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85화 (85/201)

#   85 - 광세일소_한추영 - 1469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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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화. 복귀 (3)

담예린은 석추명이 자신을 볼까 봐 얼른 근처 있던 전각 담벼락 뒤로 몸을 숨겼다.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석추명이 한없이 야속하면서 동시에 불모전의 주인 황연화에 대한 질투심이 냄비 속의 물처럼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담예린은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뒤 신법을 전개해 바로 옆에 있던 전각의 지붕 위로 튀어 올라갔다. 수라대원 중에서도 일급대원에 속하는 담예린의 몸이 바람에 실린 깃털처럼 가볍게 지붕 위로 날아올랐다. 담예린은 지붕 위 돌출된 부분의 그늘에 몸을 숨기고 바짝 엎드린 다음 석추명이 사라진 불모전 안을 주시했다. 석추명이 나올 때까지 전각 지붕 위에 숨어 기다릴 참이었다.

****

석추명은 불모전 안으로 들어가자 사소혜가 반색하며 달려왔다. 눈꼬리가 초승달처럼 휘어지고 하얀 이빨이 다 보일 정도로 입가에 커다란 미소가 걸렸다. 달려오자마자 마치 큰오빠에게 안기는 철없는 여동생처럼 석추명에게 와락 안겼다.

“아이쿠, 누가 보면 헤어진 지 십 년쯤 된 줄 알겠구나.”

석추명은 입으로는 핀잔을 주면서도 사소혜를 반기며 환하게 웃었다.

“호호호, 십 년이 다 뭐예요. 오십 년쯤 되는 줄 알았구만. 보고 싶었어요, 석 오라버니.”

사소혜가 응석을 부리자 석추명이 미소를 지으며 응수했다.

“언제부터 내가 네 오라버니가 되었느냐?”

“호호호, 오라버니도 참! 이렇게 편하게 부르면 서로 좋잖아요. 뭘 그렇게 따져요, 따지길.”

사소혜가 장난스럽게 손등으로 석추명의 가슴을 툭 쳤다.

“소혜야, 이럴 시간이 없다. 어서 불모님께 안내해다오.”

석추명의 진지한 말에 사소혜가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흥. 내가 그 열쇠 복사본을 만들려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알아요? 죽을뻔하다가 살아났다구요, 하마터면 자겸 그 곰 같은 놈의 손에―. 읍!”

사소혜의 이야기에 석추명이 당황하여 얼른 사소혜의 입을 한 손으로 틀어막았다. 석추명은 황급히 주위를 돌아보며 사소혜의 귀에 낮게 소곤거렸다.

“조용히 좀 해.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이 일이 새어나가면 우리 모두 살아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몰라?”

석추명이 한 손으로 사소혜의 입을 막고 귀에 대고 속삭이는 모습이 멀리서 보면 둘이서 서로 끌어안고 밀회라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사소혜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석추명의 손을 억지로 밀치더니 입을 불쑥 내밀며 토라진 표정을 지었다.

“흥, 불알 찬 사내대장부가 뭐가 그리 두려운 게 많아요. 불알이 아까우니 떼 버려요.”

사소혜의 말에 석추명은 또다시 당황하여 얼굴이 빨개졌다. 조금 전과는 다른 종류의 당황스러움이었다. 석추명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사소혜를 잠깐 쳐다보다가 결국 껄껄 웃고 말았다.

“소혜 네가 여자로 태어난 게 정말 아깝구나. 남자로 태어났으면 아마 내가 형님으로 모셨을 성싶다.”

“호호호,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먼저 누님이라고 불러봐요. 어서요.”

사소혜가 다시 교태를 부리며 간드러지게 웃었다.

“이럴 게 아니다. 어서 불모님을 뵈어야 해.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이야.”

사소혜가 장난을 거두고 석추명을 불모 황연화의 방으로 안내했다. 황연화의 방은 주인을 닮아 정갈하고도 우아하게 꾸며져 있었고, 방에서는 그윽한 난초 향이 풍겨 나왔다. 정면에 바라보이는 벽에는 커다란 화조도(花鳥圖) 한 폭이 걸려 있었다.

석추명이 방으로 들어가자 황연화는 깜짝 놀라면서 반겼다. 글씨라도 쓰던 중이었는지 탁자 위에는 벼루와 붓, 연적 등과 함께 글씨를 써내려가다 만 종이가 있었다.

“석 대주! 언제 총단으로 돌아왔어요?”

황연화를 보자 석추명은 즉시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었다.

“그간 평안히 지내셨습니까, 불모님?”

“번잡한 인사는 거두고 어서 앉아요. 그렇지 않아도 사람을 보내어 석 대주를 부를 참이었요. 다친 데는 없나요?”

황연화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석추명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황연화의 모습에 석추명은 마음이 뭉클했다.

