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 광세일소_한추영 - 1472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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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화. 복귀 (5)
어두운 밤, 평소에는 적막하기만 한 백련신교 지하뇌옥 앞 광장에는 수백 명의 군사가 새까맣게 운집해 있었다. 목책 안쪽의 마당에만 백여 명의 군사들이 도열해 있었고, 목책 바깥쪽에서도 족히 이삼백 명은 될 듯한 군사들이 있었다. 군사들은 하나같이 병기를 장착하고 삼엄한 표정이었다.
목책 안쪽의 넓은 마당에는 커다란 횃불 십여 개가 훨훨 타오르며 주위를 대낮같이 훤히 비추고 있었다. 목책 정문에 있는 초소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쪽에 언제 설치했는지 넓은 단상이 설치되어 있고 그 위에 나무 기둥 네 개가 서 있었다. 기둥마다 사람이 한 명씩 묶여 있는데 바로 황연화와 석추명, 뇌옥에 갇혀 있던 황보, 뢰정으로 속이고 신교로 들어온 산적 주노삼이었다.
네 사람은 팔을 머리 위로 올린 채 묶여 있었고, 모두 기진맥진한 나머지 자신의 몸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교주 남무궁이 뇌옥 앞에 나타나자 목책의 정문이 활짝 열렸다.
“교주님께서 왕림하셨다. 모두 무릎을 꿇어라!”
누군가 큰소리로 외치자 뇌옥 안팎에 운집해 있던 수백 명의 군사가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쿵! 그 소리에 나무에서 자던 새들이 놀라 후두둑 날아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남무궁은 운집한 군사들을 한번 둘러보고는 곧장 발을 한번 내딛더니 뇌옥 앞에 설치된 단상 위로 올라갔다. 보통 사람 같으면 아무리 고수라도 걸을 때는 다리가 구부러지는 법이거늘 남무궁이 걸음을 내디딜 때는 마치 강시처럼 무릎을 굽히지도 않았다. 순식간에 단상 위로 올라간 남무궁이 뢰정에게 다가갔다.
“뢰 장로, 이렇게 만나다니 참으로 인연이 기구하지 않소? 으하하하.”
가짜 뢰정 역할을 맡은 주노삼은 남무궁이 다가오자 겁에 질려 큰소리로 외쳤다.
“아이고, 교주님! 저는 뢰 장로가 아닙니다요. 저는 주노삼이라는 놈인데 뢰 장로가 저를 협박하여 자신으로 변장하게 시켰습니다요. 저는 그저 산에서 좀도둑질이나 하던 놈입니다요. 교주님,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주노삼이 겁에 질려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말았다. 주노삼의 말에 남무궁의 눈꼬리가 하늘로 추켜 올라갔다.
“뭣이라? 그러고 보니 네놈은 정말 뢰정이 아니로구나.”
주노삼은 입에 침이 튀도록 남무궁에게 애원하며 말했다.
“뢰 장로와 뢰 장로의 제자라는 저 어린놈이 저를 협박했습니다요. 교주님, 저는 정말 결백한 놈입니다요.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교주님!”
주노삼이 옆에 묶인 석추명을 턱으로 가리키며 남무궁에게 사정했다. 남무궁은 뢰정이 가짜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석추명을 노려보았다.
“이놈! 네놈이 제법 머리를 굴렸구나.”
교주가 몸을 뒤로 휙 돌리고 단상을 내려가며 말했다.
“황연화만 빼고 나머지 세 놈은 모두 거꾸로 매달아라!”
교주의 호통에 단상 근처에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우렁찬 소리로 대답했다.
“존명!”
졸지에 석추명, 황보, 주노삼은 거꾸로 매달리게 되었다. 주노삼은 거꾸로 매달리자 피가 머리로 쏠려 발음도 제대로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계속 말을 쏟아냈다.
“아이고, 교주님! 저는 결백하다니까요. 교주님, 제발 제 말을 믿어주십시오. 저는 궁벽한 산골의 좀도둑에 지나지 않는 놈입니다요. 교주님!”
주노삼이 거꾸로 매달린 채로도 쉬지 않고 소리를 지르자 단상 위에 있던 명왕대 부대주 자겸이 주노삼의 배에 주먹을 내지르며 나직이 뇌까렸다.
“조용히 하지 못할까! 네놈이 지금 어느 안전이라고 소리를 지르느냐!”
“헉!”
자겸의 무쇠 주먹에 복부를 정통으로 맞은 주노삼은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허파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주노삼이 입을 다물자 남무궁이 뒷짐을 진 자세로 그 자리에 모인 병사들을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뢰 장로, 네놈이 여기에 숨어있다는 것을 다 알고 있다. 보다시피 네놈의 계획은 이미 사전에 발각되었으니 순순히 항복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게 다 네놈의 어리석은 제자 덕분이지. 으하하하.”
