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 - 광세일소_한추영 - 1433254
#
제71화. 전쟁의 서막 (7)
요혜신니는 일봉이 가져온 서한을 묵묵히 읽고 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겠네. 임 장주가 어려움에 처했다는데 내 모른 척할 수 없지. 그렇지 않아도 무림맹에서 공문이 왔었네. 나는 사실 무림맹의 맹주나 부맹주가 하는 짓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이번 전투에서 빠질까 했는데 임 소저가 이토록 간절히 부탁하니 그럴 순 없겠군. 임 소저에게 가서 이르게. 이 늙은이가 직접 제자들을 이끌고 가겠다고 말이야.”
요혜신니의 대답에 일봉은 너무 기뻐 땅바닥에 넙죽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사태님.”
일봉에게는 무림지존이 요혜신니였다. 요혜신니만 함께 해준다면 마교 놈들이 아무리 발악해도 지지 않을 것 같았다.
요혜신니가 무릎을 꿇은 일봉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일어나게나. 일전에 자네를 봤을 때 인연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또 보게 되는구먼. 그래, 자네 이름이 무엇이라고?”
“일봉이라고 합니다.”
“일봉, 자네에게 이번에 아미파가 큰 은혜를 입었네. 내 그 은혜를 잊지 않겠네.”
“은혜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요혜신니의 말에 일봉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요혜신니는 흡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방장실 밖에서 다른 비구니들과 함께 이 모습을 지켜보던 남우도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
아미파 여승들은 생명의 은인인 일봉을 극진히 대접했다. 비록 절간이라 고기는 없었으나 아미산에서 나는 버섯과 채소로 만든 정갈한 음식을 넘치도록 대접했다. 만나는 여승마다 미소를 짓고 합장을 해오는 통에 일봉은 방문 밖으로 나가는 것이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임가장에서 늘 긴장하고 초조하게 지낼 때와는 달리 이곳 아미산에서는 마음이 편했다. 아무도 자신을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정성스럽게 대우했다. 마음 같아서는 아미파에 눌러앉고 싶다는 생각도 잠깐 들었으나 어느새 머릿속에 임예린의 근심 어린 모습이 떠올랐다.
아가씨! 잠시라도 임예린을 잊은 것이 미안하고 죄송스러웠다. 일봉은 마음을 다잡으려는 듯 고개를 세차게 좌우로 흔들고 침상에 좌정했다. 운기행공이라도 해야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잠시 앉아 있던 일봉은 운기행공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시 일어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시원한 밤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음이 어지러운 이유는 사실 편안한 아미파의 분위기 때문도, 임예린에게 미안하기 때문인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여기에 요혜신니가 있기 때문이었다. 무공의 놀라운 새 경지를 보여주고 자신의 무공도 얼마든지 증진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던 요혜신니가 바로 지척에 있었다.
그동안 아무리 수련을 거듭해도 무공이 늘지 않아 좌절했었다. 자신보다 어리지만 훨씬 실력이 뛰어난 기하진이나 석추명을 보면서 언젠가는 자신도 상승무공을 익히리라 다짐했다. 심지어 천방지축으로 나대던 천옥랑마저도 자신보다 더 뛰어난 무공을 보이지 않았던가.
그런데 늘지 않던 자신의 무공을 대번에 깨우쳐 줄 사람이 바로 옆에 있었다. 혼자서 십 년 동안 수련했던 것보다 일각(一刻)여 동안 받았던 요혜신니의 가르침으로 훨씬 더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만약 제대로 가르침을 받는다면 어떤 결과가 생길까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려서 진정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 아미산을 오게 된 것 자체가 정말 어쩌면 부처님이 내린 은혜일지도 몰랐다.
한참을 서성이던 일봉이 결심한 듯 요혜신니가 있는 방장실로 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방장실에는 아직 불이 밝혀져 있었다.
“방장 사태님, 소인 일봉입니다.”
일봉이 나직이 아뢰자 잠시 뒤 안에서 요혜신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게.”
요혜신니는 연공이라도 하고 있었던 듯 부들방석을 깔고 바닥에 앉아 있었다.
“이 시각에 어쩐 일인가?”
요혜신니가 일봉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물었다. 신니의 수련을 방해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 일순간 망설였지만 일봉은 다시 한번 마음을 단단히 먹고 신니 앞에 무릎을 꿇었다.
요혜신니는 일봉이 갑자기 무릎을 꿇자 감았던 눈을 뜨고 일봉을 바라보았다.
일봉이 머리를 땅바닥에 대었다.
“사태님, 청이 하나 있습니다.”
“말해보게.”