“몇 달 전 무림맹에 잠입했다가 조금 다치기는 했습니다만 이제는 다 나았습니다.”

황연화는 석추명이 다쳤었다는 말에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석추명의 몸을 앞뒤로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저런! 그런 일이 있었군요. 심하게 다쳤었나요? 정말 다 나은 것이 맞나요? 어디 좀 봅시다.”

황연화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석추명은 빙긋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정말 괜찮습니다. 그보다 불모님, 거사를 좀 앞당겨야 하겠습니다.”

석추명의 말에 황연화의 안색이 굳었다.

“교주님께서 내일 직접 지하 뇌옥으로 가서 뢰 장로님을 보시겠답니다.”

“그렇게나 빨리?”

석추명의 말에 황연화가 눈을 찌푸리더니 석추명에게 다시 물었다.

“뢰 장로는 어디 있습니까?”

“스승님과 초의공은 지금 명왕대원으로 변장하여 뇌옥 수비대 초소 바깥에 숨어있습니다. 계획을 변경하여 오늘 밤이라도 당장 뇌옥으로 잠입하여 황 장로를 구해내야 할 것입니다.”

“흠, 그렇군요. 뢰 장로의 얼굴이라도 먼저 좀 보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군요.”

황연화는 가볍게 한숨을 내뱉었다.

“소혜가 뇌옥 수비대 대장실에서 뇌옥의 열쇠를 복사한 이후로 뇌옥 수비대의 경계가 한층 강화되었어요. 소혜야, 석 대주께 뇌옥 수비대의 상황을 말씀드려라.”

황연화의 말에 사소혜가 눈을 반짝이며 사뭇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먼저 뇌옥의 정문 앞 초소에는 원래 두 명이 경계를 섰는데 한 명이 더 추가되었어요. 교대는 두 시진 마다 하고 뇌옥을 드나드는 모든 사람을 일일이 확인합니다. 그리고 뇌옥 개활지를 빙 둘러싼 목책에는 다른 보초가 없었는데 이번에 새로 동편과 서편에도 초소를 만들어 두 명씩 경계를 서기 시작했어요. 아마도 명왕대주 사마곤이 아니면 그 곰 같은 부대주 자식이 지시했을 거예요.”

사소혜는 자겸을 생각하자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사실이 생각나 황연화 앞이라는 사실도 잊고 말이 곱게 나오지 않았다. 뒤늦게서야 아차 싶었는지 황연화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얼른 말을 얼버무렸다.

“흠흠, 부대주님이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지요. 암튼 초소를 통과해서 안으로 들어가면 넓은 개활지가 나오는데 지난번 제가 다녀간 이후로 그곳이 무공수련장으로 바뀌었답니다. 늘 이삼십여 명의 군사들이 무공 수련이나 대련을 하고 있어요.”

사소혜의 말에 황연화가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다.

“왜 뇌옥 앞에서 무공 수련을 한단 말이냐?”

그 말에 사소혜가 어깨를 으쓱했다.

“개활지가 워낙 넓으니 다른 연무장보다야 낮겠지요. 아울러 누가 들어오는지 경계도 할 수 있고.”

그 말에 석추명의 인상이 굳었다. 이삼십여 명이나 뇌옥 앞에 상주하고 있을 줄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계획이 차질없이 진행될 수 있을지 우려스러웠다.

“뇌옥 정문에는 두 명의 병사들이 경계를 서고 있어요. 그리고 뇌옥 정문 옆으로 수비 대장실이 있는데 여기는 뇌옥 수비대장인 명왕대 부대주 자겸이 항상 상주하고 있습니다. 사실 교대 근무를 하는 병사들은 모두 여기에서 자겸에게 신고를 하지요. 대장실 안에는 교대할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어요. 대략 십여 명이라고 보시면 될 겁니다.”

“흠, 애초에 스승님과 나는 보초 몇 명만 제압하면 될 줄 알았는데 이거 생각보다 인원이 훨씬 많군. 지하 뇌옥을 지키는데 이렇게 인원이 동원될 줄은 몰랐어.”

석추명의 말에 사소혜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게 다 제가 일을 잘해서 그런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뇌옥 안에는 몇 명이나 있는지 들어가 보지 않아서 모르겠네요.”

석추명은 사소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들어가 봐서 알아. 이전에는 뇌옥 안에도 간수장 등 대략 십여 명의 인원이 경계를 서고 있었지. 경계가 강화되었으면 그 인원도 늘었다고 봐야겠군.”

석추명의 말에 황연화가 인상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지키는 인원이 많은데 사형과 초의공 두 사람의 무공이 아무리 높다 한들 두 사람만으로 될지 걱정이군요. 만약 뇌옥에 누가 침입하면 총단 본부와는 어떻게 연락하죠?”

