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61화 (61/201)

#   61 - 광세일소_한추영 - 1322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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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0화. 재회 - 2 (5)

계단을 올라오는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점점 커졌다. 간간이 건물을 포위하라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멀리서 들려왔다. 몇 명인지도 모를 군사들이 천림비고 안팎에 쫙 깔린 것이 분명했다.

“어서 나가거라. 아래층에는 이미 군사들에게 차단되었을 테니 왔던 길로 다시 나가는 수밖에 없다.”

음양사자가 석추명을 재촉했다. 무림맹 군사들의 발걸음 소리는 이제 바로 지척에서 들려왔다. 석추명의 마음도 덩달아 급해졌다.

“선배님, 혹시 중양일지 상반부를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것이 있어야만 제 스승님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석추명이 다급하게 음양사자에게 말했다.

“중양일지?”

그때 갑자기 서고 한구석에 있던 여인이 앞으로 나와 석추명에게 다가왔다.

“중양일지는 여기 있습니다.”

석추명은 사실 아까부터 방 한구석에 있던 여인이 누군지 무척 궁금했다. 얼핏 봤을 때 왠지 낯익은 느낌이 들어 누군지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었으나, 곧바로 음양사자의 공격을 받으면서 그만 잊고 있었다.

석추명은 책을 앞으로 내밀며 다가오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방 한가운데 있던 야광주의 은은한 빛에 미약하나마 여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저를 못 알아보시겠어요, 추명 오라버니?”

석추명을 바라보는 여인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금세 눈가가 촉촉해졌다.

석추명은 어디선가 본듯한 얼굴에 여인을 가만히 바라보았지만,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 여인을 어디서 봤더라?

“저 예린이예요. 만두를 좋아하던 꼬마 예린이....”

“...!”

그 말에 석추명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예, 예린이라고? 네가 예린이라고?”

석추명은 믿을 수가 없어 두 손으로 예린을 덥석 잡고 한참이나 얼굴을 쳐다보았다. 십여 년 전, 육굉을 돕다가 정신을 잃은 뒤, 우여곡절 끝에 백련신교에 자리를 잡게 되었지만 늘 예린의 생각은 떠나지 않았다. 무공을 익히고 드디어 밖으로 나가는 것이 허락되자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이 예린을 두고 왔던 화양현의 다 쓰러져가던 폐가였다.

예린과 헤어진 지 십 년이 넘었지만 석추명은 한시도 예린을 잊은 적이 없었다. 예린과 하진은 이 세상에 단둘만 남은 자신의 가족이라고 늘 생각했었다. 나중에 기하진이 무림맹으로 간 것을 알게 되자 폐가에 홀로 남아 무서워했을 예린이 가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네... 네가 정말 예린이구나.”

석추명은 임예린을 품에 꼭 껴안았다. 지금도 석추명은 예린의 꿈을 꾸었다. 예린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한구석이 시큰거리며 아팠다.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수라대 대원인 담예린에게 특별히 신경을 더 쓰다가 쓸데없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그런 예린이 다 큰 아가씨가 되어 자신의 눈앞에 나타났지만 석추명에게는 여전히 어린 시절의 꼬마 아가씨로만 생각되었다.

“이제 다시는 떨어지지 말자꾸나.”

석추명의 말에 임예린도 파르르 몸을 떨더니 참지 못하고 결국 눈물을 떨구었다.

“너희 둘이 서로 아는 사이였더냐? 잘됐구나. 이 아이를 데리고 어서 나거라. 그리고 중양일지는 포기하거라. 맹주는 빈틈없는 사람이니 중양일지가 사라진다면 반드시 의심할 거야. 남무궁을 대적하려는 마당에 등 뒤에도 적을 만들 수는 없다.”

음양사자가 임예린의 손에서 중양일지를 받아들며 말했다. 석추명은 아쉽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서둘러 천림내고의 문밖으로 나왔다.

“지상으로 내려가거든 곧장 북동쪽으로 달려가거라. 그쪽이 가장 경계가 허술한 곳이다. 아마 쉽게 넘어갈 수 있을 게다.”

음양사자는 석추명에게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려주면서도 자신은 여전히 천림내고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석추명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선배님은 안 가십니까?”

“신공의 마지막 관문을 아직 뚫지 못했다. 그 관문만 뚫으면 남무궁을 찾아갈 생각이다. 그때 너를 먼저 찾으마. 그리고 맹주에게 받은 은혜도 있으니 그의 소원 한두 가지쯤은 들어주고 가야겠지.”

음양사자가 야광주를 들어 올려 통로를 비추며 말했다.

“이렇게 지체할 시간이 없다. 어서 서둘러라.”

석추명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음양사자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그럼 부디 조심하십시오.”

석추명은 말을 마치자마자 왼팔로 임예린의 허리를 감싸 안더니 바닥을 박차며 신법을 전개했다. 두 사람이 통로 끝에 난 창문을 통해 천림원의 지붕으로 올라가자마자 ‘쾅!’하고 천림내고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림원 지붕 위로 올라간 석추명이 살펴보니 음양사자의 말대로 이미 그 주변에는 무장한 무림맹 군사들이 쫙 깔려있었다. 강궁에 화살을 먹이고 시위를 잔뜩 잡아당긴 채 천림원 지붕을 겨냥한 군사들도 있었다.

