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63화 (63/201)

#   63 - 광세일소_한추영 - 1408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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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화. 십 년 만의 만남 (2)

멀찌감치 떨어져 사람들 속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기하 진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십여 년 만에 만난 형의 모습이 애처롭기만 했다.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차마 앞으로 달려나갈 수는 없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하필이면 무림맹 안에서 마교의 대주와 무림맹의 단주로 만나 무슨 말을 할 수가 있을까?

석추명을 쳐다보던 기하진의 시선이 임예린을 향했다. 임예린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남천단원의 칼끝이 임예린의 몸에 닿으려고 할 때마다 가슴속이 요동쳤다.

임가장에서 임예린을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자신에게 잘 있었냐고 묻던 눈빛이 떠올랐다. 그때 다시는 헤어지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다시는 어리석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리라 다짐했건만, 지금 자신은 눈앞에서 위험에 처한 임예린을 또 그저 쳐다만 보고 있었다.

기하진은 일봉에게서 임예린이 사라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부맹주가 관련되어 있으리라 짐작했다. 부맹주는 수상한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자신도 남몰래 임예린을 찾으려고 백방을 수소문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임예린이 천림비고에서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석추명과 함께.

임예린을 바라보던 기하진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예린의 모습이 너무 위태로웠다. 옥랑이 이 녀석, 왜 이렇게 더딘 거야.

“임 소저에게서 썩 물러나라!”

그 순간 천옥랑이 공중에서 임예린의 옆으로 내려오며 임예린을 압박해오던 검을 모두 떨쳐냈다.

“임 소저, 괜찮습니까?”

천옥랑의 물음에 임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급했던 얼굴에 안도하는 기색이 퍼졌다. 늘 안하무인에 거들먹거리기 좋아하는 천옥랑이었지만 이때만큼은 정말 반가웠으리라.

남천단원들은 부맹주의 자제이자 용봉단의 부단주인 천옥랑이 나타나자 임예린을 공격하지 못하고 모두 검을 거두었다.

“멍청한 녀석들 같으니라고! 이 분이 누구신 줄 아느냐? 무림맹을 제일 많이 후원하시는 천린상단 임 대방님의 무남독녀시다. 감히 임 소저께 검을 겨누다니!”

천옥랑의 호통에 남천단원들이 황급히 물러났다.

임예린이 위기에서 벗어나자 석추명도 그제야 마음에 여유가 생기는 듯했다.

석추명이 고개를 돌려 왕취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제대로 한번 싸워 봅시다. 왕 선생.”

석추명의 검이 왕취선의 어깨를 사선으로 그으며 무겁게 떨어져 내렸다. 석추명이 집중하자 검의 기세가 바뀌었다. 몸에 입은 상처도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듯했다.

태산이 찍어 누르듯 둔중하게 휘두르던 검이 순식간에 바람에 날리는 민들레 씨앗처럼 한없이 가벼워졌다. 석추명의 공격은 진중하면서도 깊이를 알 수 없는 현기가 서려 있었다. 왕취선의 변칙적인 담뱃대 공격이 이어졌지만 아까와는 달리 금방 승기를 잡지 못했다.

기하진이 보기에는 오히려 석추명의 무공이 명문정파의 무공이요, 왕취선의 무공이 마교의 무공으로 보일 정도였다. 게다가 석추명의 무공에서 이상하게도 알 수 없는 익숙함을 느꼈다. 뭔가 자신의 무공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기하진은 눈을 똑바로 뜨고 석추명의 검법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알 리 없는 무공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맹주가 자신에게 전수해준 창궁무애검법이나, 천림비고에서 음양사자에게 받았던 천마검법에 절대 뒤지지 않을 검법이었다.

석추명이 펼치는 검법에는 일망무제의 운해를 뚫고 올라온 붉은 태양처럼 장중한 기운, 천 길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폭포수 같은 도도한 기세, 그리고 눈 덮인 설원에 외발로 홀로 선 학과 같은 고고한 기상이 서려 있었다. 저 검법을 내가 펼친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마도 중양신공과도 멋들어지게 어울릴 것이다.

찌지직! 석추명의 검에 왕취선의 옷자락이 걸려 길게 찢어졌다. 다행히 상처가 깊지는 않았지만 왕취선은 그 한 수만으로도 상당히 놀란 듯했다.

“이게 정말 뢰정의 검법이란 말이냐?”

왕취선은 믿기 어렵다는 투로 물었다.

“제가 스승님께 배웠으니 스승님의 검법이 맞을 것입니다.”

“수라검 뢰정이 마교의 사대검왕 중 으뜸이라고 하더니 과연 검법이 고명하기 짝이 없구나. 이 정도의 검법이라면 검의 명가인 무당파나 곤륜파와도 겨루어도 전혀 뒤지지 않겠어.”

