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 광세일소_한추영 - 1469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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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화. 복귀 (4)
석추명은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어두운 비밀통로 안을 천천히 더듬으며 기어나갔다. 빛 한줄기 들어오지 않았지만 통로가 한쪽으로만 이어져 그 방향대로만 가면 되었다.
얼마나 걸음을 옮겼을까 황연화의 방 쪽에서 그릇이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석추명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렇지 않아도 아까부터 들려오던 교주의 고함소리, 호통소리에 마음이 계속 불안했다. 그런데 이제 교주가 물리력까지 행사한 것이다. 물론 무공실력을 드러내기로만 한다면야 힘없는 여인의 목숨쯤이야 파리 목숨보다 쉽게 거둘 수 있겠지만, 어찌 자신의 아내에게 무공을 쓴단 말인가?
석추명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부부싸움이니 제삼자인 자신이 관여할 수도 없고 관여해서도 안 되었다. 몇 차례 티격태격하다가 말리라.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석추명은 애써 좋은 쪽으로 생각하며 바깥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하지만 그다음으로 들려온 둔탁한 소리는 황연화의 방에 있던 커다란 자단목 탁자가 부러지는 소리였다. 뒤이어 분노에 찬 교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아하니 아내를 의심하는 것이 분명했다. 교주는 성격이 종잡을 수가 없고 손속이 잔혹한 편이라 이쯤 되니 황연화의 안위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 이 통로를 벗어나서 스승님께 뇌옥의 열쇠를 주지 않으면 황 장로를 구해낼 가능성은 없다. 내일 교주가 뇌옥에 가서 잡혀온 자가 수라검 뢰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자신은 살아날 수가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 몰래 뇌옥 근처에 잠입해 있는 스승과 초의공의 목숨도 위험해진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 되돌아가는 것보다 이대로 걸어나가서 한시라도 빨리 스승에게 뇌옥의 열쇠를 전달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그 길만이 또한 여러 명의 목숨을 살릴 수 있는 길이었다.
석추명은 마음을 일부러 독하게 먹고 다시 발걸음을 바깥쪽으로 내디뎠다. 그 순간, ‘짝!’하고 살이 거칠게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황연화의 비명이 들려왔다. 교주가 선녀 같은 불모님께 손찌검을 한 게 분명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석추명은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았다.
손찌검 소리는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교주가 기어이 불모님을 죽이려 하는구나!
더 이상 망설일 수가 없었다.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걸을 수도 없었다. 한시라도 바삐 달려나가 황연화를 구해야 했다. 자신의 실력으로 교주를 얼마나 막아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일단 달려나가서 온몸으로라도 막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일단 마음을 정하자 석추명은 신속히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손바닥으로 통로바닥을 짚고 경공을 시전했다. 좁은 통로 안이었지만 석추명의 몸은 화살처럼 황연화의 방으로 다시 쏘아져 갔다.
황연화의 방과 연결된 통로 문이 눈앞에 드러났다. 석추명이 그대로 발로 차서 문을 열려는 순간, 문이 저절로 ‘퍽!’ 소리를 내며 부서져 나가더니 파편이 돌가루와 함께 사방으로 튀었다. 교주 남무궁이 벽 안에 무언가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먼저 장력을 퍼부은 것이다.
문과 함께 벽면이 산산조각이 났지만 석추명은 전혀 개의치 않고 그대로 돌진하며 회오리바람처럼 몸을 솟구쳐 교주를 공격해 들어갔다. 바로 중양일지 후반부에 기록된 숭양일기검의 초식이었다.
남무궁은 벽 속에서 누군가 튀어나오면서 자신에게 검을 휘두르자 놀란 듯 눈을 부릅떴으나 재빨리 탁자에 놓여 있던 벼루를 들어 올려 검을 막았다.
검이 벼루에 부딪히면서 쨍, 소리와 함께 번쩍하고 불꽃이 튀었다. 석추명은 교주가 주춤하는 사이 얼른 황연화의 손을 잡아끌고 뒤로 물러났다.
“불모님, 괜찮으십니까?”
석추명이 황연화를 자신의 뒤로 숨기며 물었다. 고개는 여전히 교주 쪽을 향하고 있었다.
황연화는 석추명이 돌아오자 깜짝 놀라면서 다급하게 외쳤다.
“왜 돌아왔어요? 어찌하려고요?”
“도저히 그냥 갈 수 없었습니다.”
여전히 시선은 교주를 향한 채 석추명이 답을 했다. 황연화는 자신의 손을 잡은 석추명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손을 단단히 붙잡은 석추명의 손을 보자 두려우면서도 말할 수 없는 감동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석추명은 죽을 줄 알면서도 자신을 위해 돌아와 준 것이다. 여인으로서 처음 느껴보는 행복감이었다.
