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83화 (83/201)

#   83 - 광세일소_한추영 - 146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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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화. 복귀 (1)

“자네 혹시 귀영검객(鬼影劍客)이라는 별호로 불리던 무림맹의 전임 암영단주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초의공이 벌떡 일어선 채 분기를 이기지 못해 주먹을 쥐락펴락했다. 뢰정은 초의공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바로 석문이라는 자이지.”

“그놈이 귀면쌍살이었을 줄이야!”

초의공이 탁자를 ‘쾅’ 하고 내리쳤다. 그 바람에 탁자가 흔들리면서 그릇이 뒤집히고 술잔이 넘어졌다.

“진정하게나. 석문이 정말 귀면쌍살인지 아닌지는 아직 모르네. 다만 정황상 내가 그렇게 추측할 뿐이라네.”

“아니야. 자네의 말을 들으니 그자가 분명하다는 확신이 드네. 내가 알기로는 석문 그자도 맹주에게 무공을 사사받지 않았나?”

“아마 그럴 걸세. 당시 그런 소문이 자자했었지.”

옆에서 잠자코 듣던 석추명이 뢰정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다면 그동안 무림맹에서 귀면쌍살을 잡으려 했던 것은 모두 거짓이었겠군요?”

“그렇지는 않을 게야. 귀면쌍살이 맹주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은 무림맹 수뇌부도 모르는 것이 분명해.”

뢰정의 말을 듣던 초의공이 한숨을 쉬며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흠. 그렇겠지. 그렇지 않다면 무림맹 수뇌부 놈들이 기막히게 연기를 잘한 것일 테고.”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합니까? 본교가 마교라는 누명을 뒤집어쓰는 바람에 강호에서는 그자가 신교의 출신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석추명이 답답한 듯 두 사람을 바라보며 물었다.

“당장 맹주의 추악한 모습을 전 무림에 드러내야지!”

초의공이 다시 탁자를 내리치며 소리쳤다. 그러자 뢰정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초의공을 말렸다.

“어허, 이 사람. 자네답지 않게 왜 이리 서두르는가? 이 일은 다급하게 생각해서는 안 되네. 지금 당장 이야기를 해본들 어느 누가 믿겠는가? 자네는 지금 무림맹의 추포를 받아 쫓기는 신세이고, 나와 추명이는 명문정파들이 그토록 싫어하는 ‘간악한 마교 놈들’이 아닌가?”

듣고 보니 과연 그랬다. 괜히 어설프게 밝혔다가는 역풍을 맞기 딱 좋을 듯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초의공의 물음에 뢰정이 기다렸다는 듯이 조곤조곤 이야기를 꺼냈다.

“이 일은 맹주가 절대 부인할 수 없는 증거와 증인을 확보하는 것이 최우선일세. 그리고 그 일은 그렇게 금방 되지는 않을 게야. 실은 오늘 자네를 보자고 한 것은 아까 얘기한 우리 신교의 황 장로와 관련이 있네.”

뢰정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술잔을 바라보는 뢰정의 눈빛이 흔들렸다.

“나는 지난 10여 년간 황 장로에게 끝없는 부채의식을 느꼈다네. 그리고 이제 교주는 더 이상 교도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황 장로의 목숨을 거둘 생각인 듯해.”

“흠. 그것참 큰일이구먼. 온 무림이 모두 황 장로의 은혜를 입은 격인데 정작 본인은 죽음을 앞두고 있다니.”

“그래서 내가 다시 교로 들어가 황 장로를 구해낼 생각이네.”

그 말에 초의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래야겠지.”

초의공의 긍정적인 말에 자신감을 얻은 듯 뢰정의 목소리가 조금 밝아졌다.

“지금 절반이 넘는 신교의 정예병력과 고수가 이곳 사천성에 와 있다네. 바로 무림맹과 한판 결투를 벌이기 위해서이지. 그렇다는 이야기는 지금 신교 총단의 방어 인원은 얼마 되지 않다는 뜻이지.”

“그러니 자네 말은 지금이 황 장로를 구하기 적기라는 것인가?”

초의공의 물음에 뢰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그리고 이번 일은 추명이와 내 사매인 불모 황연화가 교내에서 은밀히 호응하기로 했네.”

“잘됐군. 그렇다면 나는 무얼 하면 되겠는가?”

초의공의 시원스런 질문에 뢰정은 기뻐하며 초의공의 두 손을 덥석 잡았다.

“도와주겠는가? 자네만 도와준다면 천군만마가 두렵지 않네.”

“자네 일이 내 일 아닌가? 당연히 도와야지. 그리고 황 장로 같은 협객을 구하는데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나로서도 큰 영광일세.”

“고맙네. 의공!”

뢰정이 초의공의 손을 잡은 자신의 손에 힘을 주었다.

“신교 병력의 절반이 여기 성도에 와 있다 하나 그래도 총단에는 지금 교주를 비롯하여 많을 고수들이 포진하고 있을 텐데 구체적인 방안이라도 있는 것인가?”

초의공의 물음에 뢰정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있네. 내가 거짓으로 잡혀갈 생각이네.”

