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 - 광세일소_한추영 - 131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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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7화. 재회 - 2 (2)
임예린은 자신의 눈앞에 기묘한 모습을 한 여인이 나타나자 두려움이 솟구쳤다. 어둠 속에 보이는 여인의 얼굴만 봐서는 도무지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다. 여인은 기묘하게도 눈앞에 불쑥 나타났다가 그다음 순간, 몸을 움직이거나 이동하는 기색도 없이 이십여 척 떨어진 서가 옆에 홀연히 나타났다.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 같은 몸놀림이었다.
귀신일 리는 없었다. 자신의 목에 닿은 차가운 감촉으로 보더라도 사람이 분명했다. 그러나 소리 없는 움직임과 노란 눈동자, 기다란 손톱과 허연 손가락만으로도 임예린은 말할 수 없는 공포감이 들었다.
“누구냐고 묻지 않느냐? 대답하지 못할까?”
여인이 눈빛을 번뜩이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저, 저는 임예린이라고 합니다. 천린상단 임 대방의 여식입니다.”
“천린상단이라면 천하제일 상단이라고 하는 그 상단을 말하는 게냐?”
“예.”
임예린은 사시나무 떨듯 떨면서도 또박또박 답을 했다.
“천린상단 사람이 여기서 무얼 하는 게냐? 아니, 그보다 여기에는 어떻게 들어왔지?”
자신이 누군지 모르는 걸 보니 눈앞의 기이한 여인은 부맹주의 사람이 아닌 것만 분명했다. 임예린이 자신이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 여인은 임예린의 말을 다 듣고 나더니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그래, 남천단 놈들에게 납치당해 감금되었다가 여기로 도망쳐 왔단 말이지. 흥! 천계심이 지금은 기고만장해서 하늘 높은 줄 모르지만 조만간 피눈물을 흘릴 날이 올 게야.”
임예린은 무슨 뜻인지 몰라 두 눈을 껌벅이며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너는 알 필요 없다.”
임예린은 눈앞의 여인이 모습과 목소리는 기괴하지만 부맹주에게 반감을 품은 것을 보고 한 가닥 희망이 들었다.
“제가 없어진 것을 알고 제 아버님이 아마 지금쯤 앓아누우셨을 것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시어 제발 나가는 길을 알려주세요.”
임예린은 간곡한 목소리로 애원했지만 여인은 코웃음을 쳤다.
“네 아비가 죽든 말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여인의 차가운 말에 임예린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네가 굳이 나가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이곳을 나가는 즉시, 너는 부맹주의 수하들에게 다시 붙잡히고 말 게야.”
그 말에 임예린은 기운이 빠져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여인은 임예린을 힐끗 쳐다본 뒤 허공으로 몸을 날리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날 밤을 그렇게 보내고 그다음 날이 밝자 웬 노인 한 분이 끌차와 청소도구를 가지고 서고에 나타났다. 깜박 선잠이 들었던 임예린은 소스라치게 놀랐으나 노인은 뜻밖에도 전혀 놀라는 눈치가 아니었다.
노인은 임예린을 한 번 쳐다보고는 누구냐고 묻지도 않은 채 서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묻지도 않는데 자기가 누군지 밝히기도 이상해서 임예린은 잠자코 노인장의 서가 정리를 도왔다. 노인은 임예린이 책을 건네주자 아무 소리도 없이 받아서 서가에 꽂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 동안 묵묵히 일만 했다.
서가 정리가 끝나자 임예린은 노인장의 손에서 걸레를 넘겨받아 서가를 닦기 시작했다. 노인장은 그러는 임예린을 여전히 묵묵히 쳐다보기만 했다. ‘너는 누구냐?’, ‘여기서 무엇 하느냐?’ 물어볼 만도 하건만, 그런 질문은 일절 없었다.
임예린도 자신이 누군지, 왜 여기에 있는지 설명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한참 서가를 닦는 임예린에게 노인장이 갑자기 툭 말을 건넸다.
