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 - 광세일소_한추영 - 1430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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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화. 전쟁의 서막 (6)
“우리야 그런 실력이 안 되니 여기 이렇게 짱박혀 있는 게 아니겠소? 형님도 뻔한 소리를 그렇게 하시오? 사람 섭섭하게스리.”
수염투성이가 볼멘소리를 했다.
“아 그 적비랑인지 흑비랑인지 씨부랄 놈들만 아니-!”
두목이 당황하여 급히 수염투성이 입을 두 손바닥으로 막았다. 그리고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누군가를 쳐다보았다.
“이놈이 실성을 했나, 왜 이렇게 쓸데없는 소리를 해!”
그러더니 두목이 수염투성이의 등짝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이놈이 더위를 먹었나 봅니다. 허허허. 우리 같은 좀도둑들이 생전 처음으로 이런 큰 판에 끼어들다 보니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게지요. 제가 잘 타이를 테니 너무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두목의 말투가 자못 공손했다. 두목이 말하는 사람은 일봉에게 등을 돌리고 있어서 누군지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다만 키가 꺽다리처럼 훌쩍 크고 등 뒤에 철추 한 자루를 메고 있었다.
“흥, 네놈들이 아미파 여승들을 어떻게 찜쪄먹든 상관은 없지만 만약 대사를 그르친다면 마교에서 손을 쓰기 전에 우리 손에 죽을 줄 알아라.”
목소리가 제법 살벌했다. 꺽다리가 고개를 돌리고 수염투성이를 잠시 노려보았다.
저놈은...! 일봉의 두 눈이 번뜩였다. 꺽다리의 이마 한가운데 주사(朱沙)로 칠한 붉은 표시가 있었다. 바로 적비랑들의 표시였다.
그러고 보니 천산산맥에서 도망쳐 나올 때 저놈의 얼굴을 봤던 기억이 났다. 적비랑 놈들이 이번 싸움에 참여한다는 것은 결국 마교놈들과 손을 잡았다는 뜻이 아닌가.
이번 싸움의 판이 점점 커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교에, 무림맹에, 적비랑들까지. 그리고 보아하니 이들은 평범한 녹림 도적 같은데 이들도 이번 싸움에 참여하다니.
두목에게 한차례 호되게 질책을 받은 수염투성이가 화가 나는지 어린 비구니에게 쿵쿵거리며 다가갔다.
“젠장 할. 이년아, 네년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냐? 재미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으니 네년 소원대로 부처님 앞으로 보내주마.”
수염투성이가 솥뚜껑 같은 손을 치켜들더니 어린 비구니에게 사정없이 내리쳤다. 저 큰 손에 맞는다면 장정도 그대로 기절할 것만 같았다.
주위에 산적 외에는 별다른 고수가 없음을 확인한 일봉이 발목에서 강철비침을 꺼내어 휘리릭 날렸다. 강철비침이 쏜살같이 날아가더니 수염투성이의 뒷목 한가운데로 푹 박혀 들어갔다.
“으악!”
수염투성이가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쓰러졌다. 그러자 산적들이 깜짝 놀라 다들 무기를 잡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일제히 소리쳤다.
“웬 놈이냐?”
비침을 날리자마자 일봉은 경신법을 전개하여 시위 먹인 화살처럼 날아가더니 오른발로 제일 앞에 있는 산적의 턱을 날려버렸다. 산적의 턱이 왼쪽으로 꺾이며 목뼈가 그대로 부러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검을 뻗어내어 좌우에 서 있던 산적 두 명을 단칼에 베어버렸다.
서걱. 칼날이 둔탁한 마찰음을 일으키자마자 산적들의 몸이 쩍 갈라지면서 붉은 핏물이 흘러나왔다.
아미파 여승들은 갑자기 산적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자 두려운 나머지 일제히 소리를 지르더니 덜덜 떨며 염불을 외기 시작했다.
산적들은 난데없이 누군가 튀어나와 세 명의 목숨을 앗아가자 대군이 몰려온 줄 알고 깜짝 놀랐다가 적이 고작 한 명인 것을 보고 안심하는 눈치였다. 20여 명의 산적이 다들 무기를 붙잡고 일봉을 둥그렇게 에워쌌다. 비록 세 명이 죽기는 했으나 1대 20이니 해볼 만한 싸움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적비랑 꺽다리는 등에서 철추를 꺼내 손에 들고 경계를 하다가 일봉의 얼굴을 알아보고 소리쳤다.
