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76화 (76/201)

#   76 - 광세일소_한추영 - 14396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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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화. 사천대전(四川大戰) (4)

기하진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기하진은 대청이 아니라 정갈한 방의 침상에 누워 있었다. 약재를 다리는 듯, 어디선가 탕약 냄새가 흘러나왔다. 여인의 규방인 듯 침상에는 부드러운 휘장이 쳐 있었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는 기하진의 눈에서 다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학아....”

기하진이 속으로 지학의 이름을 되뇌었다. 천림원에서 무공을 배우던 시절, 지학, 백무결과 함께 연못가 정자에 드러누워 두런두런 이야기하던 때가 기억났다. 그때 지학은 신이 난 목소리로 자신에게 무림 3대 신공 이야기를 해주었었다. 지학의 훤칠한 얼굴과 백무결의 부드러운 미소가 아직도 선명하게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너무도 그리운 얼굴들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얼굴들이기도 했다.

문득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남이가 약사발을 들고 들어왔다.

“언제 깨셨어요?”

남이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기하진은 얼른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돌려 남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절박했던 전투의 양상이 남이의 모습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핏자국과 흙먼지에 찌든 옷, 수척한 모습, 휑한 얼굴. 그러고 보니 아미파 제자의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는데 그들이 모두 남이의 사저나 사매라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자신만 친우를 잃은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단주님, 식기 전에 얼른 이 탕약을 드십시오.”

남이가 기하진의 상체를 부축하여 일으킨 다음 약사발을 입에 대어 주었다.

기하진은 남이가 먹여 주는 대로 탕약을 마신 다음 남이를 바라보았다.

“많이 피곤해 보이는구나. 나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고 가서 쉬어라.”

“아닙니다. 단주님 부상이 너무 심해서 누군가가 계속 지켜보아야 합니다. 제가 좀 더 곁에 있겠습니다.”

기하진이 남이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소란 피우지 않을 테니 염려 말고 가서 쉬어라. 나를 아직도 단주라고 생각한다면 내 말을 들어.”

남이는 아까와는 확연히 다른 태도에 잠시 기하진의 눈을 응시하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쉬시고 필요한 게 있으면 소리쳐 부르세요.”

기하진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이가 나가고 곧 방안에 정적이 찾아왔다. 가만히 누워 있으니 풀벌레 소리만 처량하게 들려왔다.

기하진은 열린 창문 밖으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유독 별빛이 밝은 밤이었다.

탈명검 마립을 보자 부모의 원수를 갚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실력이 어떤지는 돌아보지도 않고 그저 분노에만 사로잡혀, 죽기 살기로 덤비면 원수를 갚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었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너무나 참혹했다. 자기 하나를 구하려고 뛰어들었던 소림사 승려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지학마저도....

이게 모두 자신의 무공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아직 부족함을 알면서도 무모하게 덤벼들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무공이 강했더라면 어쩌면 지학이 목숨을 잃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200명이 넘는 용봉단원들의 귀중한 목숨도 지켜 냈을지도 모른다. 귀면쌍살에게 백무결이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무공만 강했더라면!

무공이라.... 어찌하다 보니 천하제일 신공이라는 중양신공의 내공을 익혔다. 10여 년간 착실히 쌓아온 내력은 몸속에서 넘쳐 흐르는데 어떻게 운행을 시켜야 할지 몰라 그저 단전에 뭉쳐있기만 했다. 물길을 터서 논에 물을 대야 하는데 물길을 모르다 보니 저수지에만 계속 물을 가두는 꼴이었다.

그러다 보니 역설적이게도 목숨을 걸고 천림비고에 잠입해서 얻은 천마검도 내공이 부족하여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맹주의 제자가 되어 무림 맹주의 진산절기인 창궁무애검을 배웠지만 그것도 입문단계를 겨우 벗어났을 뿐, 다음 단계로 진입하지 못했다. 답답한 마음에 몇 번 맹주에게 가르침을 요청했지만, 그때마다 맹주는 다음 단계는 스스로 깨닫는 것이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실상을 모르는 사람들은 자신을 맹주의 제자라고 부러워하지만 그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맹주의 제자가 되기 전이나 되고 난 후나 체감적으로 느끼는 무공의 변화는 별로 없었다.

기하진은 한숨을 내뱉더니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자신의 무공이 한 단계 더 발전하려면 역시 관건은 중양신공이었다. 중양신공만 완성할 수 있다면 세상 그 어떤 무공도 부럽지 않을 것만 같았다.

기하진은 중양신공 소주천 부분을 조용히 읊기 시작했다. 몇천 번을 반복했던지 의식하지 않아도 소주천 부분은 머릿속에 훤히 떠올랐다.

