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60화 (60/201)

#   60 - 광세일소_한추영 - 1319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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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9화. 재회 - 2 (4)

석추명은 눈앞의 여인이 교주의 적인지 우군인지 얼른 판단할 수가 없었다.

“교주께서는 무탈하게 잘 지내십니다.”

그러자 음양사자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광소(狂笑)를 터뜨렸다. 무엇이 그렇게 우스운지 두 손으로 배를 잡고 어깨까지 들썩거렸다.

한참을 웃던 음양사자가 웃음을 그치고 처연한 기색으로 석추명을 바라보았다.

“무탈하게 잘 지낸다? 무고한 삼천 명의 목숨을 앗아간 자가 무탈하게 잘 지낸다? 그렇겠지. 자신은 죽지 않았으니 그럴 테지. 아무도 자신에게 위협을 가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니 당연히 두 발 뻗고 잘 잤겠지!”

음양사자의 목소리에 점점 분노가 실리기 시작하더니 마지막에는 온몸에서 칼날 같은 살기가 폭사되었다. 석추명은 황급히 내공을 끌어올려 전신을 압박해오는 살기에 저항했다.

“흑련교도 삼천 명의 억울한 넋이 지금도 구천을 헤매는데 남무궁 그놈이 감히 두 발 뻗고 편하게 있었단 말인가!”

분을 참지 못한 음양사자가 오른손으로 장풍을 일으켜 내고의 벽을 내리쳤다. 순식간에 ‘쾅!’하는 소리와 함께 벽돌로 쌓아 올린 내고의 벽이 뚫리며 커다란 구멍이 생기고 말았다. 뿌연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석추명은 놀라서 벽에서 떨어지며 얼른 뒤로 물러섰다.

음양사자는 석추명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네놈이 수라대의 대주라니, 남무궁의 수족이렷다? 네놈부터 찢어 죽여서 삼천 명의 영혼을 위로하겠노라!”

말을 마침과 동시에 음양사자의 몸이 공중으로 둥실 떠올랐다. 꼭 누군가 뒤에서 붙잡고 위로 천천히 들어 올린 듯한 모습이었다. 공중으로 올라간 음양사자의 기다란 은발이 상하좌우로 뻗어 나가며 꼿꼿이 섰다.

석추명은 믿기 어려운 광경에 숨을 쉴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저렇게 두둥실 공중으로 떠오르듯 몸을 날린 경공도 놀라웠지만 머리카락에까지 공력이 전달되다니 이는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음양사자는 공중에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석추명을 노려보며 두 손을 서로 교차하며 앞으로 뻗어내기 시작했다.

백귀격공장(百鬼擊空掌)!

허공을 격하고 장풍을 뻗어내자 처음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더니 석추명의 바로 코앞에서 날카로운 귀곡성(鬼哭聲)과 함께 음한(陰寒)한 기운이 폭사되었다.

장력이 허공을 가르며 나는 소리는 한밤중에 세상의 모든 귀신이 한꺼번에 달려드는 착각을 불러일으켰고, 그 기세는 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뒤덮을 정도로 석추명의 온몸을 휘감아왔다.

백귀격공장은 귀면쌍살의 철산장과 비견될만한 놀라운 장법이었다. 아니 철산장은 상대방의 신체에 닿아야 위력이 발휘되는데 비해, 음양사자의 백귀격공장은 말 그대로 허공을 격하고 장이 발휘되니 오히려 한 단계 더 위라고도 볼 수 있었다.

석추명은 허공에서 자신을 때려오는 장력을 도저히 막아내지 못하고 급히 신룡보를 펼쳐 이리저리 피해 달아났다. 음양사자의 장력이 허공에서 폭죽처럼 터지면서 그 여파에 서가가 무너져 내렸다.

음양사자의 장력을 받은 서가 하나가 순식간에 두 동강이 나면서 부서지자 서가에 꽂힌 책이 와르르 바닥에 쏟아지며 굉음과 함께 뿌연 먼지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석추명은 경공을 펼쳐 달아나면서도 이런 식으로 한정 없이 달아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곳에서 소란이 일면 반드시 무림맹의 고수들이 달려올 것이다. 무림맹의 고수들에게 발각되어 붙잡힌다면 모든 게 끝이었다. 일단 음양사자를 진정시켜야 했다.

