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 - 광세일소_한추영 - 1418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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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화. 전쟁의 서막 (1)
일봉은 가슴이 답답했다. 임예린이 사라지고 나서 하루도 쉬지 않고 임예린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여러 가지 정황들로 볼 때 부맹주의 짓이 분명했지만 결정적인 증거를 잡을 수 없었다. 또 설령 결정적인 증거를 잡는다 한들, 자신의 실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가서 부맹주에게 협박이라도 한단 말인가? 임 소저를 내놓으라고?
일봉은 두 손으로 얼굴을 몇 번 비비더니 자신의 머리를 여러 번 내려쳤다. 쓸모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머리가 멍해질 때까지 내려쳤으나 답답한 심정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도대체 이런 무공실력으로 내가 뭘 믿고 아가씨를 호위해왔을까?
일봉의 머릿속에 자신의 무공을 비웃던 자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천산산맥에서 만났던 설랑을 비롯해서 부맹주와 남천단주 원무개, 귀면쌍살과 천옥랑.... 그리고 자신과 동년배이거나 어리지만 무공은 더욱 훌륭한 기하진과 석추명의 얼굴도 스쳐 지나갔다.
결국 관건은 훌륭한 스승을 만나서 무공을 배우는 것이었다. 천옥랑이 자신을 비웃으며 했던 말이 사실은 진실이었다. 무공은 어떤 사문을 만나느냐에 따라 정해진다는 말.
한참 번뇌에 빠져있던 일봉은 드르륵 문 열리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장주님께서 찾으십니다.”
문을 연 사람은 임가장 장주전의 시비였다. 그러고 보니 바깥에는 어느새 어둠이 내려있었다.
“유시(酉時)가 훨씬 지났구나.”
일봉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임예린이 사라지고 난 후 일봉은 매일 유시가 되면 임풍에게 그날의 상황을 보고했다. 임예린을 찾지 못했으니 사실 뭐 특별할 것도 없는 보고였다. 하지만 임호는 매일 자신의 보고를 기다렸다. 오늘도 임예린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는 말을 임풍은 임예린이 아직 살아있다는 뜻으로 알아들으며 마음의 위안으로 삼았다. 그런 임풍을 볼 때마다 일봉은 늘 죄스러워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임 장주님, 일봉입니다.”
“그래, 들어오게나.”
임예린이 사라진 이후로 기력이 많이 쇠잔해진 임풍의 목소리가 문밖으로 들려왔다. 기침 소리가 잠시 뒤를 이었다.
일봉은 오늘도 임예린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는 말을 또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임풍의 방에는 임풍의 동생인 임호가 와 있었다.
“오랜만이로군. 일봉. 풍천숙이 죽고 나서 처음 보는 것 같구먼.”
일봉은 임호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인상이 굳었다. 풍천숙은 자신의 스승이자 아버지 같은 분이었다. 풍 대주는 임가장 호위라는 자신의 임무를 끝까지 다하다가 돌아가셨거늘 임호는 마치 풍 대주가 노름이라도 하다가 죽은 것처럼 심드렁하게 얘기하는 것이 아닌가.
임풍이 일봉의 기분을 눈치채고 그런 임호를 꾸짖었다.
“어허, 이 사람. 망자에 대해서 어찌 그렇게 경망스럽게 얘기하는 건가? 풍 대주만큼 우리 집안에 충직한 사람도 없었네.”
“원, 형님도. 집안에서 부리는 수족 하나가 죽었을 뿐인데 예의가 지나치십니다. 그리고 탁 까놓고 얘기해서 풍 대주가 죽은 것은 그 친구 실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 아닙니까? 다달이 호천대에 들어가는 돈을 생각하면 오히려 화를 내시는 게 마땅하지요.”
“어허, 이 사람이!”
임풍이 노기를 띠자 임호가 능글맞게 웃으면서 일봉에게 말했다.
“내 말이 틀렸는가? 일봉?”
“아닙니다. 적보다 무공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니까요.”