그 말에 초의공은 놀라서 들었던 술잔을 딱 소리 나게 내려놓고 뢰정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초의공의 물음에 뢰정이 빙긋 웃더니 밖을 향해 말했다.

“들어오너라.”

뢰정의 말이 떨어지자 세 사람이 들어앉은 방의 문이 열리더니 중년의 문사가 들어왔다.

난데없이 누군가 들어오자 석추명은 의아하면서도 호기심이 일었다. 석추명은 들어온 사람의 얼굴을 보러 고개를 들었다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스, 스승님!”

“하하하, 성공한 것 같군. 의공, 자네가 보기에는 어떤가?”

뢰정의 물음에 초의공도 믿기지 않는 듯 혀를 내둘렀다.

“허허, 오랫동안 자네를 보아왔던 나도 헷갈리는군. 자네 혹시 쌍둥이였나?”

“하하하, 아닐세. 이 자는 주노삼(周老三)이라는 자로 섬서와 하남 경계지역에서 산적 노릇을 하던 자였지. 산적 노릇도 모자라 감히 겁도 없이 부녀자까지 강간하려다가 나에게 딱 걸렸지. 그날따라 이놈의 재수가 없었던 게지. 하하하.”

뢰정의 말에 초의공이 눈살을 찌푸렸다. 강간범과 같은 자리에 있다니 생각만 해도 불쾌한 듯했다.

“그런데 잡고 보니 이 자가 나를 무척이나 닮았더란 말일세. 그래서 이번 거사에 좀 활용하기로 했네.”

뢰정은 주노삼에게 말했다.

“이번 일을 시키는 대로만 잘 끝내면 너 이상 네놈의 일에 관여치 않을 테니 실수 없이 해야 할 것이다.”

뢰정의 호통에 주노삼은 연신 허리를 굽히며 비굴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렴. 여부가 있겠습니까? 목숨만 살려주신다면 사람 없는 산골로 들어가서 정말 개과천선하여 살겠습니다요.”

주노삼의 비굴한 미소를 보던 뢰정이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 나가 보거라.”

주노삼이 나가자 초의공이 구레나룻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닮기는 정말 닮았구먼. 누구나 속아 넘어가겠어.”

초의공의 말에 뢰정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다가 다시 목소리를 낮추었다.

“주노삼이 나로 분장한 다음 거짓으로 잡혀들어갈 걸세. 신교에서는 죄인을 압송하면 일단 뇌옥에 가두고 교칙에 따라 국문을 열게 되네. 추명이 너는 주노삼을 압송하되 다른 사람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총단에 도착하는 즉시 지하 뇌옥에 가두도록 해라.”

“예. 스승님.”

“초의공 자네와 나는 은밀히 몸을 숨기고 지하 뇌옥 근처에 대기하세나. 그리고 내 사매가 수단을 강구하여 국문이 열리기 전에 지하 뇌옥의 열쇠만 구해오면 우리 두 사람이 즉시 뇌옥에 들어가 황 장로를 구한 다음 돌아오면 되네. 추명이와 내 사매가 뇌옥 밖에서 도울 터이니 계획 대로만 진행된다면 크게 두려워할 일은 없네.”

뢰정이 눈빛을 초롱초롱 빛내며 말했다.

“신교의 전력은 지금 어떻게 되는가?”

“현재 신교에는 남아있는 고수가 별로 없네. 교주의 그림자 같은 수족인 명왕대주가 있기는 하나 자네와 나의 무공이면 문제없네. 교주만 맞닥뜨리지 않는다면 크게 걱정할 일도 없을 걸세.”

뢰정은 자신만만하게 말하더니 이번에는 석추명에게 시선을 돌렸다.

“내가 이미 말을 넣어두었으니 불모전에서는 지금 지하 뇌옥의 열쇠를 훔칠 방도를 강구하고 것이다. 추명이 너는 신교에 도착하자마자 즉시 불모를 만나서 이번 계획을 소상히 논의하도록 해라.”

“예. 스승님.”

석추명의 머릿속에 문득 불모 황연화의 근심 어린 눈빛이 떠올랐다. 일전에 자신을 변호하다가 교주님의 미움을 받는 듯했는데 지금은 어떨지... 석추명은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하여 앞에 놓인 술잔을 꽉 움켜잡았다.

****

“흥, 제깟 놈들이 안 넘어가고 배기나 보자.”

사소혜는 가슴이 좀 더 도드라져 보이게 추켜올리고, 새하얀 허벅지가 둔부 바로 아래까지 드러나도록 그렇지 않아도 옆으로 터져 있는 치마의 옆선을 좀 더 위로 찢어 올렸다.

사소혜는 갖가지 자세를 취하며 자신의 몸매를 내려다보더니 미리 준비한 음식 바구니를 들고 뇌옥의 입구에서 경계를 담당하는 병사들을 지나 수비대장실로 도도하게 걸어갔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사소혜의 가슴을 감싼 얇은 비단 천 속에 모습을 감춘 탐스러운 복숭아 두 알이 터질 듯이 출렁이며 교묘히 남심(男心)을 자극했고, 걸을 때마다 앞으로 쭉쭉 내뻗는 하얀 다리는 아슬아슬한 부위까지 보일락 말락 뭇 남성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평상시에도 관능적인 사소혜의 몸매가 한껏 농익어 벌어진 붉은 석류처럼 눈앞에 나타나자 뇌옥의 경계를 담당하는 무사들은 몽혼약이라도 먹은 듯 금세 눈매가 게슴츠레해졌다.

