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89화 (89/201)

#   89 - 광세일소_한추영 - 1474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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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화. 복귀 (7)

“이 비겁한 놈들. 묶여있는 사람들을 이용하는 것도 모자라 두 명이서 한 명을 공격하다니.”

초의공의 입에서 분노의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호호호, 뭔가 착각하시나 본데, 나는 정정당당하게 싸우겠다고 한 적이 없어요. 싸움에서는 이기는 것이 전부 아닌가요?”

나찰녀의 비웃음에 초의공은 화를 참지 못하고 그대로 앞으로 돌진하며 소리쳤다.

“오냐, 두 번 다시 웃지 못하도록 그 입을 찢어주마.”

초의공의 검이 다시 한번 흰 무지개를 토해냈다.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 이백의 시에서 따온 초식의 이름이 보여주듯이 하얀 물줄기가 끝없이 이어지는 착각이 드는 수법이었다.

나찰녀는 조금 전과 같이 초의공을 비웃을 수가 없었다. 초의공이 쓰는 것은 분명히 검법이되 검의 형체가 아예 보이지 않았다. 검이 빛으로 화한 듯 흰 백광만 번쩍였다.

나찰녀의 손발이 다급해지자 천명이 백골검을 휘두르며 지원하고 나섰다.

“곤륜제일검객의 솜씨가 어떤지 노부가 한번 시험해볼까?”

졸지에 초의공은 이 대 일로 싸우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초의공은 천명이라는 이 노마두의 공력이 자신보다 훨씬 윗길임을 잘 알고 있었다. 공력이 낮으면 그만큼 불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최근 초의공은 자신보다 공력이 높은 귀면쌍살과 여러 번 상대하면서 부족한 공력을 검술로 메꾸는 방법을 연구해왔다. 천명과 몇 번 검을 부딪쳐 보니 천명의 공력이 높기는 하지만 귀면쌍살보다는 아래였다. 그렇다면 이기지 못할 것도 없으리라.

초의공은 각오를 다졌다. 문득 아까 통나무 기둥에 맞은 가슴 부위에서 계속 은은한 통증이 전해졌다. 속전속결로 끝장을 보지 않고 시간을 끌수록 자신에게 불리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영객, 보아하니 내상을 입은 듯한데 그 몸으로 노부와 나찰녀를 동시에 상대할 수 있겠는가?”

천명이 비웃었지만 초의공은 눈 한 껌벅하지 않고 곧장 검을 내찌르며 공격해 들어갔다. 초의공의 목적은 나찰녀였다. 초의공의 검이 집요하게 나찰녀를 뒤쫓았다. 그러는 초의공의 뒤를 천명의 백골검이 노렸다. 세 사람이 서로 어우러져 쉬지 않고 움직이며 공수를 거듭했다. 터질듯한 긴장감에 숨소리 한번 나지 않은 채 수백 쌍의 눈동자가 세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통나무 기둥에 묶여 그 모습을 바라보는 석추명은 몇 번이나 연출되는 아슬아슬한 장면에 마음을 졸였다. 사실 석추명은 뢰정의 상태가 걱정되어 뢰정을 보고 싶었지만 세 사람에게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그때 나찰녀가 갑자기 싸움에서 몸을 빼며 말했다.

“잠시 천 장로님 혼자서 좀 맡아주세요.”

갑자기 나찰녀가 싸움에서 빠지자 초의공이 노해 부르짖었다.

“싸우다 말고 어디로 가르는 것이냐?”

초의공의 검이 급히 나찰녀의 뒤를 쫓았지만 백골검이 귀곡성을 내며 초의공의 검을 차단했다.

“노부와 단둘이 싸우려니 두려우냐?”

초의공은 자신의 검이 백골검과 부딪힐 때마다 기이한 진동이 생겨 검로(劍路)가 조금씩 틀어지는 사실을 알고 더욱 바짝 경계심을 높였다. 그런데 곁눈질로 바라보니 나찰녀가 힘겹게 버티고 있는 뢰정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닌가!

초의공은 마음이 급해서 천명의 정면을 수평으로 가르며 공격하는 정공법을 선택했다. 공력이 자신보다 높은 사람을 정공법으로 공격하는 것은 극히 위험한 시도였다. 하지만 지금 뢰정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태에서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있겠는가.

챙강! 금속성과 함께 ‘꺅꺅’하는 귀곡성이 함께 울렸다. 초의공은 자신의 검이 백골검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순간 손목이 시큰해서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그 짧은 순간 몸을 선회하며 곤륜파의 절정 경공인 운룡대팔식(雲龍對八式)을 펼쳐냈다.

초의공의 몸이 지면에서 사선으로 비스듬히 누인 상태에서 발에 바퀴라도 단 듯 그대로 나찰녀의 뒤를 쫓아갔다.