석추명은 정신없이 장력을 피하면서 음양사자에게 외쳤다.

“선배님, 교주님과 선배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교주님은 지금 교내에서 신망을 잃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충성을 바쳐온 기개 높은 수하들을 지하뇌옥에 가두는가 하면, 제 스승인 뢰정 장로마저도 지금 교주의 미움을 받고 쫓기고 있는 상황입니다. 게다가 교주는 저에게 스승을 잡아오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제가 비록 신교의 제자이지만 어찌 저를 길러주시고 무공을 가르쳐주신 스승을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선배님께서 생각하시는 것과는 달리 저도 교주님께 이렇듯 말 못할 고충이 많음을 부디 헤아려 주십시오.”

석추명은 폭탄처럼 터지는 장력을 용케도 피해 위기를 넘기면서도 쉬지 않고 음양사자에게 교주에 관한 자신의 본심을 털어놓았다.

교주는 자기에게 인간으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짓을 강요해왔다. 스승을 잡아 오라고 시키고, 생명의 은인인 황보 장로를 철 채찍으로 내려치게 했으며,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게 했다. 석추명은 교주가 내린 이 모든 명이 너무나 끔찍했지만, 감히 교주의 명을 거역할 생각은 할 수 없었기에 지금껏 그 모든 일을 억지로 참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근래에는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자신의 양심을 따르는 것이 교주의 명을 따른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고 있었다. 교주의 명이 어디까지 갈지, 얼마나 더 가혹해질지 모르지만 교주의 명이기 때문에 옳지 못한 일을 끝까지 따를 수는 없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는 인식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마침, 비록 내력은 알 수 없지만 교주에 대해 깊은 원한이 있는 사람을 만나자 석추명은 그만 자신도 모르게 교주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고 말았다. 만약 이 자리에 신교의 사람이 있었다면 석추명은 배반자로 낙인 찍힐 수도 있는 위험한 발언이었다.

숨 쉴 틈도 없이 석추명을 공격하던 음양사자는 석추명의 말을 다 듣고 나자 손길을 거두었다. 뻣뻣하게 섰던 음양사자의 머리카락이 다시 차분하게 등 뒤로 흘러내렸다. 음양사자는 공격하려던 손길을 멈추고 석추명이 한 말의 진위를 파악하려는 듯 잠시 석추명을 노려보았다.

“남무궁이 뢰정을 왜 잡으려고 한단 말이냐? 남무궁은 사대장로 중 뢰정을 가장 신임했거늘.”

음양사자의 말에 석추명은 기왕 이렇게 된 거, 아무것도 숨기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 일은 중양일지와 관계있습니다. 십여 년 전에 교주의 명으로 당시 참룡대주였던 육굉이 중양일지를 훔쳤지만 전반부를 무림맹 고수에게 다시 뺏기고 말았습니다. 육굉에게서 중양일지 후반부를 받은 황보 장로는 교주가 이 신공을 터득한다면 강호에 엄청난 혈풍이 불 것을 우려했습니다. 그래서 중양일지 후반부를 얻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그 비급을 제 스승인 뢰정 장로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제 잘못으로 그만 얼마 전에 교주가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교주는 자신을 속인 뢰정 장로를 저에게 잡아 오라고 명했던 것입니다.”

음양사자는 석추명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십 년 전에 육굉이 이곳에 들어온 적이 있었다. 그때는 내가 신공을 완성하기 전이었지. 나는 그 전날, 신공을 수련하다가 기혈이 막혀 주화입마에 들뻔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다음 날 육굉이 천림비고에 침입해 온 거야. 심각한 내상을 입었던 나는 눈앞에서 육굉이 중양일지를 훔쳐서 달아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 나중에야 그놈이 신교의 참룡대주라는 사실을 알고 내가 얼마나 분했는지 모른다. 남무궁이 중양신공을 익힌다면 그야말로 호랑이에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니까. 그렇게 되었다면 내가 신공을 터득하더라도 남무궁을 제압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지. 흥! 그런데 그 비급이 이제야 강호에 나타나다니.”