“저는 천린상단 호천대 소속으로 제 임무는 상단과 임가장을 위험에서 지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능력이 부족하여 장주님과 아가씨를 여러 번 위험에 빠뜨렸습니다. 적을 눈앞에 두고도 선뜻 나서서 싸우지도 못했습니다....”
남천단주 원무개와 귀면쌍살의 얼굴이 눈앞을 스치면서 일봉은 감정이 격해져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일봉을 요혜신니는 그저 담담한 눈빛으로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매일 같이 밤을 새워가며 수련에 수련을 거듭해도 무공은 늘 제자리였습니다. 그러다가 지난번에 사태님을 뵙고 저에게도 희망이 생겼습니다. 사태님의 그 짧은 가르침이 마른 땅에 내린 단비처럼 상승무공을 갈망하는 제 마음을 적셔주었습니다.”
요혜신니는 묵묵히 듣기만 했다. 일봉의 말은 어느새 간절한 자기 고백이 되었다.
“무례하고 송구스러운 부탁인 줄은 알지만 사태님께 제대로 무공으로 배우고 싶습니다. 저를.... 제자로 받아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일봉은 힘들게 마지막 말을 내뱉고 두려운 나머지 머리를 들지도 못하고 잠시 그대로 있었다.
“고개를 들게.”
요혜신니의 차분한 음성이 이어졌다. 일봉은 혹시나 하는 희망에 머리를 들고 요혜신니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분명히 나와 인연이 있네. 하지만 스승과 제자로서의 인연은 아니야. 그리고 아미파의 무공은 아미파에 입문한 승려들에게만 전수되는 것으로 장문인이라고 해서 사사로이 외부인에게 전할 수는 없네.”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말뜻은 명확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일봉의 마음이 수심을 알 수 없는 바닷물 속에 빠진 납덩이처럼 한없이 가라앉았다.
“자네의 심정은 이해하네만 이 말밖에 해줄 수가 없어 미안하구먼.”
“아닙니다, 사태님. 늦은 시각, 송구했습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일봉은 다시 한번 요혜신니에게 머리를 숙이고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일봉은 잠시 멍하니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미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가까운 것만 같았다. 하늘에 저토록 무수한 별이 있건만, 정작 자신은 별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니 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하고 올라왔다.
일봉은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기기 시작했다. 상승무공이라.... 상승무공이라.... 자신의 처지에 상승무공을 염원하는 것이 가당키나 하느냐는 생각이 들면서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상단의 일개 호위인 내게 그런 기연이 닿을 리가 없지.....
오래간만에 밝았던 일봉의 표정이 불을 끈 듯 다시 어두워졌다.
****
“신니께서 제자를 이끌고 이렇게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무림맹을 대표하여 정말 감사드립니다.”
요혜신니가 제자 백여 명을 이끌고 직접 현장에 나타나자 총군사 사마경이 두 손을 맞잡고 정중하게 맞이했다. 두 사람의 연배는 서로 비슷했으나 요혜신니는 구대 문파 중에서도 거대방파인 아미파의 장문인이요, 무공 수위를 보더라도 강호 전체를 통틀어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고수라 사마경이 무림맹 총군사이기는 했지만 깍듯하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
“맹주께서 직접 군사를 이끌고 오셨다고 들었거늘 어찌 아니 보이시고 군사께서 무림맹의 대표가 되신 게요?”
요혜신니가 안부를 묻기도 전에 대뜸 따지듯이 물었다. 여인의 몸으로 험난한 강호에서 문파를 이끌며 두각을 드러낸 요혜신니는 키가 작고 생김새는 고운 편이었지만 깐깐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웬만큼 험악한 남자 고수들도 요혜신니 앞에서는 주눅이 들 정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첫 마디부터 나무라는 말투에 사마경이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맹주님께서는 며칠 전에 귀면쌍살을 쫓아갔습니다. 그자가 감히 겁도 없이 맹주님이 계신 곳에 나타났지 뭡니까? 맹주님께서 나서신 이상 귀면쌍살의 악행도 끝입니다. 이제 곧 강호 전체에 평화가 오겠지요.”
“오호라, 맹주께서 귀면쌍살을 잡으러 가셨다고? 맹주께서 마음을 고쳐 잡수셨나? 그동안은 뭐하시다가 이제야 잡으러 가셨을꼬?”
듣기에 따라서는 맹주를 비꼬는 말로 들릴 수도 있었다. 사마경은 정색을 하며 따질까 생각하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지금은 한 사람이 아쉬울 때. 괜히 이 늙은 비구니에게 미움받을 일은 벌이지 말자고 생각했다.