왕취선은 옆에 무당파 장로인 허각 도장이 있다는 사실을 잊은 듯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수라검 뢰정과 만나 자웅을 겨루고 싶었는데 이 검법이 뢰정의 검법이라면 아직은 안 되겠구나.”

왕취선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발 짝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허각에게 눈길을 돌렸다.

“소생은 아직 역부족이군요. 아무래도 허 도장께서 나서셔야 하겠습니다.”

왕취선이 담담한 표정으로 물러섰다.

기하진은 두 사람의 대결을 보면서 왕취선이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을 즉시 알아챘다. 이유를 알 수는 없으나 왕취선이 자신의 진짜 실력을 보이지 않고 허각 도장에게 싸움을 떠넘기는 듯했다.

기하진은 무공이 아직 두 사람을 앞서지는 못하지만, 무림맹주 등 대가들에게서 무공을 배웠고 또 그동안 귀면쌍살, 음양사자 등 초절정고수들과 실전에서 부딪혀 봤기 때문에 안목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기하진은 왕취선의 속내가 궁금했다. 설마 허각 도장의 실력을 떠보려고? 하지만 그럴 이유는 없다. 어차피 두 사람은 천림원 강사, 아마 서로의 실력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왕취선이 다 이겨가던 싸움을 역부족이라고 하며 물러나자 3조 조장이 보다못해 다시 소리를 질렀다.

“이게 무슨 비무시합인 줄 아십니까? 저놈은 무림맹을 침입한 자객이란 말입니다. 당장 인정 사정 볼 것 없이 몰아쳐서 저놈을 잡아야 한다니까요!”

하지만 왕취선은 3조 조장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는 듯, 그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허각 도장이 굳은 표정으로 한 걸음 성큼 앞으로 나왔다. 꼬장꼬장 하기는 했으나 평소에 인자하던 두 눈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기하진은 그 모습에 가슴이 철렁했다. 허각 도장은 왕취선처럼 석추명을 봐줄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이 분명했다. 기하진이 그동안 지켜봤던 허각 도장은 무당파 무공에 대한 자부심이 무척 강한 사람이었다.

강호의 무공을 논할 때 누구나 소림을 제일 앞에 놓는다. 강호의 누구도 이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지만 허각 도장만큼은 예외였다. 무공 강의 시간 중에 소림, 무당을 나란히 언급해야 할 때면 늘 무당, 소림이라고 했다. 허각 도장 앞에서 소림 무공이 무당 무공보다 낫다고 하는 사람은 꼭 자신의 말을 증명해 보여야 했다. 그것 때문에 지학이 얼마나 피곤해했던가!

어쩌면 아까 석추명의 검법이 무당과 곤륜을 넘어설지도 모르겠다고 했던 왕취선의 말에 자극이 되었을 수도 있다. 저 자존심 강한 노인네는 마교의 검법으로는 무당을 넘볼 수 없다며 아마 이 자리에서 자근자근 밟으려 들 것이다. 그리고 허각 도장은 그럴 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친 기하진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경공을 발휘해 허각 도장 앞으로 튀어나갔다. 허각 도장이 직접 석추명을 상대하지 못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기하진이 튀어나오자 왕취선과 허각 도장뿐만 아니라, 거기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기하진을 향했다.

“허 도장님, 상대가 마교의 수라대주라 하니 제가 한번 상대해 보고 싶습니다. 마교에 수라대가 있다면 무림맹에는 용봉단이 있지 않겠습니까?”

기하진의 말에 남천단 조장들의 얼굴빛이 변했다. 누가 들어도 남천단을 무시하는 말처럼 들렸다. 그렇지 않아도 붉으락푸르락하던 남천단 조장들의 표정이 똥 씹은 듯 일그러졌다.

“하하하. 이거 볼 만하겠구먼. 마교에 검의 신동이 있다면 우리 무림맹에는 무림 신동이 있었지. 두 신동 간의 대결이라. 하하하, 정말 볼 만하겠어.”

왕취선이 손바닥을 치며 좋아했다. 기하진이 나서자 허각의 표정이 부드러워지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우리 무림맹에도 인재가 있음을 보여주어야지. 좋다. 기 단주께서 직접 수라대주를 상대하시게나.”

허각 도장이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기하진에게 존칭을 써 주었다. 무림맹의 명예를 생각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기하진은 허각에게 짧게 머리를 숙인 뒤 석추명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포권을 취했다.

“무림맹 용봉단 단주, 기하진이라고 합니다.”

석추명의 눈이 살짝 커지는가 싶더니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반갑소이다. 백련교의 수라대주 석추명이라 하오.”