“....이로써 소주천이 완성되었으니, 무릇 내공을 닦는 자는 한시도 쉬지 않고 지극한 정성으로 수련해야 한다. 향후 대주천으로 기경팔맥이 타통하고 삼화취정과 오기조원의 경지에 오르며, 마침내 우화등선의 경지에 이르는 것도 모두 소주천에서 비롯하는 것이니 수련하는 자는 절대 이를 경시해서는 안 된다. 소주천을 완성한 자는 이제 대주천의 준비가 되었도다....”

한참을 읊조리던 기하진이 대주천의 운기행공을 언급하는 부분에서 멈추었다. 자신의 무공이 한계에 도달한 이유는 대주천의 운기 행공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것만 알 수 있다면.... 이것만 알 수 있다면 무공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 텐데....

기하진은 다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왜 자신에게 절세신공인 중양신공을 익히게 했으면서 완성하지는 못하게 하는 걸까? 도대체 무슨 뜻이 있는 걸까? 아니, 뜻이 있기나 한 것일까? 또다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때 창문 너머로 청아한 음성이 들려왔다.

“백회혈로 들어오는 건기(乾氣)와 용천혈로 들어오는 곤기(坤氣)가 단전에서 만나 정기신(精氣神)으로 수련한 내공과 융화하니 건곤이기(乾坤二氣)와 삼태극(三太極)이 비로소 생성된다. 수련자는 이제야 비로소 어디에도 막힘이 없는 대자재(大自在)한 힘의 주인이 될 준비를 마쳤도다. 대자재한 힘을 얻으면 천하에 죽이지 못할 것이 없고 살리지 못할 것도 없으리라....”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말하는 내용은 놀랍게도 기하진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중양신공의 대주천 부분이었다. 맑고 낭랑한 소리는 여인의 음성이 분명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들으면 들을수록 여인의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결국, 참다못한 기하진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옆구리의 상처가 다시 쑤셨으나 그런 고통 따위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기하진이 옆구리를 부여잡고 창가로 다가가자 창문 너머 저쪽에 새하얀 치마를 나풀거리며 아름다운 여인이 서 있었다.

“예, 예린아!”

뜻밖에도 기하진이 그토록 찾던 무공심결을 읊은 사람은 다름 아닌 임예린이었던 것이다.

“네... 네가 어떻게 그걸...!”

기하진의 놀란 표정을 보면서 임예린이 천천히 다가왔다.

“오라버니가 외우다가 말기에 저도 아는 부분이라 뒷부분을 외워보았어요. 많이 다쳤다고 들었는데 몸은 좀 어떠세요?”

기하진은 임예린의 말에 흥분을 가눌 수 없었다. 어쩌면 중양신공 대주천의 실마리를 풀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떨려 말이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다.

“괜, 괜찮아. 그것보다 예린아, 방금 외운 부분. 그 부분을 네, 네가 어떻게 아는 거야?”

“지난번에 부맹주에게 납치되어 무림맹의 서고에 갇혔을 때, 서고 안에서 우연히 봤어요. 그러고 보니 그때 추명 오라버니도 이 책을 찾고 있었던 것 같아요. 중양일지라고....”

“.....!”

머릿속에서 벼락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기하진은 떨리는 마음을 간신히 진정하고 다시 임예린에게 물었다.

“방금 외웠던 그 부분, 그 부분을 다시 한번 천천히 외울 수 있겠어?”

기하진의 표정에서 심상치 않은 기색을 읽은 임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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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임예린은 그때 읽었던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줄줄 암송했다. 글의 앞뒤가 논리정연한 것이 어느 한 부분을 잊어먹거나 건너뛰지도 않은 듯했다. 기하진은 시험 삼아 임예린이 말하는 대로 기를 운용했더니 대번에 청량한 기운이 온몸에 퍼져나갔다.

기하진은 임예린이 외는 운기행로를 잘 기억했다가 그 자리에서 즉시 좌정했다.

“예린아, 네가 내 은인이로구나. 잠시 운기행공을 해야겠으니 조금만 기다려줘.”

기하진의 말에 임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하진은 좌정하자마자 곧바로 입정(入靜)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임예린이 불러준 대로 기운을 돌리자 돌연 백회혈과 용천혈이 찌릿하더니 웅혼한 두 기운이 몸 안으로 흘러들기 시작했다. 단전에 모인 건곤이기(乾坤二氣)는 태극의 모양을 이루며 소용돌이치더니 기하진이 입은 내상을 거짓말같이 말끔하게 치료한 다음 막힌 경혈을 뚫기 시작했다.

좌정하고 앉은 기하진의 얼굴이 몇 번이나 환하게 밝아졌다가 어두워졌다. 마치 기하진의 몸속에 커다란 등불이라도 있어 누군가 그 등을 껐다 켰다 하는 것만 같았다.

