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 - 광세일소_한추영 - 1476093
#
제89화. 복귀(8)
“나를 구하러 왔던 것을 후회하나요?”
후두둑 하고 떨어지는 빗줄기 소리에 황연화의 목소리가 묻혀 처량한 느낌이 났다.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석추명이 그 말에 황연화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황연화도 아마 자신만큼이나 괴로워하고 있으리라 짐작되었다.
석추명은 묵묵히 생각해보았다. 그때 그 상황에서, 교주가 황연화에게 그토록 무지막지한 폭력을 행사하는 그 상황에서, 자신은 과연 황연화를 못 본 척하고 그냥 갈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섣불리 나선 행동의 대가로 이토록 비참한 결과를 얻기는 했지만, 같은 상황이 또다시 닥친다 하더라도 뻔히 보이는 황연화의 괴로움을 못 본 척할 자신이 없었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다만....”
석추명이 말끝을 흐렸다. 괴로운 듯 인상이 일그러졌다.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에 황연화의 목소리가 살짝 올라가며 떨렸다.
“다만?”
“다만... 제 무공이 이토록 형편없다는 사실이 너무 후회스럽습니다.”
석추명은 눈앞에 누워있는 뢰정의 시신을 다시 바라보았다. 다시 눈물이 고였다.
무공이 고강했다면 이처럼 참혹한 결과는 없었을 것이다. 불모님도 지키고 아울러 스승님과 다른 분들도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무공이 좀 더 고강했더라면...!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가운 밤비가 두 사람의 얼굴에 묻은 핏자국을 씻겨주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어디선가 풀잎이 밟히는 소리가 났다.
석추명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초소 바깥쪽에서 누군가 안쪽을 들여다보는 모습이 보였다. 오늘은 초소에도 경계병이 없었다. 뇌옥 안의 죄수들이 모두 죽은 마당에 더 이상 경계를 설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초소 문 바깥쪽에서 안쪽을 기웃거리던 사람이 쪼르르 안으로 달려왔다. 달려온 사람은 다름 아닌 사소혜였다. 사소혜는 불모전에서 사단이 났을 때부터 발만 동동 구르다가 이제 사람들이 모두 물러가고 주위가 조용해지자 두 사람을 구하러 온 것이었다.
울어서 눈이 퉁퉁 부은 사소혜는 급히 황연화와 석추명을 풀어주었다.
“불모님, 괜찮으십니까? 불모님. 흑흑흑.”
황연화의 초췌한 얼굴을 보자 사소혜의 입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얼른 손등으로 입을 막았지만 울음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위험한데 뭣 하러 여기까지 왔느냐?”
황연화가 계속 어깨를 들썩이며 울먹이는 사소혜의 어깨를 다독였다.
“고맙구나. 소혜야.”
“불모님!”
사소혜가 황연화의 손을 꼭 붙잡았다.
“석 대주님, 많이 고생하셨죠?”
사소혜가 이번에는 눈물을 글썽이며 석추명을 바라보자 석추명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빨리 서둘러야 해. 날이 밝으면 사람들이 올라올 거야.”
초소 정문 쪽에서 또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담예린이었다.
담예린이 채근하는 소리에 사소혜가 눈물을 닦으며 일어섰다.
“이런, 내 정신 좀 봐. 불모님, 석 대주님, 어서 달아나셔야 합니다.”
“스승님을 이렇게 내버려 두고 갈 수 없어.”
석추명이 스승 뢰정의 시신 곁으로 다가가더니 맨손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비가 오긴 했으나 여전히 땅은 쉽게 패이지 않았다. 하지만 석추명은 스승을 묻기 전에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겠다는 듯 무릎을 꿇고 앉아 하염없이 땅을 파헤쳤다.
“석 대주님, 뢰 장로님과 다른 분들의 시신은 제가 묻을게요. 지금 이러실 시간이 없어요. 곧 사람들이 올라오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사소혜가 답답한 듯 석추명의 팔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석추명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석추명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황연화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석추명이 꿈쩍도 하지 않자 사소혜가 초소 정문 쪽에 있는 담예린을 불렀다.
“너희 대장님께서 꿈쩍도 안 하셔. 네가 와서 말씀 좀 드려 봐.”
사소혜의 말에 담예린이 달려오더니 뢰정의 참혹한 모습에 넋이 나간 듯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담예린이 쓰러지듯이 석추명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대... 대주님, 이... 이게 모두 제 잘못입니다.”
담예린이 어깨를 들썩였다. 담예린의 말에 석추명이 땅을 파던 손길을 멈추고 담예린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냐?”
“제, 제가 질투에 눈이 멀어... 그만....!”
담예린이 오열하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은 담예린의 말에 석추명이 울고 있는 담예린을 붙잡았다. 석추명의 눈빛이 극심한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부르르 떨렸다.
“무슨 말인지 제대로 말해라!”
사소혜와 황연화도 담예린을 주목했다.
“제... 제가 부대주님께 말씀드렸습니다. 불모전으로 웬... 외간 남자가 들어갔다구요!”