일봉은 그 말을 하면서 임호를 바라보았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꾹 쥔 주먹이 부르르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임호가 그런 일봉을 보며 히죽 웃었다.
“어허, 임호 자네는 그 말버릇을 고치지 않으면 언젠가 크게 후회할 날이 있을 것이네. 그건 그렇고, 일봉 자네가 성도(成都)에 좀 다녀와야겠네.”
“성도라면, 사천성 지부에 다녀오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사천성 지부에 문제가 좀 생겼어.”
임풍이 인상을 찌푸리더니 혀를 두어 번 찼다. 그러자 임호가 눈치 빠르게 끼어들었다.
“형님께서 또 말하기 불편하실 테니 내가 대충 말해주겠네. 자네도 알겠지만 우리 상단의 성도 지부는 사천, 귀주, 운남 대리, 대월, 몽골 등에서 오는 모든 물품의 요충지이네. 상단 전체에서 유통되는 물품의 삼분의 일이 성도에서 집결하여 여기 남경으로 올라오지.”
임호의 말에 일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저도 대충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사천성에 녹림 도적들이 활개를 치는 바람에 물품운송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네. 문제는 그 도적들이 보통 도적들이 아닌 모양이야. 천산산맥을 주름잡던 도적떼들이었다고 하더군. 무슨 적비랑이라던가, 흑비랑이라던가....”
임호의 말이 떨어지자 일봉의 눈에서 번쩍 섬광이 일었다. 적비랑이라면 예린 아가씨를 납치해갔던 설랑의 패거리 놈들이 아닌가! 일봉의 머릿속에 문득 자신을 무시하던 온몸이 새하얀 설랑의 모습이 떠올랐다. 언젠가 반드시 만나 그때 당한 수모를 갚아 주리라 생각했건만 이렇게 자신의 앞에 나타날 줄이야.
“적비랑이라면 예전에 살말건으로 가던 길에 만났던 도적 떼가 아닌가? 당시도 참 위험했었네만 일봉 자네 덕분에 예린이를 무사히 되찾았었지....”
임풍은 말을 하다가 잠시 멈추었다. 옛 생각을 하는 듯했다.
“....해서, 나는 일봉 자네가 호천대를 이끌고 가서 물품 호위를 좀 맡아주면 좋겠네. 이미 겪어보았으니 그놈들의 수법도 알 테고 말이야. 이번에 물품이 제때 올라오지 못하면 우리 상단이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어.”
적비랑 패거리들이 왔다면 분명히 설랑 그놈도 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연 온몸에 투지가 강렬히 일면서 주먹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아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잘 알겠습니다. 장주님.”
“아우가 나를 대신해서 성도로 내려가기로 했으니 같이 내려가면 될걸세.”
임풍의 말에 임호가 일봉에게 친한 척을 했다.
“이제 내 목숨은 자네 손에 달려 있네. 잘 부탁하네. 허허허.”
임호의 말에 일봉은 가타부타 말없이 잠시 머리를 숙이고 임풍에게 다시 물었다.
“그런데 아가씨를 찾는 일은 어떻게 할까요?”
“그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겠지. 일단 상단의 일이 위중하니 자네는 물품 호송 건에 신경을 좀 써주게나.”
임풍의 기색이 침울했다. 다시 예린 아가씨 생각을 하는 듯했다.
그때 문밖에서 장 총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주님, 장주님!”
임풍이 말을 하다가 장 총관의 목소리에 잠시 말을 멈추었다. 임풍이 사람들과 중요한 얘기를 할 때는 한 번도 방해한 적이 없었던 장 총관이 이번에는 어찌 된 일인지 또 다급하게 임풍을 불렀다.
“장주님, 소인 장 총관입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급한―.”
임호가 문을 벌컥 열어젖혀 장 총관의 말을 끊으며 호통을 쳤다.
“아랫것들이 방자하기 짝이 없구나. 주인어른이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어디서 감히 소란을 부리는 게야!”
