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88화 (88/201)

#   88 - 광세일소_한추영 - 1473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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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화. 복귀 (6)

뢰정의 눈앞에 나타난 사람은 교주 자리를 놓고 쟁탈전이 치열했던 당시, 실종되었던 전대의 장로 백골마검(白骨魔劍) 천명(千命)이었다. 뢰정 자신이 석추명 정도의 실력이었을 때 천명은 이미 지금 자신의 무공 수위를 훨씬 능가했던 고수였다.

지난 30여 년간 생사를 알 수 없어 죽었다고 여겼는데 갑자기 이 자리에 나타날 줄이야. 게다가 당시 천명 장로는 나이나 무공은 말할 것도 없고, 그때 당시 좌호법사자였던 남무궁보다 직책상으로도 훨씬 선임이었다. 그랬던 자가 남무궁의 수하가 되어 나타나다니.

“뢰 장로, 천 장로를 알아보겠는가? 으하하하.”

남무궁의 웃음소리가 적막한 밤하늘에 다시 울려 퍼졌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신교의 기강이 아주 해이해졌구나. 감히 장로 나부랭이가 교주님께 맞서다니.”

천 장로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가 온통 새하얀 백발이라, 언뜻 보면 탈속한 신선과도 같은 풍채였다.

뢰정은 잠시 천 장로를 바라보더니 검을 고쳐 잡았다.

“천 선배, 여태껏 어디서 무얼 하고 계시다가 30년 만에 한참 후배의 앞잡이가 되어 나타나신 게요? 현 교주의 분탕질에 신교의 위상이 땅에 떨어진 지 오래되었소이다.”

뢰정은 자신보다 한참 선배인 천명에게 전혀 기죽지 않고 소리를 높였다.

“네놈은 젊을 때도 선배 알기를 우습게 여기더니 나이 들어서도 아직 그 버릇을 고치지 못했구나. 내 오늘 교주님을 대신하여 신교의 배신자를 처단하리라.”

천명이 검을 빼 들자 검에서 서늘한 기운이 흘러나와 반경 백 척 이내에 있는 사람들은 기분 나쁜 한기에 하나같이 몸서리쳤다. 희미한 푸른 빛이 감도는 그 검은 백골마검이라는 별호를 안겨준 백골검(白骨劍)이었다.

“백골검의 위력이 그대로인지 어디 한번 봅시다. 천 선배!”

뢰정의 검이 하얀색 무지개처럼 길게 이어지더니 질풍처럼 천명에게 날아갔다. 검 끝에서 십수 개의 하얀색 무지개가 폭사 되어 나오면서 기다란 유선형을 그리며 천명을 공격해 들어갔다.

뢰정의 검법을 본 석추명은 눈을 부릅떴다. 스승이 실전에서 한 번도 펼친 적이 없었던 숭양일기검을 펼친 것이었다. 심지어 지난번 임가장에서 귀면쌍살과 싸울 때도 사용하지 않았던 검법이었다.

천명은 뢰정의 무공은 훤히 꿰뚫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뢰정이 돌연 처음 보는 검법을 펼치자 놀란 듯 안색이 변했다. 검법의 법도가 엄밀하고 검의가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 보기 드문 상승검법이었다.

“이게 무슨 검법이냐?”

“흥, 검법의 이름은 알아서 뭘 하려고 그러시오?”

뢰정이 쏘아붙이자 천명은 갑자기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네놈이 펼치기에는 아까운 검법이다만 네놈 말이 맞구나. 곧 죽을 놈의 검법 이름 따윈 알 필요 없지.”

천명은 말을 끝내더니 백골검을 좌우로 부채처럼 휘둘러 뢰정의 검을 막았다. 천명이 백골검에 공력을 주입하자 검에서 나오는 푸른빛이 진해지더니 뢰정과 검과 부딪칠 때마다 금속성이 아니라 ‘꺅꺅’하고 듣기 거북한 귀곡성이 났다.

석추명은 거꾸로 매달린 채로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았다. 스승 뢰정은 지금까지 자신이 본 것 중에서 가장 정심한 무공을 펼치고 있었다. 심지어 숭양일기검의 초식 중 마지막 절초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석추명은 잠시 당황스러웠다. 얼마 전에 교주가 도발하듯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뢰 장로가 과연 석 대주에게 중양신공을 제대로 다 가르쳐주었을까?’

하지만 석추명은 스승의 인품을 믿었다. 스승은 일부러 무엇인가를 음흉하게 숨기고 다 가르친 것처럼 꾸미는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만약 석추명에게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석추명이 조금 더 지켜보니 그제야 스승이 자신에게 그 절초를 가르쳐주지 않은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은 아직 공력이 부족해서 지금 스승이 사용하는 초식을 배우더라도 펼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공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연공을 하면 크게 다칠 수도 있기에 스승은 아무래도 그 점을 걱정했던 것이리라. 그 생각이 드니 잠시 잠깐이라도 스승을 의심한 것이 못내 죄스러웠다.

