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 - 광세일소_한추영 - 1428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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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화. 전쟁의 서막 (5)
드디어 출정일이었다. 무림맹을 뜻하는 용호기(龍虎旗)를 앞세우고, 남천단과 용봉단을 좌우에 거느린 채 맹주 남궁진악이 직접 말을 타고 최선두에 섰다. 말은 흠 하나 없는 백마로 체구가 크고 갈기에서 윤이 났으며, 황금색의 안장을 채워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천마(天馬)처럼 위풍당당했다.
맹주의 왼쪽에는 총군사 사마경이 오른쪽에는 부맹주 천계심이 역시 혈통이 좋은 말을 타고 보무도 당당하게 따라갔으며, 그 뒤로 남천단주 원무개와 용봉단주 대행을 맡은 천옥랑이 말을 타고 각기 군사를 이끌고 움직이고 있었다.
직위를 박탈당해 평단원이 된 기하진은 자신의 무기를 짊어지고 다른 단원들과 함께 달렸다. 한낮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뛰다 보면 내공을 발휘해 경공으로 달리더라도 어느새 온몸이 땀투성이가 되었다. 말은 각 단의 조장급에게까지만 지급되었다.
남이가 말을 타고 가면서 신경이 쓰이는지 자꾸 기하진을 돌아보았다. 기하진은 염려 말라는 뜻으로 손을 들고 흔들었다. 그 모습에 남이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항주를 출발한 무림맹 군사들은 쉬지 않고 걸음을 재촉하여 호북성 무한, 향계를 거쳐 곧 사천성 접경지역인 운양에 도달했다. 원래는 향계에서 허각 도장의 사제인 성각(性覺) 도장이 무당파 제자 백여 명을 이끌고 합세하려고 했으나 총군사 사마경의 요청으로 성도로 가지 않고 무림맹 본단으로 발걸음을 바꾸었다. 사마경은 맹주가 자리를 비운 사이 마교에서 무림맹 본단을 공격할까 봐 우려했던 것이다.
사마경은 대군을 한 번에 움직이기가 어려워 운양에서 군대를 나누어 부맹주가 남천단을 이끌고 배릉을 거쳐 남쪽으로 진격하게 하고, 맹주와 자신은 용봉단과 함께 만현, 달천을 거쳐 북쪽에서 성도로 진격하기로 했다.
이제 하루 반나절만 더 가면 성도였다. 맹주에게서 군사의 모든 사항을 위임받은 사마경은 만현에서 하룻밤 쉬어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거듭된 행군에 피로가 누적된 기하진은 이제 곧 있을 결전을 앞두고 운기행공으로 심신을 가다듬기로 했다. 한적한 곳에 좌정하고 앉아 기운을 일으키자 중양신공으로 쌓인 내공이 단전에서 요동쳤다. 소주천 행로를 따라 기운을 한 바퀴 돌리자 피로가 가시며 대번에 정신이 맑아졌다.
기하진이 소주천 운기행공을 계속해나가는데 돌연 서북방에서 날카로운 호각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기하진은 즉시 운기행공을 멈추고 눈을 번쩍 떴다. 호각소리는 적이 나타났다는 신호였다. 기하진은 즉시 검을 어깨에 둘러메고 발끝으로 땅을 찍으며 소리가 난 곳으로 달려갔다.
기하진이 달려가자 용봉단 단원들이 분분히 길을 터주었다. 비록 기하진이 평단원으로 강등되기는 했지만 일반 단원들에게 기하진은 아직도 단주였다.
“무슨 일이냐?”
기하진이 묻자 가까이 있던 단원 한 명이 대답했다.
“귀면쌍살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뭣이라? 귀면쌍살이 여기까지? 납치되거나 다친 사람은 없느냐?”
“아직 파악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때 천옥랑과 남이가 말을 몰고 급히 지나갔다. 둘 다 얼굴빛이 다급했다.
“옥랑, 무슨 일이야?”
기하진의 소리에 천옥랑이 급히 말을 멈췄다.