그 앞에서 유독 길길이 날뛰는 사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멀어서 얼른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었으나 유심히 바라보니 그 사람은 바로 자신에게 천림내고로 가는 길을 알려주었던 남천단 조장이었다. 그 옆에는 역시 자신에게 한칼에 나가떨어진 남천단원 두 사람이 조장의 눈치를 보며 서 있었다.

백 척 높이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임예린은 눈앞이 아찔해서 자신도 모르게 두 팔로 석추명의 몸을 꽉 껴안았다. 석추명이 고개를 돌려 임예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서우냐?”

“견딜 만해요.”

“그래. 이제 여기서 저쪽 아래로 뛰어 내려갈 테니 단단히 붙잡아야 한다.”

그 말에 임예린은 얼른 석추명을 안은 두 손의 깍지를 단단하게 꼈다.

“그럼 내려간다!”

석추명이 신룡보를 전개했다. 갑자기 몸이 공중으로 붕 뜨더니 순식간에 6층 지붕 위로 내려갔다. 그리고 몸이 6층 지붕에 닿자마자 다시 발끝으로 지붕을 찍나 싶더니 어느새 두 사람은 5층 지붕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석추명을 발견한 무림맹의 군사들이 활을 쏘기 시작했다. 수십 대의 화살이 날카로운 파공음을 내며 두 사람의 몸을 향해 날아왔다. 지상에는 군데군데 횃불을 환하게 피워 놓았지만 천림원 지붕 쪽은 어두워서 날아오는 화살 끝이 다 보이지도 않았다. 허공에 뜬 두 사람의 몸이 수십 대의 화살 앞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그러나 이를 대비하고 있던 석추명은 오른손에 든 검을 바람같이 휘둘러 화살을 모조리 쳐냈다.

임예린은 눈앞에서 화살이 마치 빗줄기처럼 쏟아지자 얼른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쌩, 쌩, 하고 바람을 가르는 화살 소리가 사정없이 귓전을 파고들었다. 임예린은 석추명의 품에 고개를 묻고 석추명을 붙잡은 두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아래로 내려올수록 쏟아지는 화살의 수는 점점 더 늘어났다. 석추명이 혼자였다면 이따위 화살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무공을 모르는 임예린을 데리고 이 포위망을 뚫어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도 방심할 수 없었다.

석추명이 한층, 한층 아래로 내려오자 천림원 아래에서 대기하며 분주하게 움직이던 무림맹 군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적이 있다. 남천단 제1조는 가서 검진을 형성해라. 적이 땅에 발을 내딛는 순간 인정사정 두지 말고 공격하라!”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푸른 무복을 입은 이삼십여 명의 남천단 무사들이 검진을 짜고 석추명이 내려오기만을 기다렸다.

“활을 쏴라. 이제 놈은 독 안에 든 쥐다. 놈의 무공이 제아무리 높다 해도 놈이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다. 조금도 쉴 틈을 주지 마라!”

시위대를 지휘하던 우두머리 하나가 소리 질렀다.

석추명이 아래에 몰려든 무림맹 군사들의 진세를 가늠하며 임예린에게 말했다.

“이제 땅에 내려서면 저기 보이는 숲 쪽으로 있는 힘껏 달려가. 내가 뒤에서 호위해줄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알겠지?”

석추명이 고개를 돌려 임예린을 바라보았다. 천림원 아래에는 어림잡아도 백여 명도 훨씬 넘는 군사들이 깔려있었다. 불빛에 반사되는 검광과 화살촉, 그리고 아래 마당을 빽빽이 채우고 있는 군사들을 보면 웬만큼 간담이 없는 사람은 한 걸음도 뗄 수 없을 정도였다.

석추명이 우려하자 임예린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씩 웃었다.

“이래 봬도 지난 일 년간 일봉에게서 착실하게 무공을 배웠으니 너무 염려 마세요.”

“일봉? 그 사람이 누군데?”

석추명은 임예린이 무공을 배웠다는 말에 호기심이 생겼다.

“제 호위무사예요. 늘 자신보다 저를 더 생각해주는 사람이지요.”

그 말에 석추명은 잠시 묘한 느낌이 들었지만 더 이상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수십 대의 화살이 다시 빗발치듯 날아왔기 때문이었다. 석추명은 검을 휘둘러 화살을 일일이 쳐 내고는 임예린을 껴안고 훌쩍 뛰어 땅바닥으로 내려섰다.

석추명이 내려서기 무섭게 검진을 형성하고 있던 남천단원 이십여 명이 두 사람을 빙 둘러 포위했다.

“내가 길을 터 줄 테니 뒤돌아보지 말고 달려야 한다.”