황연화의 물음에 석추명이 대답했다.

“뇌옥에서 삼색 신호탄을 쏘아 올리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보는 대대는 즉시 병력을 대동하여 뇌옥으로 가야 합니다. 다만 지금 사천으로 본교의 인원이 상당히 빠져나간 터라 총단 내에는 명왕대와 수라대 밖에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흠, 본교 고수들도 대거 사천전투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그나마 본교에 남은 고수는 명왕대주 사마곤과 부대주 자겸 정도겠군요.”

황연화의 말에 석추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인원이 예상보다 많기는 하지만 교주님만 맞닥뜨리지 않는다면 스승님과 초의공이 아마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도 뇌옥 외곽에서 동정을 주시하겠습니다.”

“그게 좋겠군요. 석 대주는 소혜를 데리고 외곽에서 두 분을 지원하시고, 혹시라도 싸워야 할 경우가 생기면 꼭 복면을 쓰도록 하세요. 정체를 들키지 않도록 반드시 조심해야 합니다. 저는 교주전에 가서 교주님이 그쪽에 신경을 쓰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예, 불모님”

세 사람이 한참 얘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딸랑딸랑 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큰 소리는 아니지만 어딘지 모르게 조급한 느낌이 드는 소리였다.

그 소리를 듣자 황연화가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교주님이 이쪽으로 오고 있어요!”

“예엣?”

황연화의 소리에 석추명도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제가 여기 있는 것을 아시면 분명히 대로하실 겁니다. 저는 여기에 없었던 것으로 해주십시오.”

석추명이 서둘러 문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황연화가 석추명의 팔을 잡았다.

“안돼요! 그리 나가면 교주님과 부딪힐 겁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황연화가 황급히 벽면으로 다가가 벽에 걸린 화조도를 치우자 놀랍게도 그 뒤로 비밀 문이 나타났다. 황연화는 비밀 문을 열고 석추명에게 다급하게 손짓을 했다.

“교주님은 모르는 비밀통로입니다. 밖으로 연결되어 있으니 어서 들어가세요. 교주님의 신공은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으니 작은 소리 하나라도 내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게 뇌옥의 열쇠입니다. 뢰 사형께 전해주세요.”

석추명은 황연화를 이렇게 두고 혼자만 나가는 것이 내키지 않았으나 사안이 워낙 심각하여 어쩔 수 없었다. 지난번에 뢰정 장로를 고의로 놓아준 건으로 문초를 받을 때 황연화가 신교의 수뇌부 앞에서 자신을 옹호하자 가뜩이나 의심 많은 교주는 자신과 황연화와의 관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만약에 총단으로 복귀하자마자 또다시 황연화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인다면 괴팍한 교주 성격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조심하십시오.”

석추명은 황연화가 건네주는 뇌옥의 열쇠를 받고 황연화를 바라보았다. 잠깐이었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황연화의 눈빛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석추명은 열쇠를 품 안에 갈무리한 뒤 서둘러 비밀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비밀통로는 사람이 기어서 겨우 빠져나갈 만한 크기로 오랫동안 쓰지 않아서인지 눅눅하고 퀴퀴한 냄새가 났다.

석추명이 비밀통로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황연화는 황급히 비밀통로 문을 닫고 다시 그림을 제자리에 걸었다. 그리고는 탁자에 앉아 심호흡을 하며 조마조마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는데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렸다.

교주 남무망이 문 앞에서 서서 눈빛을 번뜩이며 방안을 둘러보았다.

황연화와 사소혜는 교주가 나타나자 얼른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교주님을 뵈옵니다.”

교주 남무망은 두 사람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눈알을 굴리며 방안 여기저기를 살폈다. 그 모습에 황연화는 속이 뜨끔했으나 침착하게 말했다.

“교주님께서 이 누추한 곳까지 어인 일이십니까?”

방문 밖에서 한참 동안 방안을 살펴보던 남무궁은 그제야 방안으로 발을 성큼 들였다. 교주가 방안으로 들어오자 사소혜는 허리를 굽혀 조용히 방 밖으로 나갔다.

“왜, 여기는 내가 오면 안 되는 곳이오?”

대뜸 시비조로 나오는 교주의 말에 황연화가 당황하여 얼른 말을 덧붙였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부부는 한 몸이라 하였으니 이 방은 교주님의 방이기도 한 것을요.”

“흥! 내 방이라. 말 한번 잘했군. 내방에 쥐새끼 한 마리가 들락거린다는 말을 들었소. 그래, 그 쥐새끼를 어디에 숨겼소?”

남무궁이 탁자로 다가와 앉더니 황연화를 힐끗 쳐다보았다.

