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 광세일소_한추영 - 1440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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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화. 사천대전(四川大戰) (5)
청성파 장문인 무욕자는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진 참상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이끌고 온 제자 500명에 가운데 살아남은 제자들의 수가 수십 명이 채 되지 않았다.
핏물로 얼룩진 장검을 손에 든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를 봐도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가슴과 복부가 난자당한 채 선혈을 흘리고 죽은 청성 제자들의 시신이 들판에 나뒹굴고 있었다.
문득 저 멀리 자신이 특히나 귀여워하던 제자 홍립(弘立)의 모습이 보였다. 천옥랑과 비슷한 또래인 홍립은 성격이 밝고 매사에 열심이라 앞으로 청성의 미래를 이끌어갈 동량으로 생각하던 인재였다.
죽은 줄 알았던 홍립의 손가락이 순간 꿈틀했다. 그 모습에 무욕자는 허겁지겁 홍립에게로 다가갔다.
“립아! 립아!”
무욕자는 핏물이 검붉게 말라붙은 손을 내뻗어 제자를 부축하여 안았다. 온몸에 시뻘건 선혈을 뒤집어쓴 홍립이 스승의 부름에 천천히 눈을 떠서 무욕자를 잠시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바싹 마른 논바닥처럼 갈라진 입술을 두어 번 힘겹게 벌려 무욕자는 귀를 바싹 갖다 대었으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애타는 스승의 표정을 보았기 때문인지 홍립은 피투성이 손을 들어 올리려 애쓰다가 스르르 힘이 빠져 땅바닥에 털썩 손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어느새 홍립은 스승을 바라보려 힘겹게 뜬 눈을 감지도 못하고 숨이 끊어져 있었다.
“립아!”
제자의 이름을 부르는 무욕자의 눈에서 두 줄기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가 그깟 명예에 눈이 멀어 아까운 너희 목숨만 잃게 하였구나.”
죽은 홍립을 안고 회한의 눈물을 흘리던 무욕자의 입에서 기어이 울음소리가 꺼이꺼이 터져 나왔다. 늙은 사부는 떨리는 손길로 눈을 감지 못하고 죽은 애제자의 눈을 감겼다.
그때 도끼 한 자루가 날카로운 파공음을 내며 무욕자를 노리고 날아왔다. 제자의 죽음에 넋이 나간 무욕자는 도끼가 날아오는 데도 피할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멍하니 앉아 있기만 했다.
도끼가 무욕자의 머리를 몸에서 분리하려는 순간, ‘쨍강!’하는 금속성과 함께 불꽃이 튀더니 도끼가 그 기세 그대로 제 주인에게 날아갔다. 그리고는 뒤미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도끼가 그대로 제주인의 몸통을 갈랐던 것이다.
“괜찮으시오?”
도끼를 막아 무욕자를 구한 사람은 다름 아닌 아미파 장문인 요혜신니였다. 요혜신니는 제자들의 죽음에 상심하는 무욕자의 심정을 이해하고도 남았다. 어제 자신의 심정이 바로 그랬다.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소이다. 제자들의 죽음은 싸움이 끝난 뒤에 마음껏 애도하기로 합시다. 스승이라는 우리들이 이렇게 넋이 나가 있으면 아직 살아있는 제자들이 어찌 힘을 내겠소?”
요혜신니가 손을 내밀었다. 무욕자는 요혜신니의 손을 잠시 바라보더니 그 손을 잡지 않고 혼자 힘으로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내가 욕심에 눈이 멀어 대죄를 지었소. 나는 사태의 손을 잡을 자격이 없는 늙은이요.”
요혜신니는 청성파가 어제 아미파 제자들을 힘껏 돕지 않은 부분을 말하는 줄로만 생각했다.
“지나간 일은 다 잊으시구려. 어제 전투에서는 그대에게 말할 수 없이 서운했으나 아까운 청성의 제자들이 이렇게 모두 전사한 마당에 그걸 따져서 무얼 하겠소?”
“아니오. 그게 아니오. 사실 나는.....”
무욕자가 말을 이으려 할 때 지척에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렸다. 불과 이삼십여 척 앞에서 아미파의 제자인 남이가 백련교 고수들에게 포위되어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합시다.”
요혜신니는 무욕자의 말을 중간에 끊고 남이를 도우러 급히 달려갔다. 무욕자는 그런 요혜신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게 아니외다. 사실 이번 싸움은 우리 청성이 자초한 싸움이외다....”
무욕자의 머릿속에 얼마 전 자신을 은밀히 찾아왔던 사형 천계심의 모습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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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 우리 청성은 오랜 전통에서 불구하고 구대 문파의 말석만 겨우 유지하며 다른 문파의 멸시를 받아왔네.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오랫동안 우리 사문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하고 고심해왔다네.”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그래도 사형께서 무림맹의 부맹주까지 되셨으니 이제 우리 청성 제자들도 제법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닐 만하다고 합니다. 허허허.”
“이 사람. 그릇이 그렇게 작아서야 쓰나. 모름지기 출사했으면 우두머리가 되어야지, 부(副)자가 들어간 자리에 만족해서야 되겠는가?”