“큰일났어. 귀면쌍살이 이번에는 남궁척을 납치했어!”
“뭐라고?”
천옥랑의 말에 기하진의 안면이 굳었다. 귀면쌍살 이놈이 기어이 맹주님의 조카인 남궁척에게까지 마수를 뻗치는구나.
“맹주님께 보고드려야 하니 이따 다시 얘기하자.”
천옥랑은 말을 끝내자마자 급히 다시 말을 몰았다.
기하진은 천옥랑과 헤어진 뒤 곧장 현장으로 달려갔다. 이동 중에 이런 일을 당하고 보니 용봉단원들도 모두 당황한 듯했다.
“누가 쫓아갔느냐?”
기하진이 묻자 곁에 있던 단원 하나가 얼른 대답했다.
“10조 조장이 조원 20명을 데리고 뒤쫓아갔습니다.”
10조 조장이라면 산동악가의 차남인 악호군이었다. 악호군은 산동악가의 독문무공인 벽력단악권(霹靂斷岳拳)의 고수이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다들 대열을 정비하고 경계를 철저히 해라.”
기하진은 귀면쌍살이 사라졌다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내디디면서 단전의 공력을 모두 개방했다. 쏴, 하고 청량한 기운이 단전에서 올라와 발끝으로 전달되는가 싶더니 발이 땅에 닿지도 않는 듯 움직였다. 혼자서 익힌 초상비(草上飛) 경공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가는데 돌연 뒤에서 무시무시한 파공음이 들리며 누군가 쏜살같이 기하진을 추격해왔다. 그 기세가 너무 대단하여 기하진은 누군가 싶어 고개를 뒤로 돌려 보니 달려오는 사람은 다름 아닌 맹주 남궁진악이었다. 그동안 귀면쌍살이 나타나서 악행을 저질렀어도 맹주가 직접 나선 적은 없었는데 자신의 조카가 납치되니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었으리라.
“귀면쌍살은 내가 추격할 테니 하진이 너는 군사들과 함께 성도로 가거라. 성도에서는 총군사가 직접 지휘할 것이니 너는 그 명에 따르거라.”
맹주는 달려오면서 기하진에게 명령했다.
“어서 가거라. 적이 이때를 노리면 더욱 위험하다. 가서 단을 지켜라.”
“존명”
기하진은 급히 걸음을 멈추고 앞으로 달려가는 맹주의 뒷모습에다 대고 무릎을 꿇었다. 순식간에 맹주의 모습이 멀어지더니 곧 자그마한 점이 되어 사라졌다.
기하진이 야영지로 돌아오니 천옥랑과 남이가 다가왔다.
“맹주님께서 직접 귀면쌍살을 잡으러 가셨어. 맹주님께서 직접 나서신 이상, 귀면쌍살 그놈도 이제는 끝이지. 천하에 악독한 놈!”
천옥랑이 유독 언성을 높이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 모습에 기하진이 의아한 눈초리로 물었다.
“왜 그래? 귀면쌍살과 마주친 적이라도 있어?”
기하진의 물음에 천옥랑이 움찔하며 기하진과 남이를 힐끗 쳐다보고는 얼른 시선을 떨구었다.
“마, 마주치긴. 그랬다면 이미 죽은 목숨일 텐데....”
“하기야. 청성파 제일의 후기지수요, 부맹주님의 귀한 외아들인데 귀면쌍살이 그냥 내버려 두었을 리가 없지.”
기하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천옥랑은 입가에 어색한 미소를 띠며 맞장구를 쳤다.
“그, 그렇겠지.”
“남궁척은 무사할까요?”
남이의 말에 기하진이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 무사해야겠지. 어쨌든 맹주님께서 직접 가셨으니 뭔가 답을 내시겠지.”
“참, 성도에 지금 임 소저가 와 있답니다.”
남이의 말에 기하진이 말하기도 전에 천옥랑의 목소리가 먼저 튀어나왔다.
“아니, 임 소저가? 이 위험한 곳을 임 소저가 왜...?”
