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 - 광세일소_한추영 - 1435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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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화. 사천대전(四川大戰) (2)
빗줄기처럼 떨어져 내리는 수백 발의 화살을 뚫고 수십 명의 무사들이 말을 타고 달려왔다. 하나같이 왼팔에는 금속으로 된 짧은 방패를 차고 있었는데 어두운 밤인데도 방패에서 빛이 번쩍였다. 백련교의 무사들은 방패와 검을 휘두르며 쏟아지는 화살을 일일이 쳐내고 있었다.
달빛을 받아 번쩍이는 방패는 수십 개의 조각난 달이 초원에 뿌려진 듯했다.
“지독한 놈들. 어떻게 저 화살을 뚫고 달려올 생각을 했지?”
천옥랑이 앞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빨리 공격 명령을 내려. 저들이 여기까지 닿기 전에 나가서 싸워야 해.”
“하지만 나가서 맞서 싸우려면 화살 공격을 중지해야 하는데, 그것보다는 차라리 먼 거리에서 계속 화살을 쏘는 것이 좀 더 안전하지 않을까?”
천옥랑의 말에 기하진은 기가 찼다.
“저놈들이 이곳까지 달려오는 것은 시간문제야. 곧 들이닥친다고. 그전에 맞서 싸워야 한다니까.”
하지만 천옥랑은 손톱을 물어뜯으며 전방만 주시했다. 그러는 사이 백련교 무사들은 이미 삼십여 장 앞으로 치달았다. 보다 못한 기하진이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내가 먼저 갈 테니 다들 따라와.”
기하진의 목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단주로서의 직책을 잃은 그였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기하진의 한마디에 용봉단 전원이 그 뒤를 따랐다.
천옥랑도 별수 없이 단원 뒤에서 따라가며 혼자 중얼거렸다.
“젠장 할. 지휘관은 나라고. 나!”
기하진이 달려나가자 철궁부대의 화살이 멈췄다. 그러자 마교 놈들이 즉시 새까맣게 몰려오기 시작했다.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기하진의 검이 불을 뿜었다. 검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적들이 분수처럼 피를 뿜었다.
“저놈이 용봉단주다. 저놈을 잡아라!”
마교측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와!’하는 함성이 일어나며 병사들이 기하진을 공격해 들어갔다.
“앗! 조심하세요.”
남이가 그 모습을 보고 기하진을 도우러 달려가는데 돌연 남이의 어깨 위로 철추가 달린 채찍이 어깨뼈를 쪼갤 듯이 내리꽂혔다.
“너는 나랑 놀자.”
남이는 채찍에 실린 기운을 무시할 수가 없어 오른쪽으로 빙그르르 돌며 채찍의 공격을 피하고는 손을 뻗어 채찍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돌아보니 채찍의 주인은 다름 아닌 여인이었다. 칠흑 같은 검은 머리에 호랑이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얼굴에 짙은 화장을 해 인상이 아주 강인해 보이는 여자였다.
“여자끼리 한판 붙는 게 어때?”
여인이 입술을 날름 내밀더니 피처럼 붉은 선홍색 입술을 한번 훑었다. 그러더니 남이를 요염하게 노려보며 팔을 휘둘러 채찍을 떨쳐냈다.
짝! 가죽이 서로 맞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남이는 지독한 통증에 그만 손에 쥔 채찍을 놓치고 말았다. 어느새 손바닥에는 벌건 채찍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
“너는 누구냐?”
“이거 실망이군, 아미파 남이 소저. 나는 당신을 아는데 당신은 나를 모르다니.”
여인이 다시 채찍을 후려치자 채찍이 독오른 독사처럼 머리를 곧추세우더니 남이를 향해 질풍같이 다가왔다. 채찍 끝에 매달린 철추에 정통으로 맞는다면 뼈가 으스러질 것만 같았다.
“잘 기억해둬. 나는 탈명대의 부대주 백기(白器)라 한다.”
백기. 남이도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마교의 암호랑이라 불릴 만큼 성격이 포악한 여자였다.
“마교의 암호랑이로군.”
남이가 검을 사선으로 휘둘러 철추를 내려치는가 싶더니 경공을 전개해 순식간에 백기에게 바싹 다가갔다. 채찍은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불리하므로 근접공격을 해야 했다.
“잘됐군. 우리 아미파가 호랑이를 때려잡는 데는 전문이거든. 오늘 임자 잘 만났다.”
남이가 아미복호권(蛾眉伏虎拳)을 검으로 변환하여 펼쳐냈다. 검이 핑그르르 도는가 싶더니 채찍을 타고 그대로 백기의 손목을 베려 들었다. 뜻밖의 공격에 기세등등하던 백기의 안색이 싹 변하며 급히 채찍을 놓고는 곧바로 호조수(虎爪手)를 펼쳐냈다. 호조수는 어마어마한 힘을 바탕으로 상대방의 몸을 꿰뚫는 수법으로 손가락과 손목의 힘이 약한 여인들은 보통 펼치지 않는 수법이었다.
