쌍살보다 무공이 높으면 높지 낮지는 않을 것 같구나. 마립을 구해갔으니 틀림없이 마교의 고수 중 한 명이겠지.”
“혹시 부맹주 쪽 사람이 아닐까요? 부맹주와 신교가 서로 작당을 했으니... 어쨌거나 이번에 추명 오라버니가 연루되지 않아 다행이에요.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해야 했을지 정말 몰랐을 거예요.”
“들리는 정보에 의하면 추명이 형이 대주 직에서 밀려났다는 것 같더구나. 교주의 미움을 받는 것 같아. 그래서 이번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던 것 같은데 오히려 잘되었어. 만약 추명이 형이 싸움에 나왔더라면 아무리 형이라고 해도 그냥 넘어갈 순 없었을 테니. 이 더러운 마교 놈들, 절대 그냥 두지 않을 거야!”
신교가 철천지원수인 양 울분을 토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기하진이었다. 양측간에 사상자 수가 엄청났다고 하더니 이번 전쟁에서 기하진이 가까운 사람을 많이 잃은 것일까?
석추명은 마음이 무거우면서도 문득 의문이 들었다. 사천대전이 결국 양패구상으로 끝났다는 말은 석추명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마 장로가 기하진과 싸우다가 도망쳤다니 그건 무슨 말일까? 마 장로는 신교의 사대검왕 중 한 명으로 석추명조차 상대가 안 되는데 기하진이 설마하니 마 장로보다 무공이 윗길이란 말인가?
석추명은 이런저런 의혹이 들었지만 기하진이 와 있어서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했다. 하진이에게 맹주의 진면목도 알릴 수 있을 테니.
석추명이 임예린의 방 쪽으로 살금살금 걸음을 내딛는 순간, 돌연 창문이 벌컥 열리면서 기하진이 소리쳤다.
“누가 이렇게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움직이는가? 썩 나오지 못할까!”
그 말에 석추명은 움찔하며 잠시 놀랐으나 곧 담담한 표정으로 두 사람의 앞으로 나섰다.
“나다. 하진아.”
뜰 안의 우거진 수풀 뒤에서 석추명이 나오자 기하진과 임예린은 깜짝 놀랐다.
“아니, 추명이 형, 이 밤에 어쩐 일이야?”
기하진의 물음에 석추명이 조용히 말했다.
“조용히 예린이를 만나 상의할 일이 있어서 이렇게 밤에 불시에 찾아왔다.”
“어서 들어오세요. 오라버니.”
임예린이 방 밖으로 달려 나오더니 석추명을 이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세 사람이 모두 장성한 뒤 한자리에 앉는 것은 처음이었다. 일전에 석추명이 임예린과 함께 무림맹을 탈출한 다음에도 잠깐 셋이 함께한 적은 있었지만 그때는 석추명이 정신을 잃어 세 사람이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다.
지난 10여 년간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만남이었건만 막상 이렇게 만나고 보니 석추명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기하진과 임예린도 마찬가지인지 분위기가 어색하기만 했다. 게다가 자신을 바라보는 기하진의 눈빛은 더 이상 예전의 그 착한 꼬마 녀석의 눈빛이 아니었다. 최근 성도에서 벌어진 싸움 때문인지 이글이글 타오르는 분노가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였다.
“성도의 일은 들었다. 쌍방 간에 피해가 막심하다고... 정말 뭐라고 해야할 지 모르겠구나.”
석추명의 말에 임예린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게 오라버니의 잘못이겠어요? 다 신교와 무림맹의 윗분들이 하신 일이지...”
“하진이 너는 이번 싸움에서 크게 다치지는 않은 것 같구나. 정말 다행이다.”
석추명은 걱정해서 한 말이지만 기하진의 대답은 곱게 나오지 않았다.
“내 한 몸은 무사하지만 우리 용봉단 300명 중 젊은 목숨 200명 이상이 사라졌어. 내 유일한 지기(知己)였던 벗도 나를 구한답시고 마교 놈들에게 목숨을 잃었지. 그 목숨 빚을 다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어.”
석추명이 신교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건만 기하진은 백련신교에 대해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차가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히려 들으란 듯이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구나...”
석추명은 그저 머리를 끄덕이며 담담하게 말했다.
“특히 탈명검 마립이라는 자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놈과 그놈을 구해간 자, 그놈을 비호하는 자는 모조리 내가 갈가리 찢어서 죽여버릴 거야.”
기하진이 눈빛을 번뜩이며 석추명을 바라보았다. 만약 그 사람이 형이라도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는 의미인 것 같았다.