음양사자는 이제 뒷짐을 지고 앞뒤로 왔다 갔다 하며 옛일을 회상하는 듯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석추명이 음양사자에게 물었다.

“선배님, 제가 어쩌면 선배님을 도와드릴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니 말씀해주십시오. 선배님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그리고 신교의 남무궁 교주와는 어떤 관계입니까?”

그 말에 음양사자는 격정을 이기지 못한 듯 잠시 몸을 부르르 떨더니 천천히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 남무궁이 백련신교의 교주가 되기 전의 일이었다. 당시 신교의 교주였던 백정천(白頂泉)이 돌연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백정천은 그 당시 적수를 찾을 수 없는 절세고수로, 백정천의 죽음은 신교뿐만 아니라, 강호의 모든 문파에서 비상한 관심을 가졌던 사안이었다.

당시 백정천의 죽음을 조사하던 선임 장로 무갈(茂葛)은 교주의 사인을 주화입마라고 발표했지만 그 사실을 믿는 사람은 신교 내에서 아무도 없었다. 백정천 같은 내공고수가 갑자기 주화입마로 목숨을 잃다니,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이었다. 모두 측근에 의한 독살을 의심했지만 뚜렷한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그 사실을 입 밖에 꺼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그다음에 생겼다. 신교 내에서 무공이 높고 세력이 있는 자들이 하나같이 차기 교주 자리를 노리면서 신교 내부가 사분오열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 백련신교의 4대 장로였던 무갈, 지확(池確), 천명(千命), 계륭(桂隆)뿐만 아니라 좌우 호법이었던 좌사 남무궁과 우사 모용추, 심지어 당시 4대주였던 마립, 황보, 신갈, 뢰정도 은근히 교주 자리를 노렸다.

하지만 교주 자리에 오른 자는 좌사 남무궁이었다. 손속이 잔인한 데다 머리까지 비상한 남무궁은 먼저 4대주를 설득하여 자신을 지지하게 한 다음, 4대 장로들에게 누명을 씌우거나 압박하여 장로 자리에서 쫓아 버렸다. 4대 장로 중 2명은 누명을 쓰고 지하뇌옥에 갇혔다가 울분을 참지 못해 자결했고, 1명은 실종되었으며, 1명은 몇 달 뒤에 정파 무림인의 손에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남무궁은 신교의 네 개 대주들과 대원들의 지지를 받으며 급격히 세력을 확장했지만 우사였던 모용추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백련신교의 지파인 흑련교 출신이었던 모용추는 남무궁 못지않게 똑똑한 두뇌와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었고, 그뿐만 아니라 3,000명이 넘는 흑련교의 인원과 자금을 바탕으로 남무궁의 턱밑을 바짝 죄어왔다.

게다가 백정천의 죽음이 남무궁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신교 내에 은근히 그런 사실을 퍼뜨리고 다니기도 했다. 남무궁은 눈엣가시 같은 모용추를 없애고 싶었지만 그 뒤를 든든히 떠받치고 있던 흑련교를 먼저 처단하지 않고는 모용추를 없앨 방도가 없었다.

마침내 남무궁은 신교통일의 기치를 내세우고 신교 4개 대대와 각 지역의 향주(香主)들을 동원하여 흑련교를 토벌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스스로 교주에 오른 남무궁은 흑련교가 백련교의 교리를 흐리고, 혹세무민하며, 조정의 앞잡이라는 누명을 씌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임교주 암살의 배후라는 죄목을 덮어씌워 흑련교도 3,000명을 모조리 몰살시켰다.

당시 흑련교의 교주이자 모용추의 동생이었던 백음수(白陰手) 모용회(慕容會)는 구사일생으로 달아나 신교를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강호세력인 무림맹에 몸을 의탁했다.

모용회는 그 이후 천림비고의 양 노인으로 행세하면서 오로지 남무궁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일념으로 자신의 양물(陽物)을 자르고 금기된 무공인 음양일기공(陰陽一氣功)을 극성으로 수련해왔던 것이다.