천옥랑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손을 이마에 대고 걸음을 옮기며 안절부절못했다.
“임 소저가 위험해. 이번 싸움은 절대 보통 싸움이 아니라고. 마교 측에서 파병한 병력만 3,000에 육박한다는데 이 위험한 싸움통에 꽃 같은 임 소저가 왜 왔을까? 뭘 한다고.”
심각한 표정으로 혼자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천옥랑을 보고 남이와 기하진은 어이가 없어 서로 고개를 저었다.
“우리 용봉단이 반드시 필사의 각오로 임 소저를 지켜드려야겠군.”
천옥랑이 하는 말을 남이는 가볍게 무시하며 기하진에게 말했다.
“마교측에서는 총 3개 대대가 움직인다고 합니다. 탈명대가 북쪽에서 진격해오고, 광풍대가 동쪽에서, 그리고 참룡대가 서남쪽에서 성도로 진격한다고 합니다. 각 대대는 1,000여 명 이상의 정예병으로 이루어졌다고 해요.”
남이의 말에 기하진의 표정이 굳었다.
“청성파 500명을 합쳐도 인원이 우리보다 두 배가 훨씬 넘는군. 정말 힘든 싸움이 되겠어.”
“하지만 기쁜 소식도 있습니다.”
남이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기쁜 소식이라니?”
“단주님의 절친한 벗이신 지학 스님이 소림사 승려 수십 명을 이끌고 이쪽으로 오고 있답니다.”
“지학이 온다고?”
남이의 말에 기하진의 두 눈썹이 위로 추켜 올라갔다. 이게 얼마 만인가. 백무결이 죽고 나서 자책감에 의기소침해진 지학은 결국 소림사로 돌아갔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지학은 소림사에 돌아가서도 깊은 산속의 암자에 홀로 은신하며 참선과 수련에만 전념할 뿐, 사람들 앞에 잘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기하진은 지학의 안부가 늘 궁금했지만 지학의 마음을 알기에 일부러 연락하지 않았다. 자신이 연락하면 다시 백무결이 떠오를 것이므로.
백련교와의 큰 싸움을 앞두고 있었지만 기하진은 지학을 보게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빨리 성도에 도착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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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봉은 손등으로 흐르는 땀을 닦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도 가도 끝없는 산길만 나올 뿐 사람의 흔적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맞게 가고 있는 거겠지?”
일봉은 혼자서 중얼거렸다.
십여 일 전, 임호가 천린상단 사천지부로 출발할 때 임예린은 자신도 동행하겠다고 밝혔다. 깜짝 놀란 임풍이 위험하니 안 된다고 여러 차례 만류했지만 임예린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임예린은 임호에게 이번 일을 일임하는 것이 아무래도 꺼림칙했다. 자신이 큰 힘이 되지는 않겠지만 임호 옆에서 면밀히 살펴보면 임호가 무슨 수작을 부리든지 대책을 강구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임풍은 임예린의 고집이 완강하자 포기하고 대신 일봉에게 한시도 임예린 곁에서 떨어지지 말고 임예린을 보호하라고 엄하게 지시했다.
하지만 임예린은 사천성 경내로 들어서자 일봉에게 아미파로 가서 요혜신니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은밀히 지시했다. 무림맹이 대군을 급파하기로 결정할 때 부맹주가 자발적으로 청성파에서 대군을 동원하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 부쩍 의구심이 들었다. 게다가 부맹주가 자신을 납치한 사실이 맹주에게 보고되었을 텐데도 아무런 조치가 없는 것도 수상했다.
임예린은 무림맹에 모든 것을 맡기고 있기는 너무 불안하다고 판단하고 자기 아버지와 가까운 사이인 아미파 요혜신니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일봉은 흐르는 땀을 닦고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일봉은 지금 요혜신니가 있는 복호사(伏虎寺)로 가는 중이었다. 산세가 어찌나 험준한지 산 위로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산길이 종래에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 끝이 보이지 않았고, 산봉우리마다 자욱한 운무가 서려 있었다.
