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 - 광세일소_한추영 - 1421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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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화. 전쟁의 서막 (2)
천옥랑은 벽에 바싹 귀를 갖다 댔다. 가슴이 터질 듯 벌렁거렸다. 등줄기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식은땀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자정이 넘은 시간, 천옥랑은 임예린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아서 바깥에 나와 할 일 없이 서성거렸다. 잘 도착했나 궁금했다. 그러다가 문득 저 멀리서 누군가가 아버지의 처소로 몰래 들어가는 모습을 발견했다. 덩치로 볼 때 남천단주인 원무개가 분명했다.
자신을 자기 친아들보다 더 반겨주던 원 단주는 지난번 임예린 사건 이후 자신을 대하는 눈길이 차가워졌다. 거리를 두는 기색도 역력했다. 천옥랑도 원 단주가 어려워 일부러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던 중에 원 단주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몰래 아버지의 처소로 가는 게 아닌가. 야심한 시각에 부맹주의 처소에 몰래 들어간다라.... 뭔가 냄새가 났다. 천옥랑은 즉시 원무개 뒤를 쫓았다.
방 안에서 원무개와 자신의 아버지가 목소리를 낮춰 무엇인가 얘기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무공이 워낙 높은지라 가까이 가지는 못하고 담벼락 멀리서 귀를 기울여봤지만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얼른 알아듣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간간이 들려오는 말소리에 ‘천린상단’이니, ‘사천지부’니 하는 말들이 섞여 있는 것으로 봐서 천린상단과 무관하지는 않은 듯했다. 설마 아버지가 또 무슨 일을 꾸미시는 것은 아니겠지? 천옥랑의 머릿속에 임예린이 화사하게 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연이어 자신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이 떠올랐다.
그래. 임 소저를 납치까지 했던 아버지야. 더한 일도 하실 수 있을 거야. 내가 미리 알아내서 막아야 해!
천옥랑은 침을 한번 꿀꺽 삼키더니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움직여 창문 쪽으로 몇 걸음 더 앞으로 다가갔다. 이제야 제법 말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번에 마교에서 사천지부를 치게 되면 천린상단은 끝장이겠군.”
“그렇습니다. 전체 상단에서 유통되는 물건의 삼 분의 일이 성도에 집결한다고 하니, 만약 마교에서 성도를 친다면 천린상단은 끝장일 것입니다. 임풍 그 작자도 이제 끝난 것이지요.”
“흥! 쓴맛을 봐야 무림맹이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 깨닫겠지.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을 테지. 가뜩이나 그 작자 면상이 보기 싫었는데 그야말로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로구먼.”
“정말 그렇습니다.”
안에서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부맹주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 일이 절대 새어나가지 않게 입단속 잘해야 하네. 만약 상단 측에서 무림맹에 공식적으로 도움이라도 요청해서 맹주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일이 여러 가지로 복잡해져. 참, 마교는 언제쯤 공격할 예정이라고 하던가?”
“마교에 심어놓은 첩자의 말에 따르면 이달 말이나 내달 초가 유력하답니다.”
“천린상단 사천지부가 풍비박산이 나면 임풍 그놈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정말 궁금해지는군. 그놈의 재수 없는 낯짝을 두 번 다시 보지 않아도 되도록 확실하게 짓밟아 놓으면 좋겠군. 크하하하.”
마교가 천린상단 사천지부를 노린다?! 그렇게 되면, 그렇게 되면 임 소저는 어떻게 되는 거지? 천옥랑의 얼굴빛이 새하얗게 질렸다.
천옥랑은 다시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종종걸음으로 뒷걸음질 쳤다. 심장이 어찌나 거세게 뛰는지 자신의 심장 소리에 놀라 아버지가 뛰쳐나올 것만 같았다. 부맹주전을 벗어난 천옥랑은 정신없이 외곽으로 달렸다. 숨이 턱에 차오르고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천옥랑은 헉헉거리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문득 머릿속에 오늘이 초하루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이달 말에 총공격 예정이라면 불과 25일도 채 남지 않은 셈이었다. 조바심이 들었다. 즉시 가서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옥랑은 무림맹 밖으로 슬며시 빠져나갔다.
***
“가는 걸 확인했느냐?”
부맹주가 원무개에 물었다.
“예, 부맹주님. 과연 예상한 대로 밤을 틈타 천린상단 임대방의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부맹주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두 눈이 어둠 속에서도 번들거렸다.
“어리석은 놈. 여색에 미쳐 제 애비도 몰라보다니.”
“그런데 과연 임 대방이 저희가 생각한 대로 움직일까요?”
원무개의 말에 부맹주의 입술 한쪽이 말려 올라갔다.
“임풍은 지금 맹주 말고는 도움을 요청할 데가 없지. 차라리 잘 됐다. 맹주를 몰아낼 절호의 기회야. 마교 측에는 지난번에 약속한 금액의 두 배를 준다고 해. 이번에는 반드시 성사시켜야 해. 반드시!”
“알겠습니다. 부맹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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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옥랑은 무림맹 본단 건물 밖으로 나가자마자 말의 배를 힘껏 찼다. 맹이 있는 항주에서 천린상단의 본점이 있는 남경까지는 말을 빨리 달리면 반나절 만에 갈 수 있는 거리였다. 천옥랑은 마음이 급했다. 빨리 이 사실을 전달해야 한다는 생각에 정신없이 말을 달렸다.
어느새 항주의 외곽지대로 들어섰다. 자정이 넘은 시각이라 불빛 한 점 없었지만 천옥랑이 모는 청총마는 길을 기억이라도 하는 듯 전혀 막힘없이 달렸다.
갑자기 어디선가 파공음이 들리더니 돌멩이 두 조각이 날아와 정신없이 달리는 청총마의 다리를 맞췄다. 청총마는 뒷다리에 통증을 느끼자 울부짖으면서 즉시 멈춰섰다.
