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80화 (80/201)

#   80 - 광세일소_한추영 - 145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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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화. 귀면쌍살의 정체 (1)

석추명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챙겨입고 떠날 준비를 했다. 무림맹을 탈출하면서 입었던 상처는 상당히 회복되었다. 게다가 신교의 명왕대를 통해 근래 맹 주위에서 다시 귀면쌍살이 나타났다는 첩보를 들었다. 맹주와 귀면쌍살의 관계를 파악하려면 지금이 적기인지도 몰랐다.

그때 임예린이 탕약을 들고 방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석추명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석추명도 이번에 신교에서 천린상단 사천지부를 공격하기로 했다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임예린은 석추명이 떠날 준비를 한 것을 보고 멈칫했다.

“떠나려고요?”

“응. 아직 끝내지 못한 임무가 있어서 얼른 가봐야 할 것만 같아.”

“10년 만의 만남인데 제대로 이야기도 못 했네요.”

임예린의 말에 아쉬움이 묻어났다.

“이렇게 만났으니 앞으로도 얼마든지 기회가 있겠지. 다음에는 하진이랑 같이 보자. 그 녀석이 그렇게 멋지게 자랐을 줄을 생각지도 못했어.”

“그래요. 셋이서 같이 봐요. 그럴 수... 있겠죠?”

임예린의 목소리에 확신이 없었다. 석추명은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럴 수 있을까? 신교에서 천린상단을 공격하고, 무림맹에서 천린상단을 도와 백련신교와 대적하기로 한 마당에....

석추명은 임예린의 손을 잠시 잡았다 놓았다.

“성도에 가면 조심하거라.”

임예린이 촉촉한 눈으로 석추명을 올려다보았다.

“오라버니도 부디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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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추명은 은밀히 귀면쌍살의 뒤를 쫓고 있었다. 귀면쌍살의 경공이 워낙 대단하여 따라가기 쉽지 않았지만 귀면쌍살이 가는 방향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아 놓치지 않고 따라갈 수 있었다. 귀면쌍살은 무림맹이 가는 방향을 그대로 쫓아가고 있었다.

귀면쌍살이 항주에서부터 조금도 벗어나지 않고 계속 무림맹의 뒤를 쫓아가자 석추명은 내심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이번 싸움에는 맹주가 직접 참여했다. 귀면쌍살이 맹주와 관계가 없다면 이렇게 며칠씩이나 굳이 무림맹 뒤를 조심스럽게 쫓아갈 이유는 없으리라.

귀면쌍살이 무림맹 군사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소로를 이용하여 다니는 바람에 바위나 나무 등 다행히 석추명이 몸을 숨길 수 있는 지형지물이 많았다.

무림맹 군사들은 쉬지 않고 달려오더니 성도까지 불과 하루도 남지 않은 거리인 만현(萬縣)초입에 있는 들판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분주히 야영 준비를 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석추명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제 곧 천린상단의 사천지부가 있는 성도인데 왜 굳이 여기서 밤을 새는 걸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발상이었다.

해가 떨어져 어둠이 내려앉자 지금까지 조용히 무림맹의 뒤만 쫓아오던 귀면쌍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석추명은 귀면쌍살이 드디어 맹주를 만나러 간다고 생각하니 온몸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귀면쌍살은 맹주가 있는 곳으로 가지 않고 은밀히 주위를 둘러보더니 소리 없이 용봉단 후미로 다가가는 것이 아닌가! 귀면쌍살이 후기지수들만 노린다고 하더니 이번에도 설마 후기지수 중 한 명을 노리는 것일까? 용봉단이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의 후기지수들로 구성되어 있음은 석추명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무림맹 용봉단에 맹주가 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귀면쌍살도 아마 그 사실을 알 것이다. 그런데도 만약 귀면쌍살이 용봉단 후기지수를 또다시 납치하거나 살해한다면 무엇인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지금까지 맹주와 귀면쌍살 간의 관계를 의심했던 것이 완전히 헛다리를 짚은 셈이 되기 때문이었다.

석추명은 귀면쌍살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계속 뒤를 쫓았다. 백련신교의 천리잠행보(千里潛行步)는 강호에서 따라갈 무공이 없는 은밀한 추적술이었다. 석추명은 지금 천리잠행보를 펼쳐 자신의 흔적은 지우면서 끊임없이 귀면쌍살의 뒤를 쫓고 있었다.

