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 - 광세일소_한추영 - 1424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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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화. 전쟁의 서막 (4)
기하진이 벌떡 일어섰다.
“그게 무슨 소리야? 자세하게 좀 말해봐.”
“귀면쌍살이 다시 나타나서 남이를 납치해 갔대.”
“그게 말이 돼? 남이는 요즘 맹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는데.”
천옥랑이 호흡을 고르며 말했다.
“귀면쌍살이 맹 안으로 들어와서 납치해 갔대.”
“뭐야?”
믿을 수가 없었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귀면쌍살이 들어온단 말인가? 아니, 남천단 이 자식들은 도대체 근무를 어떻게 서기에 적이 버젓이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었단 말인가?
기하진은 즉시 무장을 하며 천옥랑에게 물었다.
“혼자 있다가 당한 거야?”
“아니, 그 자리에 평단원들 서너 명이 있었는데 귀면쌍살이 그들의 공격을 받고도 유유히 빠져나갔다나 봐.”
천옥랑이 기하진을 쫓아오며 말했다.
“즉시 전 용봉단원에게 비상명령을 내려. 남이를 찾으러 가야겠어.”
기하진의 말에 천옥랑이 기하진의 팔을 붙잡았다.
“출정일이 바로 내일모레인데 지금 전 병력을 움직인다고? 수뇌부에서 알면 큰일 날 텐데?”
“그럼 어쩌자는 거야? 남이가 죽는 꼴을 두고 보자는 거야? 아직은 내가 용봉단주니 내 명을 전달해. 전원 비상투입해서 남이를 찾으라고!”
기하진은 그 말을 마치고 발끝으로 땅바닥을 툭 치더니 앞으로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기하진의 머릿속에 남이를 잘 부탁한다던 요혜신니의 꼬장꼬장한 모습이 떠올랐다. 당시 누구 한 사람만 특별히 대우할 수 없다고 답하여 신니의 분노를 사기는 했지만 그 이후, 기하진은 남이를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왔다. 어쩌면 음양사자의 정체를 알게 된 날 이후, 두 사람 사이에 끈끈한 유대감이 들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귀면쌍살 이 녀석, 남이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절대 그냥 두지 않겠다! 기하진은 자신도 모르게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용봉단원 300명 전원이 천라지망을 펼친 지 반 시진도 되지 않아 귀면쌍살의 흔적을 발견했다. 귀면쌍살이 있는 곳은 어른 팔뚝보다 굵은 대나무가 빽빽이 자라는 항주 외곽의 울창한 대나무 숲이었다.
기하진은 천옥랑에게 인원의 절반을 주어 퇴로를 차단하게 하고 나머지 절반은 전방에 배치한 다음, 자신은 귀면쌍살이 있는 곳으로 직접 다가갔다. 앞으로 걸어가자 급박한 금속성이 들려왔다. 귀면쌍살이 누군가와 싸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기하진이 몸을 나무 뒤에 숨기고 내다보니 귀면쌍살과 싸우는 사람은 다름 아닌 곤륜검객 초의공이었다. 귀면쌍살이 철산장을 펼치려고 여러 번 손을 쳐들었으나 그때마다 신속하기 그지없는 초의공의 공격에 밀려 공격할 기회를 찾지 못하고 번번이 장을 내려야 했다.
남이는 귀면쌍살의 뒤쪽 나무 둥치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는데 혈도를 찍혔는지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다행히 큰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기하진은 용봉단원들에게 수신호를 보내어 귀면쌍살을 에워싼 다음 조금씩 범위를 좁혀 들어갔다.
“흥! 쥐새끼들이 몰려왔구나.”
자신이 포위되었다는 사실을 눈치챈 귀면쌍살이 코웃음을 쳤다.
“장단을 좀 맞춰줘야겠지.”
귀면쌍살이 경공을 전개하여 몸을 공중을 띄우더니 오른손으로 장을 격출하여 초의공을 공격하면서 동시에 왼손을 남이가 있는 곳을 향해 가볍게 휘둘렀다. 곧 굉음이 나면서 남이 뒤에 있던 커다란 대나무가 우지끈 소리를 내며 부러지더니 그대로 남이를 덮쳐갔다.
그 모습을 본 기하진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안돼!”
기하진이 쏜살같이 신법을 전개했다. 어른 팔뚝만 한 대나무는 점혈을 당해 꼼짝 못 하는 남이의 머리 위를 그대로 덮쳤다. 대나무가 워낙 크다 보니 떨어지는 기세도 엄청났다. 위를 올려다보는 남이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 아혈까지 점혈 당한 것인지 비명 한마디 내뱉지도 못하고 그저 몸을 바들바들 떨기만 했다.
“으흐흐흐. 여기도 있다.”