남이는 백기가 과감하게 무기를 버리고 맨손으로 자신을 공격해오자 간담이 서늘해졌다. 상대방은 공격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이것은 무공 수위와는 또 다른 문제로 무수한 실전을 거듭해 익힌 본능과도 같은 것이었다.
남이가 놀라는 사이, 백기의 손톱은 이미 남이의 왼쪽 가슴팍에 닿고 있었다. 남이도 무기를 버리고 맨손으로 맞서지 않는다면 절대 막아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사삭. 검을 버리고 가슴을 방어하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남이는 오히려 자신의 가슴을 백기의 손끝에 갖다 대며 검을 가위자 모양으로 휘둘렀다.
“으아악!”
“윽!”
백기의 입에서 고통에 찬 절규가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남이의 입에서도 짧은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백기의 호조수에 당한 남이의 가슴은 어느새 선혈이 낭자했다. 하지만 호조수를 휘두르던 백기의 팔은 어깨 부위에서 절단되어 있었다. 절단된 어깨에서 피가 꾸역꾸역 흘러나왔다.
남이는 오른손으로 아직 자신의 가슴에 꽂힌 백기의 팔을 뽑아낸 뒤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백기가 남이를 잡아먹을 듯이 쳐다보며 이를 갈았다.
“보았느냐? 호랑이는 결코 호랑이 사냥꾼을 당할 수가 없는 법이다.”
남이의 검이 울부짖는 백기의 허리를 다시 한번 스치고 지나갔다. 왼쪽 손으로 피가 쏟아지는 오른쪽 어깨를 부여잡고 있던 백기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자신의 허리를 한번 쳐다보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백기가 쓰러지자마자 남이는 기하진 쪽으로 다시 몸을 날렸다. 기하진은 양 사방에서 몰려드는 마교 놈들을 상대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기하진의 주위에는 적의 시체가 쌓였다. 그 시체를 밟고 다시 적들이 기하진에게 검을 뿌렸다.
기하진이 검을 들어 올리더니 자신에게 도약하는 적을 향해 세차게 내리쳤다. 적의 가슴이 대번에 사선으로 갈라지며 기하진의 얼굴에 핏방울이 튀었다.
기하진은 눈 속에 핏방울이 튀어도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적을 노려보았다.
남이는 기하진을 도와 기하진의 배후에서 적들을 막았다. 기하진과 남이가 손을 휘두를 때마다 적들이 나가떨어지자 백련교 무사들은 검을 쥐고 섣불리 공격하지 못하고 기하진과 남이를 빙 둘러싼 채 잠시 대치 상태를 이루었다.
“물러나라.”
백련교 병사들의 뒤로 낮고 굵은 음성이 들리더니 키가 훌쩍 큰 거한이 말을 타고 다가왔다. 그러자 백련교 병사들은 마치 물결이 갈라지듯 양옆으로 쫙 갈라졌다.
“용봉단주라 하더니 무공이 제법 쓸 만하구나.”
어느새 구름을 뚫고 나온 달빛이 그자의 얼굴을 어렴풋이 보여주었다.
그자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기하진은 머릿속에 벼락이 내려치는 듯했다. 얼굴을 가로지르는 기다란 칼자국. 한시라도 잊어본 적이 없던 부모님의 원수였다.
“너....너는...!”
기하진이 손가락으로 사내를 가리키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저자가 바로 탈명검 마립입니다.”
남이가 기하진 옆에서 눈앞의 사내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탈명검 마립! 네놈이었구나. 내가 지난 10여 년간 찾아 헤맸던 놈이 바로 너였구나. 칼을 맞고 쓰러지시던 부모님의 모습이 마립의 얼굴 위로 떠올랐다.
기하진의 눈에 분노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두 눈에서 뜨거운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벽력검 기 대협을 기억하느냐?”
악다문 이빨 사이로 어렵게 부친의 별호를 내뱉는 기하진의 턱이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 기하진의 상태에 남이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기하진을 지켜보았다.
“벽력검 기 대협? 벽력검이라....”
마립은 얼른 기억이 나지 않는지 한참을 생각하는 눈치였다.
“오호라. 신교에 맞서다가 십여 년 전에 멸문당한 섬서성의 기일광을 말하나 보군.”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앗은 사람을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모습에 기하진은 더욱 분노가 일었다.
기하진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자 마립이 조롱하듯 말했다.
“그 눈빛으로 내 몸에 구멍이라도 내려는 게냐? 네 녀석은 도대체 기일광과 무슨 관계냐?”
“내가 바로 벽력검 기 대협의 아들이다. 오늘 너를 죽여 부모님의 원수를 갚겠다!”
기하진은 말을 마치자마자 천지가 떠나갈 듯 고함을 치며 몸을 솟구쳐 마립에게 달려들었다. 기하진의 손에 잡힌 검이 수평으로 공간을 자르며 지나갔다.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검을 잡은 손이 새하얗게 변해 있었고, 검 주위의 공기가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렸다.