“정신들 안 차리고 뭣들 하는 게야!”

갑자기 천둥이 치듯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하 뇌옥을 지키는 수비대 대장이자 명왕대 부대주인 자겸(自謙)이었다. 그 소리에 정신이 든 자겸의 수하들은 얼른 자세를 바로 했다. 자겸의 살기 어린 눈빛을 보자 경계조 무사들은 오금이 저려와 침을 꿀꺽 삼키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정면을 응시했다. 하지만 그들의 바로 앞을 사소혜가 방실방실 웃으며 지나가자 그새를 못 참고 다들 슬쩍 눈길을 돌려 사소혜의 꽁무니를 뒤쫓았다.

사소혜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도도한 발걸음으로 뇌옥 입구 옆에 자리한 대장실의 문을 열고 자겸의 바로 코앞까지 다가갔다.

자겸이 사소혜를 힐끗 보더니 다시 보고 있던 문서로 고개를 돌렸다.

“너는 불모전에 있는 아이가 아니냐? 여기에는 어쩐 일이냐?”

사소혜의 눈길이 자겸의 허리춤에 있는 열쇠꾸러미에 가서 멎었다. 저것만 빼돌리면 되는데...

사소혜가 자겸이 보고 있던 문서 위에 가지고 온 음식 바구니를 떡 하니 올렸다. 그리고는 자겸의 바로 코앞에서 허리를 숙여 가슴속이 훤히 보이게 한 다음 가슴을 몇 번 출렁거렸다.

“불철주야로 뇌옥을 지키느라 고생하는 부대주님을 위해 불모님께서 특별히 진귀한 음식을 장만하여 보내셨어요. 불모님께서 손수 만드신 것들이니 맛 좀 보세요.”

사소혜가 바구니에서 음식을 끄집어내어 탁자 위에 진열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사소혜는 자겸을 은근히 바라보며 눈웃음을 짓거나 몸을 비비 꼬는 등 갖은 교태를 다 부렸다. 수비대 대장실 안에 있던 대원들은 음식보다 사소혜의 몸짓에 다들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수비대 대장 자겸은 요지부동이었다.

사소혜는 음식을 다 진열할 동안 자겸이 꿈쩍도 하지 않자 속으로 살짝 당황하기 시작했다. 저놈의 자식, 혹시 고자 아니야? 내가 이렇게 꼬리를 치는데도 어떻게 저렇게 냉담할 수가 있지? 미련 곰탱이처럼 생긴 놈이라 아무 느낌도 없나?

사소혜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필살기 애교를 쓰기로 작정했다.

“이 원앙앵두탕(鴛鴦櫻豆湯) 맛 좀 보세요. 뜨거우니 제가 불어 드리죠.”

사소혜가 숟가락에 앵두탕 국물을 한 숟갈 뜨더니 입술을 오물거리며 호호 불어서 자겸의 입 바로 앞에 내밀었다. 동시에 자겸을 그윽하게 바라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사소혜가 준비해온 음식들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수비대 대장실 안이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자겸이 한 손으로 음식들을 탁자 위에서 쓸어내 버린 것이다. 쨍그랑, 그릇 깨지는 소리와 함께 국물 그릇이 엎어지고 구수한 냄새를 풍기던 닭고기와 돼지고기가 흙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향신료 병이라도 깨졌는지 뒤집힌 바구니에서 고소한 양념 냄새가 솔솔 났다.

“허튼수작하지 마라. 불모님이 보내셨다니 그 말을 누가 믿는단 말이냐? 그리고 음식에 독이 없다고 누가 장담하지?”

자겸의 말에 사소혜는 화를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며 삿대질을 했다.

“독, 독이라고? 지금 불모님을 의심하는 거예요? 아니, 먹기 싫으면 안 먹으면 되지, 이게 무슨 짓이예요? 당장 사과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감찰대에 고발하겠어요!”

“흥! 그러시든가.”

자겸이 호락호락 넘어오지 않자 사소혜는 노기를 참지 못하고 결국 팔뚝에 감겨있던 금사신편을 풀었다. 자겸은 사소혜가 금빛 채찍을 풀자 대번에 눈빛이 바뀌었다.

“네년이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무기를 꺼내 드는 것이냐? 반역이라도 할 셈이냐?”

“나는 부대주 당신에게 사과를 받아내야겠어요. 사람의 성의를 이토록 무시하고 짓밟았으니 절대 그냥 갈 수 없어요.”

사소혜가 금사신편으로 바닥에 떨어진 바구니를 내리치자 바구니가 대번에 산산조각이 나며 미처 쏟아지지 못한 음식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러자 고소한 냄새가 더욱 짙게 풍기기 시작했다.

“각오하세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사소혜의 금사신편이 자겸의 얼굴을 똑바로 후려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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