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 - 광세일소_한추영 - 1444411
#
제77화. 사천대전(四川大戰) (6)
전장으로 달려간 기하진의 눈에 제일 먼저 띈 사람이 바로 요혜신니였다. 요혜신니는 기운이 다 빠졌는지 몸놀림이 둔했고 고수답지 않게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천하의 요혜신니께서도 지칠 때가 다 있구먼. 하도 잘난 척을 하기에 난 또 신니께서는 불사신인 줄 알았지. 우하하하.”
팔 한쪽이 없는 노인네가 요혜신니를 바라보며 박장대소를 터뜨리자 신니를 에워싼 험상궂은 장정 수십 명도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당두걸. 차라리 나를 죽여라.”
요혜신니의 입에서 노성이 터져 나왔다. 지친 기색이 완연했으나 눈빛만큼은 아직도 사납게 적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렇게 쉽게 보낼 수야 없지. 내가 네년한테 당한 수모가 얼마인데. 먼저 네년의 팔과 다리 하나씩을 자르고 눈 한 알을 파낸 다음, 네년이 보는 앞에서 아미파 제자들의 보드라운 살결을 한 명씩 어루만져 줘야겠지. 기왕이면 복호사 불당 안에서 말이야. 우하하하.”
그 말을 들은 요혜신니는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날이 빠진 계도를 곧추세우고 그대로 당두걸에게 달려들었다.
“이 천하에 몹쓸 놈!”
요혜신니가 계도를 휘둘렀으나 힘이 빠진 신니의 칼을 당두걸이 선선히 맞아줄 리가 없었다.
“이것도 아미복마검이냐? 느릿느릿한 움직임이 파리나 쫓으면 딱 좋겠구나. 우하하하.”
요혜신니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무림의 대종사로 한평생을 살아온 신니가 이런 수모를 겪은 적은 없을 것만 같았다.
“뭣들 하느냐? 당장 저 늙다리 비구니 년의 팔다리 하나씩을 끊어내지 않고.”
당두걸의 말이 떨어지자 검은 옷의 장정 서넛이 동시에 요혜신니에게 다가갔다.
그 모습에 기하진은 손에 잡히는 대로 땅바닥에서 즉시 돌멩이 서너 개를 주워들고 하나씩 휘둘렀다.
돌멩이는 기하진의 손에서 떠나기가 무섭게 요혜신니를 핍박하던 무사들의 머리뼈를 부스러뜨렸다.
“으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뼈가 부서지는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요혜신니를 에워싼 네 명의 무사가 그 자리에 쓰러져 절명했다. 하나같이 돌멩이에 머리뼈를 손상당한 채였다.
돌멩이 하나로 머리뼈를 바스러뜨리다니, 당금 무림에 누가 이런 공력이 있단 말인가.
뜻밖의 상황에 당두걸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주위를 급히 두리번거리며 소리쳤다.
“남궁 맹주시오?”
“맹주님은 왜 찾으시오?”
기하진이 차가운 냉소를 날리며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모습을 드러냈다.
당두걸은 난데없이 기하진이 나타나자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네놈은 무림맹의 애송이 단주가 아니냐? 맹주님은 어디에 계시느냐?”
“맹주님께서 당신 같은 하류 잡배를 상대하시겠소?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마시오.”
기하진의 말에 당두걸의 미간에 굵은 주름이 잡히면서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뭐라고?”
요혜신니는 비록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지치고 다치기는 했으나 안목만큼은 그대로였다. 네 명의 흑도오련 무사들이 돌멩이 하나에 즉사하자 자신조차도 무림맹주 남궁진악이나 소림 신승 무학대사가 나타난 줄로만 생각했었다. 그렇지 않고는 저 불가사의한 공력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겨우 약관을 넘긴 기하진이라니! 아무리 기하진이 기연을 얻고 영단을 섭취했다 하더라도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마냥 놀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당두걸의 눈빛이 교활하게 반짝이는 것을 본 요혜신니는 즉시 기하진에게 소리쳤다.
“기 단주, 그놈은 예전에 개방의 무공교두였던 당두걸이란 놈일세. 무공이 고강하고 성정이 음흉한 놈이니 조심해야 하네.”
당두걸은 요혜신니의 말에 잠시 껄껄껄 웃으며 말했다.
“신니께서 이 몸을 그렇게 칭찬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소이다.”
그리고는 기하진에게 고개를 돌리고 오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놈은 일전에 노부의 빈 소맷자락도 당하지 못했던 놈이 아니냐?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감히 어른들이 계신 곳에 끼어들다니.”
그 말에 기하진이 당두걸을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때 복수를 하러 왔소이다. 하나 남은 팔마저 이 자리에서 잘라줄 터이니 평생 발로 밥을 떠먹으며 속죄하며 사시오.”
“뭣이라!”
