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 광세일소_한추영 - 1406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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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화. 십 년 만의 만남 (1)
“이런 빌어먹을! 어째서 스무 명도 넘는 녀석들이 저놈 하나를 상대하지 못한단 말이냐!”
남천단 1조 조장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평단원들로는 저놈을 잡을 수 없소. 우리도 마찬가지일 거요.”
3조 조장의 말에 1조 조장이 3조 조장에게 눈알을 부라렸다.
“무림맹 조장이라는 사람이 지금 그것도 말이라고 하는 거요? 그럼 저놈에게 넙죽 길이라도 터주자는 말이오?”
남천단 조장들끼리 옥신각신 싸우고 있을 때 모여있던 무리에서 돌연 두 사람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천림원 강사 왕취선과 허각 도장이었다.
“어리석은 것들. 남천단원들은 썩 뒤로 물러서라!”
왕취선과 허각은 석추명의 앞뒤를 가로막고 섰다.
“네놈의 무공이 과연 명불허전이로구나. 이름이 무엇이냐?”
허각 도장이 석추명에게 물었다. 석추명이 바라보니 자신을 가로막고 선 도장의 전신에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뻗어 나왔다. 지금껏 자신을 막아서던 남천단원들과는 급이 다른 고수가 분명했다.
“저는 백련교의 수라대주, 석추명이라고 합니다.”
석추명의 말에 좌중이 순식간에 조용해지더니 모든 사람의 시선이 석추명을 향했다.
허각 도장이 눈을 부릅뜨고 석추명을 노려보았다.
“수라대주라. 수라검 뢰정이 키워냈다는 검의 신동이 자네로군.”
“검의 신동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수라대주가 야심한 밤에 혼자서 무림맹을 침입해 들어왔다? 무림맹을 얼마나 하찮게 봤으면 그랬을꼬?”
이번에는 왕취선이 석추명에게 말했다. 왕취선은 말을 하면서 등 뒤에서 기다란 담뱃대를 꺼내 불을 붙여 물었다. 어떤 노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유만만한 기세로 볼 때 절대 쉬운 상대는 아닐 것 같았다.
“노인장의 말씀처럼 하찮게 봤다면 야심한 밤에 몰래 잠입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침투와 정보수집은 무림맹에서도 늘 하던 일이 아닙니까?”
석추명이 차분하게 말하자 왕취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적진에서도 이토록 침착하다니 과연 인중호걸이로군.”
왕취선이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그 모습에 남천단 조장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적을 앞에 두고 담배를 피우다니! 왕취선의 행동이 너무나 태연자약하여 마치 평소에 알던 사람에게 말을 하는 것만 같았다. 남천단 조장들은 너무 어이가 없어 허각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허각은 그 모습은 본체만체 계속 말을 이었다.
“나는 무당파의 허각이라 한다. 야심한 시각에 무림맹에 침입했을 때는 그만한 각오를 했을 터!”
석추명이 검을 고쳐잡고 자신의 앞뒤를 막고 선 허각과 왕취선을 차분하게 바라보았다. 두 사람 모두 범상치 않아 보였다.
“그렇습니다. 두 분 선배님 중 어느 분이 먼저 공격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함께 공격하시겠습니까?”
석추명의 말에 왕취선이 껄껄껄, 웃음을 터뜨리더니 허각에게 말했다.
“무림의 선배로 자처하는 우리가 후배 한 명을 두고 함께 덤빌 수는 없지요. 도장께서 괜찮으시다면 제가 수라대주의 검을 받아보고 싶습니다.”
왕취선의 말에 허각 도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시지요.”
아까부터 화가 잔뜩 나 있던 남천단 3조 조장은 왕취선과 허각 도장의 말에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게 무슨 말씀들이십니까? 두 분이 당장 합공해서 저놈을 잡아야지요. 무림맹에 침입한 놈을 앞에다 두고 무슨 강호의 법도를 따지십니까?”
3조 조장이 열불을 내며 악을 쓰자 허각 도장이 차갑게 노려보았다.
“그렇다면 자네가 직접 나서지 그러나? 침입자를 잡는 것은 어차피 남천단의 임무, 우리는 뒤로 빠지겠네.”
그 말에 3조 조장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인상은 붉으락푸르락하면서 허각과 석추명을 노려보기만 했다. 검을 잡은 손에 힘이 지나치게 들어갔는지 부르르 떨렸다.
“나는 왕팔야(王八爺)라고 하네. 이곳 천림원에서 선생 노릇을 하고 있지. 사실 내 오래전부터 자네의 스승인 수라검 뢰정과 한번 붙어보고 싶었다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자네와 한번 붙어보는 것도 좋겠지.”