황연화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찻주전자를 들어 교주의 잔에 차를 따르려고 했으나 손이 떨려 차를 제대로 따를 수가 없었다. 석추명이 여기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온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알았을까? 누가 말했을까?

황연화는 속으로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단단히 먹고 다시 교주의 잔에 차를 따랐다.

“쥐새끼라니요, 저는 당최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황연화가 찻잔을 남무궁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그리고는 자신도 모르게 벽에 걸린 그림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림을 본 것이 아니라 그림 뒤쪽에 있는 비밀통로를 본 것이다. 다행히 비밀통로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남무궁은 황연화가 건네준 찻잔은 본 척도 하지 않고 빤히 황연화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쥐새끼를 모른다?”

교주의 눈매가 샐쭉해지더니 돌연 팔을 뻗어 황연화의 팔을 붙잡았다.

“내 눈을 보시오. 내 눈을 똑바로 보고 말해보시오.”

황연화는 두려움과 싸우면서 교주의 눈을 애써 외면했다. 고개를 돌리는 황연화의 눈에 불빛에 번뜩이는 교주의 눈이 보였다. 피에 굶주린 야수의 눈이 연상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혐오감을 주는 교주의 푸른 기가 도는 눈썹과 머리카락이 한 올 한 올 일어서기 시작했다.

“내 눈을 똑바로 보라니까!”

교주가 황연화의 팔을 잡아당기며 황연화가 자신의 눈을 바라보게 했다. 황연화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교주의 눈을 바라보며 끝까지 발뺌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제가 왜 교주님을 속이겠습니까?”

교주가 황연화의 코 바로 앞까지 자기 얼굴을 갖다 대며 말했다.

“가증스럽게도 지금 내 눈을 빤히 보면서도 그런 거짓말을 하는 게요?”

황연화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남무궁의 성격이 비록 괴팍하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자신에게 막말한 적은 없었다. 신교의 교도들 앞에서는 항상 예의를 지켜 말했다. 물론 그것조차 교주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행동이었다. 둘이 있을 때는 심한 말을 하더라도 늘 아슬아슬하게 선은 지켰다.

그런데 오늘 밤은 누구에게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그 선을 대번에 넘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자기 분을 이기지 못해 길길이 날뛰는 교주의 모습은 처음 보는 모습이라 황연하는 두렵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입 한 번 잘못 놀리면 모든 일이 수포가 될 수 있었다. 버틸 수 있을 때까지는 버텨야 했다.

“거짓말이라니, 제가 무슨 거짓말을 했다고 그러십니까? 아랫사람들이 듣습니다. 체통을―!”

황연화는 말을 하다가 끝을 맺지 못하고 고개를 한쪽으로 돌렸다. 그리고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려 소맷단으로 얼굴을 닦아냈다. 어느새 남무궁이 자신의 앞에 놓인 찻물을 황연화의 얼굴에 끼얹은 것이다. 다행히 찻잔이 식어 화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황연화는 교주의 행동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얼굴을 닦는 손끝이 경련이라도 일어난 듯 심하게 떨렸다.

“흥! 체통을 지키라니, 나보고 체통을 지키라니!”

남무궁이 노해서 황연화에게 소리를 지르더니 빈 찻잔을 내동댕이쳤다. 찻잔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부딪히더니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났다. 황연화를 바라보는 남무궁의 눈이 이상하게도 희번덕거렸다.

“음탕하게 방에 사내를 들여 교주의 체통을 흐린 것은 네년이거늘, 감히 나에게 체통을 지키라니!”

남무궁이 화를 참지 못하고 이번에는 앞에 놓인 탁자를 내리치자 두꺼운 자단목 탁자가 순식간에 두 동강으로 갈라져 박살이 났다. 남무궁은 탁자를 때려 부수고도 분기가 가라앉지 않는지 방 안에 있는 화병이며 옷장 등을 뒤집어엎고 순식간에 때려 부수었다. 남무궁의 움직임에 방에 있던 등불이 일렁이며 남무궁의 얼굴에 기다란 그림자를 만들었다.

황연화는 남무궁의 광기 어린 행동을 더는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얼른 남무궁 앞에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교주님, 고정하세요. 어찌 이러십니까?”

그러자 남무궁이 황연화의 뒷머리를 낚아채 고개를 뒤로 꺾었다. 황연화의 입에서 ‘헉!’ 소리가 절로 났다.

“네년이 젊은 사내놈을 침실로 불렀다는 것을 내 알고 왔다. 어서 이실직고하지 못하겠느냐? 그놈이 누구냐?”

황연화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끝까지 석추명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교주님 제발 고정하세요.”

하지만 그다음 순간 황연화의 고개가 돌아가며 입술이 터져 피가 흘러내렸다. 교주가 오른손으로 황연화의 뺨을 내려친 것이다. 황연화는 교주가 내려치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땅바닥에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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