천마검법의 절초 등평도룡(登萍屠龍)이었다.
마립은 말 위에 있다가 위험하다가 생각하여 즉시 말을 버리고 공중으로 10여 척이 튀어 올랐다. 바로 그 순간 기하진의 검이 원을 그리며 지나가자 육중한 말의 머리가 그대로 베어져 땅바닥에 떨어졌다. 머리 잃은 말은 고통에 차서 앞발을 들며 크게 한 번 부르짖더니 그대로 옆으로 털썩 쓰러졌다.
“신력이 굉장하구나!”
마립이 공중에 뜬 상태로 공중제비를 넘어 뒤로 착지했다.
“기일광의 식솔들은 그날 모조리 죽였는데 네 녀석이 어떻게 살아났지? 하지만 상관없다. 좀 늦긴 했지만 오늘이라도 정리하면 되니 말이야. 아니, 기일광의 자식이라고 밝혀줘서 오히려 고맙군, 그래. 으하하하하.”
마립의 웃음소리가 밤하늘을 울렸다. 기하진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얍!”
기하진이 다시 기합을 내뱉으면서 검광을 뿌렸다. 마립은 마교 사대검왕 중의 우두머리. 자신의 무공으로는 아직 벅찬 상대였다. 하지만 부모의 원수를 눈앞에 두고 어찌 복수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기하진의 검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뜨거운 열기가 후끈거렸다. 천마신공은 극강의 열양신공(熱陽神功)이라 단계가 올라갈수록 내뿜는 기운이 뜨거워졌다. 4단계가 넘어서면 열기가 화기(火氣)로 변하지만 아직 기하진은 대주천을 이루지 못하여 그 단계는 아니었다.
하지만 마립은 처음 느껴보는 신공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것은 무슨 무공이냐? 이토록 강렬한 열기를 내뿜다니. 가만, 그러고 보니 이런 무공이 있다는 것을 내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구나.”
마립은 기하진의 공격을 막으면서 계속 말했다.
“오호라, 그러고 보니 이 검법은 홍진노괴의 천마검법이 아니냐? 백 년 전에 실전되었다고 들었거늘.”
“잘도 아는구나. 그렇다면 천마검법이 얼마나 무서운지도 알겠지?”
기하진이 검을 사정없이 몰아쳐 마립을 압박했지만 마립은 여유만만하게 받아냈다.
“잘 알고 있지. 극성에 다다른 천마검법은 받아낼 사람이 없다고 말이야. 하지만 내가 보기에 아직 네놈이 그 단계까지는 아닌 듯하구나. 으하하하.”
마립의 비웃음 소리에 기하진이 사력을 다해 검을 공중에서 아래로 내리꽂았다.
쾅! 기하진의 검과 마립의 검이 서로 맞부딪치자 귀를 찢는 날카로운 소리가 공명을 일으키며 전장으로 퍼져나갔다.
기하진은 자신의 검이 마립의 검과 부딪치자 팔이 시큰하게 떨려와 검을 놓칠 뻔했다. 자신의 공력이 높다고 하나 아직은 탈명검 마립에게 역부족이었다. 기하진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마립을 노려보았다.
그때 다급하게 외치는 천옥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적들이 후방으로 몰아친다. 적군이 강을 건너지 못하게 막아라!”
천옥랑의 목소리 사이로 용봉단원들의 비명 소리가 끝없이 터져 나왔다.
“탈명대주 왕기를 막아라! 검진을 형성해라.”
천옥랑의 목소리가 절박했다. 용봉단 제일의 고수인 기하진이 탈명검 마립과 맞붙는 사이, 탈명대의 대주 추혼검 왕기가 용봉단을 무차별적으로 살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아무리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의 후기지수들로 이루어진 용봉단이라고 하더라도 왕기의 무공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적은 죽여도 죽여도 계속 새까맣게 몰려왔다.
“남이 조장, 검진을 이끌어라. 어서!”
천옥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이는 기하진을 돕다가 천옥랑의 명령을 받자 잠시 멈칫하며 기하진을 바라보았다. 기하진은 피투성이가 된 채 거친 숨을 내쉬며 마립을 노려보고 있었다.
“빨리 가서 검진을 도와.”
기하진이 남이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남이는 잠시 망설이나 싶더니 곧 기하진에게 짧게 고개를 숙여 목례를 하고는 그 자리를 벗어났다.
“조심하세요.”
왕기의 검에 단원들이 계속 쓰러지자 검진을 이끌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남이가 움직이자마자 천옥랑의 목소리가 다시 뒤를 이었다.
“우진(宇眞) 사숙, 청성 제자들을 이끌어 남이 조장을 배후에서 도와주세요. 어서요!”
숨을 가다듬으며 마립을 노려보는 기하진의 귀에 천옥랑의 고함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우진 사숙, 청성 제자들이 왜 움직이지 않습니까? 남이 조장의 배후를 지원하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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