풀을 헤치며 산길을 오르고 있는데 어디선가 짤막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손으로 급히 입을 막은 듯 비명소리가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목소리로 볼 때 여인이 분명했다.
이 깊은 산속에 설마하니 산적인가? 일봉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살금살금 다가가 커다란 바위 뒤에 숨었다. 십여 장쯤 가다 보니 넓은 공터가 나오는데 그 앞에 과연 험상궂게 생긴 사내 수십 명이 진을 치고 있었고, 그 옆에는 젊은 비구니 몇 명이 겁에 질려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그중에 얼굴이 곱상하고 어려 보이는 비구니가 있었는데 산적 중 한 명이 그 비구니를 희롱하고 있었다.
“으흐흐, 고년 참 예쁘게도 생겼구나. 이 어르신이 가뜩이나 심심하던 차에 잘 되었군. 너는 나랑 같이 놀자.”
뻣뻣한 수염으로 얼굴이 뒤덮인 사내가 음흉한 눈을 빛내며 어린 비구니의 팔을 잡아끌자 그 옆에 있던 나이든 비구니 두 사람이 덜덜 떨면서도 사내의 앞을 막아섰다.
“감히 아미파 경내에서도 이게 무슨 짓이오? 하늘이 두렵지도 않으시오?”
하지만 사내에게 겁을 주기에는 목소리가 너무 떨려서 나왔다. 일봉이 보아하니 여승들은 아무래도 아미파 승려들 같은데 무공을 못하는 것이 이상했다.
“이렇게 야들야들한 년과 한번 뒹굴 수만 있다면 하늘 따위야 무에 그리 대수이겠느냐?”
산적은 털복숭이 팔을 뻗어 나이든 비구니들을 우악스럽게 밀쳐냈다. 그 모양에 어린 비구니가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저... 저희 대사저께서 지금 이리로 오시고 계십니다. 여러분들께서 이러시면 대사저의 분노를... 사게 됩니다. 대사저께서는 무공이 한량없이 고강하시고... 악을 불같이 미워하는 분입니다. 부디 마음을 돌이켜서 죄를 짓지 마십시오.”
그 소리에 산적은 갑자기 껄껄껄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아미파 대사저가 아니라 요혜 늙은이가 오더라도 내 어찌 네년을 포기한단 말이냐? 그러니 앙탈은 그만 부리고 순순히 안기거라. 으흐흐흐.”
수염투성이 산적이 다시 어린 비구니의 팔을 거칠게 잡아끌더니 수염투성이 얼굴을 비구니의 얼굴에 갖다 댔다. 그러자 비구니가 다시 비명을 질렀다.
“어허! 넷째, 이러다가 아미파 요혜 늙은이가 정말로 내려오면 어쩌려고 이러나?”
산적 중의 우두머리인 듯싶은 자가 털복숭이를 나무랐다. 그러자 털복숭이가 투박한 손바닥으로 얼른 어린 비구니의 입을 틀어막았다.
“형님, 이런 심심 산골짜기에서 몇 날 며칠을 이러고 있는데 이런 재미도 없으면 어찌 견디란 말이오?”
수염투성이 볼멘소리를 하자 두목이 다시 꾸짖었다.
“그렇다면 너도 마교 놈들 틈바구니에 섞여 무림맹 무사들과 싸움질이라도 하지 그러느냐? 듣자하니 이번에 무림맹주 남궁진악, 부맹주 천계심, 남천단주 원무개, 용봉단주 기하진 등 무림맹의 내로라하는 고수들은 모조리 출동한 모양이던데, 네놈의 그 알량한 무예로 일각이라도 버틸 수 있을 성싶으냐?”
일봉은 그 소리에 호기심이 일었다. 보아하니 이들은 평범한 산적은 아닌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마교와 무림맹이 한바탕 결전을 벌이려는 것을 어찌 안단 말인가? 그뿐만 아니라 무림맹에서 출전한 사람들의 이름을 줄줄 꿰고 있는 것을 보면 꽤 믿을 만한 정보통이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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