나찰녀는 초의공이 쫓아오자 간드러진 웃음소리를 냈다.

“호호호, 아까 내린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했나 어디 시험해볼까?”

나찰녀는 부상을 입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뢰정의 뒷덜미를 잡더니 그대로 초의공을 향해 던졌다.

초의공은 뢰정이 자신의 검을 향해 곧장 날아오자 당황하여 황급히 검을 내리고 반대편 손으로 뢰정을 받아 안는 찰나, 나찰녀의 유성추가 절묘하게 아랫배를 뚫고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뢰정을 받아 안지 않았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는 공격이었다.

“선배님!”

석추명이 그 광경에 몸서리치며 목이 터지라고 소리를 질렀다.

나찰녀의 유성추가 초의공의 아랫배를 관통하는 순간, 천명의 백골검이 초의공의 등 뒤에서 가슴 쪽으로 튀어나왔다. 초의공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배와 가슴을 관통한 무기를 쳐다보았다. 초의공의 눈동자에 미친 듯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뢰정의 모습이 비쳤다.

“의공! 의공!”

뢰정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초의공의 손을 움켜잡았다.

“정.... 정이, 자... 자네를.... 끝까지 도와주지 모...못.... 해서 미안....하―!”

초의공은 말을 끝내지 못했다. 나찰녀와 천명이 동시에 자신의 무기를 빼냈기 때문이었다. 무기가 빠져나가면서 초의공의 아랫배와 등에서 핏물이 분수처럼 튀어 올랐다.

“의공!”

“선배님!”

뢰정과 석추명의 간절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초의공은 그대로 털썩 땅바닥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의공! 의공!”

뢰정은 초의공의 시신을 안고 땅을 치며 통곡했다.

“내가 자네를 죽인 걸세. 내가 자네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않았더라면....! 의공, 이 사람아!”

평소에 단정한 모습만 보여 검군자(劍君子)라는 별칭이 있는 뢰정이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땅바닥에 퍼져 앉아 초의공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 모습에 초의공을 공격했던 나찰녀와 천명마저도 손길을 거두고 물끄러미 뢰정을 바라보았다.

그때 남무궁이 뢰정 옆으로 다가왔다.

“뢰 장로, 친우 한 명의 죽음 때문에 그토록 슬퍼하다니, 검군자답지 않구먼. 으흐흐흐. 어차피 이렇게 될 운명이었던 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겠지?”

남무궁의 말에 뢰정이 고개를 들고 남무궁을 쏘아보았다.

“남무궁 네 이놈.....!”

뢰정은 지금 이 순간 남무궁을 향해 일검이라도 내찌르고 싶었으나 그럴 힘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피눈물을 흘리며 노려볼 뿐이었다.

뢰정의 시선을 받던 남무궁이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 네놈의 피눈물을 보니 내 마음이 즐거워지는군. 친우를 또 한 명 잃으면 어떻게 될까? 그것도 바로 네놈의 잘못으로 목숨을 잃는다면 말이야.”

남무궁이 천천히 황보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에 뢰정이 놀라 몸을 일으키려다가 등 뒤에서 전해오는 고통으로 몸을 휘청거렸다.

남무궁은 황보의 옆에 서더니 황보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시선은 그대로 뢰정을 향하고 있었다.

뢰정은 그 모습에 놀라 다시 칼을 짚고 일어서려 안간힘을 썼다.

“남무궁, 신교의 10만 교도들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너를 지켜보고 있다. 네놈이 이런 악행을 저지르고도 무사할 성싶으냐?”

뢰정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소리를 질렀다.

“으하하하. 자고로 배신자의 말로는 처참한 법이니라. 신교에서는 교주가 곧 하늘. 뢰정,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보아라. 오늘 황 장로는 바로 네놈 때문에 죽는 것이다.”

남무궁은 그리고는 황보에게 눈길을 돌렸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있는가, 황 장로?”

그러자 황보가 남무궁은 본척만척 뢰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뢰 장로, 하늘의 그물을 몹시 광대하여 성근 듯하지만 하나도 빠뜨리는 법이 없다네. 우리는 우리 역할을 다했으니 너무 자책하지 말게나.”

목숨이 촌각에 달려있었지만 황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오히려 뢰정을 향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황 장로!”

황보의 말에 뢰정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황보의 말에 남무궁이 콧방귀를 끼며 손을 활짝 펼쳐 황보의 머리를 내리쳤다. ‘퍽!’하고 두개골이 깨지는 둔탁한 소리가 나더니 황보의 머리가 깨지고 눈알이 앞으로 툭 튀어나왔다. 황보는 그대로 즉사하여 옆으로 쓰러졌다.