남무궁의 웃음소리가 밤하늘에 길게 울렸다. 주위에 수백 명의 사람이 있었지만 교주의 웃음소리 외에는 횃불의 나무가 탁탁, 하고 타들어 가는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뢰 장로. 내, 평소에 뢰 장뢰의 명석함에 자주 감탄하곤 했는데 이번 일은 영 실망스럽구먼. 황보 저 늙은이 한 명 구한답시고 지금 몇 명의 목숨을 갖다 바치는 것인가? 게다가 말이야, 자네와 어리석은 자네 제자 때문에 오히려 황보가 더 빨리 죽게 생겼으니 황보는 죽어서도 자네를 원망하겠구먼. 으하하하.”
남무궁은 어딘가에 숨어있을 뢰정이 들으란 듯이 크게 소리쳤다.
“뢰정! 어서 나와 순순히 항복해라. 셋 셀 동안 나오지 않는다면 여기 단상에 있는 연놈들의 목숨을 하나씩 없애주마.”
남무궁이 오만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스승님, 절대 나오시면 안 됩니다. 어차피 저희들은 오늘 죽을 운명입니다. 스승님이라도 목숨을 보존하십시오!”
석추명이 거꾸로 매달린 상태에서도 몸부림을 치며 소리쳤다. 몸은 이중 삼중으로 점혈을 당해 내공은 쓸 수가 없었다. 그저 악으로 깡으로 내는 소리였다.
“시끄럽다! 누가 네놈에게 입을 열라 허락했느냐?”
남무궁이 단상 아래서 허공을 격해 주먹을 움켜쥐자 돌연 석추명은 복부에 창자가 끊어져 나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남무궁이 격공권(隔空拳)을 시전한 것이다. 가벼운 손놀림이었지만 황소 열 마리가 동시에 복부를 들이받는 듯 고통스럽기 짝이 없었다.
“윽!”
거꾸로 매달린 석추명의 입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석추명의 몸이 고통으로 활처럼 휘었다.
“자, 그럼 숫자를 세겠다.”
남무궁이 두 발로 버티고 서서 손가락을 접으며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남무궁은 잠시 뜸을 들이고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쥐새끼 한 마리 움직이는 낌새도 없었다.
“셋!”
여전히 주위는 적막했고 그림자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단상 위에서 겁에 질린 주노삼이 몸을 뜨는 소리만 간간이 났다.
“흠.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 어쩔 수 없군. 여봐라, 당장 저 가짜 뢰정 놈의 목을 베어라.”
“존명.”
주노삼은 남무궁이 첫 번째 희생자로 자신을 지명하자 깜짝 놀라 실성이라도 한 듯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교주님, 저는 무고합니다요, 무고해요! 뢰정, 이 썩을 놈아! 당장 나오지 못하겠느냐? 뢰정, 이 천하의 육시랄 놈아!”
하지만 교주의 명을 받은 부대주 자겸이 큰 칼을 들어 올려 주노삼의 앞으로 가더니 주노삼의 목을 단숨에 내리쳤다. 그러자 주노삼의 머리가 순식간에 몸에서 분리되더니 마치 수박처럼 단상 위를 한참 동안이나 데굴데굴 굴러갔다.
석추명은 자신의 코앞에서 주노삼의 머리가 분리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주노삼이 비록 죽어 마땅한 악인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미안하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 속으로 조용히 그의 명복을 빌었다.
머리 위로 두 팔이 묶여 기진해 있던 황연화는 주노삼의 목에서 피가 튀기자 그 모습이 끔찍한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다만 황보는 오랜 투옥과 고문생활에 이골이 나서인지 세 명 중 가장 차분했다.
“황 장로님, 정말 죄송합니다. 이 모든 일이... 저의 불찰 때문입니다.”
거꾸로 매달린 상태에서 석추명이 황 장로에게 고백하듯 말했다. 몸의 고통보다 마음의 고통이 몇십 배, 몇백 배 더 컸다. 자신의 목숨으로 다른 사람의 목숨을 대신할 수만 있다면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죽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비썩 말라 뼈만 남은 황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석추명을 바라보며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사람이 일을 도모하더라도 그 성사는 하늘에 달려있다고 했네. 너무 자책하지 말게나.”
하지만 그다음 순간, 말을 했다는 이유로 자겸의 무쇠 주먹이 석추명과 황보의 복부에 내리꽂혔다. 이미 교주의 격공권에 내상을 입은 석추명은 자겸의 주먹질을 견디기 힘들었다.
“헉!”
석추명과 황보의 입에서 고통에 찬 신음소리가 시간차를 두고 새어 나왔다.