석추명의 오른손에 들린 검이 신들린 듯 앞으로 뻗어 나가며 번쩍, 광채를 내뿜었다. 그러자 검진이 미처 발동하기도 전에 검진 앞부분에 있던 남천단원 네댓 명이 비명을 지르며 순식간에 나가떨어졌다. 공격 초식이 얼마나 절묘한지 하나같이 어깨에 검상을 입어 검을 쥘 수 없게 되었다.

단 일격에 남천단원 네댓 명이 나가떨어지자 검진을 지휘하던 남천단 일조 조장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놈의 무공이 보통이 아니라고 내 이미 말했잖소? 우리들 만으로는 부족하니 인원을 더 보강해야 하오!”

석추명에게 혼쭐이 났었던 제3조 조장이 악을 쓰듯 소리쳤다. 그러나 그러는 순간에도 석추명은 검을 바람같이 놀리며 검진을 형성하고 있던 나머지 단원들을 공격해 들어갔다. 석추명의 검이 휩쓸고 지나가자 남천단원들은 제대로 검 한 번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족족 부상을 입고 말았다. 그 틈을 타 임예린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앗! 적 하나가 도망친다. 어서 쫓아라!”

달아나는 임예린의 뒤로 남천단원 대여섯 명이 따라붙었다. 남천단원들이 석추명의 한칼에 나가떨어지며 체면을 구기긴 했지만 남천단원들은 무림맹의 실전 병력이었다. 절대 만만히 볼 실력은 아니었다.

임예린은 몇 걸음 못 가 금방 붙잡힐 처지가 되었다. 석추명에게 농락당해 가뜩이나 심기가 불편했던 남천단원들은 상대가 여자인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인정사정없이 살초를 펼치며 임예린을 찔러 들어왔다.

한편, 기하진과 천옥랑은 천림원에 침입자가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천림원으로 달려오다가 그 모습을 보게 되었다. 원래 무림맹의 수비와 경계는 남천단의 임무였기에 기하진과 천옥랑은 맹 내에 침입자가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딱히 큰 신경은 쓰지 않았다. 남천단이 어련히 알아서 잘 처리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그 침입자가 천림비고를 탈출했다는 소식을 듣자 두 사람은 슬그머니 궁금증이 들었다. 기하진과 천옥랑도 천림비고에 들어갔다가 음양사자에게 죽을 뻔했던 경험이 있지 않았던가? 특히 천옥랑은 지금도 음양사자의 허연 귀조수를 생각하면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 일이 새록새록 생각나자 두 사람은 침입자가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음양사자의 손에서 벗어났는지 호기심이 일어, 누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나란히 천림원으로 몸을 날렸다.

천림원 주위는 횃불 수십 개가 타올라 대낮처럼 훤했다.

“앗! 임 소저!”

임예린을 먼저 알아본 사람은 천옥랑이었다. 천옥랑은 임예린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임예린의 호위무사, 일봉과 비무를 벌이다가 임예린이 사라지자 크게 당황했었다. 임예린이 사라진 날, 천옥랑은 자신을 의심하던 일봉과 대판 언쟁을 벌였다.

이번에는 비무가 아니라 사생결단의 싸움이 벌어질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럴 게 아니라 빨리 임예린을 찾아야 하지 않느냐는 시비의 말에 두 사람은 싸움을 멈추고 집 안팎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천옥랑은 자신의 아버지가 의심스러웠다. 자신의 행동을 늘 한심하게 생각하여 호통만 치시던 분이 그날따라 자신에게 임가장과 잘 사귀어 보라고 얘기했던 것도 지나고 보니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우연한 기회에 아버지 천계심이 천린상단을 비틀어 다시 거액의 자금을 마련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러모로 볼 때 만약 누군가가 임예린을 납치한다면 자신의 아버지일 가능성이 가장 컸다.

그때부터 천옥랑은 아버지 몰래 무림맹 여기저기를 뒤지며 임예린을 찾아봤지만 아무리 샅샅이 뒤져봐도 임예린의 그림자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자 천옥랑은 자신이 괜히 아버지를 의심했나 하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그런 천옥랑의 눈에 꿈에도 그리던 임예린이 드디어 나타난 것이다.

“앗! 저, 저놈들이 임소저를...!”

천옥랑은 눈앞에 임예린이 나타나자 천림비고를 침입한 괴한은 까맣게 잊고 임예린의 안위만 걱정되기 시작했다. 다급해진 천옥랑이 임예린을 도와줄 요량으로 비류보(飛流步)라는 청성파의 절정 경공을 전개하며 임예린에게 다가갔다.

옆에 있던 기하진은 천옥랑의 외침에 표정이 굳었다. 임예린이 사라진 것은 알고 있었지만 무림맹 안에 있을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었다.

그러나 지금 기하진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사람은 임예린이 아니었다. 기하진은 임예린의 바로 뒤에서 압도적인 무위로 무림맹의 군사들을 휩쓸고 있는 키가 훌쩍 큰 청년 고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교 내 모든 고수의 얼굴을 파악하고 있던 기하진의 눈에 띈 사람은 바로 석추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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