왕취선이 자신을 소개하자 석추명이 선배를 대하는 예로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크하하하. 자네는 어째 하는 짓이 마교 놈 같지 않구먼. 마교라면 좀 악랄하고 화끈해야 싸울 맛이 나는데 말이야. 여하튼 좋아. 나는 선후배의 도리 따위를 따지지 않으니 먼저 공격해 들어가겠네.”
“그렇게 하시지요. 무기로는 뭘 쓰시겠습니까?”
“이놈이 네 무기라네.”
왕취선이 몇 모금 뻐끔거리며 피우던 담배를 손바닥 위에 올리고는 담뱃재를 털었다. 담뱃대를 무기로 쓴다는 말에 석추명은 어이가 없어 왕취선을 쳐다보았다. 담뱃대는 길이가 두 자가 좀 넘으며 강철로 주조한 것 같았지만, 대가 가늘어 칼질 한 번에 댕강하고 잘려나갈 것만 같았다. 근래에 바다 건너 왜에서 들어온 담배가 인기를 끌어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많았다. 백련교의 수뇌부 중에도 제법 있었다. 하지만 담뱃대를 무기로 쓴다는 것은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었다.
석추명이 어리둥절해 있는 새, 왕취선의 담뱃대가 벌써 쐐액, 공기를 가르며 번개같이 앞가슴 요혈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석추명은 정신이 번쩍 들어 검을 곧추세우며 가슴을 면밀히 보호했다. 그러자 담뱃대가 돌연 부드럽게 휘더니 검을 쥔 손목의 혈도로 공격방향을 바꾸었다.
알고 보니 혈도를 찍는 판관필이나 마찬가지군. 괜히 놀랬구나. 담뱃대가 연속해서 혈도를 찍어왔지만, 좀 기다란 판관필이라고 생각하니 딱히 이상한 것만도 아니었다.
석추명의 귀에 주위에서 수군대는 남천단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에서야 왕 선생의 실력을 보겠군. 듣자하니 맨날 술이나 처먹고 강의시간에도 말로 다 떼운다면서? 게다가 요즘에는 담배에 빠져 살고 말이야. 쯧쯧.”
“그래도 맹주님이 직접 추천했다고 하니 한 가닥 실력이 있을 테지. 그러니 직접 나서지 않았겠는가? 허각 도장께서 저렇게 깍듯이 대하는 걸 보면 결코 허각 도장 아래가 아닌 게야.”
“허각 도장은 무림맹 내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는 실력자 아닌가? 왕 노인이 정말 그렇게 고수란 말인가?”
“그거야 지켜보면 알겠지.”
석추명은 귓전에 들려오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들으며 검을 수평으로 눕혀 왕취선을 공격해 들어갔다. 왕취선도 사람들의 얘기가 들릴 텐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얼굴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다시 공격 들어가니 조심하시오.”
왕취선의 무공은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혈도를 공격하는 것으로 봐서 판관필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으나 엄밀히 말하면 혈도를 찌르는 것이 아니라 때리는 것이었다. 담뱃대 끝부분의 담배를 넣는 대통으로 혈도를 때려왔다. 게다가 몸놀림이 무학의 상도를 벗어나 전혀 예측하지 못하는 각도에서 공격해오는 통에 석추명은 적지않이 당혹스러웠다. 언뜻 보면 강시공 같기도 하고, 취팔선 같기도 했다.
석추명이 연속 삼검을 찔렀지만 왕취선은 무릎을 굽히지도 않고 몸을 뒤로 젖혀 공격을 피했다. 마치 아랫부분에 무거운 쇠심이 박힌 오뚝이 같았다.
천림원 강사라고 하더니 과연 남다른 구석이 있구나. 하지만 나도 질 수 없지.
석추명이 즉시 숭양일기검 삼도종검세(三到鐘劍勢)를 펼쳐냈다. 검을 한번 휘두르자 검신이 우웅 하고 용울음을 토해내더니, 검날이 동시에 상, 중, 하 삼단을 수평으로 가르며 달려들었다. 마치 얇은 박도 세 자루가 삼면을 동시에 자르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돌연 검세가 변하자 왕취선의 움직임이 급박해졌다. 석추명의 검날이 상중하 삼 면을 모두 점하고 잘라왔기에 어디로 피하든지 검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유일한 방어책은 자신의 무기로 석추명의 검과 부딪쳐 공격을 파괴해야 하지만 고작 두 자 남짓한 담뱃대로서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석추명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감히 담뱃대로 내 검을 받아내려 하다니 어림도 없지!
