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 - 광세일소_한추영 - 1436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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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4화. 사천대전(四川大戰) (3)
이마에서 벌건 땀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입에서는 단내가 달 지경이었다. 하지만 기하진의 눈빛만큼은 여전히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타앗!”
기하진의 입에서 다시 기합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기하진의 검이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며 마립을 공격해 들어갔다. 스승으로 모신 맹주 남궁진악의 절기인 창궁무애검법이었다. 마립은 기하진이 창궁무애검을 펼치자 의외인 듯 신중하게 대응했으나 검법이 아직 극의에 닿지 못하자 코웃음을 쳤다.
“맹주의 제자라는 얘기를 들었건만 무공은 수박 겉핥기로만 배웠나 보군. 아니면 가르치는 스승이 의욕이 없던가.... 이 따위 무공으로는 내 검을 받을 자격이 없다.”
마립의 검이 돌연 부르르 떨리더니 커다란 뱀이 몸을 흔들며 돌진하듯 기하진의 몸을 찔러들어왔다. 검 끝이 뱀 혓바닥처럼 흔들리는 통에 도대체 어디를 공격해 들어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검 끝을 노려보던 기하진은 눈앞이 어지러워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기하진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바로 그 순간, 마립의 검이 아가리를 벌린 독사처럼 기하진의 아랫배를 질풍같이 찔러 들어왔다. 기하진은 재빨리 검을 내리치며 막았으나 마립의 검은 빙글 하고 돌면서 기하진의 옆구리에 깊은 검상을 남겼다.
“으윽!”
입에서 절로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기하진은 피가 쏟아지는 옆구리를 부여잡고 마립을 노려보았다. 마립은 그런 기하진을 내려다보며 껄껄껄 웃었다.
“맹주의 제자라, 빛 좋은 개살구로군. 크하하하하.”
웃음과 동시에 마립의 검이 다시 기하진의 심장을 노렸다. 기하진이 힘겹게 검을 휘둘러 마립의 검을 막아내는 순간, 마립의 좌장이 번개같이 기하진의 단전을 치고 지나갔다.
“허억!”
기하진은 견디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말았다. 단전이 용광로처럼 끓어 오르며 극심한 통증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마치 온몸이 뜨거운 용암 속에 빠진 것만 같았다.
"헉, 헉, 헉"
기하진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다시 거친 숨을 내뱉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단주님이 위험하다. 단주님을 보호해라!”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간신히 몸을 가누고 있는 기하진의 귀속으로 몽롱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적군들이 기하진과 마립을 둥그렇게 에워싸고 있어 용봉단원들이 기하진을 돕고 싶어도 기하진 옆으로 접근할 수가 없었다.
기하진은 가물가물해지는 정신을 억지로 차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눈이 자꾸 감기면서 마립의 모습이 중첩되며 어슴푸레하게 보였다.
“으흐흐흐. 이제 네 아비 곁으로 보내주마. 잘 가거라.”
마립이 웃자 얼굴에 난 검상이 꿈틀거렸다. 마치 커다란 뱀 한 마리가 얼굴을 구불거리며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기하진은 자신의 목을 향해 떨어지는 마립의 검을 바라보면 이대로 끝이로구나 하고 생각했다.
“기하진, 정신 차려!”
돌연 어디에선가 무척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칼 한 자루가 거센 파공음과 함께 빙글빙글 돌며 날아오더니 마립의 검을 쳐냈다.
“어떤 새끼냐!”
공격이 방해를 받자 마립의 입에서 험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검을 던진 사람은 마립의 물음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쳤다.
“항마진(降魔陣)을 펼쳐라!”
청아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기하진과 마립을 에워싸고 있던 백련교 무사들의 대열 한쪽이 무너지더니 수십 명의 스님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회색 승복을 입은 스님들은 기하진을 등 뒤에 놓고 둥그렇게 에워싸 보호하며 일제히 제미곤을 쳐들었다가 바닥을 내리찍었다.
쿵! 지축을 흔드는 소리가 제미곤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넓게 퍼져나갔다.
기하진은 그 소리에 가까스로 눈을 떠서 자신의 앞에 선 훤칠한 청년 스님을 바라보았다. 바로 지학이었다.
“지학아!”
지학의 입가에 미소가 살짝 번진다 싶더니 곧장 손에 든 제미곤을 휘두르며 마립을 공격해 들어갔다.
“오늘 살계를 여니 마왕의 잔당들을 일제히 토벌하라!”
지학의 명에 따라 수십 명의 소림사 승려들이 일제히 불호를 외며 제미곤을 쳐들고 상중하로 마립을 공격해 들어갔다. 수십 개의 제미곤이 가운데 있는 마립을 겨냥해 일제히 공격해 들어가자 거대한 법륜(法輪)이 굴러가는 것만 같았다.
“아미타불. 부처님은 자비로우시도다.”