석추명은 기하진의 분노에 찬 말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전쟁이란 멀쩡한 사람도 불구대천의 원수로 만드는 법이다.
석추명이 묵묵히 있자 임예린이 두 사람의 눈치를 살펴보더니 화제를 바꾸려는 듯 일부러 화사하게 웃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석 오라버니, 제게 뭔가 상의할 것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게 뭔가요?”
“그보다 먼저, 하진아 네게 꼭 해줄 말이 있구나.”
석추명이 임예린에게 팔을 들어 말을 막으며 기하진을 바라보았다.
“혹시 근래에 귀면쌍살이 나타나지 않았느냐?”
석추명의 말에 기하진은 웬 뜬금없는 귀면쌍살 얘기냐는 표정이었다.
“나는 사실 지난번 사천대전이 일어나기 전 귀면쌍살을 쫓고 있었다.”
“형이 왜 귀면쌍살을...?”
기하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석추명을 쳐다보았다.
“나는 사실 귀면쌍살과 맹주 간에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 같아서 그걸 조사 중이었지.”
“하! 믿을 수가 없군. 마교에서 맹주님의 뒤를 캐고 있었다? 역시 마교답군!”
기하진이 석추명의 두 눈을 응시하며 빈정거렸다.
“그러지 말고 끝까지 한번 들어봐요. 하진 오라버니.”
임예린이 걱정스럽다는 듯 기하진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자 기하진은 ‘흥!’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석추명은 기하진의 표정을 묵묵히 쳐다보더니 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다.
“그날 귀면쌍살이 맹주의 조카 남궁척을 납치했을 때는 마침 내가 귀면쌍살의 뒤를 쫓고 있을 때였다. 귀면쌍살이 무림맹 야영지에서 4,50리 정도 벗어나자 뜻밖에도 남궁척에게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했었지. 그런데 잠시 후 맹주 남궁진악이 나타난 거야.”
“맹주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
기하진이 탁자를 치며 역정을 냈다. 하지만 석추명은 화를 내지 않고 차분히 대꾸했다.
“끝까지 듣게 되면 너도 맹주님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 거다. 맹주가 나타나자 놀랍게도 귀면쌍살이 맹주 앞에 부복하는 것이었어. 그 자세가 얼마나 공손한지 나도 깜짝 놀랐단다. 그리고 맹주는 귀면쌍살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하더니 남궁척을 데리고 사라졌어. 얼핏 듣기로 곧장 전장으로 돌아갈 것 같지는 않았어.”
“거짓말하지 마! 신교는 애당초 무림맹의 적이니 우리를 자중지란에 빠뜨리려고 그런 거짓말을 하는 거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아?”
“나 혼자만 본 것도 아니었어. 초의공이라고 곤륜파 선배 한 분도 마침 그 자리에 계셨지. 사실 그분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도 맹주의 교묘한 속임수에 죽었을지도 모른다.”
초의공이 귀면쌍살을 오랫동안 추적해온 것은 기하진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석추명의 말에 기하진의 표정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일그러졌다.
“그렇다면 초의공 선배님은 어디에 있지? 형 말은 믿지 못하겠으니까 초의공을 데려와! 그분께 직접 들어야겠어.”
“초의공 선배님은... 돌아가셨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그분은 귀면쌍살과 맞붙어도 지지 않는 분이셨어. 그런 분이 돌아가시다니, 갑자기 병환이라도 났다는 거야?”
기하진이 콧방귀를 뀌며 석추명에게 쏘아붙였다. 기하진의 두 눈이 불신의 빛으로 가득했다. 기하진이 믿지 못하자 석추명은 초의공과 뢰정의 죽음을 간단하게 얘기해주었다.
기하진은 초의공이 죽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러니까 초의공께서 정말로 돌아가셨다고?”
“그래.”
기하진은 잠시 묵묵히 바닥을 바라보더니 다시 석추명을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초의공도 결국 마교 놈들의 손에 돌아가신 거군. 마교에 갚아야 할 목숨 빛이 또 하나 생긴 셈이로군. 그리고 형은 그 마교의 대주이고.”
“하진아, 말조심해.”
기하진이 자신의 말을 엉뚱하게 알아듣자 석추명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렇잖아. 귀면쌍살의 배후에 맹주님이 있다는 말을 아무런 증거도 없이 내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어? 게다가 한 명 있던 증인마저 죽었다? 그것도 마교의 손에? 그런데 형 말을 믿으라고?”
기하진은 씩씩거리면서 석추명의 코앞까지 도발하듯 얼굴을 들이밀었다.
