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 - 광세일소_한추영 - 1467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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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화. 복귀 (2)
자겸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자신의 얼굴로 떨어져 내리는 사소혜의 금사신편을 대번에 오른손으로 잡아버렸다.
“이따위 어린애 장난감으로 누굴 놀리는 게냐?”
금사신편을 붙잡은 채 자겸이 사소혜를 비웃었다. 설마 자신의 채찍을 맨손으로 잡아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사소혜는 당황해서 얼른 손에 공력을 주입하여 채찍을 털어봤지만 요지부동이었다.
“불모님의 체면을 생각해서 네년에게 더 이상의 책임은 묻지 않을 테니 썩 물러가거라. 하지만 네년의 무기는 내가 보관하마.”
자겸이 채찍을 잡아당겼다. 8척 장신의 거구가 우람한 팔로 잡아당기자 별로 힘을 주는 것 같지도 않은데 사소혜는 버틸 수가 없었다. 채찍을 놓지 않으면 볼썽사납게 속절없이 끌려갈 것이다. 하지만 무기를 버린다는 것은 결국 항복을 의미했다. 무인에게 무기는 곧 목숨이 아니던가.
자존심이 강한 사소혜는 채찍을 버리지 않고 온 힘을 다해 버티며 자겸을 노려보았다. 그 모습에 자겸이 가소롭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냉소를 지었다. 자겸에게는 사소혜가 버티는 힘이 어린애 팔심보다 못한 것이 분명했다.
“이제 그만 채찍을 내려놓거라!”
자겸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금사신편과 사소혜를 한꺼번에 자신의 몸쪽으로 잡아당겼다.
하지만 사소혜의 임기응변도 재빨랐다. 사소혜는 자겸이 잡아당기는 힘에 자신의 몸이 허공에 뜨자마자 경공을 전개하여 오히려 자겸이 잡아당기는 속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자겸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는 원앙각(鴛鴦脚)을 시전하여 질풍처럼 자겸의 가슴 대여섯 군데를 발로 걷어찼다.
사소혜가 그렇게 막무가내로 덤벼들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자겸은 사소혜의 발길질을 고스란히 그대로 다 맞았다.
“간지럽군.”
자겸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사소혜의 발길질이 닿은 부위의 흙을 털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자겸의 표정에 오히려 사소혜가 놀랐다. 자신의 발길질 공격을 그대로 맞고도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저놈의 몸뚱이는 동근철골로 만들기라도 했단 말인가?
“이쯤 놀아주었으면 불모님께서도 하실 말이 없으실 테지.”
자겸이 사소혜를 잡으러 다시 곰 발바닥 같은 손을 휘둘렀다. 하지만 절대 느린 속도가 아니었다. 사소혜는 급히 뒤로 공중제비를 돌아서야 자겸의 손길을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다.
“부대주님, 잠깐만요!”
사소혜가 갑자기 손바닥을 들어 올리며 자겸의 막을 막아섰다. 고소한 냄새가 묘하게 식욕을 자극하며 계속 코끝에서 맴돌았다.
“명왕대의 군기가 형편없군요. 부대주님이 계시는데 저렇게 아무렇게나 널브러지다니. 아니면 부대주님께 혹사라도 당해서 기진맥진한 건가요? 호호호.”
그 말에 자겸이 뜨악한 눈빛으로 사소혜의 손길을 따라 눈을 돌려보니 다음 조와 교대하려고 대장실 안에 와 있던 대원 4명이 잠이라도 들었는지 모두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이놈들이 미쳤나? 야, 이놈들아!”
자겸은 사소혜를 공격하다 말고 쓰러진 병사들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옮기는 자겸의 발길이 순간 휘청했다. 그 모습을 본 사소혜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옳거니! 이제야 내 오보산(五步散)이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군. 제아무리 공력이 뛰어나다고 내 오보산에 중독되고 다섯 걸음을 걸을 수 있는 사람은 없지. 네놈도 마찬가지일 게야. 어디 세어볼까? 하나, 둘, 셋, 넷, 다섯.... 쿵!
사소혜가 속으로 다섯까지 세자 정말 거짓말처럼 자겸이 옆으로 쓰러지며 정신을 잃었다. 사소혜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자겸이 여색에 관심 없는 돌부처 같은 성격임을 진즉에 파악했던 사소혜는 음식 바구니 안에 순식간에 정신을 잃게 하는 오보산을 숨겨 두었다. 고소한 냄새의 주범은 바로 오보산이었던 것이다.