석추명의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워 교주를 바로 앞에 두고서도 잠시 미소가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예상은 하고 있었다만 역시 쥐새끼는 석 대주 네놈이었구나. 네놈이 감히 겁도 없이 내 아내를 넘봐?”
교주가 석추명을 노려보며 한 발 앞으로 다가섰다. 그러자 석추명은 검을 들어 공격자세를 취하면서도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교주님, 오해이십니다. 제가 어찌 불모님께 그런 망상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석추명은 어차피 교주에게 대들기는 했지만 황연화가 자기 때문에 억울한 누명을 쓴 것만큼은 벗겨주고 싶었다. 누가 뭐라고 한들 우리는 떳떳하지 않은가.
“망상이라? 우하하하. 지나가던 개가 웃을 노릇이구나. 네놈이 지금 내 아내의 방 벽에서 튀어나오지 않았느냐? 내 아내와 밀회를 즐기다가 내가 오는 기척이 나자 꽁무니가 빠지도록 벽 속으로 달아난 게 아니냐? 그런데도 망상이라고? 어느 미친놈이 네놈 말을 믿는단 말이냐?”
남무궁의 말은 누가 들어도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떳떳하다면 도망갈 이유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도망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누가 보더라도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은 저도 잘 압니다. 하지만 불모님께서 저 같은 놈을 마음에 둘 까닭이 없지 않겠습니까? 하늘에 대고 맹세하니 저와 불모님은 절대 교주님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불모님께서는 행실이 깨끗하신 분입니다. 제발 의심을 거두어 주십시오.”
석추명의 말은 절절했다. 자신은 죽을지언정 황연화의 명예만큼은 지켜주고 싶었다.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여자에게 있어 정절을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기지 않던가!
석추명의 간절한 소리에 마음이 움직였는지 남무궁이 잠시 두 사람을 바라보더니 어느새 감정을 가라앉히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좋다. 네놈의 말이 사실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네놈은 애당초 왜 이 방에 있었으며, 내가 온다는 사실을 알고 왜 달아나려 했느냐?”
“그... 그것은....”
남무궁의 물음에 석추명은 답을 할 수 없었다. 오늘 밤 지하 뇌옥에 잠입하여 황보를 빼내기로 했다는 말을 어떻게 교주에게 한단 말인가?
석추명이 답을 못하고 더듬거리기만 하자 참고 있던 남무궁의 노여움이 폭발했다.
“네놈이 감히 나를 기만한 게로구나. 네 이놈!”
남무궁이 석추명을 향해 돌연 오른손을 튕기듯이 뻗어냈다. 손바닥에서 푸른 기운이 넘실대는가 싶더니 곧 가공할 장력이 그대로 석추명을 덮쳤다. 십여 년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교주의 성명절학 명왕개세공(冥王開世功)이었다.
방 한쪽 구석에 몰려있던 석추명은 피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피하면 그 장력은 고스란히 가냘픈 황연화의 몸에 떨어질 게 뻔했다. 교주와 싸우면서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려면 오로지 자신의 장기인 검으로 공격해 들어가야 하는데, 검을 쓰지 못하니 결과는 보나마나였다.
석추명은 죽기 살기로 저항할 생각으로 이를 악다물고 양손에 공력을 모아 벼락같이 떨쳐냈다. 교주의 장력이 해일처럼 몰려와 자신의 장에 부딪히는가 싶더니 돌연 장력이 홀연히 사라지고 교주의 팔이 쑥 늘어나더니 순식간에 석추명의 목을 움켜잡았다.
“윽!”
교주가 손아귀에 힘을 주자 석추명은 숨이 막혀와 얼굴이 금방 시뻘게졌다. 교주의 팔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쳐보았으나 교주의 손아귀는 쇳물을 부어만든 자물쇠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교주는 자신의 손아귀에 잡힌 석추명을 노려보았다.
“버르장머리 없는 놈. 내가 네놈을 어여삐 여겨 대주의 자리에 올려주고 앞으로도 중히 쓰려고 했거늘, 네놈이 감히 내 뒤통수를 쳐?”
석추명은 남무궁의 손아귀가 바싹 조여오자 목의 핏줄이 드러나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교주의 적수가 안 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허망하게 패할 줄은 몰랐다. 교주의 무공이 이렇게 높을 줄 몰랐던 판단착오이기도 했다.
석추명은 숨이 막혀 얼굴이 새빨개진 상태로 교주 남무궁을 노려보았다. 어느새 석추명의 눈에는 시뻘건 핏발이 서 있었다.
“교주..., 당신은.... 인심을.... 저버렸소. 자신의 아내....마저 의심하는.... 당신은 더 이상... 교주의 자격이....없소.”