단상 아래에서 주노삼이 죽는 모습을 지켜보던 남무궁은 입가에 미소를 짓더니 다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저 가짜 놈이야 죽든 말든 상관없을 테니 큰 고민이 안 되었나 보군. 그럼 이번에는 자네의 절친한 친우인 황보로 해 볼까? 자, 다시 셋을 세겠다. 셋을 셀 동안 안 나오면 황보의 목은 그 순간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남무궁은 차갑게 내뱉더니 다시 셋을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그때였다. 군사들 속에서 하얀 백색 광채가 번쩍하는가 싶더니 단상 위로 누군가 올라서면서 자겸에게 검을 휘둘렀다. 자겸은 부지불식간에 공격을 받고 황급히 자신의 대도를 휘둘러 검을 막으려 했으나 검이 찔러오는 속도가 기이할 정도로 빨라서 그만 어깻죽지를 찔리고 말았다. 자겸이 어깻죽지 부상으로 비틀거리는 순간 이미 차가운 검날은 목에 닿아 있었다.
“뢰, 뢰 장로...!”
단상 위로 올라온 사람은 다름 아닌 수라검 뢰정이었다. 교주가 황보를 죽이겠다고 하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뛰쳐나온 것이었다. 자겸은 명왕대의 부대주이며 뇌옥 수비대의 대장인 자신이 이렇듯 단 한 수에 당하자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솟아났다.
“자겸, 살고 싶다면 썩 물러서라.”
뢰정이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자겸에게 말했다. 보통 때였다면 신교 사대검왕 중의 한 명이요, 장로의 신분인 뢰정 앞에서 자겸은 고개도 들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교주를 비롯하여 수백 명에 달하는 신교의 군사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발자국이라도 뒤로 물러선다면 그 뒤에 쏟아질 교주의 책임추궁과 병사들의 비웃음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자겸은 자신이 뢰정의 상대가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싸우기로 마음먹었다. 죽더라도 교주에게 밉보이는 짓은 하지 말아야 했다.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죽는 것은 똑같았다.
“신교의 반역자, 뢰정, 내 칼을 받아라!”
자겸의 거대한 몸통이 돌연 활처럼 휘면서 뢰정의 검을 피한 다음 손에 쥔 명왕대도로 거센 바람을 일으키며 뢰정을 베어왔다. 자겸이 휘두르는 대도는 무게만도 이삼십 근에 달할 정도로 극히 무거운 도였다. 칼날의 면이 넓어 공기와의 저항이 커서인지 칼을 휘두를 때마다 웅, 웅 하고 세찬 바람소리가 귀를 때렸다.
자겸의 대도가 단상 바닥을 때리자 단상에 즉시 커다란 구멍이 생기더니 황보가 묶인 기둥이 쓰러질 듯 한쪽으로 기울었다.
뢰정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잽싸게 자겸의 대도를 피하더니 몸을 비틀며 자겸의 겨드랑이 밑으로 검을 절묘하게 꽂아 넣었다. 신교의 고수 중 검으로는 따를 자가 없다는 수라비기(修羅祕技)를 펼친 것이다.
“윽!”
뢰정의 검이 자겸의 왼쪽 겨드랑이를 관통하여 어깨 위로 튀어나왔다. 뢰정이 검을 뽑자 겨드랑이 아래로 핏물이 주르르 흘렀다. 자겸은 오른손으로 왼쪽 어깨를 감싸며 망연자실하여 뢰정을 바라보았다. 뢰정의 무공이 자신보다 높은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허망하게 당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석추명은 뢰정이 튀어나오자 한편으로는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웠다. 비록 초의공이 은밀히 숨어서 도와준다고 하더라도 이 자리에 모인 수백 명의 군사들을 다 물리치지는 못할 것이다. 게다가 절세신공의 소유자인 교주가 저렇게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제야 말로 모든 일은 하늘에 맡길 뿐이었다.
자겸이 고통을 참으며 비틀거리자 남무궁이 소리쳤다.
“자겸, 너는 뢰 장로의 상대가 아니니 물러서라.”
교주의 말에 자겸이 뒤로 물러섰다. 어느새 단상 주위에는 군사들이 무기를 고쳐잡고 새까맣게 에워싸 전투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순간. 그러나 단상 아래에 있던 남무궁은 눈앞의 뢰정이 아무런 문제도 아니라는 듯 미소를 띠며 말했다.
“뢰정, 너는 평상시 너의 지모에 항상 자신이 넘쳤지. 오늘만 하더라도 신교의 고수들이 대거 사천으로 출병하여 자리를 비운 지금, 네놈을 상대할 만한 고수는 총단에 남아있지 않으리라고 생각했겠지. 안 그런가?”
남무궁이 뢰정을 노려보며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과연 그럴까?”
뢰정은 남무궁이 무슨 소리를 하든지 대꾸하지 않고 그 자리를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생각하는 눈치였다.
“네놈은 그래도 한때 신교의 호교장로였으니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줘야겠지. 천 장로, 나오시게.”
교주의 명이 떨어지자 군사들 속에서 누군가 공중으로 치솟더니 마치 공중을 걷듯이 천천히 교주 앞으로 날아왔다. 극치에 이른 천상제(天上梯) 무공이었다.
“부르셨습니까, 교주님.”
교주 앞에 부복한 사람은 머리가 새하얀 백발노인이었다. 하지만 뢰정은 그 사람을 보자 번개에 감전이라도 된 듯 깜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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