당두걸의 낯빛이 대번에 대추처럼 벌겋게 타올랐다.
“애송이 놈이 하늘 높은 줄도 모르고!”
당두걸의 왼손에 든 검이 한차례 파르르 떨리더니 번개같이 기하진을 찔러 들어갔다. 바로 개방의 유명한 검법, 사망검(蛇蟒劍)이었다. 개방에는 강호에 위명을 떨치는 2대 신공이 있는데 첫째가 방주에게만 전승되는 타구봉법(打狗奉法)이요, 둘째가 장로 이상의 신분만 익힐 수 있는 사망검법으로 기하진도 무공 강습시간에 들어본 적이 있었다.
당두걸이 검을 떨치자 수백 마리의 독사가 아가리를 벌리고 일제히 달려드는 착각이 들었다.
“입으로는 개방을 부인하면서도 무공은 끝까지 개방의 무공을 쓰는구나. 하지만 이것도 소용없다.”
기하진이 검을 휘두르자 검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검기가 응축되며 붉은 불꽃을 생성했다. 천마검이 고급단계에 들어갈 때 나오는 현상이었다.
기하진이 천마검을 펼치자 당두걸의 눈이 앞으로 튀어나올 듯 휘둥그레졌다. 입까지 쩍 벌린 모습이 개방의 무공교두였던 만큼 당두걸도 천마검에 대해 아는 것이 분명했다.
기하진의 검이 당두걸의 검에 부딪치자 당두걸의 검이 대번에 중간에서 부러져 나갔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기하진의 검은 화염을 내뿜는 뱀처럼 어두운 밤하늘을 배경으로 허공에서 빙그르르 돌더니 당두걸의 왼손 팔꿈치 부분을 휘감았다. 서걱!
“으악!”
그와 동시에 당두걸의 왼손이 허공에 피를 뿌리며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이것은 네놈에 대한 사태님의 복수요,”
기하진의 좌장이 고통으로 휘청거리는 당두걸의 가슴을 강타했다. 좌장이 가슴에 닿는 순간, ‘철퍼덕’ 둔탁한 소리가 들리더니 당두걸의 몸이 공중으로 떠서 20여 척이나 뒤로 날아갔다. 땅바닥에 처박힌 당두걸은 가슴뼈가 함몰된 듯 가슴이 움푹 들어간 채 입으로는 끝없이 선혈을 뿜어냈다.
“이것은 그때 네놈에게 당했던 나의 복수다.”
기하진이 뻗었던 손을 거두며 말했다.
당두걸이 순식간에 당하자 당두걸의 수하들은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기하진이 검을 고쳐잡고 그들을 노려보았다.
“네놈들도 악행에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겠지. 그것이 바로 인과응보라는 것이다.”
기하진이 검을 잡고 공력을 일으키자, 바람이 일어나듯 순식간에 공중으로 치솟더니 그대로 회오리바람이 되어 주위를 휩쓸었다. 기하진의 검이 스치고 지나가는 자리마다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적들의 몸이 양분되었다. 기하진의 검에서 일어난 화염이 적들의 몸에 옮겨붙어 살이 타들어 가는 누린내가 진동했다.
요혜신니는 넋을 놓고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았다. 어린 나이답지 않게 손속이 매섭고 전혀 사정을 두지 않았다. 비록 전쟁의 목적이 적을 베는 것이라고는 하나 기하진이 손을 쓰는 모습을 보자니 자신의 등골마저도 오싹해지는 것만 같았다. 어디서 이런 귀왕(鬼王) 같은 놈이 나타났을까?
무림 3대 신공(神功) 중의 하나인 천마신검을 익힌 것도 놀라웠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천마신검을 가능하게 하는 웅대한 공력이었다. 검을 펼칠 때마다 펄펄 끓는 용암의 열기가 진동하는 천마검은 그만큼 내력소모가 막대한 무공이었다. 내력이 끊임없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천마신검을 익히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요혜신니가 묵묵히 기하진을 살펴보고 있는데 돌연 등 뒤 영태혈에서 뜨끈뜨끈한 내력이 그야말로 세찬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어느새 기하진이 자신의 등에 장심을 대고 기운을 불어넣고 있었던 것이다. 공력이 정심하고 순수하여 도무지 약관의 나이에 쌓을 수 있는 내력이 아니었다.
“제가 넣어드리는 기운으로 막힌 혈도를 뚫으십시오.”
“알겠네.”
기하진의 말에 요혜신니는 잡념을 그치고 즉시 운기행공에 들어갔다. 반 각도 지나지 않아 요혜신니는 붉은 핏덩이 같은 것을 서너 개 내뱉더니 온몸이 가뿐해져 벌떡 일어났다.
“고맙네, 기 단주. 내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네.”
요혜신니는 기운을 차리자 적을 향해 노성을 터뜨렸다.