“네놈은 그때 살말건으로 가던 상단에 있던 놈이로구나.”
“흥, 기억력 하나는 쓸 만하군. 자비를 베풀 테니 죽기 싫다면 다들 셋 셀 동안 무기를 버려라. 그렇지 않으면 이 세 놈과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어 주겠다.”
일봉이 죽어 나자빠진 산적 한 명을 발로 걷어차며 말했다.
“그 무슨 개뼈다귀 뜯어 처먹는 소리야!”
일봉의 좌우에 서 있던 산적들이 일제히 무기를 빼 들고 일봉에게 덤벼들었다.
산적들의 실력은 잘 쳐주어 봤자 이류로 일봉의 원래 실력에도 훨씬 미치지 못하는데, 일봉이 요혜신니의 지도를 받은 이후 무공이 급상승하여 산적들은 일봉의 옷자락에 칼끝 한번 대보지도 못했다.
다시 순식간에 서너 명의 산적이 몸에 검상을 입고 나가떨어졌다. 산적두목은 일봉이 자신들의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고수라는 사실을 절감하고 아미파 여승들을 인질로 삼아 일봉을 협박하려고 했다.
“꼼, 꼼짝 마라. 그렇지 않으면 이 여승들을 모조리-!”
하지만 산적두목은 말을 끝내지도 못하고 꼬챙이에 꿰인 생선처럼 강철비침에 목이 뚫려 쓰러지고 말았다. 그 끔찍한 모습에 우악스러운 산적들조차 몸서리를 쳤다.
“한시라도 빨리 염라대왕을 뵙고 싶다면 허튼짓을 해도 좋다.”
일봉이 강철비침을 번쩍 쳐들었다. 손에 잡힌 비침들이 햇빛을 받아 번쩍번쩍 빛났다.
그 모습에 산적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무기를 버리고 우르르 무릎을 꿇었다.
“아이고,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저희들은 사실 아미파 여스님들께 죄를 짓고자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요.”
부두목인 듯한 자가 두 손을 들고 싹싹 빌었다. 일봉은 부두목에게 칼끝을 겨누고 다가갔다.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저, 저희는 적, 적비랑들이 시키는 대로 아미파를 염탐하러 가던 길이었습니다요. 저, 저분이 바로 적비랑 대원입니다요.”
부두목은 꺽다리가 있던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으나 어찌된 일인지 꺽다리는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아이고, 그놈이 그새 도망쳤구나. 우리에게 모든 죄를 다 뒤집어 씌우려고 도망쳤어. 아이고!”
부두목은 꺽다리가 보이지 않자 일봉의 칼끝이 자신의 목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고 길길이 날뛰었다. 그 모습에 일봉은 부두목의 등 한복판을 발로 차서 땅바닥으로 쓰러뜨렸다.
“허튼수작하지 마라. 네놈들 실력으로 어찌 아미파를 엿본단 말이냐?”
일봉의 말은 사실이었다. 자신조차 이기지 못하고 벌벌 떠는 주제에 요혜신니가 계시는 아미파를 어찌 넘본단 말인가?
“그, 그게 여기서 주구장창 기다리고 있다가 아미파가 움직이면 즉시 적비랑 두목에게 신호를 주기로 했습니다요.”
“적비랑 두목?”
“예. 온몸이 온통 새하얀 놈 있습니다요. 눈빛 하나만큼은 설산의 늑대보다 무섭습죠. 그래서 설랑이라고 부른다고 하더군요. 도망친 그 적비랑 놈이....”
일봉의 눈이 일순간 가늘어졌다. 정말 설랑 그놈이 나타났을 줄이야.
“설랑은 어디 있나?”
“적비랑 대원들을 이끌고 지금 성도 외곽에 숨어 있습니다요. 곧 성도에서 큰 싸움이 난다고 해서....”
일봉은 판이 어찌 돌아가는지 대충 눈치챌 수 있었다. 백련교에서 적비랑을 끌어들였고, 적비랑들이 다시 녹림 도적들을 끌어들인 것이다.
“밑에 몇 놈이나 있느냐?”
“그건 저희도 잘 모릅니다요. 당최 저희들에게는 얘기를 해주지 않아서....”
부두목이 일봉의 눈치를 보았다. 일봉이 눈살을 찌푸리자 놀란 부두목이 다시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려 싹싹 빌며 말했다.
“어이쿠, 정말입니다요. 저희가 뉘 앞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습니까요?”