“그거야 물론 사형께서 맹주가 되면 좋겠지만 맹주의 자리가 우리 청성에게까지 오겠습니까?”
“안 오면 오도록 해야지.”
천계심이 눈을 부릅뜨며 무욕자를 바라보았다.
“오도록 하다니, 어떻게 말입니까?”
“이번에 마교에서 천린상단 사천지부를 공격할 걸세. 당연히 천린상단은 무림맹에 도움을 요청할 것이고 말이야.”
천계심이 목소리를 낮추고 은밀히 얘기했다.
“아마도 이번 전투에는 맹주가 직접 나갈 것 같네. 그런데 만약 맹주가 전투 중에 마교 놈들의 손에 죽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천계심의 말에 무욕자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천계심을 바라보았다.
“그야 당연히 사형께서 맹주가 되시겠지요. 맹주의 자리가 비어 있을 때는 부맹주가 맹주직을 대행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내가 맹주에 오른 뒤에 맹주의 복수를 내세우며 마교와의 항전을 주장한다면 구대문파나 오대세가에는 감히 맹주 자리를 넘볼 생각을 못 할 걸세. 그렇게 되면 우리 청성의 세상이 되지 않겠는가?”
“그것 참 묘안이군요. 맹주의 복수라는 명분이 있으니 구대 문파와 오대 세가도 따르지 않고 못 배길 겁니다. 하지만 듣자 하니, 맹주의 신공이 당금 강호에 무적이라 소림신승인 무학대사(舞鶴大師)나 살아있는 신선으로 불리는 화산파 태상장로 독고양(獨孤陽)을 능가한다는데 이번 전투가 아무리 치열하다고 하나 전사할 리가 있겠습니까?”
“내가 무림맹에 몸을 담은 지 30여 년 동안 맹주가 직접 무공을 펼치는 모습을 제대로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아마 그 소문은 과장일 게야. 그리고 맹주가 마교의 손에 죽도록 만들어야겠지.”
천계심의 단호한 어조에 무욕자가 움찔 놀라며 반문했다.
“사형께 무슨 묘안이라도 있습니까?”
“걱정하지 말게나. 이번에 정마대전이 벌어지면 마교에서 반드시 맹주를 노릴 게야. 다만 우리는 마교가 맹주를 처치할 때 방해만 하지 않으면 되네.”
천계심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무욕자를 바라보았다.
“그 말씀은...?”
“맹주가 마교에게 당할 때 모른척하게나. 제자들에게도 잘 일러두어야 할 걸세. 이번에 다른 문파가 참전하지 않도록 내가 미리 선수를 치기는 했지만, 혹여 어떤 문파든지 이번 전투에 참전한다면 그놈들이 맹주를 구해서 이번 일을 망치지 않도록 청성파가 나서야 할 걸세.”
“사형의 말씀은 다른 문파에서 맹주를 구하려고 한다면 우리가 방해라도 하자는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마교 놈들을 앞에 두고 싸우지 않는다면 다른 문파에서 이상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러니 적당히 싸우는 시늉을 해야지. 그리고 마교 놈들은 우리 청성 제자들은 건드리지 않기로 이미 사전에 다 약조가 되어 있으니 걱정하지 말게나.”
무욕자는 사형 천계심이 야심이 큰지는 알았으나 이 정도로 대담할지는 몰랐다.
“흠....”
아무래도 사형의 말대로 하기가 꺼림칙 했던 무욕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제, 큰일은 사사로운 정을 돌아보지 않는 걸세. 잠깐 양심이 괴로운 것만 참는다면 우리 청성이 구대 문파의 선두에 설 수 있으니 지하에 계신 조사님과 선배 장문인들도 용서해 주실 것이야.”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꿰뚫어 보는 천계심의 말에 무욕자는 그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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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욕자는 사형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넋을 잃고 있는데 돌연 양옆에서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나더니 검 두 자루가 동시에 자신의 옆구리를 찔러 들어왔다.
무욕자는 그저 손 가는 대로 검을 휘둘러 적의 공격을 차단했다.
띠딩. 띠딩. 시간차를 두고 경쾌한 금속성이 두 번 울렸다. 바로 청성파가 자랑하는 칠십이파검법(七十二波劍法)이었다.
“흐흐흐, 어찌 그리 넋을 놓고 계시나?”
걸걸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무욕자가 쳐다보니 마교의 사대검왕 중의 한 명인 광풍검 신갈이었다. 신갈이 광풍대주 마첨과 함께 자신을 공격해 들어왔던 것이다.
비웃음을 띠고 있는 신갈의 얼굴을 보는 순간 무욕자의 수염이 부르르 떨렸다.
“네 이놈!”
무욕자의 입에서 노성이 터져 나오더니 눈부신 검광이 번쩍거렸다. 쾌검의 진수를 보여주는 칠십이파검법이 이번에는 제대로 무욕자의 손에서 시전되었다. 눈알이 핑핑 돌 정도로 쾌검을 구사하던 무욕자가 돌연 좌장을 번개같이 펼쳐냈다. 바로 청성파가 자랑하는 쇄비천수장(碎碑千手掌)이었다.