“으아아악!”

괴로움을 이기지 못한 뢰정이 고개를 젖혀 하늘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항상 단아하고 고결하던 모습은 간데없고, 옷은 피투성이에 머리는 봉두난발, 얼굴에는 흙먼지와 눈물 자국이 엉킨 광인(狂人)이 되어 목을 놓아 통곡했다.

초의공에 이어 황보까지 목숨을 잃자 석추명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게다가 비통해하는 스승의 모습을 보자 자책감에 머리를 들 수 없었다. 뜨거운 눈물이 석추명의 눈에서 흘러내렸다.

남무궁은 손에 묻은 황보의 핏자국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옷에 대고 슥슥 닦더니 이번에는 뢰정 앞으로 다가왔다. 괴로움에 눈물만 흘리던 석추명은 교주의 모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교주가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지 알아차린 것이다.

“안됩니다! 교주님, 절대 안 됩니다!”

석추명이 몸부림을 치며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묶인 팔을 풀려고 버둥거렸으나 공력을 쓸 수 없는 상태에서 굵은 동아줄을 끊을 방법은 없었다. 오히려 심한 몸부림에 살갗이 쓸려 벗겨져 생채기만 났다.

하지만 석추명은 아픔도 느끼지 못한 채 남무궁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목이 터지라고 외쳤다.

“교주님, 스승님은 절대 안 됩니다. 교주님!”

하지만 남무궁은 석추명의 비명소리를 즐기듯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두 사제가 말이야, 하는 짓이 어찌 이렇게도 똑같은지 모르겠단 말이야. 이러니 재미가 있을 수밖에.”

남무궁이 뢰정의 정수리 위로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뢰 장로, 이게 자네가 저지른 짓의 대가일세. 그리고 자네가 사랑하는 제자는 아마 지금, 조금 전까지 자네가 느끼던 것과 똑같은 고통을 맛보고 있을 게야. 으흐흐흐.”

남무궁의 말에 뢰정이 석추명을 바라보았다.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석추명을 바라보며 뢰정은 조금 전 황보가 그랬던 것처럼 담담한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추명아, 황 장로님의 말씀처럼 자신을 너무 자책하지 말거라.”

뢰정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석추명에게 자상한 미소를 띠었다.

“살아남아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아라. 알겠느냐?”

“스승님!”

남무궁의 손이 뢰정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석추명은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질렀다. 얼마나 소리를 질렀는지 얼굴이 시뻘게지고 목에서 힘줄이 투둑 솟아났다.

하지만 석추명의 울부짖음에도 남무궁의 손은 그대로 뢰정의 정수리로 떨어져 내렸다.

“스승님!”

퍽! 수박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뢰정의 두개골이 즉시 터져나가면서 허연 뇌수와 함께 시뻘건 핏물이 흘렀다.

“아아아악!”

스승의 끔찍한 죽음 앞에 석추명은 참지 못하고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마음속에 쌓인 울분과 고통은 풀리지 않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남무궁이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등을 돌려 뇌옥 초소의 정문으로 걸어갔다.

“모두 철수한다.”

“존명.”

명왕대주 사마곤이 교주의 말에 포권을 취했다. 그때 교주 남무궁이 잠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 저 두 연놈은 단상 위에 다시 잘 묶도록 하라. 높은 데서 자신들이 저지른 일의 대가를 하나하나 되새기며 고통을 잘근잘근 되씹을 수 있도록 말이야. 으하하하.”

교주 남무궁의 웃음소리가 긴 꼬리를 남기며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그 뒤를 따라 명왕대원들이 이동하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그 많던 병사들이 어느새 남김없이 사라지고 뇌옥의 광장에는 참혹한 형태의 시신 네 구만 남아서 뒹굴었다.

화련산 정상에서 밤바람이 불자 비릿한 피 냄새가 코끝에 맴돌았다.

나찰녀가 기둥을 부러뜨릴 때 정신을 잃었던 황연화는 언제 정신을 차렸는지 눈앞에 펼친 광경에 조용히 눈물만 흘릴 따름이었다.

밤이 깊어지면서 먹구름이 일기 시작하더니 투두둑, 하고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차가운 밤바람에 으슬으슬 한기가 들더니 비까지 내리자 황연화는 이까지 딱딱 부딪치며 추워했다. 하지만 석추명은 차가운 시신이 되어 눈앞에 누운 뢰정의 모습에서 넋이 나간 사람처럼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디선가 밤 까마귀 소리가 까욱까욱 하고 찬비를 맞으며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석 대주”

황연화가 조용히 석추명을 불렀다.

“그때 나를 구하러 오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아마도 일어나지 않았겠지요?”

깊은 회한과 슬픔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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