땀을 비 오듯 흘리다가 돌연 한기가 드는지 으스스 몸을 떨기도 했다. 그럴 때는 기이하게도 기하진의 몸에서 서릿발같이 차가운 기운이 뻗어 나오며 눈썹에 새하얀 서리가 앉기도 했다.

좌정한 지 벌써 4시진이 훌쩍 지났다. 캄캄한 밤이 지나고 해가 이미 중천에 떠올라 있었다. 그동안 남이를 비롯해서 몇 사람이 찾아왔지만 임예린은 기하진의 곁을 지키며 사람들이 기하진의 연공을 방해하지 못하게 막았다. 비록 무공이라고는 일 년간 일봉에게서 배운 것이 전부였지만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정도는 임예린도 잘 알고 있었다. 찾아온 사람들도 기하진이 입정에 든 모습을 보고는 조용히 발소리를 죽여 뒤돌아 나갔다.

또다시 4시진이 지났다. 임예린은 어느덧 꼬박 8시진 동안 한 번도 자리를 뜨지 않고 기하진을 지켜보고 있었다. 중천에 떴던 해가 어느새 다시 서산 위에 걸려 있었다.

환하게 빛나던 기하진의 얼굴이 제 혈색을 되찾더니 기하진이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눈에서는 은은한 신광이 갈무리된 채 흘러나왔다.

“하진 오라버니, 괜찮아요?”

기하진의 눈에 걱정스러워하는 임예린의 모습이 들어왔다. 기하진은 임예린에게 빙그레 미소를 짓더니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자세 그대로 공중으로 2척 정도 떠올랐다. 그리고는 얼음판 위를 미끄러지듯 스르르 임예린 앞으로 다가왔다.

그 모습에 임예린은 깜짝 놀랐다.

“오...오라버니!”

“그토록 바라던 대주천을 완성했어. 이게 모두 네 덕분이야.”

기하진은 임예린을 끌어당겨 품에 안더니 그대로 발끝으로 땅을 찍어 문밖으로 나섰다. 도약하는 기세나 높이가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 상태라면 하늘을 나는 새도 부럽지 않을 것만 같았다.

툭, 툭 지면을 두어 번 차기가 무섭게 기하진은 별채를 벗어나 무림맹 군사들이 임시막사로 쓰는 사천지부 안가에 도착했다. 하지만 사람들로 가득했던 대청 바닥에는 부상자만 누워있을 뿐 다른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임예린이 안가의 대청에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고 일봉이 대청으로 달려왔다.

“온종일 식사도 안 하시고 어디에 계셨습니까?”

일봉은 임예린이 밤새 기하진을 간호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물었다. 안그래야지 하면서도 어느새 말투에 힘이 들어갔다. 밤새 같이 있었던 것도 모자라서 오늘도 하루 종일 같이 있었다. 아무리 환자를 간호한다고 하지만 호위무사인 자신에게는 아무런 언질조차 없었다.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건만.

자연히 기하진을 바라보는 일봉의 눈빛이 곱지 않았다.

“하진 오라버니의 연공을 도왔어. 중요한 단계라 미처 일봉에게 말할 시간이 없었어. 걱정시켜서 미안해.”

임예린이 일봉에게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가슴속은 쓰라리더라도 저런 모습을 보면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가 없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주십시오. 아가씨의 안전은 모두 제 책임이니까요.”

“그렇게 할게.”

일봉의 기분을 짐작한 임예린이 다시 한번 미안한 듯 웃었다.

“다들 어디 갔습니까?”

기하진이 일봉에게 물었다. 일봉은 감정이 실린 눈으로 기하진을 바라보며 딱딱하게 대답했다.

“오늘 아침 일찍 마교 놈들이 다시 공격해와서 모두 막으러 갔습니다.”

“어딘지 아시오?”

“장원의 북쪽, 민강 상류 지역입니다.”

기하진은 일봉의 말을 듣자 고맙다는 말도 없이 곧장 무서운 기세로 몸을 솟구쳤다.

일봉은 불쾌하여 한마디 하려다가 기하진의 경공신법을 보고 그만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불과 몇 달 만에 본 기하진의 무공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해 있었다.

일봉과 임예린을 뒤로 한 채 몇 걸음 만에 민강 상류 지역에 도달한 기하진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그대로 다시 발걸음을 내디뎠다.

쏴아, 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허공으로 내뻗은 기하진의 발이 소금쟁이처럼 수면 위를 두어 번 걷어차는가 싶더니 어느새 10여 장이 넘는 너비의 강을 가뿐히 넘어섰다.

강을 건너고서야 경공으로 강을 건넌 사실을 알아차린 기하진이 터져 나오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강호에 전해진다는 전설적인 경공, 수상표(水上飄)가 어느새 자신의 발밑에서 펼쳐진 것이다.

강을 건너고 보니 100여 장 앞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무림맹의 군사들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형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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