깜짝 놀란 천옥랑은 얼른 말에서 내려 날아온 돌멩이를 주워들고 살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떤 놈이냐! 썩 나서지 못할까!”
호기롭게 외쳤지만 돌아오는 소리는 없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잠긴 숲이 음산한 느낌을 주었다. 천옥랑은 안력을 돋우어 주위를 샅샅이 살폈으나 어디에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누군지 몰라도 이 정도로 자신을 숨긴다면 고수가 분명하리라 생각했다.
천옥랑은 즉시 말에서 뛰어 내려 땅 위에 선 다음, 검을 빼 들었다.
“나는 무림맹 용봉단 부단주 천옥랑이다. 감히 무림맹 부단주의 앞을 막다니, 겁을 상실한 놈이로구나.”
천옥랑이 내공을 실어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그러자 숲 안쪽에서 기괴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기이한 점은 그 웃음소리가 들리는 곳이 백여 장 밖이었다는 것이다. 어찌 그 먼 곳에서 이렇게 작은 돌멩이를 던질 수 있었을까?
“무림맹 부단주가 그토록 대단한 직책인 줄은 오늘에야 알았구나. 크하하하. 네놈이 부맹주 천계심의 자식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으니 더 이상 그렇게 떠벌릴 필요는 없다.”
말과 동시에 숲 안쪽에서 검은 물체가 천옥랑이 있는 쪽으로 날아왔다. 자세히 보니 온통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인데 등 뒤의 검은 장포가 밤바람에 박쥐 날개처럼 펄럭였다.
천옥랑은 그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대번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귀면쌍살!”
숲 안쪽에서 날아온 사람은 귀면쌍살이었던 것이다. 그제야 천옥랑은 아차 싶었다. 구대문파와 오대세가 후기지수들만 골라서 노리는 귀면쌍살에게 야심한 밤 혼자 있는 자신은 너무나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천옥랑은 두려운 마음을 억지로 다잡으며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가슴이 고동치기 시작했다.
“이 야심한 밤에 어딜 그렇게 급히 가시나?”
천옥랑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귀면쌍살의 얼굴을 노려보기만 했다.
“아 참, 먼저 고맙단 말을 해야겠군. 네 아비가 천린상단의 팔을 비트는 바람에 내가 칠보영환과 만년설삼을 구했으니 말이야, 크하하하.”
귀면쌍살은 천옥랑이 검을 들고 있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등을 보이며 껄껄 웃었다. 천옥랑은 자신의 무공으로는 귀면쌍살에게 어림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하필 여기서 귀면쌍살을 만날 줄이야!
천옥랑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귀면쌍살은 고개를 돌리고 천옥랑을 바라보았다. 귀면탈 안에 있는 눈이 번뜩였다.
“이 길로 쭉 가다 보면 남경이 나오겠지. 이 야심한 시각에 남경엔 왜 가는 걸까? 누구를 만나려고?”
귀면쌍살이 천옥랑의 바로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고 쳐다보더니 다시 무엇이 우스운지 껄껄 웃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돌연 웃음을 멈추고 천옥랑을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네놈 몸뚱아리에도 내 손바닥을 떡 하니 찍어주고 싶지만 네놈은 건드리지 말라시는 구나. 왜냐하면 네놈 아비가 아직도 쓸모 있거든? 크헐헐헐.”
귀면쌍살의 말에 천옥랑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누가 나를 건드리지 말라고 한단 말인가? 귀면쌍살에게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귀면쌍살이 후기지수들만 골라서 죽이는 것도 그자의 명령이란 말인가? 천옥랑은 문득 오싹한 생각이 들었다.
돌연 귀면쌍살이 왼팔을 바람처럼 내뻗더니 검을 쥔 천옥랑의 오른손 맥문을 틀어잡았다. 천옥랑은 손에 검을 들고도 제대로 막아내지도 못한 채 단 한 수만에 제압되자 가슴이 철렁했다. 이제 귀면쌍살이 내력을 쏟아붓기만 하면 자신의 목숨은 끝장이었다.
“하지만 말이야, 나는 네 아비를 좋아하지 않아. 갚아줘야 할 빚도 있고 말이야. 네놈이 네 아비와 똑같은 놈이라는 것도 알고 있지.”
쇠를 긁는 기괴한 목소리가 바로 지척에서 들리자 천옥랑은 까무러칠 것만 같았다.
“내 아, 아버지를 아시오?”
천옥랑의 목소리가 떨렸다. 귀면쌍살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아버지를 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호, 혹시 무림맹에 있, 있는 분이오?”
천옥랑의 말에 귀면탈 아래로 미약한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정보를 많이 주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오늘 일에 대해 누구에게든지 쓸데없이 입을 놀린다면 그날로 네 목숨은 죽은 목숨이다.”
귀면쌍살이 천옥랑의 팔을 번쩍 쳐들자 천옥랑은 순식간에 이십여 척 밖에서 나뒹굴었다.
“윽”
천옥랑이 땅바닥에 부딪힌 충격에 신음소리를 내자 귀면쌍살이 천옥랑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명심해라, 애송아.”
귀면쌍살이 다시 한번 손을 번쩍 쳐들자 천옥랑의 옆에 있던 커다란 화강암 바위가 귀면쌍살의 장력에 맞아 굉음을 내며 부서져 내렸다. 마치 폭약이라도 터진 것만 같았다. 천옥랑은 돌멩이 파편이 쏟아지자 얼른 몇 걸음 뒤로 물러나 피해야 했다. 천옥랑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보지 않았다면 절대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말을 마친 귀면쌍살이 땅을 박차더니 검은 장포를 휘날리며 숲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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