“부맹주는 어디에 계시오? 맹주가 안 계시면 부맹주라도 있어야 하거늘. 쯧쯧쯧, 무림맹 돌아가는 꼴이 영 말이 아니구려.”
요혜신니가 주위를 둘러보며 혀를 찼다. 이 늙은이가 우리를 도와주러 온 것인가, 아니면 시비를 걸려 온 것인가 사마경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청성파 장문인께서 직접 제자 500여 명을 이끌고 온다기에 부맹주께서 맞이하러 가셨습니다.”
사마경은 말을 하면서 요혜신니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만하면 답이 되었느냐는 표정이었다.
“오호라, 청성파에서 500명이나 온단 말이오? 부맹주가 무욕자(無欲子) 장문인의 사형이라고 청성파에서 무리를 하셨구먼.”
“허허허, 좀 그런 면도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
“청성파가 큰 문파이기는 하나 실전에 투입할 수 있는 제자들이 1,000여 명이 채 되지 않을 텐데, 제자의 절반 이상을 이끌고 오다니. 무욕자 장문인께서 이번 싸움에 청성파의 명운을 거셨구려.”
요혜신니의 말에 사마경은 빙긋 웃었다.
“무욕자 장문인께서 생각하신 바가 있으시겠지요. 신니께서도 생각하신 바가 있으시니 저희가 요청을 드릴 때는 꿈쩍도 안 하시다가 이렇게 마음을 바꾸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마경이 슬쩍 요혜신니를 떠보았다. 그러자 요혜신니가 선장으로 땅바닥을 쾅 내리쳤다.
“따로 생각한 바는 없소. 무림맹에서 하는 꼬락서니들이 이 늙은이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맹에서 요청했을 때 응하지 않았을 뿐이오. 하지만 천린상단에서 직접 도와달라고 호소하는데 안 올 도리가 있나.”
에둘러 말하는 법이 없는 요혜신니의 말에 오히려 사마경이 당황스러웠다. 말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사마경이었지만 사람의 면전에서 대놓고 싫다고 하니 뭐라고 반박해야 좋을지 몰랐다.
“흠흠, 그렇지 않아도 우리 측 병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는데 신니께서 잘 오셨습니다.”
“부족하다니요? 얼마나요?”
“나중에 다 모이면 다시 말씀드리겠지만 마교에서는 3개 대대, 모두 합쳐 3,000명 이상의 병력이 성도로 공격해올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마교 놈들이 녹림을 규합해서 이번 전투에 참전시킬 것 같다는 첩보가 입수되었습니다.”
사마경의 말에 요혜신니가 눈살을 찌푸렸다.
“녹림이라면 산적이나 비적들을 말하는 것이오? 흥! 어중이떠중이 모아봤자지. 단칼에 쓸어버리면 그만인 것을.”
사마경이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신중하게 말했다.
“물론 녹림의 무공은 우리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 군사들이 싸우다가 부상을 당한다면 무공이 훨씬 부족한 녹림 도적들에게 당할 수도 있지요. 사자도 들개들에게 물려 죽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흠. 그 말도 일리 있구려. 그래, 녹림 도적들은 몇 명이나 참전한다고 합디까?”
“그 숫자는 아직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이곳 사천 지역에 있는 녹림들만 규합해도 3,000명은 거뜬히 넘을 것입니다. 게다가 만약 최근에 악명을 떨치는 녹림 도적들까지 가세한다면 그 숫자는 비약적으로 커질 수 있습니다.”
사마경의 말에 요혜신니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러면 큰일 아니오? 적의 군사가 우리의 6배가 넘는다는 소리이니....”
그때 멀리서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안 본 사이 신니께서 담이 많이 줄었나 봅니다.”
십여 장 밖에 청성파 장문인 무욕자가 부맹주 천계심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를 청성사로가 따라왔다.
“하하하. 무욕자께서는 여전히 귀가 밝으신 걸 보니 그새 신공이라도 또 터득하셨나 보오이다.”
“그걸 눈치채신 걸 보니 신니께서도 신공을 닦으신 것이 아닙니까?”
요혜신니와 무욕자는 평소에도 서로 격의 없이 지내는 사이라 보자마자 서로 농담을 하며 웃음을 주고받았다. 사마경은 수십 보의 공간을 사이에 두고도 두 사람이 마치 지척인 양 자연스럽게 말을 주고받자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신니께서는 저는 눈에 안 보이나 봅니다.”
무욕자와 함께 걸어들어오던 천계심이 요혜신니에게 덩달아 친한 척을 했다. 그 소리에 요혜신니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