“도망치려고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지금 바깥에는 사람이 쫙 깔렸어. 자네를 찾느라고.”
노인장의 말에 연신 걸레질을 하던 임예린이 멈칫했다. 마치 자신이 누군지 아는 듯한 말이었다. 임예린이 노인장을 바라보자 노인장은 임예린의 마음을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여기 있으면 안심해도 돼. 저놈들이 여기는 못 들어오니까.”
“그건 왜 그런가요?”
임예린이 묻자 노인장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여기는 음양사자님이 계시니 저놈들이 못 들어오는 게지.”
“음...양 사자님요?”
노인장이 다시 끌차를 밀며 말했다.
“어제 만나지 않았어? 그분이 음양사자님이야.”
“할아버지는 누구세요?”
그러자 노인장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 그냥 양 할아범이라고 불러.”
양 노인은 그러더니 임예린만 남겨둔 채 끌차와 청소도구를 챙겨서 다시 밖으로 나가버렸다. 혼자 남은 임예린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곧 정신을 차렸다.
‘무슨 수가 생기겠지. 그때까지만 기다리자.’
그렇게 마음을 먹으니 한결 편했다. 어차피 당장 나갈 수 없다면 차라리 책이나 읽자고 생각했다. 임예린은 자신이 정리하던 서가에서 책 한 권을 뽑아 들었다. 표지가 낡아서 너덜거리는 책은 무공서적이었다. 다른 책을 뽑아 살펴봤지만 역시 무공서적이었다.
무공서적 말고 뭔가 다른 책이 없을까 한참 찾던 임예린의 눈에 무공서적이 아닌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표지에 적힌 책 제목에는 자신도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바로 중양일지(重陽日誌)였다. 다른 책에 비해 얇기도 했고, 무공서적보다는 차라리 일지가 나을 것 같아서 임예린은 그 책을 뽑아 들고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책의 앞부분 몇 장은 찢어진 것을 다시 이어붙인 듯했다. 어느새 임예린은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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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추명은 교주의 명으로 귀면쌍살과 맹주의 관계를 살피려고 며칠째 무림맹 주위에 숨어 무림맹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귀면쌍살로 추정되는 인물은 보이지 않았다.
‘귀면쌍살이 가면을 벗고 드나든다면 내가 어떻게 알아보겠어? 며칠 동안 멍청한 짓만 한 셈이군. 이럴 게 아니라 직접 안으로 들어가서 살펴봐야겠어.’
그러나 무림맹 안에는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의 날고 기는 고수들이 쫙 깔려있을 터. 아무리 생각해봐도 운신이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맹주전 근처에 잘못 숨어 들어갔다가는 대번에 들키고 말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서자니 그것도 우스웠다. 이번에는 제발 제대로 한 건 좀 하시라는 담예린의 신신당부도 떠올랐다.
석추명은 일전에 임가장에서 귀면쌍살과 잠시 겨루었을 때를 생각하다가 문득 귀면쌍살이 중양신공을 익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렇군.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어차피 귀면쌍살과 맹주와의 관계를 알아내지 못할 바에야 중양일지라도 훔쳐야겠다. 그러면 교주님도 스승님을 잡아들이라는 명을 돌이키실지도 몰라.’
따지고 보면 교주가 뢰정을 잡으라고 한 것도 중양일지가 빌미가 된 것 아닌가? 혹시 자신이 중양일지 전반부라도 찾아다 교주에게 바친다면 스승 뢰정에 대한 교주의 노여움이 누그러질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면 그때 뢰정이 나머지 후반부를 바치면 될 것이다.
그 생각이 들자 석추명은 옛날, 중양일지를 훔쳤다가 무림맹의 추격을 받던 육굉이 생각났다. 그때 육굉은 어린 마음에도 걸출한 사내대장부로 보였었다. 그때 육굉과 우연히 만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자신은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새삼 감개가 무량했다.
문득 석추명은 지금 자신의 무공을 당시 육굉의 무공과 비교하면 어떨지 생각해 보았다.