“귀면쌍살 그놈은 내 친구 백무결을 죽인 놈이라고! 그런 놈 뒤에 맹주님이 있을 리가 없잖아. 맹주님이 왜, 무엇 때문에 후기지수들을 죽이냐고. 왜!”
기하진이 벌떡 일어나 석추명을 향해 따지듯이 소리치자 석추명도 화를 참지 못하고 탁자를 쾅 내리치며 기하진을 쏘아보았다.
“내 말을 믿지 못한다면 도대체 누구 말을 믿겠다는 것이냐?”
“흥! 마교 대주의 말을 믿느니 차라리 지나가는 똥개의 말을 믿고 말지.”
“이 녀석이 정말 보자 보자 하니까.”
화를 참지 못한 석추명이 손을 뻗어 기하진의 팔을 붙잡으려고 했다. 그러자 기하진이 코웃음을 치며 팔을 교묘하게 비틀어 석추명의 손아귀에서 빼낸 다음, 곧장 석추명의 가슴을 쳐오는 것이 아닌가! 쳐오는 방향과 속도가 모두 석추명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석추명이 놀라서 급히 반대쪽 팔을 사선으로 들어 올려 기하진의 주먹을 막았다. 하지만 막는 순간 석추명의 몸이 뒤로 두어 발짝 밀렸다. 그러자 석추명의 안색이 대번에 변했다.
석추명은 검을 집어 들더니 재빨리 창문을 통해 밖으로 뛰어나갔다.
“오냐, 네 녀석이 다 컸다고 이 형의 말을 무시하니 버릇을 단단히 고쳐주마. 썩 이리 나와!”
석추명의 말에 기하진도 번쩍 몸을 날리며 석추명 앞에 우뚝 섰다.
“얼마든지 상대해 드리지. 마교 수라대주님!”
두 사람의 사이가 살벌해지자 임예린이 발을 동동 구르며 두 사람을 말렸다.
“오라버니들, 10년 만에 만나서 웬 칼부림이에요? 당장 그만들 두지 못하겠어요?”
임예린의 말에 기하진이 냉소를 지으며 석추명을 비꼬았다.
“추명이 형이 마교 인사가 되더니 거짓말만 잔뜩 는 데다 싸움꾼으로 변했군. 예린아, 이 사람은 우리가 알던 사람이 아니다.”
기하진이 계속 비꼬자 석추명이 참지 못하고 검을 휘둘렀다. 물론 검을 검집에서 뽑지는 않았다. 아무리 이 순간 화가 난다고 하더라도 사랑하던 동생에게 시퍼렇게 날 선 검을 갖다 댈 만큼 석추명은 냉정하지 못했다.
“검을 뽑아. 어차피 형은 내게 안 되니까 검을 뽑아서 제대로 덤비라고. 나도 인정 사정 봐주지 않을 테니.”
기하진은 검을 뽑지 않고 장을 서로 교차하며 맹주가 전수해준 천룡파천장을 펼쳤다. 맹주의 무공으로 마교의 대주인 석추명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겠다는 마음이었다.
기하진이 장을 펼치자 웅혼한 장력이 높이 일어선 파도처럼 석추명의 전신을 뒤덮어 왔다. 석추명은 장력으로는 기하진에게 맞설 수 없다는 사실을 대번에 깨달았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기하진의 공력이 상상을 초월한 것이다.
석추명은 재빨리 신룡보(神龍步)를 펼쳐 피한 다음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검을 뽑아 숭양일기검 일기만파(一氣萬波) 초식을 펼쳐냈다. 석추명은 얼마 전 스승 뢰정과 초의공이 사투를 치르며 펼치는 검법을 보면서 검에 대한 이해가 한층 더 높아져 있었다.
석추명의 검이 빛살처럼 빠른 속도로 날아들자 기하진은 속으로 당황하면서도 허둥대지 않고 차분하게 일일이 검을 피한 다음, 번뜩 손을 내밀어 손가락으로 검날을 강하게 튕겨냈다. 마립의 팔을 으스러뜨린 중양신공을 발휘한 것이다.
검날은 기하진의 손가락에 ‘퉁!’하는 소리와 함께 기이한 공명음을 내며 부르르 떨렸다. 그 진동이 얼마나 큰지 석추명은 팔이 떨려와 도저히 검을 붙잡고 있을 수가 없었다.
챙! 석추명의 검이 땅에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기하진의 우장이 춤추듯이 석추명의 가슴을 가격했다.
“안돼요!”
그 순간 임예린이 두 사람 사이에 불쑥 끼어들며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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