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 - 광세일소_한추영 - 1422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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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화. 전쟁의 서막 (3)
동트기 전 아직 푸르스름한 어둠에 뒤덮인 임가장 지붕 위에 누군가 서 있었다. 간밤에 내린 비로 기와가 아주 미끄러울 텐데도 그 사람은 발 한 번 삐끗하지 않고 잘도 균형을 잡고 있었다.
호천대 야간조를 순시하던 일봉은 지붕 위에서 임예린의 처소 뒤 불이 환히 밝혀진 전각을 바라보았다. 저 불은 밤새 꺼지지 않았다. 임예린을 구해서 데려왔다던 석추명이라는 자가 있는 별채였다. 임예린은 자기 방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밤새 별채에 머물며 간호를 했다고 한다.
일봉은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았다. 임예린이 어릴 때부터 잊지 못하던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임예린의 마음을 가져간 자. 자신이 구하지 못했던 임예린을 구해온 자. 그리고 자신보다 무공이 더 고강한 자.
문득 묘한 질투심이 벌레처럼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러자 일봉은 일부러 머리를 세차게 내저었다. 그때 일봉의 눈에 멀리서 청총마를 타고 급히 달려오는 천옥랑의 모습이 띄었다.
저 녀석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또다시 얼굴을 들이밀다니! 가뜩이나 심란하던 차에 잘 만났다.
일봉은 지붕 위에서 몸을 날려 땅으로 내려서며 대문 앞을 막아섰다. 천옥랑은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며 말을 달리다가 갑자기 눈앞에 사람이 나타나자 깜짝 놀라며 황급히 말고삐를 잡았다.
히히히잉. 말이 놀라 앞발을 쳐드는 바람에 천옥랑이 말에 떨어져 내렸다.
“여기가 어디라고 또 오셨습니까? 천 공자님?”
일봉의 목소리가 싸늘했다. 그 목소리에 천옥랑의 안색이 변했다.
“급한 일이오. 어서 장주님을 뵈야 합니다. 안내해 주시오.”
일봉은 미동도 하지 않고 안절부절못하는 천옥랑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번에는 아가씨가 아니라 임 장주님을 납치하시려구요?”
일봉의 입에서 고운 소리가 나가지 않았다.
“지난번 임 소저가 그 일을 당한 건 나도 몰랐던 일이란 말이오! 임 소저께도 잘 말씀드렸소.”
“흥! 그러셨을 테지요.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더니 어쩜 그렇게 두 사람이 똑 닮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일봉이 천옥랑을 노려보았다. 저 천방지축 얼간이 같은 놈 때문에 아가씨가 죽을 뻔했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나서 고생이란 해보지 않은 놈. 좋은 가문과 좋은 사문에서 자라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굽신거리는 것을 당연하게 아는 놈. 일봉이 가장 싫어하는 부류였다.
마음이 급했던 천옥랑은 자신을 쏘아보는 일봉을 무시하고 대문 쪽으로 성큼 발길을 옮겼다. 그러자 일봉이 대뜸 검을 쳐들었다.
“그때 내지 못했던 승부를 지금 다시 내자는 겁니까?”
“급한 용무라고 하지 않소? 지금 즉시 임 장주님을 뵙고 말씀을 드려야 하는 일이오. 아랫사람이 어찌 장주님을 뵈러 온 사람을 가로막는단 말이오?”
천옥랑의 말에 일봉은 애써 억누르던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다.
“아랫사람 따위가 귀하신 분을 막아서서 죄송합니다만 장주님을 보호하는 것도 제 임무입니다. 이만 돌아가시지요.”
일봉의 검이 챙, 소리와 함께 검집을 빠져나오더니 천옥랑의 안면을 찔러 들어왔다.
“이 사람이!”
천옥랑은 일봉이 느닷없이 공격해오자 황급히 몸을 빙그르르 뒤로 돌리며 검을 피했다. 천옥랑의 발길질에 따라 비에 젖은 땅바닥에 둥글게 홈이 패였다.
“이럴 시간이 없다니까!”
천옥랑이 고함을 질렀다.
“그건 당신 사정이고!”
일봉이 소리를 지르며 다시 검을 찔렀다. 신새벽, 때아닌 칼부림이 임가장 대문 밖에서 벌어졌다.
결코 이번에는 어영부영하지 않으리라!
일봉은 지난번 납치 사건으로 인한 분노와 그동안 쌓였던 분노가 한꺼번에 폭발하여 쉴새 없이 천옥랑을 몰아붙였다. 하지만 천옥랑은 귀면쌍살에게 붙잡혔던 팔이 시큰거리는 데다 지금 일봉과 싸우고 싶지 않았기에 자연히 대응이 소극적이었다.
“그렇게 뜨뜻미지근하게 움직여서야 이 미천한 놈의 검을 받아낼 수 있겠습니까?”
“젠장 할!”