수십 명이 외는 염불 소리가 장엄하게 전장에 울려 퍼졌다.
기하진은 지학의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싶었지만 자꾸만 감기는 눈꺼풀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지학이 와서 다행이야.
기하진은 결국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정신을 잃는 순간에도 귓속을 파고드는 염불 소리에 마음이 편안해지는 듯했다.
****
꿈을 꾸었다.
지학이 오랜만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기하진에게 손을 흔들었다. 기하진은 오랜만에 만난 지학과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허겁지겁 지학을 쫓아갔지만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었다.
“지, 지학아, 기다려!”
기하진이 지학을 부르다가 제소리에 놀라 잠이 깨었다. 나무로 된 천장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지붕을 받친 거대한 대들보 뒤로 비스듬한 빗천장이 보였다.
기하진이 눈을 껌벅였다. 아직도 비몽사몽 간인데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하진은 정신을 차리려고 안간힘을 쓰며 몸을 뒤척였다.
“단주님, 아직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몸을 뒤척이려는 기하진을 누군가 붙잡았다. 기하진이 고개를 돌리니 자신을 붙잡은 사람은 다름 아닌 남이였다.
“여, 여기가 어디요?”
기하진이 아직도 멍한 정신을 차리며 남이에게 물었다.
“천린상단 사천지부의 안가(安家)입니다.”
말을 하는 남이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그러고 보니 눈이 발간 것이 아직도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 통곡 소리가 들려와서 기분이 묘했다. 누운 채 눈길을 돌려 보니 사람들이 대청마루에 삼삼오오 모여있었다.
기하진이 막 입을 열어 남이에게 말을 걸려는데 분노에 가득 찬 요혜신니의 목소리가 대청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청성파가 어찌 이럴 수가 있소? 말해보시오,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이오?”
요혜신니의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일백 명의 아미 제자 중 절반이 넘는 제자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살아남은 제자들도 몸이 성한 제자가 한 명도 없습니다. 말씀해 보세요. 아미 제자들이 다 죽어 나가는 동안 청성은 뭘 했는지 말씀해 보세요!”
요혜신니의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요혜신니의 질문에 청성파 장문인 무욕자가 쩔쩔매는 목소리가 뒤미처 들렸다.
“그것이.... 그것은.....”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하는 무욕자 대신 부맹주 천계심이 말을 이었다.
“제자들을 잃은 사태의 심정은 이해가 되지만 싸우다가 죽거나 다치는 것은 전쟁 중에 흔히 일어나는 일인데 어찌 아미의 제자가 죽은 책임을 청성에게 묻는 것이오?”
그러자 연이어 요혜신니의 노성이 터져 나왔다.
“청성이 아미의 후방을 제대로 지원만 해주었다면 이렇게 참혹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외다! 100명의 아미 제자들이 싸우다가 죽어 나자빠지는 동안 도대체 500명도 넘는 청성의 제자들은 무엇을 했단 말이오!”
대청 안에서 나는 흐느낌은 알고 보니 아미 제자들의 울음소리였다.
무욕자가 말을 더듬거리며 답을 못하자 천계심이 다시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청성의 제자들도 마교를 상대하고 있지 않았소이까? 어떻게 그렇게 청성파를 모욕하는 언사를 하시는 게요? 설마하니 청성파 제자들이 팔짱 끼고 아미파 제자들의 죽음을 수수방관이라도 했다는 거요?”
부맹주 천계심의 언성도 올라갔다.
“팔짱을 끼고 구경만 하고 있었던 게 아니면 똑같이 싸웠는데 청성파 제자들은 어찌 다친 사람 하나 없이 죄다 멀쩡하단 말이오!”
요혜신니가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자리에 누워 듣고 있던 기하진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마교와 똑같이 싸웠는데 청성파 제자들은 다친 사람이 없이 멀쩡하다?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설마하니 마교 놈들이 청성파 제자는 공격하지 않은 걸까? 왜? 어째서?
“그거야 우리 청성파 제자들의 무공이 아미파 제자들보다 높으니 그런 것 아니겠소? 강호에서는 무공 수위가 곧 목숨과 직결되는 법. 사태께서는 그 연세가 되도록 어찌 아직도 그 간단한 이치를 모른단 말이오?”
천계심의 말에 요혜신니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선장을 들어 대청마루를 ‘쾅!’ 하고 내리쳤다. 대번에 대청이 뚫리고 그 진동으로 기둥과 서까래가 흔들려 먼지가 우수수 떨어졌다.
“뭣이라? 그렇게 뛰어난 청성파 무공, 어디 구경이나 한번 해봅시다.”
요혜신니가 지난번에 끝내지 못한 승부를 다시 내려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단순히 기선제압용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하는 진검 승부가 될 것이다.