용봉단 일행의 야영지에서 멀리 떨어진 커다란 나무 아래에 키가 훤칠한 청년 하나가 혼자 앉아 있었다. 청년은 답답한 일이라도 있는지 나무 밑에 앉아서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석추명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혀를 쯧쯧 찼다. 적이 언제 나타날지도 모르는데 이동 중에 대열을 이탈하다니. 자신의 부대 같으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게다가 청년의 바로 뒤에서 귀면쌍살이 살금살금 다가가고 있었다. 이제 그 청년은 죽은 목숨이었다. 귀면쌍살의 손에 사로잡히고도 살아남은 후기지수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과연 귀면쌍살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번에 달려들더니 그 청년의 혈도를 짚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번쩍 들어 올려 달아나는 것이 아닌가. 마치 매가 병아리를 잡아채듯 신속하기 그지없는 행동이었다. 청년은 반항 한번 못해보고 단번에 붙잡히고 말았다. 너무나 속절없이 붙잡혀서 오히려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귀면쌍살은 청년을 붙잡아 둘러메더니 갑자기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날카로운 광소를 몇 번 터뜨렸다. 그 소리에 귀면쌍살이 나타난 줄도 모르고 있던 용봉단원들이 깜짝 놀라 검을 움켜잡았다.

귀면쌍살은 즉시 달아나지 않고 용봉단원들 몇 명이 달려올 때까지 청년을 어깨에 멘 채 느긋이 기다렸다. 숨어서 귀면쌍살의 모습을 지켜보던 석추명은 귀면쌍살의 의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도대체 뭐하는 수작이지? 왜 자기의 행적을 굳이 드러내려 하는 것일까?

“누구냐!”

용봉단원 몇 명이 검을 빼 들고 뛰어 왔다.

“귀면쌍살!”

그중에 한 명이 귀면탈을 알아보고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귀면쌍살은 다시 한 번 광소를 터뜨리며 팔을 휘두르자 모두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는 귀면쌍살은 신법을 전개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귀면쌍살은 키 큰 청년 하나를 둘러메고도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순식간에 귀면쌍살의 모습이 사라질 지경이 되자 석추명도 더 이상 숨어있을 수만은 없어 즉시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귀면쌍살이 눈치채지 못하게 계속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수십 리를 달려가던 귀면쌍살이 인적 없는 한적한 숲속에 닿자 멈춰 서서 청년을 내려놓았다.

이제 곧 또 아까운 젊은 목숨 하나가 사라지겠구나. 석추명은 귀면쌍살과 직접 맞붙지 말라던 교주의 명령이 생각나 출수를 해야 할지 망설이던 찰나, 뜻밖의 모습을 보고야 말았다. 귀면쌍살이 청년의 혈도를 풀어주며 청년에게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는 것이 아닌가?

석추명은 수상한 생각에 즉시 덤불 옆 큰 바위 밑에 몸을 숨기고 더 지켜보기로 했다. 일각(一刻)이 조금 지났을까? 이번에는 애초에 예상했던 맹주 남궁진악의 모습이 나타났다.

역시 두 사람이 관계가 있었구나!

석추명은 긴장되어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맹주와 귀면쌍살이 서로 관계가 있으리라는 의심이 드디어 사실로 드러난 것이다.

맹주가 나타나자 귀면쌍살은 무릎을 꿇어 포권을 취했다. 그러자 맹주가 귀면쌍살에게 뭐라고 지시를 하는 듯했다. 귀면쌍살은 여러 번 고개를 끄덕이고 포권을 취했다.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궁금하여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두 사람의 무공이 워낙 고강하여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잠시 후, 맹주가 청년을 데리고 사라지자 귀면쌍살도 곧 사라졌다. 석추명은 귀면쌍살을 쫓으려고 몸을 일으키려는데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불안한 생각에 석추명은 꼼짝 않고 다시 주위를 살피다가 그만 간담이 서늘해지고 말았다. 맞은 편 덤불 속에 사람이 한 명 숨어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람은 구렛나루를 기른 중년의 검객으로 햇빛을 가리는 챙이 넓은 죽립을 쓰고 있었다. 자신의 반대편에 사람이 숨어있는 것도 몰랐다니, 모르긴 몰라도 자신보다 무공이 월등히 뛰어난 고수임이 분명했다.

눈이 마주친 검객은 석추명에게 일어나지 말고 그대로 있으라는 손짓을 했다. 석추명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일어나려다 말고 그대로 멈추었다. 바로 그때 석추명의 바로 옆에서 맹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맹주가 돌아오는 기척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석추명은 깜짝 놀랐다.

“이상하군. 조금 전까지 여기서 분명히 인기척이 있었는데 말이야. 설마하니 내가 잘못 느낀 것인가?”

“사람이 숨어있었다면 백부님께서 모르셨을 리가 있겠습니까? 아마도 산짐승인 듯합니다.”

맹주의 목소리 뒤이어 젊은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맹주가 콧방귀를 뀌었다.

“흥, 산짐승은 감히 내 눈을 피해갈 수 있단 말이냐?”