“이놈들아, 다시 한번 붙어보자.”
기하진은 요혜신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소 짓다가 다시 급히 공중으로 신형을 뽑아 올렸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무욕자가 온몸에 선혈이 낭자한 채 두 명의 고수로부터 협공을 받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일전에 무림맹의 맹주전을 침입해왔던 마교 탈명대의 수장, 추혼검 왕기였으나 기하진의 시선은 다른 사람에게 꽂혀 있었다. 바로 부모의 원수이자 지학의 원수이기도 한 탈명검 마립이었다.
“무욕자, 우리 백련교가 청성파의 덕을 좀 보았으니 네놈에게는 은혜를 베풀어 단칼에 보내어 주마. 우하하하.”
마립이 손에 든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검보다 먼저 다가온 검기가 무욕자의 등을 서늘하게 베고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왕기의 검이 곧게 뻗으며 무욕자의 가슴을 찔러 왔다.
공력이 소진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둘 다를 막아낼 방법은 없었다.
무욕자는 마음을 비웠다. 제자 500여 명을 거의 다 잃은 마당에 어차피 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린다면 저승에서 제자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대 청성파의 장문인으로서 문파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죽을 때 죽더라도 한 명의 적이라도 더 베고 죽어야 할 것이다.
무욕자는 마립의 검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왕기의 검에만 집중했다. 찔러 들어오는 왕기의 검을 막지 않은 채 자신의 검으로 똑같이 왕기를 찔러 들어갔다. 동귀어진을 노린 수법이었다.
검 끝이 왕기의 가슴에 닿았다고 느끼는 순간, 왕기의 검은 이미 자신의 살갗을 뚫고 들어오고 있었다.
그 순간,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나더니 ‘챙강!’하고 왕기의 검이 중간에서 부러져 나갔다. 누군가가 왕기의 검에 극강의 탄지신공을 펼친 것이다. 그와 동시에 무욕자의 검은 왕기의 가슴을 뚫고 등 뒤로 튀어나왔다.
분명 마립의 검이 세차게 자신을 베어왔는데도 자신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게다가 아무런 상처도 없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무욕자가 뒤로 돌아보려는 순간, 엄청난 열기가 자신의 등 뒤로 후끈 지나갔다. 무욕자는 뜨거운 열기에 얼른 팔을 들어 올려 얼굴을 가렸다.
천천히 팔을 내리며 눈을 뜨니 자신의 앞에 우뚝 서 있는 사람은 사질 천옥랑과 같은 또래인 용봉단주 기하진이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마립이 두 동강이 난 반쪽짜리 검을 쥐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설마하니 이 청년이 마교 사대검왕 중 한 명인 탈명검 마립의 검을 부러뜨렸단 말인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의 공력이 절정인 상태라 하더라도 마립의 검을 두 동강 낼 자신은 없었다.
“흐흐흐, 애송아, 그새 간장과 막야가 만든 검이라도 구한 게냐? 네 녀석이 나를 놀라게 하는구나.”
마립은 껄껄 웃더니 두 동강 난 검을 미련 없이 던져버리고는 기하진 쪽으로 성큼 한 걸음 내디뎠다.
“하지만 말이야, 이 자리는 네놈 같은 잔챙이가 낄 자리가 아니야. 용기는 가상하다만 낄 자리와 끼지 말아야 할 자리 정도는 분간해야지. 어디서 보검 한 자루를 구했다고 이렇게 아래위를 몰라봐서 쓰나?”
마립은 오만한 자세로 기하진을 비웃더니 점점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마립은 기하진의 검이 보검이라서 자신의 검이 부러져 나갔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내 부모와 친우의 원수를 갚는데 그분들의 이름을 욕되게 할 수야 없지. 네놈이 검을 쓰지 않겠다면 나도 쓰지 않으마.”
기하진이 마립을 차갑게 노려보며 검을 등 뒤 검집에 꽂았다. 기하진의 모습에 마립은 고개를 하늘로 젖히고 광소를 터뜨렸다.
“우하하하, 네놈의 그 배짱 하나는 정말 마음에 드는구나. 지금까지 내 앞에서 네놈만큼 큰소리치는 놈은 본 적이 없으니 말이야.”
“사설이 긴 놈치고 제대로 된 놈 보지 못했다.”
기하진이 눈빛 하나 깜박이지 않고 마립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마립의 인상이 다시 구겨졌다.
“건방진 놈. 오늘 네놈의 처지를 똑똑히 깨닫게 해주마.”
마립이 말을 하면서 양어깨를 한차례 돌리자 어깨에서 드르륵, 드르륵, 콩 볶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는 기하진의 가슴을 향해 쌍장을 날렸다. 바로 백련교가 자랑하는 무림신기(武林神技), 구곡절심장(九曲切心掌)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