무욕자의 좌장에서 ‘펑!’하고 압축된 공기가 터지는 소리가 나더니 하나의 장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십 개의 장이 신갈의 요혈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장력에는 무욕자가 수십 년간 수련한 웅혼한 공력이 담겨 있어 신갈은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하고 신중히 이에 맞섰다.
청성파 장문인이 정신을 차리자 백련교의 장로와 대주 두 사람이 동시에 공격해 들어갔지만 팽팽한 접전을 이룰 뿐 우세를 잡지는 못했다.
“네 이놈! 네놈들이 우리의 등을 치다니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이냐? 강호인이라면 신의를 생명같이 여겨야 하거늘.”
무욕자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마다 울분이 담겨 있었다. 그 말에 신갈이 하늘을 향해 껄껄껄 웃었다.
“하하하. 신의라.... 애초에 우리와 거래를 한 것부터가 잘못이 아니겠느냐? 네놈들이 자중지란을 일으키는데 이 좋은 기회를 우리가 어찌 아니 활용할까? 우리의 목표는 애당초 강호일통임을 몰랐더냐? 으하하하하.”
광풍검 신갈의 말에 무욕자는 할 말이 없었다. 신갈의 말대로 애초에 마교 놈들과 손을 잡은 것부터가 잘못되었다. 사형의, 아니 자신의 무리한 욕심이 결국 이런 참담한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어쩌면 처음부터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몰랐다.
무욕자는 마음에 충격을 받으면서 광풍대주 마첨의 검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오른팔을 베이고 말았다.
“윽!”
그러자 어디선가 청성사로가 득달같이 달려왔다.
“장문인에게서 떨어져라, 이놈들아!”
청성사로는 원래 네 명이 동시에 펼치는 일월성신검(日月星辰劍)이 유명했으나 어쩐 일인지 지금은 합격진을 펼치지 못했다. 무욕자가 바라보니 청성사로 중 막내 신검자의 왼쪽 팔이 팔꿈치 부분에서 절단되어 선혈이 낭자했다. 신검자는 지혈도 제대로 못 해 계속 피를 흘리면서도 쉬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사제, 괜찮은가?”
놀라서 외치는 무욕자의 말에 신검자는 고통스러운 듯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억지 미소를 띠었다.
“참을 만합니다. 사형께서는 괜찮으십니까?”
무욕자는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청성 제일 고수들인 청성사로가 이 지경이니 다른 제자들은 어떨지 안 봐도 뻔했다. 오늘 이 전장에서 살아남을 청성 제자는 거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망적인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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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혜신니는 베어도 베어도 적들이 몰려오자 이제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무거운 선장은 진즉에 어디론가 던져버리고 허리에 차고 있던 계도로 적을 상대하고 있었지만, 얼마나 칼을 많이 부딪쳤는지 계도의 칼날이 모두 빠져 있었다. 피와 땀에 전 이마를 승포자락으로 쓱 닦았다. 어디선가 피비린내가 물씬 풍겼다.
나무아미타불. 오늘로써 이 늙은이의 목숨도 끝나려나 보구나. 이 업보를 모두 어찌할꼬.
돌연 뒤에서 세찬 파공음이 일더니 무시무시한 검기가 등 한가운데를 찔러왔다. 요혜신니는 반사적으로 몸을 빙그르르 돌리며 계도로 적의 검을 막았다.
“으하하하, 여기서 이렇게 보니 무척 반갑소이다. 사태!”
상대방의 얼굴을 확인한 요혜신니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네놈이 어찌 여기에...?”
“으하하하, 마교에서 무림맹과 한판 승부를 벌인다기에 사태가 나올 것 같아 열 일을 제쳐놓고 달려왔소이다. 역시나 내 예상대로 나오셨구먼.”
요혜신니의 앞에서 요란하게 웃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단비개 당두걸이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하더니 오늘이 딱 그 꼴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무림 제일방파인 개방의 장로였던 자가 어찌 마교 놈들에게 붙었단 말이더냐? 네놈도 애당초 명문정파의 제자가 아니었더냐?”
요혜신니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명문정파는 무슨 얼어 죽을 놈의 소리요? 진즉에 말을 바꿔 탔소이다. 산서 흑도오련(黑道五聯)의 귀문방주가 바로 나요. 한번 해보니 명문정파 장로 자리 따위는 생각도 나지 않더이다. 으하하하.”
당두걸이 돌연 주위에 대고 크게 소리쳤다.
“이놈들아, 인사드리거라. 저분이 바로 나를 팔 병신으로 만든 아미파 장문인 요혜신니이시니라. 우리 흑도오련이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보여드려라.”
“존.명.”
당두걸의 말에 순식간에 백 명은 족히 될 법한 장정들이 힘주어 대답하며 요혜신니 주위로 새까맣게 몰려들었다. 흑도방의 무리가 아니랄까 봐 하나같이 험상궂은 모습이었다.
문득 사자도 들개에게 물려 죽을 수 있다던 총군사 사마경의 말이 생각났다. 오늘 내가 들개들에게 물려 죽는 날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요혜신니가 날이 다 빠진 계도를 치켜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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