말을 끝낸 담예린이 허리를 꺾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날 불모전 맞은편 전각 지붕 위에서 석추명을 지켜보던 담예린은 석추명이 나올 생각을 하지 않자 들불처럼 끓어오르는 질투심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곧장 부대주 맹환에게 달려가 지금 어떤 젊은 남자가 불모전에 몰래 들어갔으니 빨리 교주님께 고해 올리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담예린은 어리석은 마음에 혹시라도 석추명이 다칠까 봐 석추명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자신이 미워하는 대상은 오로지 황연화였다. 맹환은 그길로 곧장 교주에게 보고했고, 그렇지 않아도 평상시 황연화를 의심하던 교주는 길길이 날뛰며 그길로 곧장 불모전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불모전에 교주가 간다고 슬쩍 미리 말을 넣은 것도 담예린이었다. 석추명이 달아날 시간적 여유를 주려는 의도였다.
담예린의 이야기를 들은 석추명은 믿을 수가 없어 멍하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소혜는 담예린의 말을 듣자 곧장 달려와 담예린에게 삿대질을 퍼부었다.
“네년이었구나. 고자질을 한 년이 바로 네년이었어! 네년의 질투심 때문에 뢰 장로님과 황 장로님이 돌아가셨어. 게다가 불모님과 석 대주마저 죽을 뻔했다고. 이 미친것아!”
사소혜가 불같이 화를 내며 금사신편을 꺼내어 휘두르고 하자 황연화가 말렸다.
“소혜야, 가만히 있거라.”
“하지만, 불모님!”
사소혜가 억울한 듯 항변하려 하자 황연화가 눈빛으로 석추명을 가리켰다.
석추명은 뢰정의 시신 앞에서 우두커니 일어나 괴로운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 모습에 사소혜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네...네가 어찌 그럴 수 있느냐? 다른 사람도 아닌 네... 네가...!”
석추명의 말에 담예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눈물만 흘렸다.
자신의 고자질로 이 난리가 나게 되자 담예린은 석추명이 걱정되어 속만 끓이다가 사소혜가 두 사람을 구하러 가는 듯하자 얼른 따라나선 것이었다.
석추명이 휘적휘적 걷기 시작했다. 담예린은 뢰정의 시신 앞에 꿇어앉은 채 석추명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석추명이 서너 걸음 걸어나갔을 때 담예린이 뒤에서 소리쳤다.
“뢰 장로님께 만약 일이 잘못되거든 임가장 임 소저를 찾아가라는 말을 꼭 좀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에 석추명은 걸음을 멈추었다. 마음속에서 무수한 상념이 일었다. 스승님께서는 일이 이렇게 될 줄 아셨던 것일까? 임가장 임 소저는 예린이를 말하는 것이 틀림없다. 왜 예린이를 찾아가라고 한 것일까?
“그 말씀을 언제 하셨단 말이냐?”
“꽤 되었습니다. 혹시라도 자신의 신상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때 꼭 대주님께 말을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담예린이 물기 묻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석추명은 담예린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저벅저벅 걸어 뇌옥의 초소 정문으로 걸어나갔다.
그때 황연화가 가만히 사소혜에게 말했다.
“소혜야, 비수를 잠깐만 빌려다오.”
황연화는 사소혜가 금사신편 말고도 비수를 가지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소혜는 황망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 경황이 없던 터라 아무 의심 없이 비수를 건네주었다.
“불모님, 저희도 이만 가요.”
사소혜는 황연화가 움직이는 기색이 없자 뒤를 돌아보았다. 황연화는 어느새 한발 물러나 두 손으로 비수를 붙잡고 자신의 가슴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제야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눈치챈 사소혜가 놀라서 소리쳤다.
“불모님 왜 이러세요?”
사소혜의 외침에 석추명은 섬뜩한 느낌이 들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불모님!”
비수를 본 석추명이 놀라서 소리쳤다.
석추명을 바라보는 황연화의 눈빛이 처연하면서도 부드러웠다.
“석 대주, 후회하지 않아 주어서 고마워요.”
황연화의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내게는 이게 최선인 것 같아요.”
황연화가 두 손을 가슴 쪽으로 힘주어 끌어당겼다. 날카로운 비수가 절반이나 넘게 황연화의 가슴에 박혀 들어갔다. 붉은 피가 황연화의 하얀 손 위로 떨어져 흰 눈밭에 새빨간 꽃송이가 핀 듯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불모님!”
석추명이 황연화에게 달려갔다. 옆에 있던 사소혜가 오열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정지되는 듯했다.
석추명은 쓰러지는 황연화를 품에 안았다. 황연화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왜 이러셨습니까? 왜 이렇게 어리석은 짓을 하셨습니까?”
석추명은 황연화를 안고 눈물을 지었다. 황연화는 힘겹게 손을 들어 올려 석추명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었다. 창백한 황연화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석 대주, 할 수만 있다면... 다음 생에도 그대를 만나고 싶습니다... 지금과 다른 모습으로....”
죽음을 앞둔 황연화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고백에 석추명은 눈앞이 뿌옇게 차올라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될까요...?”
황연화가 힘겹게 숨을 내뱉으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석추명은 황연화의 애절한 눈빛을 바라보며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몰라 잠시 머뭇거렸다.
“저... 저는....”
하지만 석추명이 미처 답을 하기도 전에 황연화는 그만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불모님, 정신 차리세요, 불모님!”
옆에서 지켜보던 사소혜가 다급하게 외쳤다.
담예린은 땅바닥에 꿇어앉은 채 그 모습을 바라보며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다.
어느새 희끄무레 산 위부터 조금씩 동이 트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