일봉의 비웃음에 천옥랑이 소리를 질렀다.
그때 대문이 벌컥 열리며 임예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새벽부터 이게 무슨 소란입니까?”
두 사람을 바라보는 임예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천옥랑은 임예린을 보자 반가운 듯 소리를 질렀다.
“임 소저, 급히 장주님을 뵙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천린상단의 사활이 걸린 중요한 일입니다.”
“아가씨, 천 공자의 말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천옥랑의 말에 뒤이어 일봉이 소리쳤다. 임예린은 잠시 천옥랑을 바라보더니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아버님은 지금 주무시니 저한테 얘기하시지요. 따라오세요.”
“아가씨!”
일봉이 당황한 표정으로 임예린을 바라보았다.
“일봉도 들어와. 그렇게 걱정되면 내 옆에 있으면 되잖아.”
이번에는 천옥랑이 시샘 어린 눈빛으로 일봉을 힐긋 쳐다보았다.
일봉은 얼른 임예린의 뒤를 따라가며 천옥랑에게 들으라는 듯이 호천대원 전원에게 비상경계 명령을 내렸다.
“지금부터 전원 비상대기한다. 특히, 장주전과 아가씨 처소에서 절대 눈을 떼지 마라. 외부인이 또다시 납치를 계획할 수도 있으니 유념해서 경계하라.”
일봉의 차가운 눈빛이 천옥랑을 노려보았다.
천옥랑은 아니꼬운 생각에 일봉을 마주 노려보며 뭐라고 한마디 쏘아붙이려고 하다가 임예린을 쳐다보고는 입을 다시 꾹 다물었다.
하지만 임예린의 방으로 들어간 천옥랑은 방에서 나는 향기로운 냄새에 엄중한 상황이라는 사실도 잊고 가슴이 벌렁거렸다. 아까와는 다른 벌렁거림이었다. 자신이 꿈에도 그리던 임예린의 방에 들어간 것이다.
천옥랑이 방안을 두리번거리며 다시 한번 깊이 숨을 들이마시는데 임예린의 차가운 목소리가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무슨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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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하진은 천옥랑의 말을 들은 뒤 즉시 맹주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맹주의 제자가 되고 나서 유일하게 하나 편한 것이 맹주를 보기 위해 까다로운 절차를 거칠 필요가 없다는 점이었다. 기하진은 이번에야말로 부맹주의 실상을 맹주에게 똑바로 알릴 생각이었다.
지난번 천린상단에 은자 백만 냥을 요구한 일이나 임예린 납치 사건은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정파무림의 어른이 어찌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한단 말인가? 이번에도 마교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마교가 천린상단을 공격할 것이라는 얘기가 어찌 부맹주전에서 먼저 흘러나온단 말인가?
기하진이 문득 옆에서 자신과 보폭을 맞춰 걷고 있는 천옥랑을 쳐다보았다. 천옥랑은 깊은 생각에 빠진 듯 땅바닥만 보고 걷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부맹주에게 대들던 모습이 떠올랐다. 더 이상 어릴 때 자신을 괴롭히던 철부지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 녀석, 정말 많이 변했구나. 하지만, 괜찮을까? 기하진은 괜스레 천옥랑에게 미안한 느낌이 들었다.
맹주전에는 총군사 사마경이 와 있었다. 이번 일은 사마경도 알아야 하니 차라리 잘된 셈이었다.
“옥랑이도 같이 왔구나. 그래, 내게 무슨 할 말이 있다고?”
맹주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기하진을 넌지시 쳐다보았다.
기하진은 천옥랑에게 들은 얘기를 모두 맹주에게 아뢰었다. 천린상단에 은자 백만 냥을 요구한 이야기과 임예린의 납치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맹주는 기하진의 말을 들으면서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마치 아는 이야기를 듣는 듯 딱히 표정의 변화는 없었다.
“어허, 어찌 그런 일이.”
반응을 보인 사람은 오히려 총군사 사마경이었다.
“천 부단주가 정말 어려운 결심을 했구나. 아비의 허물을 감싸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지.”
사마경이 수정 안경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맹주는 그제야 감았던 눈을 뜨며 기하진과 천옥랑을 바라보았다.
“알았으니 두 사람은 당분간 이 일을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도록 하라.”
기하진은 맹주의 반응에 당황스러웠다. 부맹주의 비행을 고하면 맹주가 최소한 화라도 낼 줄 알았다. 그런데 맹주의 반응이 너무 무미건조했다. 사마경이 기하진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한마디 덧붙였다.
“사실, 맹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부맹주의 비행을 포착하고 은밀히 감시하고 있었다. 다만 아직 결정적인 증거를 잡지 못해서 그걸 기다리는 중이다.”
사마경의 설명을 들으니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결정적인 증거를 잡을 때까지 기다리는 거였군.
“명심하겠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이번 일을 발설치 않겠습니다.”
기하진과 천옥랑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옥랑이는 고개를 들어라.”