석추명은 들으면 들을수록 너무 놀라웠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이 그럼 흑련교의 교주였던 모용회란 말인가? 대체 어떤 사이(邪異)한 무공을 익혔기에 사람의 성별이 바뀐단 말인가!

음양사자는 말하는 도중에 간간이 자신도 모르게 분노가 터져 나올 때면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눈을 감고 말을 멈추곤 했다.

“나는 반드시 남무궁을 죽여 삼천 교도들의 복수를 하기로 피눈물을 흘리며 하늘에 맹세했다. 그리고 남무궁을 돕는 자는 누구라도 절대 살려두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네놈이 나를 도와 남무궁을 치겠다는 약조를 한다면 살려주마. 살려줄 뿐만 아니라 여기서 빠져나가는 방법도 알려주겠다.”

음양사자는 말을 하다가 잠시 멈추고 바깥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그 모습에 석추명도 얼른 귀에 공력을 끌어올려 바깥의 동정을 살폈다. 과연 어디선가 사람이 움직이는 미세한 기척이 포착되었다. 무림맹에서 침입자가 있음을 알아챈 것이 분명했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순식간에 사람들이 몰려올 것이 뻔했다.

음양사자는 다시 석추명에게 고개를 돌렸다. 두 눈이 매섭게 빛났다.

“내가 아니더라도 너는 오늘 여기서 살아나가지 못할 것이다. 어떠냐? 약조를 하겠느냐?”

음양사자가 말로 석추명을 압박했다. 그러나 석추명은 선뜻 그러겠노라고 약조를 할 수는 없었다. 비록 교주가 여러 가지 잘못은 저질렀으나 그렇다고 어찌 덥석 적과 손을 잡고 교주를 친단 말인가? 그것은 반역이 아닌가?

석추명이 우물쭈물하자 음양사자가 코웃음을 쳤다.

“우유부단한 녀석! 하는 짓이 네 사부랑 똑같구나. 교주가 황보를 잡아서 지하뇌옥에 가두었다 했지? 그리고 네게 황보를 처벌하고 강요했다고 했지? 뢰정이 잡히면 그보다 더욱 끔찍한 일이 일어날 거야. 아마 네 손으로 직접 뢰정의 목을 쳐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르지. 남무궁은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야. 그리고 내가 장담하지만, 너희들은 절대 남무궁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지 못해. 뢰정도 조만간 붙잡히고 말 것이다.”

음양사자의 말이 날카로운 발톱처럼 석추명의 마음을 사정없이 후비고 들어왔다. 남무궁의 성정을 생각해보면 음양사자의 말이 일리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만약 자신이 직접 뢰정의 목을 쳐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면...!

제아무리 교주의 명이 지엄하다고 해도 그 명만큼은 절대 따를 수 없었다. 뢰정은 스승이기도 했지만 자신에게는 부모와도 다름없는 존재가 아닌가!

“그뿐만이 아니다. 흑련교 교도 3,000명을 하룻밤 새 다 죽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살인마가 바로 남무궁이다. 무림일통을 꿈꾸는 남무궁이 앞으로 얼마나 많은 무고한 자들의 목숨을 앗아갈지 눈앞에 선하지 않느냐? 네놈이 알면서도 그것을 막지 못한다면 네놈도 똑같은 놈이 될 뿐이야!”

그 말에 석추명은 흠칫 몸을 떨었다. 알면서도 막지 않은 죄!

석추명의 눈앞에 비참하게 죽어가던 장가방 방주 대웅대협과 그의 아내가 떠올랐다. 그들이 무슨 죄가 있어서 죽었던가! 당시 석추명 자신도 그들을 베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 채, 자신의 양심과 교주의 명 사이에서 무척이나 괴로워했었다.

비록 자신의 손에 그들의 무고한 피가 묻기는 했지만, 더 많은 무고한 목숨이 사라지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 그것은 속죄의 심정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의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석추명은 마음을 정하고 결연한 눈빛으로 음양사자를 바라보았다.

“선배님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앞으로 남무궁 교주를 막는 데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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