맹주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아, 아닙니다. 산짐승 따위는 어찌 백부님의 눈길을 피해갈 수 없겠습니까?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고―.”

청년이 미처 말을 다 끝내지도 못했다. 맹주가 청년의 말을 잘랐기 때문이었다.

“됐느니라. 짐승이든 사람이든 상관없다. 감히 내 일을 방해하는 놈들이 있다면 어느 놈이든지 베어버리면 그만이다.”

실로 광오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그리고 정파 무림의 수장인 맹주의 입에서 나온 얘기라고는 전혀 믿기지 않는 소리였다.

맹주를 백부라고 부른 청년은 맹주의 말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자. 천계심이가 지금쯤 나를 찾아서 아주 안달이 났을 게야. 좀 더 속이 타 들어가도록 이대로 며칠 더 있다가 돌아가야겠다. 그놈은 제 놈이 제법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제 꾀에 제가 넘어가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를 것이야. 크하하하하.”

맹주의 웃음소리가 적막한 숲을 뒤흔들자 그 소리에 놀란 산새들이 후두둑 날아올랐다.

“가자꾸나.”

“예. 백부님.”

맹주와 청년이 사라지고 한참이 지났지만 석추명은 맹주가 이번에는 정말로 가버린 것이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때 반대편 수풀속에 숨어있던 검객이 먼저 몸을 일으키며 울분을 토해냈다.

“귀면쌍살의 뒤에 맹주가 있었다니! 그렇다면 그동안 귀면쌍살이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의 후기지수들을 해친 것도 맹주의 명이었단 말인가? 이 천하에 쳐 죽일 놈!”

중년 검객이 검을 움켜잡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석추명도 그동안 귀면쌍살과 맹주가 모종의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지만 설마 귀면쌍살이 맹주의 명을 이행하고 있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지난 30년간 정파 무림이 저 늙은 구렁이 같은 놈의 수중에 놀아나다니. 허허, 이럴 수가....”

중년 검객은 허탈한 감정을 감추지 않고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석추명은 그 심정을 헤아려 그저 말없이 지켜볼 뿐이었다. 이윽고 중년 검객이 다시 입을 열었다.

“같이 있던 청년이 바로 맹주의 조카이자 남궁세가의 장남인 남궁척이라는 놈일세. 맹주가 자신의 조카만큼은 아끼는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 그것도 아니었군.”

남궁세가의 장남? 그제야 석추명은 왜 귀면쌍살이 그 청년에게 그렇게 공손하게 대했는지 깨달았다. 이제 보니 귀면쌍살이 남궁척을 납치한 것도 다 맹주와 짜고 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동안 강호에서 무림맹의 맹주는 총군사 사마경과 부맹주 천계심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혼자서는 아무 결정도 내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라는 소문이 무성했었는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니었다. 맹주야말로 누구보다도 무섭고 악랄한 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선배님은 누구십니까?”

석추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초의공이라고 한다.”

중년 검객은 다름 아닌 곤륜파의 설영객 초의공이었다. 초의공은 귀면쌍살에게 곤륜파 제자들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 귀면쌍살을 계속 뒤쫓고 있었다.

석추명은 중년 검객이 뢰정의 친우 초의공이라는 소리에 뛸 듯이 기뻤다.

“저는 백련교의 석추명이라고 합니다. 사부님께 선배님의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초의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바로 검의 신동이라는 뢰정의 제자였군. 그래서 맹주와 귀면쌍살이 바로 지척에 있었어도 그렇게 기척을 잘 숨겼던 것이군. 나도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자네가 숨어있는 것을 몰랐을 걸세.”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사흘 후에 자네의 스승과 만나기로 했네. 스승의 안부가 궁금하다면 같이 가세나.”

“그렇지 않아도 스승님을 뵙고 싶었는데 정말 잘 되었습니다.”

석추명이 기뻐하자 초의공은 다시 한차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을 노려보았다.

“귀면쌍살만 잡으면 될 줄로 생각했더니 그놈은 단지 빙산의 일각이었어. 그놈의 뒤에 누군가 있을 줄로 짐작은 했건만 설마 그것이 맹주일 줄이야. 큰놈을 잡으려면 작은놈부터 먼저 잡아야겠지. 자, 이제 작은놈부터 잡으러 가세나.”

초의공이 발을 한번 굴려 땅바닥을 박차더니 흰빛으로 화해 귀면쌍살이 사라진 방향으로 질풍같이 나아갔다. 바로 곤륜이 자랑하는 상승경공, 곤륜대팔식(崑崙大八式)이었다. 곤륜파의 경공이 무당파의 제운종과 더불어 무림 일절이라고 하더니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석추명은 은근히 호승심이 들어 자신도 재빨리 경공을 펼쳤다. 스승에게서 배운 천종보(踐宗步)라는 경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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