일봉은 여기 이런 어중이 떠중이 산적 떼들만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설랑과 같은 고수가 한 명만 있었어도 아미파 여승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목숨도 보장할 수 없었다.
일봉은 즉시 산적들의 혈도를 점한 뒤에 동아줄로 큰 나무 밑동에 묶었다. 부두목은 일봉의 눈치를 보면서도 참지 못하고 결국 한마디 죽는소리를 했다.
“이따가 협객께서 저희들을 풀어주러 오실 거죠? 아미산에는 호랑이가 많다는데 이렇게 묶여 있다가 호랑이라도 나타나면 저희는 어떻게 합니까요?”
부두목이 울상을 하며 말했다. 그 말에 일봉이 코방귀를 뀌었다.
“그것이야말로 부처님의 뜻이겠지. 평생 악한 일만 했을 테니 마지막으로 배고픈 호랑이에게라도 몸보시를 한다면 너희 죄가 좀 덜어지지 않겠느냐?”
일봉의 말에 산적들이 한 목소리로 울며불며 사정하기 시작했다.
일봉은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아미파 여승들을 풀어준 뒤 말했다.
“저는 천린상단에서 온 일봉이라고 합니다. 아미파 장문인이신 요혜신니를 뵈러 왔으니 아미파까지 좀 안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미파 여승들은 산적들에게 붙잡혀 큰 낭패를 당할 뻔하다가 이렇게 살아나니 기쁘기 짝이 없었다.
“아미타불. 저는 아미파의 정혜라고 합니다. 알고보니 거사께서는 천린상단 분이셨군요. 정말 부처님께서 도우셨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여승들 중에 제일 연장자로 보이는 비구니가 두 손을 모아 합장하며 정중히 인사했다. 그러자 일봉도 어쩔 수 없이 덩달아 합장을 했다.
특히나 수염투성이에게 욕을 볼 뻔했던 어린 비구니는 일봉이 정말 고마운지 여러 번 허리 숙여 합장하고 앞장서서 일봉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일봉 거사님, 어서 가시지요. 장문인 처소까지는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어린 비구니는 앞장서 가면서 일봉을 힐끗거리며 쳐다보고는 혼자 얼굴을 붉혔다. 일봉은 자꾸만 자신을 흘낏거리는 것이 신경 쓰여 말이나 붙이기로 했다.
“아미파 스님들은 하나같이 무공이 고강한 줄 알았습니다.”
그 물음에 어린 비구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무공이 고강한 사저들도 많지요. 하지만 저희는 학승이라 무공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학승이시군요. 그런데 어쩌다가 산적 떼를 만난 것입니까?”
“이 근처에 채마밭이 있습니다. 여기는 아미산에서도 외지고 높은 곳이라 일 년 내내 사람 구경하기 힘든 곳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오늘도 별일 없겠거니 싶어서 무승들의 도움도 받지 않고 왔다가 산적들에게 당한 것입니다.”
어린 비구니가 또랑또랑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이제 열대여섯 살쯤 되었을까? 아직 볼에 젖살이 다 빠지지도 않은 모습이 귀여워서 일봉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어린 비구니는 또 힐끗 일봉을 곁눈질했다.
“그런데 아까부터 저를 왜 그렇게 쳐다보십니까?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일봉의 말에 어린 비구니는 당황하여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 그것이 제가 태어나서 거사님은 처음 보는지라....”
불가에서는 남자를 거사라 하는데 이 어린 비구니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남자를 본 적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하기야 아미파는 여승들로만 이루어진 문파이니 남자를 볼 일도 없을 듯싶었다.
“그렇습니까?”
일봉이 빙그레 미소를 짓자 어린 비구니는 빨개진 얼굴로 잠시 넋을 잃고 일봉의 얼굴을 대놓고 쳐다보았다.
“남우(南牛)야, 사람 얼굴을 그렇게 대놓고 보면 어떡하느냐? 거사님께서 당황하시지 않겠느냐?”
보다 못한 정혜스님이 따끔하게 한마디 했다. 그러자 남우가 얼른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 그게 거사님께서 너무 잘 생기셔서.... 정말 하늘에서 내려온 신장 같으십니다!”
아무리 어리다고 하지만 불도를 닦는 비구니의 입에서 뜻밖의 소리가 나오자 정혜스님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좀처럼 잘 웃지 않는 일봉이 남우의 말에 간만에 마음 편하게 크게 웃었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남우스님.”
일봉의 말에 남우의 얼굴이 다시 빨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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