기왕 이렇게 된 거 교주에게 할 말이나 하고 죽자는 심산이었다.
“뭣이라? 이놈이 실성한 게로구나!”
교주가 다시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석추명의 눈동자가 허옇게 까뒤집혔다.
“교주님!”
보다 못한 황연화가 날카롭게 비명을 지르며 남무궁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석 대주를 살려주세요. 석 대주는 아무 죄가 없습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제발 교주님....”
“이 두 연놈이 아주 가지가지 하는구나. 시끄럽다.”
남무궁이 자기에게 매달린 황연화를 거칠게 떨쳐냈다.
“아악!”
황연화가 한쪽으로 나뒹굴면서 머리라도 찧었는지 비명을 질렀다.
남무궁은 다시 석추명에게 고개를 돌렸다.
“네놈 스승이라는 작자도 그동안 눈엣가시였거늘, 사제 두 놈이 어찌 이리 똑같이 꼴 보기 싫단 말이냐. 오냐, 네놈을 네놈 스승이 보는 앞에서 죽여주마.”
남무궁이 석추명의 목을 움켜잡고 공중으로 쳐들자 석추명이 고통으로 발을 버둥거렸다.
“역겨운 놈.”
남무궁은 그 자리에서 석추명을 죽여버리겠다는 듯 목을 움켜쥔 채 좌우로 흔들었다. 석추명은 키가 7척에 달할 만큼 장신에 체구도 작지 않았으나 남무궁의 손아귀에 붙들리자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져 꼼짝을 못했다.
그때 딸랑, 하면서 석추명의 몸에서 무엇인가 떨어졌다. 석추명은 숨이 막히는 고통 속에서도 그 소리를 듣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모든 일이 수포가 되어 버린 것이다.
남무궁은 석추명의 몸에 무엇인가 떨어지자 석추명을 벽 쪽으로 던져버리더니 떨어진 물건을 주워들었다. 석추명은 벽면에 어깨를 찧고 그대로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오호라, 이건 열쇠 아니냐?”
남무궁이 바닥에서 석추명이 떨어뜨린 열쇠를 주워들었다. 그 모습에 석추명과 황연화는 서로 절망적인 눈빛을 주고받았다. 모든 게 끝나 버렸다.
남무궁은 열쇠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석추명을 바라보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 보니 네놈이 이것 때문에 불모전에 들었구나. 네놈 말이 모두 거짓은 아니었나 보군.”
머리가 비상한 남무궁은 열쇠를 보자마자 순식간에 상황이 어떻게 돌아간 건지 파악한 듯했다. 남무궁은 회심의 미소를 짓더니 밖을 향해 소리쳤다.
“명왕대주 있는가?”
교주의 호출에 문이 벌컥 열리며 명왕대주 사마곤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방문 밖에는 사색이 되어 부들부들 떠는 사소혜와 불모전 시녀들이 보였다.
사마곤은 엉망이 된 방안의 모습과 초주검이 된 황연화와 석추명을 보았지만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불러 계십니까?”
사마곤이 포권을 취하자 남무궁이 사마곤에게 말했다.
“지금 즉시 병력을 총출동시켜 지하 뇌옥을 단단히 포위하라. 늙고 병든 쥐 한 마리를 구하러 다른 쥐새끼 놈들이 몰려온 모양이야.”
“존명!”
남무궁의 명을 받은 사마곤이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러고 나서 남무궁은 밖을 향해 또 소리쳤다.
“밖에 누구 없느냐?”
교주의 호출에 현재 수라대 대주 대행을 맡고 있는 맹환이 뛰어 들어왔다. 맹환은 쓰러진 황연화와 석추명을 보고는 흠칫 놀란 표정이었으나 얼른 교주 앞에 부복했다. 문밖 사소혜의 뒤로 충격에 빠진 듯한 담예린의 모습이 보였다. 석추명 자신을 바라보는 담예린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파르르 떨렸다.
“수라대 대주 대행 맹환이옵니다.”
맹환이 들어오자 남무궁은 입가에 묘한 미소를 떠올렸다.
“네 녀석이로구나. 그림이 괜찮겠군. 하하하하.”
교주가 한 차례 웃더니 맹환에게 명을 내렸다.
“지금 당장 저 두 연놈을 잡아다가 뇌옥 앞으로 끌고 가라.”
“존명!”
맹환은 담예린과 수라대원 몇 명에게 지시하여 즉시 석추명과 황연화를 끌고 가게 했다. 석추명은 자기 수하들의 손에 잡혀 끌려나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남무궁이 만족한 듯이 다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숨어있는 쥐새끼 놈들을 잡으려면 미끼가 필요한 법이지. 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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