석추명은 눈을 크게 뜨고 스승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스승 뢰정은 신교 제일의 검객으로 명성이 자자했지만 정작 뢰정의 제자인 석추명은 스승이 실전에서 싸우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다. 비록 배신자로 낙인찍혀 기둥에 거꾸로 묶인 상태이긴 하지만 오늘에서야 스승의 절묘한 무공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하지만 뢰정의 상대인 전대의 장로라는 사람의 무공도 뢰정 못지않았다. 오히려 공력은 뢰정을 훨씬 능가하는 듯했다.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는 석추명은 웬일인지 계속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스승이 제아무리 절기를 총동원하여 펼쳐도 조금도 승기를 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정작 뢰정의 상황은 석추명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천명이 비록 전대의 장로이기는 하나 80세에 가까운 노쇠한 몸이라 공력은 뛰어나더라도 근력이 약해서 해볼 만한 싸움일 것으로 판단했건만, 정작 검을 부딪쳐 보니 천명의 근력은 40대 장정의 근력과 다를 바 없었다.

게다가 검을 부딪칠 때마다 백골검에서 은은한 진동이 발생하여 뢰정의 심기를 흩뜨리는 것이 아닌가. 뢰정은 그것을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며 애써 무시하려 했으나 이미 마음은 양분되어 심의상통(心意相通)한 경지에 들지 못하고 공격이 계속 겉돌았다. 뢰정은 싸울수록 등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천명도 뢰정이 당황한 것을 눈치챘는지 입가에 은근한 미소를 띠고 말했다.

“선배를 무시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려주마.”

천명이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백골검으로 곧장 뢰정의 아랫배를 찔러왔다. 뢰정이 급히 검을 늘어뜨려 막아내려는 순간, 백골검이 살아있는 백사처럼 뢰정의 검을 타고 스르르 이동하여 손목을 노리는 것이 아닌가! 더욱이 백골검이 뢰정의 검을 훑자 백골검에서 고막이 터질듯한 귀곡성이 나서 뢰정은 견디지 못하고 검을 손에서 놓고 말았다.

그러자 그때를 노렸다는 듯이 백골검이 혀를 날름거리는 독사처럼 뢰정의 팔을 휘감아왔다.

“스승님!”

그 모습에 석추명은 자신의 불안한 생각이 현실로 나타날까 봐 두려워 온몸을 뒤흔들며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그 순간, 뢰정의 뒤쪽에서 비수 두 자루가 바람을 가르며 쏜살같이 백골검을 향해 날아갔다. 백골검을 막아 뢰정을 구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어딜!”

갑자기 천명의 뒤에서 뾰족한 여인의 목소리가 나더니 한 쌍의 작은 금빛 유성추가 그야말로 가공할 기세로 비수를 향해 날아갔다. 검이 날아가는 속도도 눈으로 좇기에는 어려울 정도였지만 금빛 유성추는 검보다 가벼워서인지 유난히 빨라 순식간에 비수에 부딪치니 비수 두 자루는 그만 힘을 잃고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뒤미처 군사들 속에서 누군가 장검을 뽑아 들고 유성처럼 뛰쳐나왔다. 쾌속하기 그지없는 몸놀림, 엄정한 법도, 진중한 검세. 바로 곤륜파 검객 초의공이었다.

초의공은 장검을 뽑아 들고 나오기가 무섭게 바람개비처럼 몸을 회전하며 그대로 천명을 공격해 들어갔다. 그 동작이 얼마나 신속한지 천명은 검을 피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네놈 상대는 내가 해주마!”

귀를 자극하는 고음의 탁한 소리가 허공에 퍼지면서 금빛 유성추가 다시 초의공을 향해 날아갔다. 유성추는 어린아이 주먹만 한 크기로 표면이 뾰족한 가시로 덮여 있어 스치기라도 하면 대번에 살갗이 갈라질 것만 같았다.

“오냐, 얼마든지 받아주마.”

초의공이 자신의 절기 중천자미유성검을 펼쳐냈다. 검을 한번 휘두를 때마다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맹한 기운은 그야말로 밤하늘을 가로질러 떨어지는 유성을 연상시켰다.

천명에게 밀리며 위급한 순간을 맞이했던 뢰정은 초의공이 등장하자 안심이 된 듯 검법이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밑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교주 남무궁이 박장대소를 터뜨리며 내뱉었다.

“암, 이래야 재미있지. 으하하하. 뢰 장로, 혼자 오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곤륜 제일 검객이라는 설영객을 데려올 줄은 몰랐군. 좋아.”

남무궁은 잠시 껄껄 웃더니 단상 위에서 싸우는 천명과 여인에게 소리쳤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저 두 놈을 쓸어내라. 감히 신교를 능멸한 죗값을 톡톡히 치르게 하라.”