일단 자신과 육굉 둘 다 신교의 대주이니 무공에 대해서는 일정 수준을 넘었다고 교주가 인정해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자신은 사대검왕 중 한 사람인 수라검 뢰정을 사부로 모시고 신교의 모든 무공을 배웠으며, 또한 뢰정이 교주 몰래 전수해준 중양일지에 기록된 무공도 모두 배웠다.
비록 중양일지의 전반부는 없어서 중양 내공을 익히지는 못했으나 하반부에 기록된 엄청난 무공초식을 모두 익혔다. 그 놀라운 무공들을 구현해낼 내공이 뒷받침되지 않아 그 무공들이 아직 온전히 빛을 발하지 못하기는 하지만, 석추명은 육굉과 비교해서 자신의 무공이 뒤지리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귀면쌍살은 중양일지 뒤편에 실린 무공은 하나도 쓰지 않았지. 그것은 귀면쌍살이 내공만 익혔기 때문이겠지. 당시 중양신공 전반부는 무림맹에서 가져갔으니 그 책은 아마도 무림맹에 있겠지. 흠, 사부님께서 말씀하시길, 무림맹에 천림비고라는 무학 서고가 있는데 온갖 진귀한 무공비급이 다 모여있다고 하셨어. 그러나 그곳에는 대단한 고수 하나가 지키고 있어서 비급을 욕심내는 천하의 내로라하는 고수들 중 지금까지 잠입에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하셨어. 육굉 대주가 아마 유일하게 성공한 사람이었겠지.’
하지만 육굉에 비해 무공이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자, 석추명은 자신도 한번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이번 일은 성공만 한다면 교주의 마음을 움직일 수도 있기에 꼭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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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천단(南天團) 제3조 조장인 왕학기는 인상을 잔뜩 구긴 채 구시렁댔다.
“이런 경비 일이야 애들 시키면 될 것을, 왜 나까지 불러내는 거야. 젠장.”
왕학기는 지금 남천단 단주 원무개에게 잔뜩 골이 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맹의 경계는 단원들이 알아서 잘들 서 왔는데, 며칠 전에 갑자기 단주가 조장들에게 경계를 강화하고 직접 조원들의 근무상태를 감독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
게다가 예전 같으면 서지 않던 맹 내 모든 초소에 경계 인력을 투입했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전쟁이라도 준비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요즘같이 무림맹이 막강한 권위를 누리고 있는 때에 어느 미친놈이 감히 무림맹 담장을 넘어온단 말인가?
왕학기가 투덜거리며 자신의 담당인 맹의 북측 제3초소로 어슬렁거리며 다가갔다.
“아 글쎄 내 평생 그렇게 뽀얗고 부드러운 피부는 처음 봤다네.”
“매향이 년 예쁜 건 알았지만.... 그렇게 대단하던가?”
“아 두말하면 잔소리지! 앵두 같은 입술에 잘록한 허리,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목소리는 또 얼마나 나긋나긋한지, 내 그날 아주 온몸이 다 녹는 줄 알았다네.”
왕학기가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초소에서 번을 서던 경비 무사 두 명이 전날 밤 기루에 간 이야기를 입에 침을 튀기며 하고 있었다. 두 명 다 제3조 소속 조원들이었다.
왕학기는 발걸음을 죽이고 얘기를 풀어놓고 있는 조원 뒤로 다가가 모르는 척 말을 던졌다.
“좋았겠구먼?”
“좋았지. 아, 좋다 뿐인가? 살살 녹았다니까.”
그 순간, 이야기하던 조원의 눈앞이 번쩍하더니 머리통에서 불이 났다.
“에라이, 이놈들아! 하라는 경계는 뒷전이고 잡담질이나 하고 있어? 네놈들이 이러고도 무림맹 남천단원이라고 할 테냐?”
왕학기는 두 무사의 머리통을 있는 힘껏 쥐어박았다. 한참 이야기꽃을 피우던 조원들은 갑자기 눈앞에 조장이 나타나자 깜짝 놀라서 경례를 붙였다.
