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 광세일소_한추영 - 1412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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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화. 십 년 만의 만남 (3)
“그리고....”
부맹주가 고개를 돌려 임예린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임 소저가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들었는데 마교 놈과 함께 나타난 걸 보면 역시 마교에서 납치했던 모양이군.”
부맹주를 바라보는 임예린의 눈길이 분노로 가득 차 부들부들 떨렸다.
“그게 무슨 ―!”
“안 그렇소, 기 단주?”
부맹주의 말에 항의하려던 임예린의 말은 부맹주의 다음 말에 가볍게 묵살되었다.
“기 단주도 조금 전에 저자가 임 소저를 납치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소?”
부맹주가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기하진을 바라보았다. 기하진은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채 아무 소리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그 소리를 한 것은 석추명에게 화를 돋워서 좀 더 적극적으로 싸우도록 유도하려던 방편이었다. 그래야 이 자리를 빠져나갈 수 있으니까. 그런데 저 능구렁이 같은 부맹주가 나타나면서 일이 완전히 꼬여 버렸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렸다. 자신의 입으로 한 말을 다시 번복할 수도 없었다.
석추명은 아직도 자신의 말을 이해 못 하고 무슨 뜻이냐는 눈초리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기하진은 답답한 마음에 검을 휘두르는 팔에 힘을 주었다.
그 순간, 천림원 쪽에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철정(鐵釘) 네 자루가 기하진과 부맹주를 노리고 날아왔다.
쐐액.
던진 자의 내공이 상당한 듯 자그마한 네 자루의 철정이 내는 파공음이 엄청났다.
기하진은 전력을 다해 석추명을 몰아붙이고 있던 터라 등 뒤에서 철정이 날아오는 것을 느꼈지만 막을 방도가 없었다.
그 순간, 허각이 몸을 솟구치더니 검을 비스듬히 뉘어 철정 두 자루를 쳐냈다. 그러나 철정의 기세가 얼마나 세었던지 철정을 쳐낸 허각 도장의 손목이 한참이나 부르르 떨렸다. 공력이 절대 허각 도장의 아래가 아닌 듯했다.
동시에 부맹주를 향해 날아가던 철정은 원무개의 대도에 막혔다. 무림맹 고수 중에서도 덩치가 큰 편이며 힘으로는 당할 자가 없는 원무개가 철정 두 자루를 막는데 두 팔의 힘을 모두 쓰고도 모자라서 한쪽 다리를 뒤로 뻗치고 밀리지 않으려고 버텨야 했다.
그 모습에 사람들 모두 입을 떡하니 벌리고 다물지를 못했다. 도대체 철정 두 자루의 힘이 얼마나 강하기에 허각과 남천단주가 저토록 힘들어한단 말인가!
“웬 놈이냐!”
허각은 철정이 날아온 방향으로 신속히 몸을 날렸다. 허각의 손목이 떨리는 모양에 인상이 굳은 왕취선도 허각 도장의 뒤를 연이어 쫓아갔다. 허각 도장 혼자서 상대할 적이 아니라고 생각한 듯했다.
“적에게 한패가 있다. 잡아라!”
원무개도 소리치며 허각과 왕취선을 뒤따르자 남천단 조장들과 조원들도 우르르 달려갔다.
철정 네 자루로 천림원 앞마당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석추명을 빼낼 기회만 노리던 기하진에게는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도와주기라도 한 것만 같았다.
기하진은 검을 맞댄 석추명에게 몸을 바싹 붙이고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즉시 동북방으로 달아나. 내가 추격하는 척할 테니.”
석추명은 기하진의 말을 즉시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용봉단주, 오늘은 이 몸이 좀 바쁘니 다음에 만나 제대로 겨루어 봅시다.”
석추명이 말을 끝내기 무섭게 몸을 날려 한쪽 팔로 임예린을 붙잡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경공을 전개했다.
“멈추시오!”
기하진은 다른 사람들에게 들으라는 듯이 크게 소리치며 석추명의 뒤를 쫓았다. 그 소리에 부맹주가 몸을 돌려 기하진과 석추명을 바라보았다. 부맹주에게 수상하게 보이지 않으려면 반드시 바싹 쫓아야 할 것이다. 부맹주는 여러 차례 자신의 무공을 본 적이 있어서 조금이라도 어영부영했다가는 금세 의문을 품으리라고 생각했다. 지금으로서는 석추명의 경공이 자신보다 더 뛰어나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때 부맹주가 한쪽 발을 구르는가 싶더니 눈 깜짝할 새 기하진을 제치고 석추명을 쫓았다. 여태 한 번도 부맹주의 무공을 본 적이 없던 기하진은 부맹주의 신법에 가슴이 벌렁거렸다.