초의공은 상대방이 여인인 데다 사용하는 무기조차 유성추라서 금방 제압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유성추는 먼 거리에 있는 적을 공격하는 데는 유용하지만 근접전에서는 불편한 무기였다. 게다가 빙빙 돌리며 사용하는 무기라 속도를 제어하기가 불가능했다. 고수들 간의 싸움에서는 이와 같은 작은 요소 하나가 승패를 좌우하는 요인이 되기 때문에 어떤 무기를 사용하는지는 중요한 문제였다.

하지만 이 여인은 유성추의 속도를 늦추었다 높였다 자유자재로 다루었다. 게다가 추가 두 개라 왼쪽에서 하나를 막아내면 어느새 오른쪽에서 다른 하나가 허를 찌르며 공격해 들어왔다. 초의공은 그제야 자신이 상대방을 과소평가한 줄 알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귀하의 이름이 어떻게 되시는가?”

오늘 이 자리를 헤쳐나갈 수 있을지 알 수는 없지만 상대방의 이름이라도 알아야 나중에 복수라도 할 수 있을 듯싶었다.

초의공의 물음에 남무궁이 차갑게 웃으며 대답했다.

“상대방이 마음에 드시는가, 설영객? 하하하. 혹시 나찰녀라고 들어보았나?”

초의공은 나찰녀라는 말에 가슴이 섬뜩했다. 나찰녀는 몇 년 전부터 복건성에서 악명을 떨치는 대마두였다. 복건성은 물산이 풍부하여 해적들의 노략질이 끊이지 않는 곳으로 워낙 무법지대라 무림맹이나 백련신교의 영향력도 통하지 않는 곳이었다. 그 틈을 노리고 등장한 나찰녀는 악랄한 수법으로 정사 양도를 한꺼번에 제압하고 우후죽순으로 세력을 키워간다고 들었다.

그때 나찰녀가 무슨 생각인지 돌연 유성추 공격을 멈추고 황보가 묶여있는 기둥 뒤로 훌쩍 뛰어 내렸다.

“자, 흥을 좀 더 돋워 볼까?”

말을 마친 나찰녀가 황보가 묶인 기둥의 아랫부분을 발로 차자 기둥이 대번에 부러져 나가면서 황보가 매달린 채 그대로 초의공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 광경에 초의공은 깜짝 놀랐다. 섣불리 막으려 했다가는 황보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었다. 초의공은 검을 붙잡지 않은 왼손을 앞으로 뻗어 날아오는 기둥을 막은 다음, 뒤로 물러서며 기세를 완화했다.

하지만 초의공의 동작을 예상했다는 듯이 나찰녀는 석추명과 황연화가 묶인 기둥마저도 차례로 부러뜨리더니 초의공에게 날려 보내는 것이 아닌가.

“이 무슨 짓이냐!”

그 광경에 옆에서 싸우던 뢰정이 급히 한쪽 팔로 황연화가 묶인 기둥을 잡았다. 하지만 석추명이 묶인 기둥은 그대로 날아가 황보가 묶인 기둥을 뒤에서 정통으로 맞추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황보가 묶인 기둥이 초의공의 가슴을 때렸다. 초의공은 그 와중에도 급히 검을 놀려 황보를 묶은 동아줄을 끊었다.

“윽!”

가슴을 정통으로 맞은 초의공의 안색이 대번에 새하얘졌다. 내상을 입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석추명이 묶인 기둥은 황보가 묶인 기둥을 때리고서 그대로 흙바닥에 두 척 남짓 박혀 들어갔다. 나찰녀의 공력이 얼마나 높은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사례였다. 그 광경에 초의공과 뢰정의 안색이 대번에 변했다.

“호호호, 그렇게 인정에 약해서야! 내가 보여드리지,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이야.”

나찰녀가 발을 구르며 몸을 공중으로 띄우더니 유성추를 질풍같이 앞으로 내던지며 날아왔다. 하지만 이번에 유성추가 겨냥한 것은 초의공이 아니라 기둥에 묶여 꼼짝 못 하는 석추명이었다. 거꾸로 묶여있던 석추명은 기둥이 다시 박히면서 똑바로 선 상태였다.

“추명아!”

뢰정은 사랑하는 제자의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검을 든 채 곧장 유성추를 막으려 몸을 띄웠다.

“싸우다가 어딜 내빼는 것이냐.”

백골마검 천명이 백골검을 휘리릭 뿌리자 시퍼런 검기가 뢰정의 등 뒤로 달려들었다. 뢰정은 석추명을 구하러 전속력으로 앞으로 질주하는 터라 뒤에서 달려드는 검기를 막아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뢰정의 앞에서 기둥에 묶여 뢰정을 바라보던 석추명의 눈에는 뢰정의 등 뒤로 쏟아져 내리는 검기가 한눈에 들어왔다.

“위험합니다. 스승님!”

석추명이 소리치는 순간, 뢰정의 검이 석추명에게 내리꽂히는 유성추를 막아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천명이 뿌린 검광이 그대로 뢰정의 등을 가르고 지나갔다.

“윽!”

“스승님!”

“뢰정!”

석추명과 초의공이 동시에 놀라서 부르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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