만약 사소혜가 다짜고짜 오보산을 퍼뜨리려고 했다면 자겸이 대번에 눈치를 챘겠지만, 사소혜가 음식 바구니를 들고 와서 한바탕 소동을 벌이는 바람에 치밀한 성격의 자겸도 깜박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사소혜는 자겸이 옆구리에 차고 있던 열쇠꾸러미에서 황보가 갇힌 뇌옥의 열쇠를 찾아 급히 준비해온 쇠틀에 넣고 본을 떴다. 쇠틀에는 열쇠를 복사할 때 쓰는 부드러운 진흙이 가득 들어 있어서 열쇠를 대고 앞뒤로 꾹 누르기만 하면 열쇠의 모양이 고스란히 진흙에 남았다.
사소혜는 열쇠를 복사한 다음 서둘러 어지럽힌 음식물을 치웠다. 방안에 쓰러진 자겸과 자겸의 수하들은 일각이 지나면 정신을 차릴 것이다. 하지만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은 까맣게 잊고 자신들이 왜 잠들었는지 전혀 알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식의 몽혼약은 오독신교의 전인(傳人)인 사소혜에게는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사소혜는 대장실 밖으로 나가기 전에 쓰러진 자겸의 얼굴을 바라보며 ‘쯧쯧’하고 혀를 찼다.
“신교의 뇌옥을 지키는 자들이 이렇게 허술해서야! 뭐, 나야 고맙긴 하지만. 호호호.”
사소혜는 조그맣게 소리 내어 웃더니 수비 대장실 밖으로 나와 문을 닫고 뇌옥의 정문을 지키는 경계 무사들 앞을 도도하게 지나갔다. 교대 조가 오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는 병사들의 불만이 뒤에서 들려오자 사소혜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사소혜가 앞마당을 지나 뇌옥 수비대의 초소를 막 지나치는데 돌연 앞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여기에 웬일이지?”
이전에도 들어본 적이 있는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사소혜는 불길한 느낌에 걸음을 멈추었다. 등골이 오싹했다. 설마 아니겠지. 사소혜는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악! 교주님 옆에 있어야 할 작자가 왜 여기 있는 거야? 사소혜는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자신의 눈앞에는 명왕대주 사마곤이 의심이 가득한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네가 왜 여기에 있냐고 물었다. 설마 듣지 못한 것은 아니겠지?”
사마곤이 다시 물었지만 사소혜는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랐다. 평상시 그렇게 잘 돌아가던 머리가 갑자기 텅 비어 버린 듯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 그것이...”
사소혜가 답을 하지 못하자 더욱 수상히 여긴 사마곤이 사소혜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염라대왕이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는 사마곤의 눈길을 속일 방법은 없었다. 여기서 끝이라는 생각이 들자 사소혜는 망연자실하여 자신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내가 보냈어요.”
돌연 뒤에서 청아하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노란색 비단 적삼을 입은 단아한 모습의 불모 황연화가 두 명의 시녀를 데리고 나타났다. 황연화가 나타나자 명왕대주 사마곤은 즉시 포권을 취했다.
“삼가 불모님을 뵙습니다.”
황연화는 차가운 표정으로 사마곤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뇌옥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부족한 것은 없는지 살펴보라고 내가 보냈어요. 뭐, 잘못되었나요?”
황연화가 앞으로 다가오자 사마곤이 얼른 한쪽 옆으로 비켜섰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뇌옥을 지키는 병사들에게도 신경 써 주시는 불모님의 은혜에 그저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고개를 숙이기는 했지만 사마곤의 눈빛은 먹이를 노려보는 잔인한 늑대의 눈빛이었다. 평상시 겁 없기로 유명한 사소혜도 그 눈빛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대주께서 알아주시니 고맙군요.”
황연화는 지지 않고 사마곤의 매서운 눈빛을 차갑게 바라보며 응수하더니 고개를 돌려 사소혜에게 말했다.
“시킨 일이 다 끝났으면 이만 돌아가자꾸나.”
“예, 불모님.”
황연화의 말에 사소혜가 얼른 황연화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나섰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사소혜는 혹시라도 사마곤이 눈치챌까 봐 감히 사마곤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했다.
사마곤이 미심쩍은 눈빛으로 걸어가는 황연화와 사소혜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가만히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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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하하하. 귀면쌍살이 맹주의 수하였다니 그것 정말 재미있구나.”
석추명의 보고를 받던 교주 남무궁이 무릎을 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귀면쌍살이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의 후기지수만 골라 죽였던 것도 맹주가 시킨 짓이었단 말이지. 과연 악랄하면서도 대범하기 그지없군. 이거 나보다 한 수 위인 듯해서 상당히 기분 나쁘구먼. 으하하하.”
남무궁이 웃음을 멈추고 석추명에게 물었다.
“그런데 귀면쌍살 그놈이 중양신공을 익힌 것 같다고?”
“예.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석 대주가 그렇게 느꼈다면 맞을 게야. 중양신공을 익힌 자가 갑자기 강호에 나타났다.... 그리고 맹주의 수하라.... 하하하, 누군지 대충 그림이 나오는군.”