쏴아아악.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부맹주의 몸이 튕기듯 앞으로 나갔다. 가히 청성제일고수라는 소리를 들을 만했다. 청성파 무공은 천옥랑의 무공밖에 보지 않았던 기하진은 속으로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저 정도면 맹주님에 필적할 만한 실력이야!
“멈춰라!”
부맹주가 석추명을 쫓으면서 손을 앞으로 내밀더니 중지를 모아 손가락을 튕겼다.
피융!
손끝에서 화살이라도 발사되는 듯 기묘한 소리가 났다. 손가락으로 허공을 때린다니, 그게 무슨 힘이 있을까? 기하진은 의구심이 들었지만 그 의구심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으윽!”
앞으로 달려가던 석추명이 갑자기 종아리를 붙잡으며 쓰러진 것이다. 종아리에는 손톱만한 크기의 상처가 나서 피가 철철 흘러나왔다.
“오라버니!”
석추명이 쓰러지자 임예린은 사색이 되어 석추명을 붙잡았다.
“오라버니, 괜찮아요?”
“괜, 괜찮아.....”
얼굴이 파랗게 질려 어쩔 줄 몰라 하는 임예린을 위로하며 석추명이 억지로 일어섰지만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절뚝거렸다. 그 모습을 본 기하진은 온몸에 핏기가 사라지는 듯했다. 이제 끝이다!
“크하하하.”
어느새 두 사람 앞으로 다가온 부맹주가 하늘을 쳐다보며 껄껄껄 웃더니 웃음을 멈추고 싸늘한 눈빛으로 석추명을 바라보았다.
“감히 무림맹에 잠입하고도 살기를 바랐더냐? 내 오늘 너를 처단하여 마교 놈들에게 단단히 본때를 보여주마.”
부맹주가 또다시 손가락을 튕길 듯이 오른손을 쳐들었다. 부맹주의 탄지공(彈指功)은 조금 전 상당한 거리가 있을 때도 놀라운 위력을 발휘했었는데 이렇게 가까운 거리라면 뼈라도 부러뜨릴 것만 같았다.
“썩 가버려라!”
부맹주가 공력을 모으더니 오른손 중지로 또다시 탄지공을 격출했다. 일촉즉발의 위기였다.
“안돼!”
석추명의 가슴에 구멍이 뚫릴 것이라고 생각한 기하진은 너무 놀라 소리를 질렀다.
바로 그때 천옥랑이 검을 옆으로 비스듬히 누이며 부맹주와 석추명 사이에 정확히 끼어들었다.
땅!
귀청을 울리는 날카로운 금속성이 나더니 천옥랑의 검이 중간에 뚝 부러져 나갔다. 천옥랑이 검으로 부맹주의 탄지공(彈指功) 공격을 막아낸 것이다. 탄지공은 청성파 고수들 중에서도 무공이 최절정에 오른 극소수만 구사하는 무공이었다. 천옥랑은 아직 탄지공을 구사할 줄 몰랐으나 이 무공에 대해서 알았기 때문에 마침 제때 막아낸 것이다.
“이놈이...!”
부맹주는 자신의 아들이 자신을 막아설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기에 두 눈을 부릅뜨고 천옥랑을 노려보았다.
“네 이놈! 이게 무슨 짓이냐!”
부맹주의 입에서 호통 소리가 튀어나왔다. 부맹주는 차가운 눈동자로 천옥랑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때를 틈타 석추명과 임예린은 절뚝거리며 달아났지만 부맹주는 천옥랑을 노려볼 뿐 두 사람에게는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아버지시죠?”
천옥랑이 부맹주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아버지의 말을 거역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던 천옥랑이 아버지에게 대든 것이다.
“그게 무슨 소리냐?”
“임 소저 말입니다! 임 소저를 납치한 사람이 아버지 아닙니까?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임 소저가 맹 안에 있는 것입니까?”