애써 담담하게 인사하는 석추명의 눈빛 너머로, 기하진은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던 어릴 때 석추명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기와 예린이 배를 곯게 하지 않으려고 시장에서 전낭을 훔치다가 걸려서 된통 맞아 눈에 시퍼렇게 멍이 든 채 웃던 모습이었다. 지금도 가끔 꿈속에서 보기도 하는 미소였다. 그 꿈을 꾸고 나면 가슴 한구석이 왠지 허전하기도 했고, 찡하게 아프기도 했다. 그 석추명이 지금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이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적으로.

추명이 형과 이런 식으로 마주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지금으로써는 이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석추명과 임예린, 두 사람을 무사히 무림맹 밖으로 내 보기 위해서는.

기하진이 한발 앞으로 성큼 내디디면서 검을 쭉 찔러 들어갔다. 쾌속 검법의 극치였다.

맹주가 자랑하는 창궁무애검법이었다.

“오오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천단원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자신들의 조장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 옆으로 잔뜩 인상을 찌푸린 조장들도 서 있었다.

기하진이 한 발 밀고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석추명은 얼른 한 발 뒤로 물러나며 검을 크게 휘둘러 기하진의 공격을 막아냈다.

쨍! 검이 서로 부딪치는 청랑하고도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석추명의 눈이 놀란 듯 살짝 커지더니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살짝 걸쳤다. 공격이 이어질수록 석추명의 입가에 배인 미소와 눈빛이 더욱 따스해졌다. 아마도 지난 10여 년간 떨어져 있으면서 내가 이런 무공을 익혔음을 대견하게 생각하리라.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엄중한 상황인 줄도 모르고.

어릴 때도 그랬다. 석추명은 기하진이 하는 일은 무슨 일이든지 칭찬해주었고, 대견해 했고, 그리고 항상 기하진에게 양보해 주었다. 자신이 설령 나쁜 생각을 품고 있어도, 일부러 삐딱하게 대해도 석추명은 늘 한결같았다. 바보 같은 형. 어릴 때도 그러더니 커서도 마찬가지였다.

챙, 챙, 챙, 챙. 기하진의 쾌속 공격이 쉴 틈을 주지 않고 이어졌다. 강하게 몰아부쳤지만 석추명은 왕취선과 싸울 때와는 달리 전력을 다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기하진의 무공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알아보려는 기색이 강했다. 이 바보 같은 형아. 좀 더 힘껏 덤비라고! 그렇게 설렁설렁하다가는 저 노인네들이 금방 눈치챈단 말이야.

기하진은 자신도 모르게 허각 도장을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허각 도장이 눈을 가늘게 뜨고 석추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각 도장이 깊은 생각에 잠기거나, 뭔가 마음에 복잡한 일이 있으면 나타나는 표정이었다. 혹시 석추명이 전력을 다하지 않는 걸 벌써 알아차리지는 않았는지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석추명을 자극해서 좀 더 적극적으로 싸움에 임하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천림원에 잠입한 것도 모자라서 임 소저까지 납치하다니, 정말 대단하시오!”

“내가 납치를 하다니, 그게 무슨...?”

기하진은 아까부터 자신의 얼굴에 화살처럼 내려꽂히는 임예린의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얼굴이 따끔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기하진은 고개를 들어 임예린의 눈을 마주 대할 자신이 없었다. 10년 만에 만난 큰오빠에게 왜 검을 겨누냐고 자신을 질책하고 원망할 임예린의 눈을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하... 아니, 기 단주. 납치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내가 왜 예린이를....”

석추명의 눈빛에 의혹이 떠올랐다. 10년 만에 처음 만난 동생의 입에서 나온 소리가 자신을 의심하는 소리이니 답답해할 만도 했다. 그러니 이제 사력을 다해 덤비라고! 상황 파악을 좀 하라고. 이 답답한 형아!

기하진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천마검법을 시전했다.

쏴아악! 검이 반원을 그리며 석추명의 어깨를 공격해 들어갔다. 검이 내려치는 기세에 주변의 공기가 모조리 검에 빨려드는 것만 같았다. 석추명의 눈에 살짝 당황한 빛이 스쳤다.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막기 힘든 한 수였다.

챙!

두 사람의 검이 부딪치자마자 등 뒤에서 기하진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기 단주는 상황 파악이 빠르군.”

“부맹주님을 뵙습니다.”

남천단 조장들과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모두 허리를 숙여 예를 취했다. 어느새 그 자리에는 부맹주 천계심이 남천단주 원무개를 대동하고 와 있었다.

“야심한 시각에 천림원에 잠입한 자가 있다기에 왔더니 역시 마교 놈이었군. 하하하.”

부맹주의 웃음소리가 밤공기를 타고 퍼져 나갔다. 석추명과 검을 맞댄 기하진의 마음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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