“근무 중 이상무!”
그 소리에 왕학기의 오른손이 다시 한번 두 사람의 뒤통수를 갈겼다.
“근무 중 이상무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잡담 중 이상무겠지, 이놈들아! 아무리 요즘이 태평성대라고 이렇게 정신이 나가 있으면 되겠냐? 요즘 강호가 어떤지 아느냐, 이놈들아? 엉? 귀면쌍살이 구대문파의 후기지수 중 싹수가 좀 보인다 싶은 놈들은 죄다 골로 보내고 있어. 게다가 곤륜파 소식 못 들었냐, 이놈들아? 곤륜파 초의공이 마교와 내통을 했다지 않아? 내통을! 이런 중차대한 시점에 말이야, 기생집 갔다 온 이야기나 하고 있으니 이게 말이 되느냔 말이다.”
가뜩이나 불만이 쌓였던 왕학기는 ‘이놈들 잘 만났다’는 식으로 일장 훈계를 하며 조원들을 뒤통수를 또 때렸다.
“조장님, 그렇다고 때린 곳을 자꾸만 때리시면 어떡하십니까?”
조원들이 불만을 토로하자 왕학기의 두 눈썹 끝이 하늘로 추켜 올라갔다.
“뭐라고 이놈들아?”
왕학기가 참지 못하고 조원들 뒤통수를 또 때리려고 오른손을 드는 순간, 조원들 뒤로 희끄무레한 무엇인가가 순식간에 담장을 휙 넘어서 안쪽으로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어찌나 빠른지 형체를 파악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왕학기는 오랜 경험으로 방금 지나간 것이 사람임을 금방 알아보았다. 왕학기가 땅을 박차고 두 조원을 훌쩍 뛰어넘더니 쏜살같이 괴한을 뒤쫓기 시작했다. 두 조원은 왕학기가 갑자기 신법을 전개하자 연유도 모른 채 왕학기 뒤를 따랐다.
왕학기는 남천단 내에서도 경공 하나만큼은 꽤 쓸만하다고 인정을 받고 있었다. 그러니만큼 저 침입자가 누구든지 간에 곧 따라잡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것이었군! 원 단주가 갑자기 경계를 강화하라는 명을 내린 이유가. 원 단주는 수상한 놈이 침입할 줄 알고 있었던 것이야. 오냐, 내 이번 참에 저놈을 잡아서 반드시 다음번에는 부단주로 올라서고야 말리라!’
왕학기는 공을 세우고 싶은 욕심에 발바닥에 더욱 힘을 가했다. 그런데 괴한의 경공이 어찌나 빠른지 아무리 발바닥에 힘을 주어도 거리가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더 멀어지지 않는가? 그때쯤 왕학기를 따라가던 조원 두 명은 어느새 보이지도 않았다.
왕학기는 자기 혼자 공을 세우고 싶은 마음에 그때까지도 침입자가 들어왔다는 경고신호를 울리지 않았다.
‘흠, 저놈이 누군지 맹의 내부를 제법 소상히 아는 놈이로구나. 저쪽으로 가면 천림원인데.... 가만. 혹시 천림원생인가? 예전에도 지학인가, 뭔가 하는 놈이 수시로 바깥출입을 입맛대로 하지 않았던가? 하여튼, 요즘 것들은 기본이 안 되어있어요. 기본이.’
잠시 딴생각을 하다 보니 눈앞에서 어른거리던 괴한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왕학기는 다급한 마음에 천림원 바로 아래까지 가서 살펴보았으나 아무리 보아도 사람의 그림자는 고사하고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이놈이 하늘로 솟았나, 아니면 땅으로 꺼졌나?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왕학기가 천림원을 한 바퀴 돌며 괴한을 찾는데 갑자기 양쪽 겨드랑이 밑이 뜨끔하더니 돌연 두 팔이 축 늘어졌다. 그리고는 무엇인가 서늘한 느낌을 내는 것이 등 한복판을 쿡쿡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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