“이놈이 실성한 게로구나! 감히 제 아비를 모함하다니! 네놈도 기 단주가 하는 말을 똑똑히 듣지 않았느냐? 마교 놈이 납치한 것이라고!”
천옥랑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부맹주를 쏘아 보았다. 자신의 아버지지만, 아니 자신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 잘 알기에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이기도 했다.
그때 철정을 쏜 사람을 잡으러 갔던 허각과 원무개 일행이 돌아왔다.
“아니, 기 단주, 수라대주는 어떻게 되었소?”
왕취선이 기하진에게 물었다.
“놓쳤습니다.”
그 말에 원무개가 기하진을 비웃었다.
“흥! 잘난 척 큰소리치더니 기껏 한다는 소리가 놓쳤다는 소리냐? 기 단주 네놈이 혹시 저들을 일부러 놓아준 게 아니냐?”
원무개의 말에 부맹주가 고개를 돌리고 원무개를 쏘아보았다. 난데없이 부맹주의 차가운 눈빛을 받은 원무개는 영문을 모르고 머쓱해져서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했다. 사람들은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누구도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철정을 날려 보낸 자는 어떻게 되었소?”
잠시 뒤 정적을 깨며 부맹주가 허각에게 물었다. 허각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철정을 쏜 기세로 볼 때 아무래도 마교의 사대 장로 중 한 명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정말 대단한 공력이었습니다.”
평소 칭찬에 인색한 허각 도장의 입에서 적의 무공을 칭찬하는 말이 나오자 부맹주는 불쾌한지 ‘으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허각 도장의 말에 왕취선이 맞장구를 쳤다.
“제가 볼 때는 마교 사대 장로들보다 한 수 더 위인 듯싶습니다. 하지만 제아무리 무공이 높다 한들 어떻게 그토록 기척도 내지 않고 숨어있다가 달아났을까요? 우리 무림맹의 지형을 샅샅이 알지 않고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늘로 솟았거나 땅으로 꺼지지 않은 다음에야....”
왕취선의 말에 허각 도장이 머리를 끄덕였다.
“왕 선생의 말씀이 맞습니다. 어떻게 보면 맹 내에 적과 내통하는 자가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허각의 말에 부맹주가 일부러 헛기침을 크게 내뱉었다.
“그럴 리가 있겠소? 하지만 마교 놈들의 무공이 갈수록 진보하는군. 어허 이것 참!”
부맹주의 말에 허각도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하진은 그토록 절묘한 순간에 철정을 날려 석추명과 임예린을 구해준 사람이 누굴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허각 도장을 놀라게 할 만큼 무공이 고강한 사람이 하나 있기는 했다. 기하진은 고개를 들고 천림원 꼭대기에 있는 천림비고를 슬쩍 쳐다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천림비고에 숨어있는 고수에게는 석추명을 구해줄 이유가 없었다.
어느새 냉정을 되찾은 부맹주가 원무개에 말했다.
“원 단주는 지금 즉시 달아난 수라대주를 쫓으라! 그놈이 부상을 입었으니 멀리 가지 못했을 게야. 그놈은 천린상단 임 소저를 납치한 죄까지 있으니 반드시 잡아야 한다. 부득이하면 죽여도 좋다.”
“존명!”
원무개는 부맹주와 알 수 없는 눈빛을 주고받더니 남천단원을 이끌고 사라졌다.
기하진은 저들이 석추명과 임예린을 찾기 전에 자신이 먼저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부맹주와 원무개가 눈짓을 주고받은 것이 아무래도 마음이 걸렸다. 한시가 급했다.
기하진이 부맹주에게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그럼 저는 맹주님께서 명하신 임무가 있어서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기하진의 말에 부맹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하진이 허각과 왕취선에 인사를 하고 발걸음을 떼자 천옥랑이 곧장 따라붙으며 말했다.
“아 참, 그렇지. 중요한 일을 잊고 있었군. 빨리 서두릅시다, 기 단주.”
천옥랑은 혹시라도 붙잡힐세라 기하진보다 앞서 나가며 부맹주와 천림원 강사들에게 인사했다.
“일이 있어서 먼저 갑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뒤에서 부맹주의 노성이 터져 나왔다.
“옥랑이 네 이놈! 당장 거기 서지 못할까!”
갑자기 부맹주가 화를 내자 영문을 모르는 허각과 왕취선 등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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