맹주가 천옥랑에게 말했다. 그말에 천옥랑이 고개를 들었다. 맹주는 평상시 옆집 할아버지처럼 인자한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두 눈에 서슬 퍼런 안광이 번쩍여 감히 마주 보기도 어려웠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옥랑이 너는 준비가 되었느냐?”
느닷없는 맹주의 말에 천옥랑이 어리둥절하여 고개를 들었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옥랑이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무림의 평화를 위해서 네 부친의 가슴에 칼날을 겨눌 준비가 되었느냐?”
맹주의 말에 기하진은 가슴이 서늘하여 천옥랑을 바라보았다. 천옥랑이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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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주전을 물러난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걸었다. 천옥랑은 맹주의 말에 충격을 받은 듯했지만 기하진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를 배반하라는 말은 쉽사리 꺼낼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바뀌어서 부맹주에게 오늘 일을 쪼르르 일러 버리는 것도 큰일이었다.
기하진과 천옥랑이 천림원 주변을 지나는데 사람들이 잔뜩 모여있었다. 설마하니 마교에서 또다시 누군가 침입하지는 않았을 테고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사람들 근처로 갔더니 남이가 기하진을 보고 달려왔다.
“무슨 일이지?”
“팽호가 귀면쌍살에게 당했어요.”
“뭐야! 귀면쌍살이 나타났단 말이야?”
천옥랑은 귀면쌍살이 나타났다는 말에 얼굴빛이 사색이 되었다. 하지만 기하진은 천옥랑의 변화는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서둘러 사람들을 헤치고 달려갔다.
팽호는 천림원을 마치고 나서 용봉단 조장으로 활약했었다. 이번에 하북팽가로 돌아가게 되어 조장 직을 사임했는데 이렇게 변을 당할 줄이야.
팽호는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얼굴로 땅바닥에 누워있었다. 상처가 거의 없는 것으로 봐서 검에 당한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가슴 부위가 엄청난 장력에 당한 듯 안쪽으로 움푹 함몰되어 있었다. 철산장이군! 여러 번도 아니고 단 일격에 당한 게 분명했다.
“어떻게 된 거지?”
기하진이 남이에게 물었다.
“팽호가 이번에 본가로 돌아가게 되어 동기들이랑 술 한잔하러 나갔다가 변을 당했어요.”
“동기들이라니 누구와? 또 당한 사람들은 없었어?”
남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시 팽호가 남궁척과 할 말이 있다며 두 사람이 따로 밖으로 나갔다가 그만....”
“남궁척?”
남궁척이라면 맹주님의 본가인 남궁세가의 장남 아닌가? 구대문파의 주요 후기지수들만 노리는 귀면쌍살의 그간 행적으로 봤을 때 하북팽가의 차남인 팽호보다 강호제일가인 남궁세가의 장남을 먼저 공격해야 했다.
“남궁척은 무사해?”
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멀쩡하게 돌아왔어요. 귀면쌍살이 자신은 털끝만큼도 건드리지 않고 팽호만 공격했대요.”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왜 남궁척은 건드리지 않았을까? 분명히 무슨 이유가 있을 것만 같았다.
“오늘 밤 용봉단은 모두 특별 경계에 들어간다. 그렇게 전달해줘.”
“존명.”
기하진의 말에 남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사라졌다.
한동안 잠잠하던 귀면쌍살이 무림맹 본단의 바로 코밑까지 나타나다니 절대 좌시할 수 없었다. 기하진의 머릿속에 문득 처참하게 죽은 백무결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다음 날, 무림맹 수뇌부 회의에서 천린상단의 사천지부를 보호하기 위해서 대군을 급파하기로 했다는 결정이 들려왔다. 특이한 것은 맹주의 의심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부맹주가 자신의 사문인 청성파의 인력을 대거 동원하여 성도에 있는 천린상단 사천지부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는 점이다. 청성파 장문인이 직접 500이 넘는 제자를 이끌고 참가하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한다. 500명이면 청성파 전체 제자의 절반이 넘는 수였다.
그리고 무림맹에서는 맹주가 직접 용봉단 전체와 남천단의 절반을 이끌고 가기로 했다. 그 수만 하더라도 800을 헤아렸다. 총군사 사마경은 적의 공성계를 우려해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에 지원요청을 하되, 성도에서 가까운 문파는 성도를 직접 지원하고, 그렇지 않은 문파는 무림맹 본단과 천린상단 본부를 지원하게 했다. 마교의 공격 예상일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모든 것은 일사천리로 신속하게 결정되었다.
출정이 결정되고 출정 준비를 하게 되자 무림맹의 분위기도 엄중해졌다. 모든 사람이 무기를 손질하고 무공을 점검하며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출정일 사흘 전, 기하진도 역시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단주, 단주!”
천옥랑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기하진은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남이가... 남이가... 귀면쌍살에게 납치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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