임호의 말에 장 총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나이가 60이 넘은 장 총관에게는 임풍도 함부로 하대하지 않고 늘 점잖게 대우했었다. 그런데 임호의 말 한마디에 자신이 졸지에 ‘방자한 아랫것’으로 격하되자 충격을 받은 듯 얼른 말을 잇지 못했다.
임풍은 못마땅한 눈빛으로 임호를 한번 쳐다보고는 장 총관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인데 그러는가?”
“그, 그것이.... 아, 아, 아....”
장 총관은 너무 놀라면 말을 더듬는 버릇이 있는데 지금이 딱 그 상황인 듯했다. 임호는 장 총관을 한심한 듯 바라보다가 임풍을 돌아보며 말했다.
“형님, 아랫것들 기강부터 좀 잡아야겠습니다. 저한테 맡겨주십시오. 당장 저 늙은 것부터 치도곤을 몇 대 쳐야겠어요.”
일봉은 임호가 집주인 행세를 하며 설레발을 치자 가뜩이나 불편한 심기를 더욱 참기 어려워 임호의 뒤통수만 노려보고 있었다.
그때 장 총관의 뒤에서 꿈에도 그리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숙부님께서 언제부터 저희 집안일에 그렇게 관심이 많으셨는지요?”
바로 오매불망 기다리던 임예린의 목소리였다.
“예린아!”
임풍은 예린이 나타나자 신발도 신지 않고 마당으로 달려갔다.
“네가 돌아왔구나. 드디어 돌아왔어!”
임풍은 딸을 안고 눈물을 흘렸다.
“염려 끼쳐서 죄송해요. 아버지.”
임예린도 간만에 임풍을 보자 눈물을 글썽였다.
“아니다. 아니야! 이렇게 무사히 돌아오니 정말 꿈만 같구나. 정말 다행이야!”
임풍은 임예린을 품에 안고 몇 번이고 얼굴을 확인했다.
임예린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앓아누웠던 임풍의 아내도 안채에서 급히 달려왔다. 방 부인은 임예린을 얼싸안고 울며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얼굴이며 몸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일봉도 임풍 부부처럼 임예린에게 한달음에 달려가고 싶었지만, 꾹 참은 채 하염없는 눈길만 던졌다.
괜찮으십니까, 아가씨? 이렇게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제 불찰로 아가씨를 위험에 빠뜨렸습니다.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그리고....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임예린을 바라보는 일봉의 눈빛에는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무수한 말들이 담겨 있었다. 그런 일봉의 마음이 전달되었는지 그때 임예린이 문득 고개를 들어 방 부인의 어깨너머로 일봉을 바라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일봉은 그제야 임예린이 돌아왔다는 실감이 났다.
한편, 임호는 임예린이 돌아오자 다소 충격을 받은 듯했으나 노련한 장사치답게 금세 표정을 싹 지우고 평소대로 능글맞은 미소를 띠었다.
“무사했었구나. 네가 없어지고 난 뒤 형님 내외분께서 정말 노심초사하셨다.”
“감사합니다. 숙부님.”
“워낙 네 행방이 묘연하여 혹시라도 송장 치르는 게 아닌가 염려했더니 이렇게 무사히 돌아왔구나.”
조금 전, 풍 대주의 죽음을 무심히 말하던 임호에게 가뜩이나 화가 나 있던 일봉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결국 한 마디 내뱄었다.
“도방 어르신, 말씀이 좀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
일봉의 몸에서 송곳 같은 기세가 일었다. 무공을 모르는 사람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기운이었다.
“이 사람, 뭘 그리 정색하는가? 반갑다고 하는 소리를 가지고. 허허...허허허.”
임호가 어색하게 웃었지만 아무도 동조해 주지 않았다.
“형님, 그럼 저는 일이 있어 이만 가보겠습니다. 질녀가 돌아왔으니 간만에 가족끼리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임호는 자신을 바라보는 임풍의 눈빛도 좋지 않자 서둘러 인사를 하고 허둥지둥 대문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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