귀면쌍살이 주위를 향해 아무렇게나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주위의 거대한 대나무들이 순식간에 부러지면서 일제히 쓰러졌다. 초의공조차 쓰러지는 대나무를 피하고 베느라 여념이 없었다.
대나무가 남이의 머리 위로 그대로 떨어지려는 찰나, 기하진이 남이를 와락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대나무는 기하진의 등을 강타했다.
“윽!”
저절로 신음이 나왔다. 수십 척 높이의 굵은 대나무가 등을 때리자 마치 무공 고수의 곤봉에라도 맞은 듯 참을 수 없는 통증이 몰려왔다. 하지만 기하진은 아프다고 정신을 놓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귀면쌍살의 강렬한 장풍에 수십 그루의 대나무들이 일제히 쓰러지고 있었던 것이다.
“귀면쌍살을 포위해라! 검진 발동!”
남이를 품에 안고 다시 땅바닥을 구르며 기하진이 용봉단원들에게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용봉단원들이 검을 앞으로 겨누고 달려들었다. 수백 명의 검사들이 일제히 일으키는 기세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귀면쌍살은 이미 옆에 곧추선 대나무를 밟아 위로 올라간 다음, 날다람쥐처럼 대나무 사이를 날아갔다.
“으하하하! 기 단주, 우리 다음에 또 봅시다. 듣자 하니 맹에서 초의공도 추적 중이라던데 꿩 대신 닭이라고 초의공을 잡아가는 게 어떻소? 맹주님이 좋아하실지 누가 아오? 으하하하하.”
귀면쌍살이 눈 깜짝할 새 사라지자 기하진은 망연자실했다. 귀면쌍살의 웃음소리가 대나무 숲에서 계속 은은히 들려왔다. 삼백 명을 동원하고도 귀면쌍살의 옷깃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기하진은 귀면쌍살이 사라진 방향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이렇게 자신이 못나 보일 수가 없었다. 어찌 된 일인지 무림맹주를 사부로 모셨지만 무공은 아직 답보상태였다. 자신의 무공이 더 늘지 않으면 어쩌면 귀면쌍살을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막막한 생각이 들었다. 대주천 행로만 알아도 이렇게 답답하지는 않을 텐데.
그때 천옥랑의 목소리가 들렸다.
“용봉단원은 즉시 배신자 초의공을 포위하라!”
“예. 부단주님.”
그 소리에 기하진은 정신이 번쩍 들어 몸을 일으켰다.
“천옥랑, 무슨 짓이냐!”
“저자는 이미 맹에서 추포령이 떨어진 사람이야. 귀면쌍살의 말대로 초의공이라도 잡아가지 않는다면 출정을 앞두고 함부로 군사를 움직인 죄를 면하기 어려울 거야.”
천옥랑이 단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천옥랑의 말에 초의공이 검을 검집에 집어넣더니 고개를 쳐들더니 큰소리로 처연하게 웃었다.
“안돼! 초의공께서는 남이의 목숨을 구해주신 분이야. 초의공이 아니었다면 남이는 벌써 목숨을 잃었다고.”
기하진이 천옥랑을 노려보며 말했다. 남이는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기하진이 혈도를 풀어주려고 했으나 귀면쌍살이 어떤 수법을 썼는지 아무리 기를 통해도 혈도가 풀리지 않았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초의공이 남이에게 다가와서 목 아래와 등 뒤를 몇 번 두드리고 문질렀다. 그제야 남이는 해혈이 되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기하진이 초의공에게 즉시 포권을 취했다. 그러자 초의공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아닐세. 그럼 나는 이만 가겠네.”
초의공이 담담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나 천옥랑의 검이 진즉부터 초의공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초의공은 눈 하나 껌벅이지 않고 천옥랑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기하진이 놀라 소리쳤다.
“옥랑, 검을 치워!”
“그럴 수 없어. 이자는 맹을 배반한 배신자야.”
천옥랑의 말에 초의공이 하늘을 쳐다보며 껄껄껄 웃었다.
“무림맹의 수장이라는 자가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도 모르니 그 아래 있는 사람들도 모두 눈뜬장님이로군.”
초의공이 손가락으로 천옥랑의 검을 조용히 밀어냈다.
“귀면쌍살을 붙잡으면 내 발로 맹으로 걸어 들어가 포박을 받겠네. 귀면쌍살이 활개를 치는 동안은 아직 그럴 수 없으니 이해해 주시게나.”
그리고는 초의공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천옥랑도 더 이상 초의공을 붙잡지 못했다.
기하진은 멀어지는 초의공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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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맹 담벼락 밑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있었다. 기하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걸음을 내디뎠으나 곧 등 뒤로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아무 말 없이 걸음을 옮기는 그를 따라 사람들의 눈길이 따라갔다. 모여있던 군중들 사이로 벽에 붙은 공고문이 보였다.