“어허, 아랫사람들이 지켜봅니다. 마교 놈들이 언제 다시 쳐들어올지 모르는데 문파의 어른이라 하는 분들이 어린애들처럼 이렇게 싸워서야 되겠습니까?”
보다 못한 사마경이 말리고 나섰다. 그 말에 한참 동안 부맹주를 노려보던 요혜신니가 선장을 요란하게 내던지더니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미파 제자들의 희생이 크긴 했지만 그 희생으로 오늘 마교 놈들을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정파 무림인 모두 아미파의 크나큰 희생에 감동했을 것입니다.”
무욕자가 요혜신니를 달래려는 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마교놈들이 이대로 물러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내일 마교 놈들이 다시 쳐들어온다면 그때는 우리 청성파가 선두에 서겠습니다.”
무욕자의 말에 천계심이 거드름을 피며 거들었다.
“그래, 그게 좋겠소이다, 장문인. 우리 청성이 무림의 본을 보여야 하지 않겠소? 차후에 벌어질 전투에서는 청성이 선봉을 맡아 주시오.”
기하진은 요혜신니와 무욕자의 대화를 듣다가 옆에서 자신의 상처를 돌봐주는 남이에게 물었다.
“남이 조장, 우리 용봉단은 얼마나 피해를 입었지?”
기하진의 질문에 남이가 고개를 돌리며 얼른 답을 하지 못했다.
“다들 일당백이지만 우리가 인원이 제일 적어서 힘들었을 텐데 어떻게 되었어? 응? 큰 피해는 없어야 할 텐데....”
“용...용봉단원 300명 중 살아남은 자가 100명도 안 됩니다.”
남이의 말에 기하진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어째서 그렇게 많이 죽었다는 거야?”
“우리를 공격했던 마교 놈들은 1,000명도 넘었습니다. 우리가 벤 적의 수로만 본다면 아마도 우리가 훨씬 더 많이 베었을 거예요. 다만 우리 단원들의 수가 적에 비해 너무 적어서.... 그래서 피해가 큰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남이가 목이 메는지 말끝을 흐렸다. 남이의 말에 기하진은 핑글, 머리가 어지러워 몸이 휘청거렸다. 그러자 남이가 놀라서 얼른 부축해주었다.
남이는 기하진의 눈치를 가만히 보더니 깊은 한숨을 내뱉고는 조용히 덧붙였다.
“그리고... 이번 전투에 참가했던 소림사 승려들은 전원 전사했습니다.....”
“뭐라고?”
마치 커다란 망치가 기하진의 뒷통수를 쾅, 하고 내려친 것 같이 눈앞이 순간 깜깜해졌다. 갑자기 꿈속에서 봤던 지학의 얼굴이 떠오르며 불안한 느낌이 온몸을 엄습해왔다. 설마 지학은 아니겠지. 지학은 후기지수들 중에 무공이 제일 고강한데 설마 지학은 아니겠지.....
기하진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남이에게 물었다.
“그, 그러면 지학은? 지학은 어떻게 되었어?”
“지학 스님도 역시 전사... 하셨습니다.”
울음을 참던 남이가 겨우 들릴 만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기하진의 귀에는 천둥이 내려치는 것만 같았다. 기하진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남이를 쳐다보면서 다시 물었다.
“뭐라고? 다시 얘기해봐. 방금 뭐라고 했어?”
기하진의 모습에 남이가 결국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자신의 가슴에 쓰러져 오열하는 남이를 바라보며 기하진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 지학이... 그럴 리가 없어. 인사도.... 제대로 못 했는데.... 그럴 리가 없어!”
기하진은 울음을 터뜨리는 남이를 밀어내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일어섰다. 봉합해 놓았던 옆구리 상처가 다시 터지며 붕대가 벌겋게 피로 물들었다. 상처가 터져 쓰라릴 만도 하건만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기하진의 눈빛은 넋이 나가 있었다.
“지, 지학아. 지학아!”
그제야 울음이 터져 나왔다. 기하진이 참지 못하고 울부짖으면서 지학의 이름을 외쳤다. 대청에 있던 모든 사람이 기하진을 쳐다보았지만 기하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가슴이 너무 답답했다. 나를 구하러 오지 않았다면, 만약 그랬다면 죽지 않았을 텐데. 내가 죽었어야 했는데 네가 대신 죽다니, 이럴 수는 없다. 이럴 수는 없어.
“지학아!”
억장이 끊어지는 것만 같았다. 가슴이 아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기하진이 악을 쓰듯 지학의 이름을 연거푸 불렀다. 피가 몰려 얼굴이 시뻘게지고 온몸에서 갑자기 열이 펄펄 나는 것만 같았다.
다시 정신이 가물거렸다. 대청 바닥이 허공으로 붕 올라왔다. 휘청거리며 쓰러지는 자신을 붙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다급하게 부르는 것도 같았다. 정신을 잃는 순간에도 기하진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지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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