설마 그것만 듣고 귀면쌍살의 정체를 대번에 파악했단 말인가! 석추명은 교주의 비상한 머리에 저도 모르게 가슴이 뜨끔했다. 스승 뢰정이 귀면쌍살의 정체를 추리할 때도 내심 감탄해 마지않았는데 교주도 뢰정 못지않았다. 두 사람의 비상한 머리에 자신은 발끝도 미치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놈이 구대문파 장문인들도 어쩌지 못하는 괴물이 되어 나타나다니... 중양신공의 위력이 정말 대단하군. 별 볼 일 없던 놈이었는데 말이야.”
남무궁이 석추명을 바라보며 씨익 웃음을 날렸다.
“아, 맞아! 우리 신교에도 중양신공을 익힌 사람이 있었지. 내가 깜박했네.”
남무궁이 빤히 쳐다보자 석추명은 입안이 바싹 마르는 느낌이 들었다.
“송, 송구합니다.”
“자네가 송구할 게 뭐 있겠나? 자네가 알고 배운 것도 아니고. 하지만 말이야, 자네는 아직 귀면쌍살에게 상대가 안 되겠지. 내 생각에는 뢰 장로가 자네에게 중양신공을 제대로 다 가르쳐 준 것이 아닌 것 같아.”
남무궁의 의도가 너무 뻔히 보여 석추명은 자신도 모르게 안색이 굳었다. 또다시 자신과 스승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이다. 남무궁은 지금 뢰정이 고의로 무공의 일부를 석추명에게 감추었다고 단정 짓고 있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혹 모르지. 자네 재질이 부족해서 다 가르치지 않았는지. 뭐, 그거야 내일이라도 당장 뢰 장로를 만나보면 알겠지. 으하하하.”
또 한 차례 웃은 뒤 남무궁이 재미있다는 듯이 한 손으로 턱을 바치고 석추명을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말이야, 석 대주 자네가 설마 자네 스승을 진짜로 잡아 오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어. 그것은 정말 내 예상을 벗어나는 행동이었어. 아주 놀라워....”
말꼬리를 흐리는 남무궁의 오묘한 표정에 석추명은 당황하여 얼른 포권을 취하며 허리를 숙였다. 뇌옥에 갇힌 뢰정이 가짜라는 사실을 혹시라도 교주가 눈치챈 것은 아닌지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스승의 은혜가 크다고 하나 그것은 사적인 관계가 아니겠습니까? 공사(公私)를 구분하지 못해서야 어찌 신교의 대주라 하겠습니까?”
석추명은 얼른 입에서 나오는 대로 둘러댔다.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데 교주의 눈빛은 그것마저도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았다.
“공사를 구분하다라... 그렇군. 내가 그동안 석 대주를 잘못 본 게지. 아니면 뢰 장로가 석 대주를 잘못 보았거나 말이야.”
교주는 흥미롭다는 듯 한참 동안 석추명을 바라보더니 중얼거렸다.
“어쨌거나 내일 바로 뢰 장로를 보러 가야겠어. 그동안 어찌 지냈을지 궁금하군.”
석추명은 교주의 말에 마음이 급해 허리를 펴지도 못하고 교주전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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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주전을 물러난 석추명은 허겁지겁 황연화가 있는 불모전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사흘 정도는 시간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건만 교주가 내일 당장 뢰정을 보러 지하 뇌옥으로 간다고 하니 마음이 급했다. 눈치가 비상한 교주는 뢰정이 가짜라는 사실을 대번에 알아채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황보를 구할 수 있는 시간이 오늘 밤뿐이라는 말이 아닌가.
석추명은 잠시 주변을 살펴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다음 즉시 불모전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모습이 담예린의 눈에 띄고 말았다.
담예린은 석추명이 복귀했다는 소식에 만사를 제치고 부리나케 달려오는 중이었다. 석추명이 없는 수라대는 수라대가 아니었다. 임무를 받아서 나가도 신이 나지 않았고 임무가 없어서 쉴 때도 쉬는 것 같지가 않았다. 눈앞에서는 늘 석추명의 얼굴이 어른거렸지만 그럴 때마다 담예린은 자신을 다독이며 마음속으로 석 대주의 안전을 기원했다.
그토록 기다렸건만 석추명은 총단으로 복귀하고 난 다음 자신의 부대인 수라대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다른 대원은 몰라도 각별하게 지낸 자신에게 마저 어떻게 한마디 말도 없을 수 있단 말인가?
석추명이 교주전에 들었다는 말에 무엄하다는 꾸지람을 들을 것도 각오하고 달려왔건만, 담예린의 눈에 들어온 것은 주위를 살피며 은밀히 불모전으로 들어가는 석추명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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