- 공고: 출정 전에 군사를 함부로 움직이고 무림역적 초의공을 두 번이나 놓친 죄를 물어 용봉단주 기하진의 직위를 박탈하고 기하진을 평단원으로 강등한다. 기하진은 이번 사천대전에 백의종군으로 참전한다. 무림맹주 남궁진악 서(書).
초의공을 면전에서 또다시 놓치자 분노한 맹주 남궁진악이 기하진의 직위를 박탈했던 것이다. 기하진은 아무 불만 없이 이번 조치를 받아들였다. 조직의 인사는 전적으로 맹주의 권한,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기하진의 모습이 멀어진다 싶자 다시 사람들 간에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기하진이 평단원으로 강등된 것을 두고 사람들 간에 설전이 분분했다.
“기 단주라면 맹주님의 적전 제자 아닌가? 그런데 맹주님께서 직접 제자의 직위를 박탈하시다니, 이번 조치는 너무 하신 것이라고 보네.”
“아닐세. 기 단주가 두 번이나 일부러 초의공을 놓아주었다 하지 않은가? 마교와 끈이 닿아있다는 초의공을 말일세. 명백한 임무 태만이지.”
“하지만 초의공 덕분에 귀면쌍살이 납치해 간 아미파 제자가 살았다면서? 즉, 초의공이 무림맹을 도운 것이란 말일세. 그런데도 초의공을 어찌 붙잡겠는가?”
“이 사람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먼. 모름지기 영웅이란 대의 앞에서 사사로운 정을 끊을 줄 알아야 하네. 친부모나 자식이라 하더라도 대의에 어긋난다면 단칼에 벨 수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사람을 구해준 은혜는 고맙지만 맹에서 추포명령이 떨어진 자이니 일단 잡고 봤어야지.”
“예끼 이 사람. 자네 같으면 자네 자식이 잘못했다고 칼을 들이댈 수 있겠는가?”
“우리 같은 사람이야 안 되겠지만 무림맹 단주쯤 되면 그래야 한다, 이 말일세.”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소리가 기하진을 끝까지 따라왔다. 사람들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지만 그럴수록 말소리는 더욱 쏙쏙 귀에 와서 박혔다.
무엇이 옳은 걸까? 사람들의 얘기처럼 그때 초의공에게 칼을 겨누었어야 했던 걸까? 기하진은 쓴웃음을 한번 짓고는 고개를 저었다. 똑같은 상황이 다시 온다 하더라도 자신은 초의공에게 검을 겨눌 수는 없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니 어느새 맹 안에 조성된 인공연못 월아연(月牙淵) 앞에 서 있었다. 예전에는 지학과 백무결과 함께 자주 오던 곳이었지만 이제는 마음이 아주 답답할 때가 아니면 거의 찾지 않는 곳이었다.
시끄러운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자 마음이 조금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연못 주변의 풀벌레 소리만 고요한 정적을 흔들고 있었다.
마침 해가 져서 어둠이 내려앉았다. 이제 사람들에게 모습을 들킬 염려도 없어 기하진은 연못가 옆에 있는 정자에 잠시 앉았다. 때 이른 귀뚜라미 소리가 제법 선선해진 밤바람에 섞여 들려왔다.
수심에 잠긴 그의 등 뒤에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리더니 누군가 조용히 다가왔다. 기하진은 발걸음 소리를 들었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단주님.”
남이였다.
“미안해요. 나 때문에....”
남이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고비 사막의 한가운데 있다는 월아천을 본떠 만든 초승달 모양의 연못 위에 이름처럼 초승달이 비쳤다.
“아니야. 신경 쓰지 마.”
“하지만 맹주님께서 너무 하시는군요. 초의공을 잡지 못했다고 어찌 단주님의 직위를 박탈할 수 있어요? 당장 내일이 출정인데 출정을 바로 코앞에 두고 이렇게 수장을 바꾸는 경우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남이의 말소리가 격앙되어 있었다. 기하진은 우두커니 서서 하염없이 연못만 바라보았다.
“게다가 이번에 가장 위험한 최전선에 배치가 되었다면서요?”
“어차피 누군가는 서야 할 곳이야. 그나마 한때 수장이었던 내가 최전선에 서는 게 차라리 낫지.”
“맹주님께서 유독 초의공에게 그토록 적대감을 드러내시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사람들은 부맹주가 꾸민 농간에 맹주님이 속아 넘어가신 것이라는 얘기도 하고―.”
“그만하자.”
기하진이 남이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남이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무림맹의 일원이니 맹의 수장이 하는 일에 의문을 품어서는 안 돼.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따위 믿지 마. 맹주님은 무조건 옳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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