돌연 왕취선의 몸이 그대로 뒤로 넘어가더니 땅바닥에 착 달라붙었다. 자석에 쇳조각이 달라붙는 듯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그리고는 왕취선의 몸이 동심원을 그리며 잽싸게 한 바퀴 도는 것이 아닌가!
석추명은 보면서도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사람이 도대체 관절을 구부리지 않고 어떻게 저런 방식으로 움직인단 말인가! 팔다리가 뻣뻣한 강시나 육신이 없는 귀신이 아닌 다음에야 관절 하나 구부리지 않고 움직인다는 것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잠시 얼이 빠져있던 석추명은 오른쪽 발목을 타고 화끈한 통증이 올라오자 자신도 모르게 ‘헉!’ 소리를 내고 말았다. 오른쪽 발목을 왕취선의 담뱃대 대통에 얻어맞았는데 대통이 불에 달군 듯 뜨거웠던 것이다. 대통에 맞은 부분의 옷이 지지직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갔다.
석추명이 왕취선의 담뱃대를 노려보았다. 왕취선이 담뱃대를 무기로 쓰는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저 대통 부분에 무슨 비밀이 숨어있는 것이다.
석추명의 다리가 휘청거리자 왕취선이 땅바닥에 누운 그대로 담배를 다시 한 모금 빨았다.
“담뱃대 맛이 어떤가? 화끈하지 않은가? 하하하.”
발목의 혈도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데다 뜨거운 열기에 화상까지 입은 석추명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왕취선을 노려보았다.
그때 옆에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났다. 그제야 석추명은 임예린이 아직 달아나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왕취선과 싸우는데 정신이 팔려 임예린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예린아!”
석추명이 얼른 고개를 돌려보니 임예린이 남천단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남천단원들은 여자 하나를 가운데 두고 네 명이 동시에 검을 찔러대고 있었다. 임예린이 힘겹게 막아내고 있었지만 힘과 무공에서 역부족이었다. 다만 남천단원들이 임예린을 사로잡으려는지 결정적인 살수는 펼치지 않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석추명의 두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이 쓰레기 같은 놈들!”
석추명은 다리의 부상을 잊은 채 임예린을 돕기 위해 땅을 발로 박찼다. 석추명의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려는 찰나, 왕취선의 담뱃대가 발목을 걸어왔다.
“어딜 가시나? 나와 하던 일은 끝내고 가야지!”
왕취선의 담뱃대가 끄는 힘에 다시 땅바닥으로 내려온 석추명은 다급하게 임예린 쪽을 바라보았다. 남천단원들이 생각을 바꾼 듯, 검이 임예린의 몸 앞으로 쭉 뻗어 나가고 있었다. 임예린은 검을 들고 있었지만 어떻게 막아야 할지 몰라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저 기세라면 검에 가슴이 뚫리고 말 텐데. 십여 년을 기다리다가 이제야 만났는데 만나자마자 사별이라니. 안돼!
“예린아!”
석추명의 입에서 절박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석추명은 땅에 닿자마자 왕취선의 담뱃대 공격을 피한 뒤 다시 한번 몸을 공중으로 띄웠다. 하지만 왕취선의 담뱃대는 집요하게 따라붙으며 석추명을 방해했다. 다시 도약하려던 석추명의 발이 왕취선의 담뱃대에 맞아 무릎이 휘청거렸다. 승기를 잡은 왕취선의 담뱃대를 여세를 그대로 몰아 석추명의 상반신을 공격해왔다. 임예린 때문에 마음이 어지러운 석추명은 왕취선의 담뱃대에 등 한가운데를 맞고 말았다.
치지직. 옷과 살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났다.
“윽!”
석추명의 입에서 고통에 찬 신음이 새어 나왔다. 사람들은 왕취선의 담뱃대가 이토록 기이한 능력을 발휘하자 다들 놀라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왕취선의 모습 뒤로 한 발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허각 도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왕취선이 지금 석추명을 압도하며 승기를 잡고 있었지만 허각 도장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왕취선의 담뱃대를 바라보며 무엇이 못마땅한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도 했다.
석추명은 마음이 바빠졌다. 허각 도장의 무공은 이 노인장의 무공보다 절대 아래가 아닐 것이다. 허각 도장이 나서기 전에 예린이를 구해 빠져나가야 한다.
석추명은 방어는 완전히 도외시하고 또다시 임예린 쪽으로 가려고 했지만 왕취선에게 다시 저지되고 말았다. 자신은 돌보지 않고 필사적으로 임예린을 도우려는 석추명은 이미 몸 여기저기에 상당한 부상을 입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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